본문 바로가기

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한국의 역사 1,015 : 일제강점기 60 (국내 사회주의운동과 민중의 투쟁 1)

 

 

 

한국의 역사 1,015 : 일제강점기 60 (국내 사회주의운동과 민중의 투쟁 1)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1928년 4차 조선공산당이 거의 무너진 상태에서 코민테른은 그해 12월 '조선의 혁명적 농민과 노동자의 임무에 관한 테제'(12월 테제)를 통해 조선공산당을 코민테른 지부로 승인한 것을 취소하고 새로운 운동방침을 제시했다. '12월 테제'는 조선혁명을 '제국주의 타도와 토지문제의 혁명적 해결'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이라고 규정했다. 이러한 혁명을 이룩하려면 파벌투쟁을 멈추고 소수 지식인이나 학생이 아닌 노동자와 농민이 당재건 운동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12월 테제'에서는 "민족부르주아지는 제국주의에 반대하여 투쟁하는 세력이 아니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12월 테제에 영향을 받은 여러 분파의 사회주의자들은 당재건 운동에 나섰다. 이들은 전국 단위의 당재건 준비조직을 만든 뒤에 생산현장에 조직원을 내려보내 혁명적 대중조직을 만들어 당을 재건하는 데 필요한 토대를 마련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서울 상해파의 조선공산당재건준비위원회(1929.2), ML파의 조선공산당재조직중앙간부회(1929.5), 화요파의 조선공산당조직준비위원회91929.11) 등은 크게 보아 이런 방침에 따라 활동했다. 초기 당재건 운동은 "공장으로! 광산으로! 농촌으로!" 라는 슬로건을 네걸고 공업중심지와 농촌 지역에서 투쟁의지가 있는 민중과 결합하여 당세포를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당재건 운동 과정에서 지난날의 파벌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했다. 또 사회주의자들이 노동자.농민과 직접 연계하여 여러 실천을 노력했지만, 분산적이고 지역적인 운동을 전국적으로 통합하려는 노력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당재건 노선의 변화

 

사회주의자들은 1931~1932년 무렵부터 혁명적 노동조합과 농민조합을 먼저 만들고 그 가운데 뛰어난 활동가를 중심으로 공산주의자 그룹을 강화한 뒤에 조선공산당을 재건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서울 상해파는 혁명적 노동조합, 농민조합운동을 바탕으로 당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빙침을 세우고 좌익노동조합 전국평의회를 조직했다. ML파 공산주의자들도 공산당과 공산청년회를 먼저 만들려던 방침을 바꿔 혁명적 노동.농민조합 건설에 힘을 쏟았다. 코민테른도 모스코바공산대학 출신자들을 국내로 보내 새로운 공산주의자 그룹을 만들었다. 만주의 조선 공산주의자들은 민족과 국경을 구별하지 않고 그 국가의 당에서 활동해야 한다는 코민테른 '일국일당 원칙'에 따라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해산했다. 이에 따라 민주에 있던 조선공산당은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로 합류하고 조선국내공작위원회를 세워 국내에 당을 재건하려고 힘썼다.

 

이렇게 당재건 운동이 벌어진 결과 1936년 즈음까지 혁명적 노동.농민조합운동을 지도하면서 당재건의 토대를 쌓아 가던 많은 지역단위 공산주의자 그룹이 곳곳에서 생겨났다. 특히 경성 지역 노동현장에서 활동한 이재유 그룹은 '경성트로이카'(1934), '경성재건그룹'(1934), '조선공산당 경성준비그룹'(1936)을 잇달아 만들었다. 이재유 그룹은 '트로이카'라는 독창적인 운동방법을 만들었는데, '트로이카 운동'은 전위가 직접 노동자가 되어 함께 활동할 노동자를 확보해, 노동자 대중에 기반을 마련한 다음 당을 조직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이제까지 당재건 운동이 대중에게 뿌리를 두지 않아 전위 활동가와 노동대중이 쉽게 분리되는 한계가 있었다는 문제의식이 담겨 있었다. 이재유 그룹은 "동대문 공장지대를 모조리 수중에 넣고 직공을 선동하여 계속 쟁의를 일으키게 했다"고 일제가 지적했을 만큼 노동계급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31년부터 1936년 사이에 활발하게 일어났던 당재건 운동은 운동 과정에서 파벌을 어느 정도 극복하고 노동자.농민 출신의 새로운 활동가들을 배출했으며 새로운 운동노선을 모색하는 등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당재건 운동은 서로 흩어져 운동을 벌였고 한 지역에서 고립되어 활동함으로써 일제의 탄압을 이겨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