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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016 : 일제강점기 61 (국내 사회주의운동과 민중의 투쟁 2)

 

 

 

한국의 역사 1,016 : 일제강점기 61 (국내 사회주의운동과 민중의 투쟁 2)

 

 

           

 

 

 

혁명적 노동조합운동과 노동운동

  

 

혁명적 노동조합운동

 

식민지 조선의 노동자와 농민은 1929년 공황의 여파로 일제가 탄압의 고삐를 죄어 오자 무엇보다도 자신의 생존권을 지키려고 파업투쟁과 소작쟁의를 활발하게 벌여 나갔다. 이때 사회주의자들은 혁명적으로 진출하는 노동자와 농민에 힘을 얻고 코민테른이 내리는 여러 지시를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운동노선을 실천했다. 이런 배경에서 일어난 노동운동이 혁명적 노동조합운동과 농민조합운동이었다. 혁명적 노동조합은 생산 현장에서 노동자 투쟁을 조직할 뿐만 아니라, 노동자.농민에 뿌리내린 조선공산당을 재건하는 임무도 띠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의 지도부를 만드는 일이었다. 

 

혁명적 노동조합 운동가들은 노농총동맹을 비롯한 개량주의 노농조합 지도부가 노동계급의 대중투쟁 역량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노동운동을 왜곡시키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노동운동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킬 새로운 노동운동 방침을 마련하려고 했다. 새로운 방침은 1930년 9월 프로핀테른(혁명적 노동조합 인터내셔널)의 '9월 테제'와 1931년 10월 범태평양노동조합 비서부의 '10월 서신'에서 제시되었다.

 

혁명적 노동조합 운동가들은 민족개량주의자들이 파시스트가 되었기 때문에 배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아가 그들은 기존의 합법적 노동조합을 개량주의 조합이라 비판하면서 이에 맞서는 혁명적 노동조합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을 통해 조직되지 못한 노동자를 새로 조직하고 기존의 '개량주의적 노동조합'을 계급에 뿌리를 둔 조직으로 바꾸려 했다.

 

사회주의자들은 옛 공업중심지와 1930년대부터 진행된 '병참기지화 정책'에 따라 새로 발달한 공업지대를 중심으로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을 벌였다. 그들은 반이나 공장그룹 등의 '세포조직'을 기초로 분회를 만들고 그 위에 공장위원회나 파업위원회, 또 그 위에 산업별 노동조합을 만든 뒤에 전국적 산업별 노동조합을 만드는 것읋 목표로 삼았다.

 

1929년부터 1931년 무렵까지 혁명적 노동조합은 전국을 아우르는 당을 재건한다는 데 더 큰 뜻을 두었다. 이때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은 '혁명적 대중조직 건설'을 내세우긴 했지만, 공장 안의 많은 노동자 대중에게 뿌리내리지 못했으며 오히려 핵생이나 지식인을 중심으로 한 반제동맹과 같은 것이 더 많았다.

 

1931년 뒤부터 사회주의자들은 튼튼한 혁명적 노동조합을 만들어 토대를 닦은 다음, 전국을 포괄하는 당을 재건한다는 노선을 실천에 옮겼다. 1933년부터 1936년 사이 경성을 중심으로 활동한 '이재유 그룹'은 "공장에서 노동자를 끌어내어 연대하여 공산주의적으로 훈련하고, 화학.섬유.금속 등 산업별로 나누어 혁명적 노동조합을 만든다" 는 방침을 세웠다. 이에 따라 이재유 그룹은 동대문 밖에 '적노조직 준비위원회'(1933.11)를 만들고, 용산 지역의 산업별 '적색노동조합준비위원화'(1933.9), 인천 지역의 '적색조직준비회'(1933.1)를 조직하는 등 산업별 적색노동조합을 지역 단위에서 결합시키려는 운동을 펼쳤다. 또 이들은 여주.양평 지역에서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을 지도했으며 경성제국대학을 중심으로 반제학생운동을 조직하기도 했다.

 

원산 지역에서는 1936년에서 1938년 사이에 '이주하' 등이 중심이 되어 '적색노조 원산좌익위원회'를 만들었다. 이들은 철도.금속.화학공업 부문에 산업별 위원회를 만들고 그 하부조직으로 '적로반'을 결성했으며, '철우회'를 만드는 등 대중 기반을 넓히려고 하였다. 원산 지역 운동가들은 지역 운동의 한계를 뛰어 넘어 운동세력을 통일하려고 했지만, 이 운동을 벌이기에 앞서 일제의 탄압을 받아 성공하지는 못했다.

 

이 밖에도 평양.신의주.마산.부산 등 여러 곳에서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이 일어났다. 일제가 만든 통계로도 1931년부터 ~1935년까지 혁명적 노동조합 관련 사건이 70여 건이 일어나 1,700여 명이 연루된 사실에 비추어 보아 이 운동이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은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고 민족개량주의자들이 친일화하는 가운데서도 쉼 없이 일어났다. 그러나 '전투적이고 혁명적인 노동자로 만든 조직'인 혁명적 노동조합은 노동자 정치조직과 대중조직이 뒤섞여 있었으며 지나치게 비합법적투쟁과 정치투쟁을 벌인 한계도 있었다.

 

 

파업투쟁

 

노동자들은 공황을 맞이한 일제와 자본가가 '산업합리화'를 내걸고 임금을 인하하거나 노동시간을 늘이는 것에 반대하면서 파업투쟁을 벌였다. 숙련공과 미숙련공, 남성과 여성, 그리고 한 지역의 같은 직종에 있는 노동자들이 함께 파업에 참여하는 일도 많았다.

 

1930년대 북부 지방에 대규모 중화학공장들이 생겨나자 파업투쟁도 평안도.함경도 등 북부 지방에서 많이 일어났다. 이들 공업중심지에서 일어난 파업은 매우 조직적이었다. 일제가 단순한 파업조차 정치범죄로 다루었기 때문에 파업은 경제투쟁에서 정치투쟁으로 옮겨 가기도 했다. 또 노동자들은 오래도록 굳세게 싸웠을 뿐만 아니라 파업도 그 어느 때보다 많이 일어났다. 파업전술도 발전했고 노동자 투쟁이 폭동으로 이어지는 일도 잦았다.

 

1930년 부산 조선방직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 8시간 노동제 확립, 조선인 차별대우 폐지' 등을 내걸고 파업에 들어갔다. 조선방직에서 내건 요구조건은 1930년대 파업투쟁에서 늘 내걸었던 것들이었고, 이 가운데 임금문제가 사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조선방직의 경우 1936년 기숙사 3끼 식사 가격이 15전 정도였는데, 여성노동자의 임금이 "1일에 15, 16전이 최고이고 6, 7년이 되어도 최고 30, 40전"이었다. 1937년까지도 9시간 넘게 노동하는 공장이 41%나 되었다. 군수공장의 경우는 보통이 14~16시간 노동이었다. 이 밖에도 일본인 관리들이 조선 여성노동자 희롱, 사생활까지 간섭하는 기숙사 생활, 불량품 배상, 지각.결근 등에 따른 벌금제, 강제 저축 등 노동자는 엄청난 책임과 의무를 져야만 했다. 

 

1930년 8월 평양고무공장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다.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하자 자본가와 일제경찰은 폭력으로 노동자들을 공장 밖으로 내몰았다. 파업을 이끌었던 여성노동자 강주룡은 파업을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밤새 광목을 찢어 줄을 만들어 홀로 12미터 높이의 을밀대 지붕 위로 올라가 단식농성을 벌였다. 을밀대에 올라간 강주룡은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와 수탈을 고발했다. 평양시로 끌려간 강주룡은 76시간 동안 단식으로 일제에 대항하기도 했다.

 

조선노동자들은 산업재해에도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전남포 제련소 노동자들은 20년이 지난 낡은 기계들이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마스크도 쓰지 못한채 숨이 턱턱 막히고 뜨거운 물이 튀어도 참아야 했다. 6명의 식구가 좁쌀죽만 먹더라도 한 달에 13원이 필요한데, 16원의 임금이 전부였다. 이런 가운데 1935년 6월, 진남포 제련소에서는 노동안전시설을 갖추지 않은 탓에 20여 명의 노동자가 꿀뚝 청소를 하다 떨어져 죽은 일이 있었다. 1,200여 명의 노동자들은 7월 13일 "무산대중 단결하라"는 구호를 내걸고, '임금을 5할 올릴 것', '하루 3교대 8시간제를 실시할 것', '조선노동자와 일본 노동자를 차별하지 말 것' 등 13개 요구조건을 내걸고 파업을 시작했다. 자본가들은 요구조건을 들고 담판하러 들어간 노동자 대표들을 몰래 경찰에 넘기고 헌병까지 불러들여 파업을 깨려고 했다. 일본노동자들을 데려와 멈춘 기계를 다시 돌리려고 했다. 이에 노동자들은 규찰대를 만들어 회사쪽에서 새 노동자를 모으는 것을 막고 파업단을 나누어 투쟁하는 등 새로운 파업전술로 자본가에 저항했다. 파업은 일주일만에 끝나고 말았지만 노동자들은 값진 투재경험을 얻었고, 일제와 자본가는 노동자의 단결에 충격을 받았다.

 

이 밖에도 크고작은 파업투쟁이 곳곳에서 잇달아 일어났다. 일제와 자본가들의 탄압과 착취로 가득 찬 공장노동이었지만 일자리가 부족한 현실에서 노동자대중의 파업투쟁은 분산적으로 펼쳐졌으며 파업에 참여하는 인원도 점점 줄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