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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018 : 일제강점기 63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1)

 

 

한국의 역사 1,018 : 일제강점기 63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1)

 

 

           

 

 

만주사변

 

만주 사변(滿洲事變, Manchurian Incident, Mukden Incident, 9·18 사변)은 일본 제국1931년 9월 18일 류탸오후 사건(柳條湖事件, 만철 폭파 사건)을 조작해 일본 관동군이 만주를 중국 침략을 위한 전쟁의 병참 기지로 만들고 식민지화하기 위해 벌인 침략 전쟁을 말한다. 제1차 세계 대전 종전(1918) 이후, 일본이 지원하는 중국의 군벌 봉천파(장쭤린)는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에 밀리기 시작하여 일본 본국 정부는 장쭤린에게 퇴각을 권고했고, 만주에서 그를 보호하려 하였다.(1927) 일본 정부의 시각에 반발해, 관동군의 일부 참모들이 모의하여 장쭤린을 암살(1928)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관동군과 봉천파의 협조는 종결되고 장쭤린의 아들 장쉐량은 국민당 정부에 합류(1929)하였다. 국민당 정부는 반일 공세를 전개하였고, 세계 경제 대공황(1929)과 겹쳐 만주에서 일본의 잇권이 타격을 받았다. 일본이 이러한 위기를 타파하고자 만주 전체를 침략할 필요성이 대두되는 상황에서, 만보산 사건(1931년 7월) 등이 터져 나와 양국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이때, 관동군은 다시 한번 계략을 꾸며 자작극인 류타오후 사건을 일으켰던 것이다. 일본은 1932년 1월까지 동삼성(東三省) 전역을 점령, 3월에는 괴뢰(傀儡)정권으로서 만주국을 성립시켰다. 이러한 일은 국제적으로 많은 비난을 받았고, 국제연맹은 1933년 2월 리튼 보고서를 채택하여 일본의 철병(撤兵)을 요구했으나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만주사변은 1945년까지 계속된 중국과의 15년전쟁의 시작이며, 제2차 세계 대전의 서곡(序曲)을 이루는 것이었다.

 

 

만보산 사건

 

만보산 사건(萬寶山事件)은 1931년 7월 2일중국 만주 지린 성(吉林省) 창춘 현(長春縣) 싼싱바오(三姓堡) 만보산 지역에서 일본의 술책으로 조선족 농민과 중국인 농민 사이에 수로(水路) 문제로 일어난 충돌 및 유혈사태로 만주사변을 촉발했다.

 

 

만보산 사건의 배경과 진행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한 이래 많은 농민이 토지를 잃고 만주 등지로 이주하였는데, 일본은 중국 동북지방에 이주한 조선족 농민들을 구실로 중국 대륙 침략의 발판을 만들었다.

 

일본은 중국인 하오융더(郝永德)를 매수하고 자금을 투자하여 만주 창춘 시에 장농도전공사(長農稻田公司)를 설립하고 그를 지배인으로 앉혔다. 1931년 4월 16일 하오융더는 만보산 지방에 있는 소한림(蕭翰林) 등 11인의 소유 토지 가운데 미개간지 약 200ha를 해당 지주와 10년 기한으로 조차계약하였다(단, 이 계약에는 현(縣)정부의 승인이 없으면 무효라는 규정이 있었다.).

 

그런데 4월 중에 하오융더는 현(縣)정부의 정식 승인을 얻지 않고, 이 토지를 조선족 농민 이승훈(李昇薰) 등 8인에게 10년간 조차계약을 체결하였고, 이승훈은 이 계약을 근거로 조선인 농민 180여 명을 이 지방에 이주시켜 개척에 착수했다. 개척 작업에서 가장 먼서 시작한 것이 이퉁 강(伊通河)에 통한 관개수로공사였다.

 

문제는 이 수로 개척과 제방 축조가 타인의 토지인 부근 농지에 미치는 피해가 많아졌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토착 중국 농민들이 반대 운동을 일으키고 현(縣) 당국에 탄원·진정하여 공사 진행을 강제로 중지시켰다. 계약서 상에 분명히 현정부의 승인이 없으면 일본의 대리인인 하오융더와 중국인 지주 간 계약이 무효가 되고, 조선족(朝鮮族) 농민들의 개척작업 또한 근거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 영사관 소속 경관 6명이 이 공사를 강행하고, 일본 경찰 60명이 중국 농민의 반대를 무력으로 억압하여 이 수로공사는 1931년 6월 말에 준공되었다. 상황이 이에 이르자 중국 농민 약 400여 명이 7월 1일에 봉기하여 이 관개수로 약 2리를 매몰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로써 현장에 있던 조선족 농민, 일본 영사관 경찰과 중국인 지주, 조선족 주민 사이에 일대 충돌이 일어났다. 7월 2일 장춘의 일본 영사관은 무장경찰관 15명을 파견하였고, 중국 측도 300명의 경찰관을 파견하였다. 다시 일본 경찰은 무장경찰관을 증파하였고, 이들의 경계 아래 개간공사를 진행시켜 7월 6일 공사를 완성하였다. 일본 경찰은 조선족과 중국인 농민에게 무차별 발포하였으나, 약간의 부상자가 있었을 뿐, 인명피해는 없었다.

 

 

사건의 반향과 반중국인과 조선족 폭동

중국 국민당 정부측은 일본측의 대응에 강경하게 대항하였으나 일본은 아무런 성의를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애매한 태도만 취하였다.

 

일본 영사 경찰서는 조선족 다수가 살상되었다는 허위정보를 제공하였으며, 조선 내 신문들은 민족감정을 자극하는 오보를 하면서, 조선 내에 거류하는 중국인을 적대시하는 운동을 도발시켰다. 조선일보는 7월 2일 호외로 '만보산에서 중국농민과 조선농민이 충돌해 많은 조선인이 피살됐다'는 보도를 했다. 이는 조선일보의 장춘지국의 조선인 기자 김이삼이 전한것으로 그는 이 정보의 진위를 가리지 않고 타전했다. 이 때문에 인천을 필두로 경성·원산·평양·부산·대전·천안 각지에서 수천 명이 하는 중국인 배척운동이 일어났으며, 평양과 부산과 천안에서는 대낮에 중국인 상점과 가옥을 파괴하고 구타·학살하는 사건이 며칠간 계속되는 등 잔인한 폭력사태로 확산되었다. 일제는 조작된 기사를 보도하게 하였고, 부산과 천안에서 불량배를 매수하여 폭력행위를 조장하였다. 이러한 사태는 《동아일보》 등의 오보임을 알리고 진정을 호소하는 보도로 7월 10일 이후로 진정되었으며, 이후로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족과 한국에 거주하는 화교의 수가 급감하였다.

 

이상하게도 첫 보도를 내었던 조선일보 기자 김이삼은 정정보도와 사죄문을 조선일보에 발표한 다음날 조선인에게 피살되었다. 김이삼이 일본의 특무기관에 의하여 살해당했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폭동으로 인해 127명(평양과 부산과 천안에서만 94명)의 중국인 사망자가 있었으며, 부상자가 400명이었고 손해는 250만 원에 이르렀다. 이 사건의 본질은 만주에 세력을 형성한 중국 민족운동 세력과 조선인 민족운동 세력의 반일 공동전선투쟁에 대해 중국인과 조선족을 이간하여 분열시키려는 일본의 치밀한 음모였으며, 이를 만주 침략과 대륙 침탈의 발판으로 삼고 국제적으로는 자기 입장을 유리하게 하려는 술책이었다.

 

조선 총독부와 일본 경찰은 이 사태를 방관하는 한편, 형식적으로 제지의 태도를 보였으나 극히 소극적이고 냉담하였다. 그러나 이 폭동이 가라앉자 총독부 당국은 단호한 태도로 광범위한 검거를 시작하였다. 이후 중국에서는 조선족 배일운동이, 일본에서는 만주 침략의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이러한 갈등은 만주 사변으로 이어지게 된다. 중국에서는 조선인의 폭동은 만몽 침략정책을 가진 일본제국주의가 고의로 선동, 촉발한 것이라고 사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더욱 거센 배일운동이 일어났다. 중국의 국민당 기관지인 중앙일보와 민국일보 등은 만보산사건의 진상을 알리고 배일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중국과 조선 독립운동가들은 연합하여 공동투쟁을 전개했다.

 

 

 

류타오후 사건

 

류탸오후 사건(중국어: 柳条湖事件 류탸오후스젠[*]) 또는 류타오거우 사건(柳条沟事件)은 1931년 9월 18일 일본 제국관동군중국만주를 침략하기 위해 벌인 자작극이다. 만주 침략을 위한 작전의 시나리오는 관동군 작전 주임참모인 이시하라 간지, 관동군 고급 참모인 이타가키 세이시로, 관동군 사령관인 혼조 시게루 등 단 세 명이 만들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만몽영유계획>이 모의되었다. 침략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 관동군은 1931년 9월 18일 밤 10시 30분경 류탸오후에서 만철 선로를 스스로 폭파하고 이를 중국의 장쉐량 지휘하의 동북군 소행이라고 발표한 후 관동군은 만주 침략을 개시하였다.

 

일본어의 한자읽기에서 溝(沟) (kō), 湖 (ko)의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에 (장단의 차이만 있다), 일본측 문서의 한자를 중국어 발음으로 읽어서 류타우거우(중국어 간체: 柳条沟, 정체: 柳條溝)로도 많이 알려져 있지만, 류탸오후(柳条湖)가 정확한 표기이다.

 

 

 

음모 획책

 

 

 

이타가키 세이시로

 

류탸오후 사건은 일본군이 용의주도하게 꾸민 첫 번째 음모였다. 일본은 만주를 장악한 후, 중국 본토를 침공하려는 계획을 오래전부터 꾸며왔다. 장쉐량의 동북군이 주둔하고 있던 펑톈(현재의 선양)은 만주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었다. 그리하여 이곳을 장악하는 것이 최우선 목표가 되었다. 류탸오후는 선양 부근이고 동북군의 본부와 가까웠기 때문에, 일본군이 중국측에 이 사건을 전가하여 진공하는 것이 용이했다. 그리하여 이 곳에서 사건을 발생시킨 것이다.

 

이 사건을 꾸민 총책은 관동군 작전 주임참모 이시와라 간지, 관동군 고급참모 이타가키 세이지로, 관동군 사령관인 혼조 시게루였다. 이들 세 명이 만주 침략을 위한 작전의 시나리오를 만들었다. 이것은 내각에도 비밀로 하고 그들끼리 꾸민 음모였다. 이시와라와 아타가키는 거사 장소로 류타오후를 선정하고, 펑텐에 있던 특무기관에서 근무하던 하나다니 다다시 소좌, 실행부대의 이마다 신타로(今田新太郎) 대위(분대장), 그리고 펑텐헌병대장 미다니 기요시 중좌와 구체적인 계획을 꾸몄다.  그리고 현지에서는 폭파전문가인 가와모토 스에모리 중위가 거사를 담당했다. 이것으로 모든 운명이 결정되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만몽영유계획>이 모의되었다.

 

9월 18일 저녁, 봉천 대화(大和)여관 1호에 위치한 관동군 참모장 미사와 코우지(三沢光治)의 사무실에 봉천 주둔 관동군 특무기관장 도이하라 겐지를 비롯한 관동군 고급 참모 이타가키 세이시로, 이시와라 간지, 가타쿠라 다다시 등이 모여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게루 대장의 주도하에 "관동군 동북 사태 수습을 위한 방침 제정"을 위한 긴급 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 이타가키, 도이하라, 이시와라 등 세 사람은 "동북 점령 후 식민 통치 실행 방법"에 관한 문제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그들은 각기 자신들의 의견을 고집하며 양보하지 않았다.

 

 

사건 경과

 

 

 

류타오후 사건, 일본군이 제시한 소위 "물증" : 동북군 군모, 소총, 불탄 철도 침목

 

류탸오후 철도 폭파는 1931년 9월 18일 밤 22시 20분 경, 일본 관동군 후스타이(虎石台) 독립수비대 제2대대, 제3중대가 실행하였다.

 

류탸오후 분견대 대대장 가와모토 스에모리 중위는 1개분대를 펑톈 북쪽 약 7.5 Km의 류탸오후 남만주철도 노선에 파견하여 소형폭약을 장치한 후 폭파시키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철도의 작은 부분이 폭파되었다. 또한 중국 동북군 군복을 입은 중국인 시체 3구를 현장에 방치하여, 이를 철도폭파가 중국인의 소행이라는 증거로 삼으려고 의도했다.

 

폭파후, 가와모토는 즉각 동북군 북부 사령부를 향해 사격하였고, 일본군 독립수비대에 "동북군의 중국군이 철로를 폭파하고 수비대를 공격했다"고 보고했다. 독립수비대는 이를 즉각 관동군 사령부에 보고했고, 이타가키 세이시로는 중국군을 향해 대응발포하고, 동북군 사령부와 펑톈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일본군은 동북군을 기습했으나,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동북군 제7여단은 무방비 상태였고, 어찌할바를 몰랐다. 동북군 사령관이었던 장쉐량은 휘하 부대에게 일본군의 확전 의도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도발에 대응하지 말라고 명령을 내려서 사령부 주둔부대는 반격을 하지 않았다. 제7여단의 3개 연대중, 2개는 지시대로 철수했고, 왕티에한의 620연대는 철수명령을 받지 못해 대응사격을 했으나, 최후에는 포위망을 뚫고 철수했다. 무대응 명령 때문에, 동북군 북부 사령부는 1만 명이 넘는 병력을 가지고도 500여 명의 일본군에게 격퇴되었다. 이후 펑톈과 동부사령부에서도 역시 대응없이 철수하였고, 이들은 일본군에게 점령되었다.

 

 

사건 영향

이 사건은 일본의 전면적인 만주 침략 (만주 사변) 으로 전개되었으며, 병력수는 20만명에 달했지만, 무장과 훈련도가 부족한 동북군은 불과 1-3만여명의 일본군에 패퇴하여 일본군이 만주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 사건뿐만 아니라 만주 사변도 본국의 훈령없이 관동군이 독자적으로 실행한 작전이었고, 이렇게 정부 통제를 벗어난 일본 군부의 독단적 행동은 계속되었고 정부는 이에 끌려가기 급급하여 급기야는 중일 전쟁, 태평양 전쟁에까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