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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2013년을 보내며......1

 

 

 

 

                          2013년을 보내며......1

 

 

 

                                

                                                                                    금년 초봄, 봄을 알리는 꽃망울

 

우주의 신비 속에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여 어미 자궁 속에서 성장하여 10개월 만에 태어난 인간이 세상의 빛을 보는 순간 그 사람의 일생은 시작된다. 부자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새 생명은 자궁 속에서 성장하는 과정까지는 거의 비슷하지만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성장 조건이 다르고 성장 과정이 다르다. 그래서 이처럼 환경이 다른 관계로 인격형성도 다르고 살아가는 삶의 방식도 달라진다.

 

한마디로 평균 80Km 거리의 마라톤을 달리는 데 처음 1Km 정도는 비슷하다가 그 다음부터는 가정 환경에 따라 수레를 타고 가는 사람,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사람, 중고차를 타고 가는 사람, 신형 소형차를 타고 가는 사람, 신형 중형차를 타고 가는 사람, 신형 외제중고차를 타고 가는 사람, 신형 외제차를 타고 가는 사람 등 등 부모와 그 사람의 깨우침에 따라 달리는 속도와 삶이 달라진다. 그러다가 중도에 교통사고가 나서 죽고 다치고 하여 삶에서 탈락한다. 느리지만 꾸준히 달리는 사람, 빠르지만 운이 나빠 사고로 빨리 죽은 사람, 느리다가 빠른 차를 얻어 타는 운 좋은 사람......, 그러나 결승점에 가까워 질수록 하느님의 명령에 의해 모든 사람이 교통 수단을 버리고 홀몸이 되어 가누기 힘든 몸으로 쓰러지며 걸어가다가 목표점 근방에서 서서히 길바닥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이게 우리들의 인생이 아닌가 생각된다. 

 

 

 

                                                                                새벽 하늘과 봄을 알리는 벗꽃 

 

블로그에 역사를 기술한지 벌써 1,000회를 넘었고 일제시대도 중반을 넘어섰다. 다사다난 했던 한 해를 마무리 하는 마지막 12월, 동짓날이 지나고 크리스마스가 바로 며칠 앞으로 다가왔고 송년회와 망년회로 거리는 슬렁이고 아쉬움을 달래면서 다시 새해를 맞을 준비에 분주하다.

 

한 해 동안 이룬게 별로 없다. 그렇다고 고난과 고통의 시간을 보낸 것도 아니다. 그저 평범하게 살아왔을 뿐이다. 그래서 지난 한 해의 달력을 다시 쭉 살펴 보았다. 겨우 이룬 것이 있다면 새벽 저전거 타기를 열심히 했고 블로그에 역사를 열심히 올린 점, 그리고 첯째 손주 돐과 둘째 손주를 본 것, 인플란트 4대를 성공적으로 잘 했고 급성 항문 수술도 성공적으로 잘 한 것, 종합건강검진 이상 없고 냉장고를 수리했고 인터넷을 바꾼 것 그리고 가족들이 큰 병 없이 건강하게 지냈고 그런대로 가난하지만 화목한 가정을 이룬 것, 딸 부부와 서울 성벽, 서울 숲, 그리고 마누라와 남산길, 서울 숲, 북악 스카이, 북한산 둘레길 등을 탐방한 것, 강아지를 등록하고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는 것, 자동차 정기검사를 잘 마쳤고, 겨울철 방한 준비로 전기 사용량 절감을 어느 정도 이룬 것, 자전거가 펑크나 고장나지 않고 1년간 잘 굴러준 것, 자동차세, 주민세, 지방세, 자동차보험, 거주자 주차료 등을 비롯한 세금을 잘 낸 것, 직장에서 나를 계속 임원으로 고용해 준 것, 그리고 큰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평안한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한 것  등등이다.

 

그러나 이루지 못한 것도 많다. 봉사와 기부를 게을리 했고, 술과 담배를 줄이지 못하고 과다한 인터넷 물품 구매로 금전적 낭비를 좀 했으며, 자식들, 그리고 사위나 며느리에게 정신적.물질적으로 온정을 제대로 베풀지 못했고, 1년 목표량의 책을 다 읽지 못하고 철학적인 분야의 종교, 우주, 인생.인간 등에 대한 탐구를 소홀히 한 점, 그리고 전문적인 능력 개발을 게을리 했으며 일본어.중국어 등 외국어 실력을 갖추지 못한 점, 가족에게 좀 더 친절하고 고생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하지 못한 점 등이다. 

 

                                                                           

                                                                          봄이 지나고 나면......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는 우리 민족에게 자연의 변화에 잘 적응하고 사계절에 따른 삶의 방식도 달라지는 등 변화에 잘 적응하는 기질을 배양해 주었다. 어떠한 고난에도 잘 견디어 내고 역경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특성이 있다. 강압적인 억압과 지배에 잘 순응하며 고통을 인내하며 잘 참아내는 인내심도 강하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한반도는 사계절이 뚜렷하고 땅이 비옥하며 산이 수려하고 강이 완만하게 흘러 주변 평야를 촉촉히 적셔주고 지나간다. 구석기 시대부터 한반도는 다른 나라보다 많은 인류들이 살았던 흔적인 고인돌이 전국 곳곳에 남아 있다. 그들은 북방에서 남으로 내려가 한반도 곳곳에 기거하면서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울산 지역 수장 직전인 귀중한 유물인 반구대 벽화를 보면 한반도에는 공룡을 포함한 각종 동물들이 많이 살았고 바다에서 고래사냥도 활발하였다. 한반도 동해는 고래들의 천국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흩어져 살던 사람들이 모여 촌락을 이루었고 서로 식량을 탈취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면서 흡수되고 합병되면서 성장했다.

 

고구려.백제는 예맥족인 부여에서 분리되어 주몽이 고구려란 나라를 세웠고 주몽의 아들인 비류와 온조가 남으로 내려가 백제를 세운 혈통이 같은 한민족이다. 가야와 신라는 북방의 유목민족인 흉노족의 후예인 김수로, 김알지 등이 배를 타고 내려와서 김수로는 기존 세력을 누르고 흡수하여 나라를 일으킨 것으로 알려져 있고 김일지는 신라 사회에 정착하여 지배층에 올라 신라를 지배하게 된다.

 

한반도의 사계절은 인간이 정착하여 살기 좋은 기후와 땅으로 봄이면 꽃이 피고 여름이면 오곡이 영글고 가을이면 추수하고 주변 만물을 만들어 주신 신들과 조상들께 감사하며 제사를 올리고 같이 축제를 즐기며 가을을 보냈다. 흰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이면 군불 땐 따뜻한 방안에서 온 가족이 오손도손 모여 앉아 이불 속에 벌을 낳고 둘러 앉아 엣날 이야기 꽃을 피우며 가족들이 같이 긴긴 밤을 보내면서 겨울을 지냈다. 다시 봄이 오면 따스한 봄바람이 불면 들에 나가 논과 밭을 갈며 씨를 뿌리고 다가올 가을을 기약했다. 

 

이처럼 살기는 좋은 땅이지만 지나온 5천 년의 역사는 영광스런 역사로는 고구려의 대수.대당전쟁, 백제의 대륙경영, 신라의 대당전쟁, 고려의 거란 침공 격퇴와 대몽항쟁, 조선의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의 해전과 왜란 3대첩, 그리고 의병들의 승전 정도이지만 대부분은 비참하고 돌이켜 보고 싶지 않은 치욕스런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

  

구.신석기 시대를 지나면서 기원전 2333년 무진년 청동기 문화를 꽃피우며 평화롭고 행복했던 부족들이 아사달인지 평양인지 기록이 없어 정확하게 알수는 없으나 이 곳에 모여 제사장 단군이 나라를 세운 것이 바로 고조선이요, 단군은 1000여 년 동안 고조선을 다스리다가 기원전 1122년경 기묘년에 상나라가 주 무왕에게 멸망당하자 상나라 왕족 기자가 무리 5천을 이끌고 고조선으로 망명하여 오자, 조선의 군주 단군은 기자에게 왕위를 내주고 장당경으로 들어가 아사달에서 산신이 되었다고 한다. 좀 황당하다. 당시 단군이 통치하던 고조선의 강역은 평양 일대를 중심으로 한반도 북부설, 요동 일대를 중심으로 요동반도와 한반도 북부설, 또 일부는 난하-요서설로 요서 일대가 강역이라고 주장하는 등 여러 설이 있다. 토기와 비파형동검 유물 등으로 판단해 볼 때 라오닝성과 한반도 북부설이 유력하다.

 

기자는 평양에 도읍을 두고 8조 금법을 베풀어 나라를 다스렸다. 정전제를 실시하고 농사와 누에치는 법을 가르쳤다. 이후 구체적인 역사는 없으나 기록에 의하면 기자조선은 기원전 323년경 연나라와 외교적 마찰을 일으켰고, 기원전 300년경 연나라 진개에게 서쪽 영토 2천여 리를 빼앗기고 만번한을 경계로 하면서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기원전 221년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면서 기원전 214년에는 진나라 장수 몽염이 만리장성을 쌓자 당시 기자조선의 왕 부는 진나라에 복속하였다. 부는 기자의 40세 손이다.

 

부의 아들 준은 기원전 194년 중원이 혼란한 가운데 수많은 유민들을 받아들이면서 한나라에서 망명해 온 위만에게 왕위를 찬탈당하자 기자조선은 멸망하고 말았다. 그래서 위만에 의해 위만조선이 성립되었다.

 

기원전 109년 전한 무제는 육군 5만, 수군 7천을 이끌고 위만조선을 침공하였다. 전쟁이 장기화되자 위만조선은 내부분열이 일어났고 우거왕이 살해되고 왕자 장이 투항하였다. 대신 성기가 성안에서 백성들을 독려하여 끝까지 항전하였으나 기원전 108년 결국 왕검성이 함락되면서 고조선의 명맥은 멸망하고 말았다. 그 자리에는 낙랑.대방.현도.진번의 한사군이 설치되었고 많은 고조선인들이 남쪽으로 이주하여 만주와 한반도에 삼한 사회를 이루는데 기초가 되었다.

 

그래서 고조선의 찬란했던 장구한 역사도 한나라 무제의 침략으로 어이없이 무너져 나라가 망하고 백성들은 한사군의 노예가 되어 비참한 생활을 하였다.

 

왕검성이 어디메며 고조선의 고토가 어디메냐? 고조선의 혈통이 중국이냐 조선이냐? 서로 섞이고 아우러져 문화를 이루고 살면서 고유한 풍습과 전통은 어디로 갔느냐? 찬란하던 고조선의 문명도 중국의 황하문명보다 더 뛰어났거늘, 오늘날 그 누가 고조선의 찬란했던 문화를 되찿을 것이냐?

 

기자도 중국인이요, 위만도 중국인이니 우리 조선인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고조선인들은 만주 동북부와 한반도 북부 및 남부로 이주하여 광범위하게 퍼져 나갔으니 그들은 바로 예맥족이라는 이름으로 고구려와 백제를 세운 조상들이니 바로 한국인들의 조상이니라.

 

 

 

                                                                                            둘째 손주 백일 사진

 

 

세월이 흘러 중원에서는 수많은 나라들이 명멸하는 가운데 고구려와 발해가 만주 땅에서 천년 이상 웅지를 펼쳤고, 백제가 양자강 이북과 산동 반도 일대에서 대륙 경영으로 힘을 펼쳤으나 그것은 잠시에 불과했다. 당나라의 힘을 빌어 신라의 통일신라 이후 신라 조정의 천년 사직이 극도로 부패해지자 반란이 사방에서 일어나면서 군웅활거 시대가 시작되었고 이후 후삼국 시대가 전개되면서 수많은 영웅들이 명멸하며 사라져 갔다. 궁예가 그랬고 견훤이 그랬다.

 

고려 역시 미완의 통일이지만 삼한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왕건이 그의 특유의 포용력을 발휘하여 지방 호족들을 아우르며 분산된 후삼국 시대의 힘을 결집시켜 후백제를 무너뜨리고 신라를 흡수하여 삼한통일의 위업을 자력으로 이루어 민족 대화합의 결정체인 고려라는 나라를 창업하였으며 임종을 앞두고서 후손들에게 '훈요십조'를 남겨 반드시 지킬 것을 유언하면서 창업공신인 박술희에게는 "인생이란 이렇게 참으로 덧없는 것이라네!" 라고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생을 마감하였다. 그러나 고려도 중반기를 넘어서면서 무신정권 80년, 몽고지배 100여 년을 겪다가 중원에서 명나라가 일어나면서 몽고가 북으로 쫓겨가자 공민왕의 개혁을 시도했으나 미완으로 끝나고 물거품이 되고 말았고 그가 죽자 나라는 결국 이성계의 쿠테타로 나라가 망하고 말았다.

 

 

 

 

 

이성계는 나라를 세운 후 국호를 정해야 했는데, 명나라로부터 승인을 받아야 했다. 국호 후보를 찿아보라는 이성계의 명을 받은 정도전은 기자조선의 '조선'과 이성계의 고향인 '화령'을 명에 보냈고, 명이 '조선'을 선택해서 나라 이름이 '조선'으로 결정되었다. 

 

한반도에서 나라 이름을 타국에 물어 정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또한 나라 이름 후보를 뽑은 '조선'은  고조선이 아니라 중국의 번국으로 생각되던 기자조선에서 끌어다 쓴 것이고, 이는 명에 대한 사대의 극치였다. 심지어 명의 사신이 오면 임금이 수창궁에서 무릎를 끓고 황제의 글을 받을 정도로 명이라면 사족을 못 써 민족 자존에 크게 상처를 냈다. 명에 대한 사대는 명이 멸망한 후에도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내내 계속되었다.  결국 명과 청에 대한 사대의 결과가 고인 물을 만들어내 조선은 역동성을 잃고 무기력하게 쇠퇴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명에 대한 극진한 사대 덕분에 임진왜란이라는 국가 존망의 기로에서 나라가 망하지 않고 명의 도움으로 500년 왕조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사실 조선은 개국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두문동에 불을 질러 많은 고려의 충신들을 화장한 데다가, 고려왕조의 후손인 왕씨들을 바닷속에 수장시켜 씨를 말려버렸다.

 

그러다보니 이성계는  명으로부터 왕으로 승인받지 못해 죽을때까지 왕 소리를 하지 못했고, 제3대 태종 때에야 비로소 왕에 책봉되어 왕 소리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왕 대신 쓴 호칭이 '권지국사'였다.

 

조선에서 명에 보내는 사신만 해도 정월 초하루에 하정사, 황제의 생일에 성절사, 동짓날에 동지사, 황태자의 생일에 천추사, 고마운 일이 있을 때 감사하는 사은사, 급한 일을 알리는 주청사, 황실 경사 때 진하사, 황실에 불행한 일이 있을 때 진위사 등이 있었다. 좌우간 명나라 경조사를 제 아비 것보다 더 챙겼다.

  

조선을 세운 이성계는 숭유억물 정책으로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유교문화가 꽃을 피웠다. 왕자의 난을 겪으면서 태종이 등극함에 강력한 카리스마로 왕권을 세웠고 대마도를 정벌하고도 대책이 없어 관리에 어려움이 있다고 판단하여 그만 철수한 것이 지금까지도 못내 아쉽기만 하다. 조선은 고려조보다 더 극심한 신분차별제도가 운영되었는데, 양반, 서얼, 중인, 상민, 노비, 천민의 구분이었다. 조선의 신분제도는 인도의 카스트 제도보다 더 악랄한 제도로 왕족과 사대부를 위한 제도였으며 결국에는 조선이 망하는데 크게 기여한 제도이기도 하다.

 

 

 

 

우리 나라, 아니 동양 역사에서도 가장 뛰어난 군주였으며 최고의 성군이며 지혜가 넘쳤던 세종은 한글창제와 문화통치는 백성들에게 태평성대를 구가하게 만들었다. 과학기술을 발전시켰고 화약무기를 개선하였으며 국토를 개발하여 국경을 확정지었고 인구도 고려조의 600만 정도에서 1000만 정도로 증가하였다.

 

조선의 문화는 명나라에 사대하면서 얻었고 태종 때부터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유지함으로써 세종 이후 왕들은 내치에만 진력하면 되었다.

 

세종은 모든 정책을 백성의 입장에서 수립하였고 시행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모든 것을 '애민정신'에서 출발한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정치인들의 헛공약과 예산도 확보되지 않은 상태의 복지 포플리즘 선심 정책과는 비교가 될 것이다. 

 

세조의 왕위 찬탈과 단종의 죽음은 유교를 숭상하는 많은 선비들과 백성들에게 씻지 못한 한을 남겼고, 수많은 정변을 통해 권력을 잡은 공신들이 왕권을 위협하며 중국에 사대하는 신하의 나라로 임금과 신하를 동급으로 생각하는 풍조가 만연하였다. 또 시간이 지남에 따라 훈구파가 제거되고 신진세력들인 선비들이 등용되면서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무위로 끝나고 권력을 잡기 위해 사색당파를 만들어 서로 죽고 죽이는 탐욕스런 사대부의 나라가 되었고 양반.문신 우대 사회가 전개되었다.

 

양반사회는 유교의 허례와 허식으로 사회를 병들게 만들었고 속보다 겉을 중시하는 외모지상주의가 팽배해졌고 양민은 수탈의 대상이었고 천민과 노비는 인간측에도 끼지 못하는 철저한 계급사회였다.

 

 

                                                                                          둘째 손주 백일 기념 사진

 

 

조선은 개국부터 약 100여 년간 융성하다가 연산군(10대), 중종(11대) 대부터 쇠퇴를 시작했으며, 이후 400년이 더 지나 멸망할 때까지 다시 부강한 나라로 변신할 만한 극단적인 계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조선은 그저 100년 내지 200년 정도 존속한 후 망해버렸어야 할 나라였으나, 중국의 속국이 되어 보호를 받으면서 쓸데없이 긴 세월을 연명했던 것이다.

 

조선은 연산군 때가 융성의 정점이었고, 이후 멍청한 왕들의 행진이 이어져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나마 조선 유일한 성군 세종이 창제한 자랑거리는 바로 한글이다.  한글은 세계에서 자랑할 만한 것으로 그 뛰어남은 오늘날 인터넷 시대에 한글의 우수성은 두 번 말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다.

 

사실 고려와 조선왕조는 세계 역사상 드물게 각각 500년 정도의 긴 수명을 누린 왕조였다. 그 이유는 역대로 중국에 사대했기 때문이었는데, 원.명.청의 우산 아래서 편안하게 지내다 보니 국가적인 경쟁 상대도 없었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제외하고는 큰 외침도 없었다. 그래서 개혁 마인드가 크게 요구되지 않았고, 유학의 진흥으로 양반사회가 지배층으로 자리잡으면서 유약하고 허례허식과 출세주의에 치중하여 진취적인 기상도 사라졌다. 나라는 부패한 채 무기력하고 느슨하게 쇠퇴의 길을 걸었다. 

 

고려는 중국의 정세변화에 따라 중국 연호를 여섯 가지나 가져다 썼고, 80년 무인시대를 거친 후 100년 가까이 몽골 식민지를 경험했다. 고려 초에 자체 연호를 사용한 것은 중국의 5대 10국의 혼란이 계속되면서 고만고만한 나라들이 몇 년 또는 몇십 년 만에 섰다가 망하곤 하여 어느 특정한 나라를 상국으로 모시는 데 애로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경우 주변 나라 중 명에 지극히 사대한 나라로 조선을 따라올 나라는 없었다. 이렇게 나라 밖을 걱정할 일이 없다보니 모조리 나태해져서 무능하고 멍청한 왕들이 줄을 이었고, 사대부들은 권력싸움에 눈이 멀어 서로를 모함하여 죽이고 죽은 사생결단의 당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악순환을 반복하였다. 백성들은 국가에 대한 애국심이나 주인의식이 전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한심하게나마 500년의 수명을 끌고 갈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사대부들은 백성들이 자신들을 경제적으로 부양하고 노동력이나 제공하는 객체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니 조정과 사대부들에게 조세와 부역을 바치면서 수탈에 시달리며 배를 곯고 사는 백성들에게서 애국심이란 애초부터 기대할 수 없었다. 이렇게 무능한 통치 계층과 애국심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백성들이 조선이라는 나라를 떠받치고 있었으니, 조일전쟁(임진왜란), 조청전쟁(병자호란) 등 전쟁만 나면 모조리 도망칠 궁리만 했지 싸움다운 싸움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전국토가 유린되었던 것이다. 그래도 이순신의 23전 23승의 해전 승리, 의병들이 각지에서 일어나 무능한 관군을 대신하여 싸운 결과 그래도 조선의 명맥을 이을 수 있었던 것이며 명나라의 지원이 있었기에 나라가 망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조선은 성리학이 국시였으며, 정체의 특징은 왕권과 신권 그리고 대간의 언권 등 3권이 분리된 체제였는데, 중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신권이 왕권을 압도하기 시작하게 되었고 이는 인조, 중종 반정 공신들과 외척들이 주를 이루었다.

 

 

 

                                                                            아들 내외와 같이 만두를 빚으며......

 

 

조선의 왕 27명 중 요절 내지는 단기 재위한 왕은 총 7명으로 정종, 문종,단종,예종,인종,경종,순종이며 명군으로는 세종과 정조 2명, 밥값을 한 왕은 5명으로 광해군, 효종, 태종, 세조, 영조이며, 밥값도 못하고 죽값을 겨우 한 왕은 2명으로 성종과 숙종이다. 결국 명군 둘에다 밥값과 죽값을 한 일곱을 제하고 나머지 단기, 요절을 포함한 18명은  얼뜨기, 멍청이, 소인배, 모자란 무능한 왕들이었다. 그 중 대표적인 소인배로는 조일전쟁(임진왜란) 때의 선조(14대)와 조청전쟁(병자호란) 때의 인조(16대)이다. 특히 두 왕들이 전쟁을 당하여 그 무능함의 극치를 보였는데, 나머지 왕들도 그런 전쟁을 당하였을 경우 마찬가지거나 더 멍청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전주 이씨 그 핏줄을 속일 수가 있겠는가!    

 

문약, 부패, 탐관, 외척, 당파싸움, 반란 등으로 왕권은 추락하고 외척들과 권신들은 무능한고 병약한 왕을 골라 세웠고 그들은 대대손손 부귀와 영화를 누렸다. 사약을 받고 죽은 어미의 피묻은 치마자락을 보고 눈이 뒤집힌 연산군의 폭정으로 중종반정이 일어나 권력이 바뀌더니 왕손이 끓기자 무능한 선조를 등극시키니 가장 불행한 시대의 왕이되고 말았다. 그러던 차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부산포, 동래, 대구, 상주를 점령하며 파죽지세로 올라오던 왜군을 맞아 신립의 충주 평원에서 배수진을 치고 벌인 전투에서 조선군 7,000명의 기마부대는 왜군의 조총앞에 무력하게 쓰려졌고 탄금대 물속으로 거품처럼 사라졌다. 이에 한양의 선조는 그렇게 믿고 의지했던 조선 최고의 날랜 장수 신립이 어이없이 패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비내리는 밤 급히 북으로 피난을 출발하였고 지나가는 왕의 행렬에 백성들이 돌팔매를 던지며 욕설을 퍼부었고 궁궐에 불을 질렀다.

                                                                        

왜군의 말발굽에 전 국토는 초토화되었고 수많은 양민들이 죽고 끌려 갔다. 그러나 이 때 망했어야 할 조선이 한 사람의 영웅에 의해 기사회생하였으니 바로 이순신 장군이었다. 옥포, 당포, 한산대첩, 명량대첩, 노량대첩 등 23전 23승의 빛나는 승리를 기억하는가? 부패한 나라의 운명을 오로지 나라.백성.부모 사랑으로 모든 어려움을 참아내며 백의종군의 처참한 현실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아던 장군! 그가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은 일종의 분신이었을 것이다.

 

무능한 선조의 우유부단은 수많은 장수들과 충신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고 나이 50 줄에 10대의 새 왕비를 얻고 아들 하나를 낳고 죽으니 그가 영창대군이라, 광해군과는 어쩔수 없는 한판 승부를 벌여야 할 입장이 되었고 결국 별궁에 위리안치되어 한많은 세월을 보내다가 인조 반정으로 광해군이 쫓겨나니 결국은 그녀의 승리가 되었다. 그래서 인조반정의 공신인 서인 남인들의 등장은 권력을 농단하였고 조정은 노론들이 장악하면서 날로 부패해져 갔다.

 

 

 

 

 

선조가 갑자기 죽자 사자 출신이지만 오랫동안 세자 자리에 있으면서 임진왜란을 통해 분조를 이끌며 의병을 모집하고 백성들을 위로하면서 책임과 역활을 다하면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선조는 광해군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였고 말년에 어렵게 얻은 핏덩이 적자 영창대군을 후계자로 삼을 요량이었지만 갑작스런 그의 죽음에 조정은 혼란하였으나 조정의 최고 어른인 인목대비의 장고 끝에 결국은 광해군이 대북파들의 지지하에 어렵사리 등극하였다.

 

그러나 영창대군이라는 적손이 살아 있는 한 왕권은 항상 불안하기 마련, 사방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역모가 적발되면서 대북파는 왕권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되면 무조건 철저하게 걸림돌을 제거하였다. 그래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잔혹함이 도를 넘었다. 또 광해군은 친국을 좋아하여 직접 죄인들을 밤을 새면서 친국하는 것을 즐겼다. 그러다가 양반 가문의 서출들의 모여 시대를 한탄하며 도적, 강도질을 저지르며 여주 근방에서 노닐다가 꼬리가 잡혀 체포되어 조사하는 과정에서 사주를 받고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 영창대군을 끌여들였다. 그래서 대북파는 역모 혐의를 씌여 수많은 관련자들을 문초하고 주살시키니 옥사에는 죄인들이 넘쳐날 지경이었다. 결국 광해군과 대북파들은 '칠서의 난'을 핑계로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유배보내 결국 능살시키고 인목대비를 별궁에 유폐시켰으며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을 사사시켜 죽였다.

 

그러자 조야에서는 '폐륜군주', '폐모론' 등이 들끓기 시작하였고 특히 권력에서 쫓겨난 서인.남인들이 영합하여 복수의 칼날을 갈다가 결국 반정을 일으키니 인조반정이라! 훈련도감 장수들까지 반정군에 포섭되어 궐문이 저절로 열리고 반정군이 들이치자 광해군은 대궐을 도망쳐 민가에 숨어 있다가 체포되어 유배를 가니 18년의 긴 세월 동안 통한의 삶을 살다가 제주도에서 쓸쓸히 눈을 감았다. 

 

 

                                                                        반포종합운동장 테니스장과 새벽 하늘

 

 

인조반정으로 등극한 인조는 대명사대를 내걸고 청나라를 오랑캐로 멸시하고 쓰러져 가던 명나라를 잊지못해 바지가랑이를 잡고 미련을 떨치지를 못했다. 결국 여진족이며 만주족인 청나라의 발흥과 침공으로 인조대에 정묘.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남한산성에서 40여 일을 버티다가 주전파.주화파가 서로 싸우는 가운데 양식이 떨어져 결국 송파 나루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머리를 땅에 '쿵쿵' 소리가 나도록 9번 박으면서 3번 절하는 치욕스런 항복을 당하고 말았다. 임진왜란에 이어 나라는 또 한 번 쑥대밭이 되었고 한양 길거리에는 죽은 양민들의 시체가 거리마다 가득하였다.

 

수많은 부녀자와 포로, 3학사, 소현,봉림대군이 불모로 잡혀가고 십여 년 가까이 볼모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포로를 돈을 주고 귀국시켰고 조선을 대변하였으며 서양 신부 아담 샬을 만나 신문물을 익혔고, 명.청전쟁을 관전하면서 망해가는 명나라와 발흥하는 청나라를 보았으며 조선이 살아남기 위한 새로운 개혁의 꿈을 가지고 돌아왔을 것이다.

 

이렇듯 국제정세와 신문물을 익히고 돌아온 소현세자가 청나라를 등에 업고 왕권을 위협한다고 우려하던 차, 소현세자가 원인을 알수 없이 갑자기 죽자 멍애를 씌워 세자비까지 사약을 내려 죽이고, 세손 아들 3명은 남쪽 섬으로 귀양보내 결국은 두 명이 죽는 잔인한 왕이었다. 만약 소현이 등극하였더라면 조선은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요즘 궁중잔혹사 드라마에서 이야기가 잘 전개되고 있으니 한번 꼭 보시라.

 

인조를 뒤이어 봉림대군이 등극하매 효종이더라. 북벌을 다짐하며 허리띠를 졸랐으나 전쟁은 유신들에게 가장 하기 싫은 임무이니 효종을 이리치고 저리치고 하여 북벌의 실행을 이루지도 못하고 영민하니 북벌의 꿈도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숙종의 치세는 환국정치로 대표된다. 장희빈, 숙빈 최씨, 노론과 남인, 인현왕후 등 숙종의 환국정치 과정에서 부침을 거듭한 사람들이다. 숙종은 환국정치로 조정을 휘어잡고 왕권을 강화한 군주였다. 그리고 그에 따라 자신의 부인도 갈아치우는 비정함을 보인 대표적인 군주다. 그래서 인현왕후가 역사에 이름이 남고 희빈 장씨가 이름이 남았다. 숙빈 최씨는 지난번 동의라는 드라마에서 잘 나와 있듯이 북촌 김춘택이란 자와 염문이 있었고 나중에는 그녀가 숙종의 후궁이 되어 영조를 낳았다. 드라마에서 나오지만 숙빈 최씨는 매우 영민했더 모양이다. 인현왕후와 장희빈, 노론과 남인들 간에 싸움에서 자신을 지켰고 영조를 낳아 후일 왕통을 잇게 만든 여인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후궁 출신 어머니에서 태어난 영조는 평생을 그것으로 인해 고통을 받았다. 요즘 희빈 장씨에 대한 드라마가 다시 방영되고 있다.

 

영.정조 시대의 태평성대는 문화융성을 극대화하였고 당평책을 사용하여 당파싸움을 없애려 하였으나 그것도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영조가 세자에 대해 숨을 쉴수 없도록 단련시키자 그 억압을 참지 못하고 미친척 하였더니 노론들의 탄핵이 이어지자 결국 뒤주속에 가둬 죽이니 부모가 자식을 죽이는 잔인함에 백성들은 치를 떨었을 것이다. 영조는 숙종과 숙빈 최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 숙빈 최씨의 과거 행적을 문제삼아 정통성에 시비를 걸며 남도에서 이인좌가 난을 일으키니 영조는 대노하였디. 그래서 다행히 난이 평정되자 영조는 자신의 정통성에 대해서 챡을 저술하게 하는 등 출신의 비천함이 평생을 영조의 마음 속에서 떠나지 못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은  어린 정조에게 너무나 큰 충격이었을 것이고 영조가 승하하지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왕위에 즉위한 정조는 한많은 세월을 청산하려고 몸부림쳤고 그것을 개혁이라는 미명아래 개혁의 고삐를 당겼으나 결실을 보지 못하고 갑자기 죽으니 개혁에 대한 그의 꿈도 연기처럼 사라졌다. 드라마 '이산'은 정조에 대한 이야기다.

 

 

 

 

그냥 재미삼아 조선 왕 27명에 대해서 점수를 매겨보자.(아래는 한 네티즌의 글로 용어의 투박함을 이해하시기 바란다)

 

1등은 당연히 세종(4대)이다. 점수는 95점을 주자. 왕으로서 더 이상 잘할 수 없었으나 후계 문제를 소홀히 했다. 세종이 세상을 뜬지 겨우 5년 후 둘째 아들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고 왕실의 장손인 단종을 죽였으며, 두 동생 안평과 금성대군을 죽였다.

 

2등은 정조(22대)다. 정조의 점수는 85점 정도다. 정조는 참으로 괜찮은 호학군주이자 개혁군주였으나, 개혁의 속도가 너무느렸고 과감하지 못해 기대 만큼 성과가 없었다. 물론 노론 정국에다가, 정조 자신이 보소주의자였던 것이 한계였다. 그 다음이 광해군(15대)을 꼽아야 할 것 같다. 인조반정에 성공하여 광해군을 내쫓은 서인들이 쓴 <광해군일기>는 대부분 소설이다. 광해군은 외치와 내치에 괜찮은 성과를 이루었으나, 실정도 좀 있었다. 그의 점수는 75점쯤 된다.

 

  

다음은 태종(3대)과 효종(17대)으로 비슷할 것이다. 태종은 조선이라는 나라를 굳혔고, 세종을 낳았다. 그게 큰 업적이다. 효종은 무기력한 조선에 진취성을 불어넣은 몇 안되는 군주였으나, 명이 짧았다. 둘 다 70~75점쯤 된다. 다음 순서가 세조(7대), 영조(21대), 성종(9대), 숙종(19대)순이 될 것이다. 이 인물들은 겨우 밥값이나 죽값을 했으니, 한 60~65점쯤 정도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조리 깡통이다.

 

조선의 27대 왕 중 전기의 절반인 14대 왕 가운데서 정상적인 과정을 거쳐 왕위에 오른 인물은 문종(5대), 단종(6대), 예종(8대), 연산군(10대) 등 4명 뿐이다. 그 중 문종과 예종은 일찍 죽었고 단종과 연산군은 신하들에 의하여 왕위에서 쫓겨났다. 초대부터 14대까지 정상적인 절차로 국왕에 올라 통치를 한 인물이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눈내린 방배동 길

 

보통 왕실에서는 세자가 9~12세 정도가 되면 혼인을 시켰다. 열 한 살에 자식을 보고 스물 다섯에 할아버지가 되었던 예종같은 왕도 있었다. 세자비는 또래거나 대개 몇 살이 더 많았다. 그런데 이런 꼬맹이들을 한방에 집어넣으니, 처음에는 뭘 모르다가 나중에는 가르쳐 주지도 않아도 알게 된다. 이렇게 해서 세손이 태어나는데, 애들끼리 섹스해서 태어난 애가 정상일 리가 없었고 대부분 미숙아일 수밖에 없엇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 왕 중에서 장자가 별로 없고 똑똑한 장자는 드물다.

 

조선이 1392년 개국하고 1910년에 망했으니, 존속 연대가 518년 정도인데(허수아비 대한제국 포함), 그 중 중종(11대), 선조(14대)가 80년(명종 포함시 100년), 숙종(19대), 영조(21대) 부자가 98년을 재위하여, 4명의 왕이 거의 200년 가까이 재위했다. 명,청나라가 존손 기간이 250~260년 정도인 것을 보면, 200년 정도는 거의 한 왕조가 창업하여 멸망할 만한 기간이다. 그런데 조선의 4명의 왕이 200년 가까이 재위했으니 얼뜨기 중종, 소인배 선조, 죽값 겨우한 숙종을 빼면 영조가 51년이나 재위하면서 그나마 겨우 밥값을 했으니, 그 나라가 되어가는 꼴은 안봐도 감 잡을 것이다.

 

  

조선이 융성하던 시기는 개국 후 약 100년, 연산군이 쫓겨나기까지이다. 중종이 들어서면서 쇠퇴를 시작하였고 마마보이 명종과 소인배 선조를 거치면서 그 기간 100년 동안 조선은 완전히 주저앉고 말았다.

 

조선이 초기에 융성하게 된 이유는 바로 세종 덕분이었다. 대개 나라가 개국하면 그 나라의 흥망은 3~4대 왕 사이에서 결정된다. 명나라 3대 황제 영락제는 좀 잔인하기는 했지만 명조에서 가장 영명한 황제로 손꼽을 수 있다. 또 청나라 4대 황제는 청나라 황제 중 가장 뛰어난 강희제였다. 조선에서도 다행히 4대째 왕이 역사상 가장 뛰어난 왕이었던 세종이었기 때문에 개국 후 100년간 유례없는 융성을 누렸던 것이다.

 

그러나 첯 번째 쿠테타로 중종이 들어서면서 융성기는 끝나고 만다. 그것은 반정으로 신권이 왕권을 누르면서 부패해졌고 나라가 절단나는 현상이 초래되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쿠테타는 더 어이가 없다. 멀쩡한 광해군이 일 좀 하려고 하는데 썩어빠진 관료 패거리들이 쿠테타를 일으켜 광해군을 내쫓았다. 그리고 무능하기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조가 들어서면서 조선의 희망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원래 최고 통치자가 힘이 약해지면 힘이 강한 신하들이나 장관, 그리고 인친척, 하급 관료, 혈연, 학연, 지연 인맥들이 권력을 휘두르며 부패해지기 때문이다.

  

조선은 두 번의 반정으로 망한 것이나 진배없을 것이다. 정조대에 병세가 약간 회복 기미를 보였으나 골수에 미친 병을 치유하기에는 너무 약발이 약했다. 멸망 직전 대개혁가인 대원군 시대가 잠깐 있었으나 10년도 안되는 짧은 기간인데다가 이미 너무 늦어서, 그저 절벽에서 굴러 떨어지다가 중간에 돋아난 나무에 걸려 잠시 한숨 돌린 후 그냥 나락으로 추락하고만 것과 마찬가지였다. 조선은 정조 이후 안동 김씨 떼거리들의 썩은 세도정치와, 대원군 몰락 이후 민비의 후원을 등에 업은 민씨 떨거지들의 더 썩은 척족정치가 합하여 80년이나 되는 바람에 망한 것이다. 80년이면 절대로 짧은 세월이 아니다. 조선의 병을 치유하고도 남을 기간이 될 것이다.

   

그런데 80년 세월이 지나고 나니 조선은 썩어도 너무 썩어 하느님이 치세를 해도 살릴 수가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두 집안이 싹싹 긁어대는 바람에 조선의 백성들은 모조리 거지 새끼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초기 100년 광해군 10년, 효종 10년, 정조 약 20년 합하여 150년간 존재의 의미가 있었던 기간이었고 나머지 350년은 무능한 인간들이 등장하여 치세했으니 조선의 백성들의 삶은 말할 수 없이 참혹했던 것이다. 명나라가  당쟁과 환관들의 횡포로 망했듯이 조선도 외척세력과 척족세력들로 인해 매관매직, 탐관 등 부패가 극을 달렸고 양반들과 공허한 명분론에 치우친 유교패습 때문에 멸망하였던 것이다. 

 

 

                         

                                                                       한양 서울 성벽 전경

                                                                                          

 

 아! 돌아보면 한숨이요 생각하면 치욕이요 백성을 바라보면 분노로 얼룩지는 세월이었다. 500년을 끈질기게 이어온 이씨 왕조. 망하고도 남을 기회가 여러번 있었지만 운 좋게도 버티며 지내왔다. 어디 이 세상에 이런 나라가 또 있었을까? 모든 치욕을 감수하면서도 백성들을 내팽개치더라도 왕족과 지도층은 호의호식하면서 양반 사대부들만을 위한 나라였던 것이다. 인간이란 재물이나 권력이나 가지면 가질수록 더많은 것을 갖고 싶어하는 동물이라, 그 처참한 피비린내는 권력투쟁은 500년 내내 계속되다가 결국 망국의 길을 가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의 마지막 연기자들은 흥선대원군, 민비와 고종이었다. 그기에 을사오적과 수많은 친일파들이 무대를 장식하였다.

 

 민족의 참담한 비극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일제가 조선을 삼키고 36년간 침탈하고 태평양 전쟁에서 패하자 한반도에는 소련.미국이라는 초강대국들이 일본군 무장해제를 빌미로 남북으로 점령하였다. 하필이면 북한 지역의 일본군 17사단이 만주의 관동군으로 배속이 변경되는 바람에 북한 지역이 관동군 무장해제를 책임진 소련군의 무장해제 대상 지역이 되었다. 만약 그 당시 일본군의 편제를 변경만 하지 않았더라면 한반도는 미군의 무장해제 지역이 되었을 것이며 김일성이 북한에서 소련의 위성국이며 꼭두각시 괴뢰 정권을 세우지도 못했을 것이다. 당시 소련군 대위로 근무하던 젊은 김일성은 참으로 운이 좋았던 인물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