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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008 : 일제강점기 53 (사회주의 성장과 민중운동의 발전)

 

 

한국의 역사 1,008 : 일제강점기 53 (사회주의 성장과 민중운동의 발전)

 

 

 

 

 

           

 

 

사회주의 성장과 민중운동의 발전

 

 

'사회주의사상의 수용과 사회주의 조선공산당세력의 등장'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은 식민지.반식민지 국가의 민족해방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민족주의자 박은식도 1920년 <독립운동지혈사>에서 "러시아 공산당은 선두에 적기를 내걸고 전제정치를 타도하여 민중에게 자유와 평등을 가져오고 제 민족의 자유와 자결을 선포했다. 과거에 극단적인 침략주의자가 극단적인 공화주의자로 바뀌었다. 이것은 세계개조의 최초의 신호탄이 되었다" 라고 하며 러시아혁명에 대한 벅찬 감격과 기대를 나타냈다. 당시 제국주의 세력들의 식민지 쟁탈을 위한 후진국을의 침탈의 고통을 겪고 있던 이들 후진국 나라와 국민들에게 러시아 10월 혁명이 주는 영향은 지대하였던 것이다.

 

1919년 3.1운동에서 민족주의 세력이 보여주었던 무기력함에 실망한 국내 민중은 민족해방을 이끌 새로운 사상을 요구하게 되었다. 러시아혁명과 제1차 세계대전 직후 고양되었던 국제혁명운동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가 국내에 수용되었다. 3.1운동 뒤에 민중의 정치의식이 높아지고 일제의 가혹한 식민통치에 따른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이 깊어지면서 사회주의가 빠르게 확산되었다. 초기 사회주의사상은 일본.시베리아.상하이를 거쳐 흘러들어와 책과 신문, 잡지에 널리 소개되면서 강연화를 통하여 민중들에게 전파되었다. 일제조차도 "그동안 독립운동이 실패를 거듭함으로써 초조해진 민중에게 사회주의 운동은 일종의 자극과 광명을 주었다'고 지적할 정도로 사회주의 확산 영향은 컸다.

 

1920년대 초 국내에 사회주의사상이 보급되면서 지식인.청년.학생.선진 노동자들은 대중단체와 여러 서클을 만들었다. 일부 사회주의자들은 서울청년회, 북성회(뒤에 '북풍회'), 신사상연구회(뒤에 '화요회'), 조선노동당 같은 사상단체를 만들어 활동했다. 사상단체들은 합법적인 간판을 내걸었으나 사실은 그 이면에 비밀 사회주의 조직을 두어 그 단체를 지도하고 있었다. 화요회는 코민테른과 직접 관계를 맺으면서 러시아에 있던 이르쿠츠크 사회주의자들과 연계하여 활동했다.

 

1921년 서울에서 김사국.이영 등이 '서울청년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1922년 10월 '공산주의 그룹'(뒤에 '고려공산동맹')을 조직하고 독자적인 강령과 조직체계를 갖춘 사회주의 정당을 결성하려 했다. '서울파'로 불린 이들은 김사국을 코민테른에 파견하여 조선공산당으로 승인받으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김약수.정태신 등은 일본에서 1923년 1월 '북성회'라는 사회주의 사상단체를 조직하여 <해방운동> 등 기관지를 발행했다. 이들 북성회 그룹은 비밀조직 '까엔당'을 만들어 노동.농민운동에 영향을 끼치려 했다. 이들은 조직을 확대하여 1924년 11월 '북풍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1923년 7월 서울에서 홍명희.김찬 등은 '신사상연구회'를 조직하여 강습회와 토론회를 열고 책과 잡지를 펴냈다. 이들은 1923년 5월 꼬르뷰로(고려국) 국내부와 관련을 맺고 있었다.  신사상연구회는 1924년 11월 '화요회'로 이름을 바꾸고 행동단체로 노선을 바꿀 것을 결의했다. 서울파와 대립하여 화요파로 불린 이들은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창립에 큰 역활을 했다.

 

 

 

조선공산당 창건

 

국내에서 조선공산당이 만들어지기에 앞서 일찍이 러시아에 건너간 조선인들은 러시아혁명의 영향을 받으면서 '한인사회당', '고려공산당' 등을 조직했다. 1918년 4월 이동휘.박진순 등은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만들었다. 이동휘가 1919년 9월 상하이 임정 국무총리에 임명되자 그들은 활동 무대를 상하이로 옮겨 1921년 5월 '고려공산당'을 결성했다. 이들은 '상해파' 고려공산당으로 불렀다. 이르쿠츠크를 중심으로 바칼호 북쪽애 있던 조선인활동가 김철훈.남만춘 등은 1920년 1월 이르쿠츠크에서 '한인공산당'을 만들고 1921년 5월 자신들이 '유일 정통'이라고 선언하며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을 창립했다.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는 운동 노선과 방법, 민족통일전선에 대한 인식 등의 차이로 대립하기도 했다. 코민테른은 1922년 10월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고려공산당연합대회를 열어 두 파를 통합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코민테른은 두 고려공산당의 해체를 지시하고 1922년 12월 '국내 조선공산주의 그룹의 통일'을 목적으로 코민테른 산하에 '꼬르뷰로'를 설치했다.

 

1923년 초 블라디보스톡으로 이동한 꼬르뷰로는 국내에 당을 건설하려고 신철과 김재봉을 파견했다. 이들은 1923년 5월 꼬르뷰로 국내부를 조직했다. 당 창건 준비기관이었던 꼬르뷰로 국내부는 책임비서 김재봉.공산청년회 책임비서 신철 등 30여 명이 참여하여 지역별 조직 건설에 나섰다.

 

1924년 5월 서울파 전위조직인 고려공산동맹은 화요회.북풍파.상해파.조선노동당 등을 아루르는 '13인회'를 구성하여 통일적 조선공산당을 청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꼬르뷰로가 해체되고 '고려공산당 창립대표회 준비위원회'('오르그뷰로' : 조직국)가 창립되면서 통일적 조선공산당 논의는 좌절되었다.

 

오르그뷰로도 조선공산당을 창립하지 못하자 1925년 2월 코민테른은 해체를 지시했다. 그러나 꼬르뷰로 때 파견된 김재봉과 신철은 국내부 작업에 일정한 성과를 가두어 '민중운동자대회'와 '조선기자대회'를 추진하면서 1925년 4월 17일 서울 황금정(을지로)에 있는 아서원에서 김재봉.김찬.김약수.조동호.박헌영 등 19명이 참석하여 '조선공산당 창립 대회(제1차 당대회)'를 비밀리에 열었다. 창당 무렵 당원 수는 120여 명이었다.

 

조선공산당 창립대회에서 책임비서 김재봉을 포함하여 7명의 중앙위원회와 3명의 중앙검사위원회를 구성했다. 4월 18일에는 박헌영을 비롯한 20여 명이 모여 조선공산당 청년전위조직인 '고려공산당청년회(공청)' 을 조직했다. 1차 조선공산당은 화요회가 중심이었고 여기에 일부 활동가들이 참여했다. '서울파'의 핵심 활동가들은 참여하지 않았다.

 

조선공산당 1차 당대회에서 '조선혁명은 민족해방, 반제국주의 혁명이어야 한다"고 선언했으며, 모든 '애국 세력'과 적극 동맹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대회는 조선공산당이 "첯째,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하여 프롤레타리아의 이익을 포함하는 조선인민의 일반적 운동을 지원해야 하고 둘째, 조선인 자본가뿐 아니라 일본인 자본가에 대항하여 투쟁해야 한다"는 결정을 채택했다.

 

'1차 조선공산당'은 여러 차례 집행위원회를 열어 당조직을 정비하고 조선노동자총동맹의 분립, 기관지 발행, 만주총국 설치, 고려공산청년회 사업을 지원하는 문제 등을 토의했다. 고려공산당청년회는 합법단체인 조선청년총동맹에 가입하여 27개 군동맹과 9개 도연맹을 조직하고 모스크바 공산대학에 21명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1925년 11월 신의주에서 일어난 한 폭행 사건을 수사하던 일본 경찰이 뜻하지 않게 조선공산당이 해외로 보내는 문서를 발견하고 당원 검거에 나서면서 조선공산당이 무너지기 시작했다(1차 조선공산당 사건').

 

이때 검거를 피한 사람을 중심으로 1925년 12월 중앙부서를 재편하여 강영달을 책입비서로 뽑았다. 조선공산당은 1926년 3월에 코민테른으로부터 정식 지부 승인을 받았다. 또 비타협적인 민족주의자들고 공동투쟁을 모색하기도 했으며, 1926년 6.10 만세운동을 조직하는 데 앞장섰다. 저선공산당은 순종 장례일인 6월 10일을 기회로 삼아 '제2의 3.1운동'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고, '투쟁지도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그 조직의 활동으로 6.10 만세운동은 꽤 성공했지만, 조선공산당은 일제경찰에 큰 타격을 입었다(2차 조선공산당 사건).

 

1.2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화요파 세력이 거의 검거되거나 나라 밖으로 망명하자, 조선공산당은 공산주의운동의 통일을 주장하던 사람들과 협동하여 중앙기구를 재편했다. 그리하여 김철수를 책임비서로 삼아 1926년 9월 'ML당'이라고도 불리는 '통일조선공산당(3차 조선공산당)'을 결성했다.

 

일제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조선공산당은 1926년 12월 6일 2차 당대회를 열어 당을 다시 세웠다. 1927년 조선노농총동맹을 노동총동맹과 농민총동맹으로 분리했으며 청년총동맹을 강화했다. 조선공산당은 사회주의자와 비타협적 민조주의자 사이에 통일전선체인 '신간회', 사회주의 여성계와 비곧교 여성계가 한데 모인 '근우회'를 결성시켰다. 나아가 기관지 <이론투쟁> 등을 발행하고 각 도에 지방당부를 조직했으며 만주총국, 상해부, 일본부를 두는 등 해외 조직을 넓혔다.

 

일제의 감시망을 피하지 모한 채 주요 간부가 또다시 검거되자(3차 조선공산당 사건), 1928년 2월 말 조선공산당의 마지막 당대회였던 3차 당대회를 열어, 노동자 출신 차금봉을 책임비서로 뽑았다. 대회는 규약을 개정하고 <코민테른 결정서>를 토의했다. 여기에는 파벌 청산, 당을 노동자 출신으로 강화할 것, 신간회에서 노동자 주도권을 강화할 것 등을 지시했다. 대회는 코민태른에 보내는 <국내정세에 관한 보고서>(논강)를 토의하고 승인했다. 29개항으로 구성된 <논강>은  조선 정세 분석과 혁명의 성격, 투쟁슬로건 등을 담고 있다.

 

조선공산당은 신간회와 근우회에 더욱 관심을 쏟았다. <조선지광>, <대중신문>, <현단계>, <불꽃> 등을 발행하여 선전활동에 힘을 기울였다. 또 대중운동에 적극 개입하려 했으며, 특히 당 산하의 고려공산청년회는 학생위원회를 두어 학생운동을 지도했다. 그러나 3차 당대회 이후 1928년 5월부터 7월까지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 관계자 175명이 검거되고 책임비서 차봉금과 공청책임비서 김재명이 일제경찰에 고문으로 살해됨으로써 당조직은 거의 파괴되었다.

 

조선공산당은 4차례에 걸친 일제의 혹심한 탄압을 받아 거듭 무너져갔지만, 그때마다 당을 다시 만들어 일제에 맞섰다. 그들은 계급해방과 민족해방을 서로 긴밀하게 연결시켜 새로운 독립국가인 '민주공화국' 또는 '인민공화국'('혁명적 인민공화국')을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며, 노동운동.농민운동 등 여러 부문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당원들의 직업별 구성을 보면 대부분 지식인이 많았다.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체포된 당원들의 직업별 구성을 보면 지식인.학생.상인 등이 42%, 농민이 13%, 노동자 11.6%, 무직 29% 기타 4%로 노동자 계급의 비율이 매우 낮았다. 이것은 당을 처음 만들 때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했지만, 아직 조선 노동계급이 크게 성장하지 못했음으로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사회주의자들은 전국 운동을 지도할 튼튼한 조직으로 조선공산당을 만들려 했지만, 일제의 탄압을 똟고 대중에게 튼튼하게 뿌리내리지는 못했다. 1930년대 당재건 운동에 나서는 사회주의자들은 이러한 과제를 떠 안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