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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007 : 일제강점기 52 (일제의 탄압과 내부 분열)

 

 

한국의 역사 1,007 : 일제강점기 52 (일제의 탄압과 내부 분열)

 

 

 

 

 

           

 

 

일제의 탄압과 내부 분열

 

'삼부의 통합은 멀고 만주사변은 가까워졌다'

 

 

재만 한인들이 일제 관헌과 중국 관헌 양쪽으로부터 핍박당한 것처럼 한국 독립운동 세력도 일제의 탄압과 내부 분열이라는 두 개의 적과 동시에 싸워야 했다. 이런 분열 상태를 끝내고 모든 독립운동 세력이 하나로 결집하자는 주장이 '민족유일당운동'과 '삼부통합운동'이었다.

 

만주 이주 한인들, 즉 한교(한국인 교포)들은 중국과 일본 어디에도 마음을 둘 수 없는 부평초 신세였다. 한교들의 사실상 정부였던 삼부는 1925년의 '미쓰야협약(삼시협약)'이후 크게 위축되었다.

 

항일 언론인 이상협이 발행하던 <중외일보>는 1927년 11월 29일자는 만주 한인들이 중국인들로부터 억압받는 실태를 보도했다. 길림성 성장이 조선 농민의 이주를 일절 금지시키고 이미 이주한 농민들도 중국에 입적하지 않았으며 1년 이상 경작지를 빌려주지 말라는 밀령을 내렸다는 보도였다. 여기에 만주 회덕현 조선 농민들이 중국 관민에게 수탈당한 사례가 전해지자 국내에 반중 감정이 들끓었다.  회덕현 소오가자의 180여 호 조선인 마을의 삼성소학교를 중국 관헌이 강제로 폐쇄시켰으며, 중국인들이 '도전공사'라는 협잡간판 아래 한교들이 피땀으로 개간한 옥토와 농작물을 빼앗았지만 중국 당국은 되레 중국인들만 비호했다는 보도였다.

 

이런 소식을 접한 국내 민중은 그 분노를 국내의 화교에게 돌렸다. 1927년 12월 7일 전라도 익산에서 화교 배척 운동이 일어나 곧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중국 국민당 광주지부 기관지인 <광주민국일보>는 이 사건에 큰 관심을 갖고 다양한 각도로 보도했다.

 

이 신문은 1927년 12월 23일자, "만주지역에서 중국 관헌이 한교들을을 학대했으니 그 원수를 갚아야 한다며 한인들이 화교들을 공격했다"고 전한다. 호남에는 만주 이주 친인척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곳에서 먼저 화교배척 운동이 발생한 것으로 추측된다. 로이터 통신은 한국 전역으로 확산된 화교 배척 운동 때문에 동삼성(만주)로 피신한 화교가 3,000여 명에 달한다고 전했다.

 

<광주민국일보> 취재진이 상해에서 활약하던 안창호를 찿아가 해결책을 물었다. 그러자 안창호는 "한교들은 중국인들이 버려둔 계곡과 황무지를 개간하기 때문에 중국인들에게 이익을 주지 절대 손해를 입히지는 않는다. 만주 관헌들이 시도 때도 없이 한인을 능멸하고 모욕하는 자들이 적지 않다. 군인들에게 특히 이런 경향이 심하다."고 지적했다. 안창호는 "정의부.신민부.참의부 등은 만주 반일파의 중심 기관이며, 한교 지도층은 참고 견딜 것을 바라고 있다" 면서 "일본제국주의 타도를 위해서는 중.한 두 민족의 긴밀한 협조와 연계가 절실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화교 배척 운동으로 여러 명이 살해되엇다는 소문이 무성했지만 조선중화총상회와 인천중화총상회 등은 "지금까지 생명이 위태로울 정도로 심한 부상을 입은 교포는 없다"면서 "사태가 점차 진정되고 있다"고 발표했다. 똰 "조선인 지도층이 여러 차례 찿아와 유감의 뜻을 전하고 정중히 사과했는데, 이들의 진중한 태도로 보아 사태 재발을 염려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고 전하기도 했다.

 

중국 공산당이 상해에서 발행하던 <중앙일보> 1928년 6월 30일자는 '동삼성, 한국 교민의 민족운동'이란 제목으로 한교 배척 운동 이후 재만 독립운동계의 동향을 보도했다. 이 신문은 손문의 장남 손과가 동사장(이사장), 국민당 중앙선전부장 정유분이 사장이었는데 "일체의 언론은 본당(국민당)의 주의와 정책에 근거한다"는 신문이었다.

 

위 보도에서 "1928년 6월 만주 거주 한교가 180만 명에 달하는데 '한교구축문제강구회' 등이 결성되어 한교 구축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하지만 한교 구축 문제의 궁극적인 해결책은 중국 국적으로 입적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1928년 4월 19일 만주 각 단체.지역의 대표들이 모여서 이 문제를 논의했지만 쉽사리 결론을 내리지 못해 '21일 일단 휴회'한 것처럼 결코 쉽지 않은 문제였다.

 

그러나 이 신문이 "최근 각 당파의 통일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정의부.참의부.신민부.청년당.노동당.남만청년동맹회.흥사단 및 한국 경내의 사상단체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 단일당통일회의를 열기로 했다"고 보도한 것처럼 이런 문제들이 재만 독립운동 단체들의 통합 논의를 부추기는 효과도 있었다. 모든 운동 세력을 하나로 결집해 '민족유일당'을 건설하자는 운동과 만주의 삼부를 통합하자는 '삼부통합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1926년 7월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한 홍진이 "전 민족을 망라하는 공고한 단체를 조직하자"고 주장한 것처럼 상해 임시정부도 그 전부터 통합운동을 지지했다. 안창호는 1926년 8~9월쯤 북경에서 임시정부 창조파로서 임시정부를 부인해오던 사회주의자 원세훈을 만나 이념과 노선을 초월한 민족의 대동단결을 촉구했다. 이어 그는 1927년에는 만주를 방문해 만주에서 우선 '민족유일당'이 결성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1928년 1월에는 홍진과 정원이 만주로 와서 민족유일당 결성을 촉구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정의부 중앙집행위원 김동삼과 김원식은 갖은 고생 끝에 1928년 4월 북만주의 신민부 본부를 찿아가 김좌진 등 신민부 지도자들에게 "광복의 제일요는 혈전인바 숭고한 사명 앞에서는 각 단의 의견과 고집을 버려야 할 것"이라면서 "삼단체 군부의 합작"을 역설했다.

 

이 무렵 신민부에서 활동하던 이강훈이 "우리 일행이 안도현에 도착했을 때 정의부에서도 사람이 나와서 지방 조직을 서두르고 있었다"고 회고한 것처럼 같은 독립운동 단체끼리 경쟁하는 상황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도 통합을 해야 했다.

 

드디어1928년 5월 12일부터 길림성 화전현에서 정의부 외 18개 재만 단체 대표자 39명이 민족유일당 건설 회의를 개최했다. 단체본위 조직론자들은 기존 단체들이 연합하는 방식으로 민족유일당을 건설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개인본위 조직론자들은 각 단체를 그대로 인정하면 또다시 당파와 파벌이 난립할 것이므로 모든 단체를 해산하고 개인본위로 민족유일당을 조직하자는 주장이었다.

 

두 노선이 끝내 합의에 이르지 못하자 단체본위 조직론자들은 '전민족유일당협의회'를 결성하고 개인본위 조직론자들은 '전민족유일당촉성회'를 결성해 각각 통합에 나섰다.

 

협의회 측은 정의부.참의부.신민부 대표 3명씩 모여 1928년 9월 길림 신안둔에서 삼부통합회의를 개최했는데 이때도 역시 통합 방식에 이견이 있었다. 세력이 가장 컸던 정의부는 단체본위 통합론을 제기했다. 반면 참의부와 신민부는 "삼부 완전 해체"와 함께 "전만일반의 대당주비를 실행하자"고 주장해 기존의 모든 단체를 해산하고 새로운 민족유일당을 건설할 것을 주장했다.

 

그런데 참의부와 신민부는 이때 한교 배척 문제 해결책으로 "이주민의 귀회를 장려하고 특수한 자치권을 획득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중국에 입적해 중국법의 보호를 받으면서 자치권을 획득하자는 주장이었다. 이때도 각 세력은 합의에 이르지 못했는데, 여기에는 신민부의 경우 김좌진 등이 주도하는 군정파와 최호 등이 주도하는 민정파로 나뉘어 있었던 것처람 각 부의 내부 분열 문제도 한몫했다.

 

결국 1928년 12월 길림에서 신민부 군정부를 중심으로 참의부 주로파, 정의부 탈퇴파, 그리고 일부 사회주의자들이 모여 '혁신의회'를 조직했다. 혁신회의는 회장 김동삼, 중앙집행위원장 김원식, 군사위원장 황학수, 군사위원 지청천, 민정위원장 김승학 등을 선임하고 중앙집행위원회의 산하에 3개 분회를 설치했다. 제1분회는 참의부, 제2분회는 정의부, 제3분회는 신민부에 관련된 업무를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자 혁신의회에 가담하지 않은 정의부 주류파와 신민부 민정파, 참의부 비주류 계열 등은 1929년 3월 정의부 주재로 길림에서 통합회의를 열고 4월 1일 새로운 통합단체인 '국민부'를 결성했다. 이로써 민주는 '혁신회의'와 '국민부'라는 두 개의 통합 조직이 분기하게 되었다. 조선의 영향인지 민족의 습성인지도 몰라도 만주 독립운동은 생각과 사고가 다른 사람들 끼리 주도권과 패권을 두고 서로 다투면서 당파와 분열이 항상 결정적인 순간에 독립운동의 큰 장애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사실 이때는 독립운동 세력들이 노선이나 주도권을 가지고 다툴 때가 아니었다. 신민부 중앙집행위원장 김혁이 이미 체포된 상태에서 통합회의를 마치고 돌아오던 혁신회의 회장 김동삼도 하얼빈에서 체포되었고, 참의부 대표 김승학도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될 정도로 중국과 일본의 탄압이 극심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일제가 만주 전역을 무력으로 점령하는 1931년 9월 18일의 '만주사변'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희생에도 불구하고 독립을 향한 가시밭길의 끝은 멀고도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