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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006 : 일제강점기 51 (북만주의 통합 바람)

 

 

 

한국의 역사 1,006 : 일제강점기 51 (북만주의 통합 바람)

 

 

 

 

 

           

 

 

북만주의 통합 바람

 

'신민부, 장작림 잡으려 장개석과 손잡다'

 

 

신민부가 성립되면서 압록강 대안의' 참의부', 그 북쪽의 '정의부'와 북만주(동간도)를 관할하던 '신민부'의 삼부가 정립하는 삼부체제가 완성되었다. 삼부는 삼권분립의 정치체제와 독립군을 가지고 일제와 치열하게 투쟁했다. 삼부는 만주 한인들에게 사실상 정부와 같은 조직이었다.

 

봉오동.청산리에서 승첩 한 후 일본군의 토벌을 피해 러시아령으로 들어갔다가 자유시 참변을 격고 다시 북만주로 돌아온 독림군들은 전열을 재정비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뜻밖에도 대한독립군단 총재 서일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동아일보> 1921년 11월 15일자는 '배일의 거두 서일 피살설'이란 제목 아래 "군정서 군무총재 서일은...... 부하 삼사십 명을 거느리고 웅거하여 있다가 동원 8일 돌연히 마적과 충돌해 밀림지대에서 정렬하게 싸움을 하다가 마적의 탄환에 맞아 그만 사망하였다는 말이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아직은 믿지 못할 일"이라고 덧붙였다.

 

자세한 진상은 독립신문 대한제국 3년 1921년 12월 6일자가 말해준다. 이 날짜 독립신문은 '고 서일 선생을 조한' 이라는 애도문을 1면 머리기사로 실으면서 3면에 '독리군 총재 서일 씨 자장(자살)'이란 제목으로 자세한 내용을 보도했다.

 

서일은 1921년 9월 28일 대한독립단 소속의 무장 군사 12명을 대동하고 밀산현 홍개호 부근 한 촌가에 머물러 있던 중 붉은 못을 입은 마적 떼의 습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마을을 포위한 수백 명의 마적 떼가 주민을 학살하고 재물을 약탈하자 서일의 호위병력이 응전했는데 수적으로 열세여서 12명이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서일은 이에 책임을 통감하고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다.

 

서일은 1916년 자결한 대종교 제1세 교주 홍암 나철의 유서 중에서 "......날이 저물고 길이 궁한데 인간이 어디메오"라는구절은 읊조리면서 41세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서일의 죽음은 북만주 독립운동 세력에 큰 타격이었다. <신민단사>의 저자이기도 한 대종교 제2세 교주 김교헌이 1923년 11월 영안현의 대종교 총본사에서 병사한 이유 중에 하나가 서일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전해질 정도였다.

 

그러나 이런 시련 속에서도 북만주의 혈성단, 북로군정서, 의군부, 광복단, 대진단 등의 독립운동 세력들은 통합운동을 전개해 1922년 8월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했다. 남만주에서 대한통의부가 결성된 것과 같은 해 같은 달이었다.

 

대한독립군단은 두만강을 자주 넘나들었던 역전의 용사들이자 봉오동.청산리 승첩의 주역들이었다. 대한독립군단은 러시아령에서 자유시 참변을 겪었기 때문에 북만주로 파고들던 사회주의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그래서 러시아가 1920년 3월 하얼빈에 동지철도 부속지 공산당 사무국을 설치하고 사회주의 전파에 나서자 목릉현 소추풍 일대에서 소비에트 반대 활동을 전개하고, 1924년에는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적화방지단'까지 만들어 대립하기도 했다.

 

남만주의 참의부와 정의부가 잇따라 결성되자 북만주에서도 단체 통합의 바람이 불어서 1925년 1월 목릉현에서 '부여족통일회의'를 개최하고 '군정부 설치'에 합의했다. 이에 따라 3월 10일 영안현에서 '신민부'가 만들어진다. 신민부는 김혁.조성환이 이끄는 '대한독립군정서'와 감좌진.남성극 등이 이끄는 '대한독립군단'의 두 군사 세력이 주축이 되고 중동선 교육회장 윤우현 등 민선대표들과 국내 10개 단체 대표들이 참가했다.

 

신민부는 "아(我)들은 민족의 요구에 응하고 이래 단체의 의사에 기하여 각 단체의 명의를 취소하고 일치된 정신하에 신민부의 조직이 성립된 것을 자에 선포한다"라고 시작해 "래하라 단결, 기하라 분투"로 끝나는 선포문을 발표했다.

 

신민부도 행정부인 중앙집행위원회와 의회인 참의원, 사법부인 검사원을 두어 삼권분립 체제를 갖추었다. 중앙집행위원장은 대종교 계통의 김혁이었고, 민사부 위원장 최호, 군사부 위원장 김좌진, 외교부 위원장 조성환, 교육부 위원장 허빈이었다. 참의원 의장은 의병장 출신의 이범윤이었는데, 이미 만 62세의 노령이었다. 검사원 원장에는 대종교 계통의 현천묵이 선임되어 대체로 대종교 우위의 인선이 관철되었다.

 

신민부도 재만 한인들의 생활 향상과 군사력 증강,교육 사업에 중점을 두었다. 신민부는 결의안에서 "군사는 의무제를 실시할 것. 둔전제 혹은 기타 방법에 의해 군사 교육을 실시할 것. 사관학교를 설치하여 간부를 양성할 것. 군사 서적을 편찬할 것" 등을 규정했다. 신민부는 목릉현 소추풍에 '성동사관학교'를 열고 모두 500여 명의 장교를 양성했는데, 교장 김혁, 부교장 김좌진, 교관은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오상세.백종렬 등이었다.

 

신민부는 '군구제'와 '둔전제'를 실시해 전시가 도래하면 금방 대규모 병력으로 전환할 수 있게 했다. 군구제는 신민부 관할 내의 만 17세 이상 40세 미만 장정들의 군적을 작성해서 독립군의 기본 대오를 편성한 것이었다. 사관학교 출신의 장교가 지휘하면 금방 정규군으로 바뀔 수 있게 했다. 둔전제는 일종의 '병농일치제'였다. 신민부는 결의문에서 "소학교 졸업연한은 6년, 중학교 졸업연한은 4개년으로 함. 단 100호 이상의 마을에는 1개소의 소학교를 설치하고 필요에 따라 기관에서 중학교 또는 사범학교를 설치함. 교육을 통일시키기 위해 교과서를 편한함......"이라고 규정했다.

 

신민부는 주하.목릉.밀산.요하.돈화 등 15개 지역에 50개 이상의 학교를 건설햇는데, 이때 신민부에서 파견되어 안도현에서 교사 생활을 했던 이강훈은 <민족해방운동과 나>에서 "나는 아침 조회 때마다 마을 옆으로 흐르는 송화강 상류 언덕 위에 학생들을 집결시켜놓고 마주 보이는 백두산 영봉을 바라보면서 애국가를 제창하게 하고 일과를 시작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일제의 사주를 받은 만주 군벌당국이 신민부 탄압에 나섰다. 그럼에도 신민부의 독립군은 중국군과는 정면 충돌하기 어려웠다. 중국군 중에는 1920년대 초 보병단장 맹부덕이 일본군의 토벌계획을 사전에 알려주면서 대피하도록 한 것처럼 독립군에 우호적인 인물로 있었다.

 

만주군벌 장작림이 조선총독부와 맺은 '미쓰야협약'에 따라 독립운동가를 조선총복부에 넘겨준 이후 환경은 극도로 열악해졌다. 장작림 군벌 경찰은 1925년 10웡 영고탐에서 회의 중이던 신민부 별동대를 급습해 박순보.신갑수 등 8명을 연행했다. 이듬해 4월 6명은 석방되었지만 위 두 사람은 그사이 옥사할 정도로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목숨을 잃었다. 1928년 1월 중앙집행위원장 김혁을 체포해 조선총독부에 남겨주기도 했다.

 

그 전에 신민부는 장작림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중국국민당의 장개석 정부와 연합전선을 결성하려 했다. 최형우의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에 따르면 신민부는 중국국민당 만주공작 책임자 공패성과 연결해 만주 군벌 타도가 목적인 국민당 북벌정책에 협력하기로 했다. 기본 계획은 중국국민당과 손을 잡고 신민부 군부를 중국 중앙군 제8로군으로 개편해 장작림 정권을 무너뜨리는 '동북혁명군'으로 활동하는 것이었다. 국민당에서 무기와 자금 400만 원을 제공하면 중앙군 제8군으로 명칭을 바꾼 신민부가 목단강과 하얼빈을 점령하고 봉천으로 진군해 장작림 정권을 타도한다는 계획이었다.

 

애국동지원호회에서 편찬한 <한국독립운동사>는 1927년 2월 중국 구국군 제13군 사령관 양수일이 김좌진을 백두산 산록의 군구 사령부로 초청해 한.중연합부대 결성에 대해서 논의했으며, 그해 8월에도 왕청현 석두하자에서 한.중연합회의가 열렸다고 전한다. 국민당 측에서 만주공작 책임자 공패성, 기병 3,000명과 보병 2만 명을 지닌 악유준, 비슷한 규모의 군사력을 지닌 사가헌이 참석하고 신민부에서는 김좌진 외 2명이 참석해서 신민부를 중앙군 제8로군으로 바꾸고 장작림 정권을 타도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전 이러한 기밀을 탐지한 장작림이 공패성.사가헌.악유준 등을 체포하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갔다고 전한다.

 

한.중연합부대가 계획대로 결성되었다면 독립운동사 자체가 달라졌을 가능성이 크다. 1925년 5월 15일자 <시대일보>는 김좌진이 1925년 3월 신민부 특공대원 강모 등에게 권총과 폭탄을 주어 사이토 총독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전하고, 혜림의 친일 단체인 조선인민회 회장 배두산을 처단하는 등 신민부는 다양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북만의 15~16개 현, 40~50만 명의 한인사회를 관장했던 신민부는 이후 '민정파'와 '군정파'로 갈라지는 분열을 겪으면서 '삼부통합운동'에 참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