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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강남의 초겨울 3 : 서정과 순수사랑의 진수, '실걸이꽃'

 

 

강남의 초겨울 3 : 서정과 순수사랑의 진수, '실걸이꽃'

 

  

                                                                                 눈 내리는 새벽 내방역 근방

 

 

날씨가 영하로 곤두박질 치고 새벽 눈발이 내리는 바람에 지난 수요일 새벽에는 자전거를 타지 못햇다. 이제 본격적인 겨울 날씨가 기승을 부릴 모양이다. 지방에는 계속 눈이 내리고 지난 금요일 서울은 영하 7.7도까지 떨어졌다. 새벽에 자전거를 타면 체감 온도를 3~4도 정도 더 낮기에 그날도 자전거는 타지 않았다. 모처럼 잠자리에서 늦잠을 푹 잤다. 토요일 새벽 3시경 일어나 현관을 나가보니 눈이 내렸다. 현관 앞과 골목길의 눈을 쓸고 염하캄슘을 뿌리고 오늘도 자전거는 타기를 포기하고 블로그를 열었다.

 

지난 주는 새벽길을 나서면 밤새 가로수 낙엽들이 반 강제로 강풍에 떨어져 어지럽게 길바닥 위에 흩어져 있었다. 새벽 청소부 아저씨들이 분주하게 쓸지만 얼어붙은 전단지처럼 낙엽도 잘 쓸리지 않는다. 청소차량이 분주하게 쓰레기를 수거하고 있고 음식물 쓰레기 수거 차량은 종량제 봉투로 개선했지만 여전히 차량이 지나면 냄새가 지독하다. 청소차 입구 주위는 언제 청소했는지는 몰라도 새까만 떼가 주룩주룩 붙어 있다. 차량을 운행하는 사람이나 청소 회사, 그리고 구청 담당 공무원은 아침 청소를 직접 따라 다녀 보았는지 청소차의 이런 상태에 대해서 관심도 없는 듯하다.

 

쓰레기 종량제 봉투를 사용하지만 아무 봉투에 음식물 쓰레기를 담아 몰래 버리는 아래층 할머니가 원망스럽다. 청소부는 귀신같이 밖에다 남겨 놓고 나머지만 수거해 간다. 또 피자, 통닭을 먹고 먹다 남은 음식을 그대로 버리면 골목 고양이들의 한밤중 잔치를 벌인다. 쓰레기를 잘 담거나 묶어서 버리지 않고 함부로 버리는 것은 물론 일반 쓰레기 봉투에 음식물을 섞어 버리는 바람에 골목 고양이들이 봉투를 물어뜯어 쓰레기가 골목 사방에 흩어져 있다. 또 비가 내려 종이박스가 찢어지는 바람에 가득 들어 있던 각종 재활용 쓰레기가 골목길에 사방에 흩어져 널부러져 있는데 밤새 바람이 불어 낙엽까지 흩날려 쓰레기와 뒤섞여 골목길이 지저분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누구 하나 쓰레기를 버리면서 정리하거나 청소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같이 더불어 공동생활을 하면서 살아가기에는 아직 우리는 멀었다.

 

이제 눈이 내리면 빌라 현관 앞은 물론 골목길에 쌓인 눈을 치우는 사람도 극히 드물다. 결국은 자신의 가족들이 얼어붙은 눈길에 넘어져 골절이 되면 재수가 없다고 할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이득을 위하고 편암함을 위해 남을 배려하지 못하는 나쁜 습성이 몸에 베인 듯하다. 그것을 바로 졸부 근성이라고 말한다. 특히 서울이라는 대도시 삶의 환경이 앞집에 누가 사는지 모르고 사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층간 소음 공해도, 복도나 골목길 청소도, 남을 배려 할 줄 모르고 나만 즐기면 된다는 식의 졸부같은 근성이 우리들의 본연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래서 진정한 선진국이 되기에는 아직 아득해 보인다.

 

 

 

 

 

요즘 블로그에 갑자기 방문자도 늘고 이웃 신청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래서 방문자들의 블로그를 방문해 보면 대부분 부동산 중계업, 원룸, 명품 모자/가방/옷, 각종 컨설팅, 기능성 상품 판매, 성형/피부 관련 개인병원, 건강식품 등 홍보를 위한 블로그가 대부분이고 순수하게 역사나 일상에 대해서 글을 올린 블로그는 드물다. 역사에 대한 인식도 없고 일주일에 한 번씩 올리는 시대 현상에 대한 글을 보고 재미를 느끼고 그냥 내 글에 공감하는 정도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올리는 글이지만 나에게는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일주일이 그렇게 빨리 돌아오는지 주제를 선정하기도 그렇고 공감을 느낄 글을 쓴다는 게 여간 힘든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책이나 신문에 글을 올리는 지식인, 작가들의 심정을 알 것 같다. 겨우 일요일 날 글을 올리고 나면 당장 다음 주 올릴 글이 걱정이다. 내 블로그를 찿아주는 사람의 태반이 역사보다 일주일에 한 번씩 올리는 글에 관심을 갖는 것 같다. 너무 많은 것을 내가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래도 그런 글을 보고 싶어 찿아주시는 분들을 위해서라고 열심히 올릴 예정이다. 그리고 역사에도 관심을 갖고 읽어주셨으면 한다. 역사를 알아야 우리들의 현실과 미래에 대한 답을 찿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냥 세월의 흐름에 인생을 맡기거나, 역사의 수레바퀴에 묻어 지나가는 흙먼지에 불과한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망년회가 우리들에게 주는 의미

 

이제 년말이 다가온다. 수많은 사람들이 송년회와 망년회로 인해 술에 쩔어 이 달을 보낼 것이다. 열심히 사회 활동을 하는 사람은 지금쯤 달력에 빼곡히 약속이 잡혀 있을 것이고 어떤 날은 몇 개가 중첩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열심히 살아도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고 재력과 권세를 뽐내는 장소일뿐 정작 보람과 감동을 주는 모임이 별로라 남는 것은 없다. 대부분 향우회, 동창회를 비롯하여 친지.가족모임, 등산모임, 직장모임, 고향모임, 친구모임, 각종 동우회 모임, 군대모임, 각종 사회/정치 단체모임 등에서 이름 있는 호텔, 회관, 식당마다 예약을 하느라 북새통일 것이다. 지금쯤은 교통이 편리한 사당, 교대, 강남, 잠실, 왕십리, 충무로, 동대문, 시청, 공덕, 신촌, 홍대입구, 신도림, 영등포 등 지하철 교차역 근방에는 장소도 거의 예약이 차 장소를 구하기도 힘들 것이다.

 

넉넉하지 못한 경제력에 스트레스를 받고 삶에 찌들다 보면 술로 스트레스를 풀고 싶고 다른 사람이 부러워지고 옛날이 그리워 지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모임에서 더 마시게 된다. 잘 된 놈을 보면 울화통이 치밀고 모임 장소에서 큰 소리치는 놈은 대부분 재력이나 권력이 있는 소위 잘나가는 놈이다. 별 몰 일 없는 서민은 그냥 가서 회비만 내고 눈도장 찍고 밥 먹고 술 한 잔하고 오는 것이 유일하다. 별 볼일 없는 놈을 반겨주는 놈도 없고 잘나가는 저들끼리 속닥인다. 그리고 2,3차도 그들끼리 은밀한 곳으로 간다. 능력 없고 끗발없는 나에게 반갑게 악수는 하지만 별로 반겨주지도 않고 대화도 걸지 않는다. 정치적인 목적의 모임도 많고 회장, 부회장, 총무 등 회의를 진행하는 것이 형식적이고 결산보고도 하지만 어떻게 사용했는지 다른 곳에 유용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도 없다. 그러나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찬조금을 누가 많이 내었느냐를 두고 총무는 광고하기에 바쁘다. 대부분의 모임에는 혈연.지연.학연을 핑계삼아 항상 청와대, 고위직 공무원, 지자체장, 해당 지역 국회의원이나 장.차관, 대학교수, 스포츠인, 기업인, 재력가, 권력기관 등 소위 성공자를 포함하여 졸부 등 끗발 있고 잘 나가는 놈이 나타나 축사를 하고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회원들에게 술을 권하거나 악수를 하며 명함을 주면서 자신의 권세와 얼굴을 자랑하다가 시간이 좀 지나면 바쁘다며 소리없이 사라진다. 하루 저녁에도 여러 곳을 다니며 얼굴 팔기에 바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정치인은 입으로 말만 하다가 사라지고 재력있는 기업인은 기부금을 좀 내고 간다. 그러면 회장 이하 간부진들이 출구까지는 나가서 그들이 떠날 때 줄줄이 배웅하고 온다.  

 

또 모임에 동성끼리만 만나는 모임보다 남녀가 같이 모이는 모임이 재미있다. 이런 자리는 나이를 불문하고 남자나 여자들이 본심을 감추고 이성에게 잘 보이기 위해 좀 튀는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삶에 시달리고 가정에 시달리고 남편과 처자식에 시달리다가 모처럼 이런 반가운 동창모임에 나오면 옛날 첯사랑이 보고 싶고 만나고 싶은 것이 사람이다. 다른 모임 등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런 모임에는 분위기가 업되어 목소리가 크지고 웃음소리도 커진다. 재력잇는 친구가 주도하여 식사비도 내고 2차도 끌고 가기도 한다. 또 누구에게나 닥칠 가정의 길흉사를 앞두고 모임 주소록도 확보하고 알고 싶은 사람 소식도 듣게 된다. 이런 동창 모임에 갔다오면 통상 밤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 것인바, 이런 옛 친구들을 만나거나 소식을 듣게 되면 가슴이 쓸레기도 하고 더욱 궁금하기도 하고 그립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년말 모임에서 일탈이 벌어지기 쉽다. 통상 식사를 하고 나면 술이 거나하게 돌고 분위기가 상승된다. 다음 2차로  중.장년층들이 갈 곳은 대부분 노래방이다. 노래방에 가면 또 사람이 달라진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어둠컴컴한 조명아래 음악이 신나게 흘러나오고 분위기가 상승되면 개인적인 숨겨진 끼가 나타나고 맘에 드는 이성에게 다가가 추파를 던지거나 춤을 추자면서 추근거린다. 그러다가 조금이라도 틈이 보이면 지속적으로 공략하고 차갑게 팅기면 일단 물러난다. 노래방이 끝나게 되면 일부는 도망가고 미련이 있거나 용기있는 사람만 남게 된다.

 

다음 3차, 생맥주집. 거나하게 생맥주나 소주 또는 폭탄주가 돌고 목소리들이 커지고 웃음 소리도 옥타브가 높아지고 슬슬 몸을 가누지 못하게 된다. 통상 헛소리와 저질 음담패설이 난무하고 정치를 욕하고 주변에서 잘 된놈이나 평소 감정이 있던 놈에게 시비를 걸거나 욕을 하면서 말싸움이 벌어진다. "저놈이 내보다 더 잘난 게 무언냐고...... 학교 다닐 때 공부도 못했고 말썽만 피우던 놈이 아닌가? 그런 병신처럼 놀던 놈이 말이다."라면서 자신의 현실을 비교할 때 상대적 박탈감에 이 세상이 더럽고 뭉개고 싶을 것이다. 이렇게 과거 학창시절 이야기를 들추면서 서로 비난하기도 하고 지난날을 되씹는 재미가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른다. 그러다가 서로 말싸움이 벌어지고 폭력이 난무하다 보면 나중에는 파출소에 끌려가는 취객도 많다. 통상 이런 자리는 밤이 깊어지면 능력 있는 졸부가 자기가 내겠다고 하면서 자리를 파하고 일어서게 된다. 

 

술취한 일부는 택시를 태워보내고 일부는 슬슬 뒤로 빠져 소리없이 사라진다. 일부는 술에 취해 선배나 연장자에게 대드는 등 추태를 부리는 경우도 많고 음주운전으로 패가망신하는 경우도 많다.  점찍은 이성에게 추파를 보내고 은근히 친절도 배푼 결과 4차를 가게 되면 이제부터는 사단이 벌어지기 쉽다. 그 이상은 나도 모르겠다. 아마 환락의 밤이 지나고 나면 후회가 몰려오고 심하면 가정이 파탄나고 무너지는 등 엄청난 불행을 초래하는 눈물의 씨앗이 되기도 할 것이다. 삶의 스트레스를 술로 풀고 술에 찌들어 망가지는 인생을 되돌아보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 우리 사회의 망년회, 송년회 풍경이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의 이번 년말 송년회는 어떻게 보낼 것인지 곰곰히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시사에 대한 지식인들의 글을 요약한다.

 

 

권력은 누구와도 나눌 수 없어

 

북한의 젊은 수령 김정은이 북한 정권의 2인자이며 자신의 고모부인 장성택을 제거하는 모습을 화면으로 보았다. 권력은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것, 확대회의 후 장성택을 여러 사람이 나와서 비난하고 난 뒤 그 자리에서 보위부 군인에 의해 두 팔이 잡혀 끌려 나가는 2인자 장성택. 어제는 약식 군사재판 모습과 재판 후 바로 처형되었다는 뉴스가 나왔다.

 

권력 앞엔 부모도, 자식도, 아내도, 남편도, 친구도 소용없다. 조선 시대 왕 27명 중 적장자로서 왕위에 오른 사람은 8명뿐이라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 준다.

태조 이성계는 5남 방원이 권력욕을 보이자 방원의 배다른 동생 방석을 세자로 책봉해 버리지만 역공에 나선 방원에게 정도전을 비롯한 신권파, 그리고 방석, 방번도 죽여 버렸다. 이렇게 권력을 잡아 태종이 된 방원은 적장자 양녕이 ‘코드’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내치고 세자에서 폐위시켜 버린다. 기생들과 놀아나고, 형 정종의 애첩과 사통을 벌였다는 이유를 댔다. 14년간 세자 수업을 시켜 놓고도 자식의 ‘호방함’이 눈에 거슬렸던 것이다.

인조는 청에 침략당해 ‘삼전도의 수모’로 예를 갖춰 간신히 왕권을 유지했다. 그런데 병자호란 때 청의 심양에 볼모로 잡혀갔던 2인자 소현세자가 9년 만에 귀국했다. 인조도, 조정 대신 누구도 청을 등에 업고 돌아온 소현세자가 반갑지 않았다. 얼마 후 소현세자는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어찌 됐든, 그렇더라도 왕권은 세손에게 넘어가야 했다. 하지만 인조는 소현의 동생(훗날 효종)에게 왕권을 넘기려 했고 아들 셋을 둔 소현세자빈 강씨가 저항했다. 결국 인조의 분노를 싼 강씨는 사약을 받고 손자 셋은 제주도로 유배돼 요절, 풍토병 등 이런저런 이유로 죽는다. 인조는 며느리를 포함, 2인자 싹을 아예 제거해 버린 것이다.

숙종비 숙빈최씨의 아들 영조는 원래 왕위에 오를 수 없없다. 장희빈의 아들 경종이 왕위에 오르자 위기가 닥친다. 그러나 슬기롭게 잘 묘면하면서 경종이 후사없이 일찍 요절하는 바람에 왕위를 운좋게 계승했다. 물론 여기에는 숙빈 최씨를 포함한 주변 노론 세력들의 은밀한 공작이 전개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영조는 성공한 2인자에 속한다. 그러나 영조는 42세라는 늦은 나이에 사도세자를 얻었다. 그리고 15세 되던 해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켰고 당연히 세자에게 세가 형성됐다. 그러자 노론의 공작에 영조는 국정운영의 미숙 등을 들어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고 자물쇠를 잠가 버린다. 2인자가 그렇게 8일 만에 죽는다. 그후 영조는 14년을 더 왕노릇한다.

이승만 대통령도 2인자를 무자비하게 제거했다. 권력에 걸림돌이 되었던 김구를 포함한 정치인들이 요절했거나 암살된 사람들 대부분이 정적으로 제거됐다. 초대 대통령이 된 그는 농지개혁 문제와 친일 지주 소유 땅 문제 등 그야말로 정권의 운명을 가르는 과제를 해결해야 했는데 그 적임자로 조봉암을 농림부장관으로 앉혀 해결해 나갔다. 헌데 조봉암이 농지개혁과 친일청산으로 인기가 높아지자 위협을 느꼈고 이에 간첩 혐의를 씌워 사형에 처해 버린다. 위협적 권력 2인자는 그렇게 사라졌다. 조봉암에 이어 2인자가 된 이기붕은 ‘모범적 2인자’로 권력 문고리에 절대 손대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정희 시대는 김형욱, 김종필, 차지철, 이후락 등이 2인자로 올라섰지만 김형욱은 해외로 망명하여 반한활동을 펼치다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여 불귀의 객이 되었고, 이후락은 권력싸움에서 몰락했으며 차지철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다가 박대통령과 운명을 같이 했다. 김종필은 끝까지 권력의 문고리에 손을 놓았고 그래서 목숨을 부지했다. 그래서 모범적 2인자는 김종필인 듯하다. 전두환 시대 ‘성공한 2인자’는 동기생이지만 읍소를 열심히 잘 한 덕분에 다음 바톤을 이어받은 노태우 전 대통령이다. 그래서 물태우라고 하지 않는가?

성서에도 2인자 제거가 나타난다. 이스라엘 최초의 왕 사울은 친아들 요나단을 의심하여 죽이려 했고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 2인자 다윗을 시기했고 죽이려고 군사까지 동원했다. 사울은 하나님께 선택되어 왕위에 오른 인물이었으나, 권력이 뭔지 그렇게 변한 것이다. 그렇게 당한 다윗도 왕권을 넘본 아들 압살롬을 무자비하게 응징했다. 하느님이 선택한 사람이라고 별다른 게 아니다는 것은 결국 하느님이 선택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북한 김정은 정권의 2인자 장성택이 한 방에 갔다. 권력자의 고모부인데도 가차 없다. 공포정치의 전형이다. 이런 ‘반공 교육’이 없다. 그렇다면 세조에게 단종은 당하였지만 김종서가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을 옹립하여 무자비한 폭정을 펼쳤다면, 단종 같이 어린 김정은을 광포한 독재자로 만들어가는 세력이 누구인지를 빨리 알아내야 한다. 김종서 황보인 등의 대신을 때려죽인, 즉 세조의 책사 한명회와 같은 ‘매트릭스(모체)’가 있다는 얘기다. 그 세력을 밝히고 대응하는 것 등이 국가정보원의 존재 이유다.

 

북한 정권을 옹호하고 편드는 남한의 종북, 친북 세력들이 장성택의 종말을 바라보는 심정은 어떨까? 절대 독재권력자는 재판도 없고 변호도 없이 한순간에 권력의 핵심자가 제거되는 모습을 보면서 토사구팽 당하던 남로당 박헌영과 중국 한고조 유방의 오른팔 한신을 생각하게 만든다. 결국 친북.종북 세력도 남로당 박헌영처럼 김정은이 목적을 달성하고 난 뒤에는 반드시 장성택처럼 제거되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나 있을까?   

 

 

 

 

 

 

중국인들이 보는 북한과 김정은

 

아래는 최근 주중 대사관이 중국 사람들에 대한 설문조사 내용과 중국인들의 북한 김정은에 대한 비판이다.  

 

주중 한국대사관이 최근 중국 인터넷 포털사이트 왕이(網易)를 통해 실시한 “당신의 눈에 비친 한국은?”이라는 설문조사에서 나온 반응이다. “한반도 통일은 중국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응답 네티즌 8530명 가운데 절반(50.1%)이 '한반도 통일이 중국에 도움이 된다'고 밝혔다. '한반도 통일이 중국에 도움이 안 된다'고 말한 응답자는 17.4%에 불과했다.

한·중 관계의 미래에 대해서는 61.3%가 “지금보다 나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나빠질 것이라고 답한 사람은 5.6%에 그쳤다. 한국에 대한 전반적인 인상도 ‘좋다’가 과반수(55.6%)를 차지해 ‘보통’(24.4%)이나 ‘좀 싫어한다’(10.4%)를 훨씬 능가했다.

근년 들어 중국 내 학계 일부에서도 한반도 통일이 중국에 이롭다는 시각이 대두되고 있는 상황에서 네티즌들이 이러한 생각을 드러낸 것은 눈길을 끈다. “진싼팡이 1000년 전 봉건왕조 당나라 때나 볼 수 있었던 일을 저지르고 있군.”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을 숙청한 사실이 공식 확인된 뒤인 9일부터 신랑(新浪) 텅쉰(騰訊) 등 중국 웨이보(微搏)에는 이러한 글들이 올라오고 있다. 진싼팡은 ‘김씨 집안 셋째 뚱뚱이’라는 뜻으로 김정은을 가리킨다. “진싼팡은 ‘진다팡’이나 ‘진얼팡’보다 훨씬 잔인하고 나쁜 인물”이라고 지적한 네티즌도 있다. 김정은을 서유기에 나오는 ‘저팔계’로 묘사한 그림을 웨이보에 띄우기도 했다. 진다팡은 김일성 주석, 진얼팡은 ‘두 번째 뚱뚱이’ 김정일 국방위 위원장에게 각각 붙여진 별명이다.

중국 네티즌들이 한국에는 우호적이지만 북한에 대해서는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예다. 이러한 분위기는 김정일 위원장이 2011년 5월 중국을 방문했을 때 가시화되더니 지난 2월 북한 핵 실험 뒤에는 더욱 뚜렷해졌다. 북한 정권이 주민들을 제대로 먹여 살리지도 못하면서 중국에 골칫거리만 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북한에 변고라도 생겨 동북 접경지역에 혼란이 빚어지면 결국 중국 부담이라는 인식이 깔려있다.

중국 외교부 훙레이(洪磊) 대변인이 9일 정례 브리핑에서 장성택 실각을 놓고 “중국은 전통적인 중조(中朝·북중) 우호관계를 발전시켜나갈 것”이라고 밝힌 것도 중국으로선 북한의 안정이 최우선적인 과제이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안정적 관리’는 중국의 현 5세대 지도부가 “전면적인 개혁 심화를 통해 2020년까지 샤오캉(小康·의식주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 사회를 완성한다”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도 필수 요건이다.

조 바이든 미국 부통령이 지난주 서울에서 ‘베팅’ 발언을 한 뒤 그 진의가 뭐였건 한국이 처한 상황이 더욱 부각됐다. 미·중 사이에서 베팅을 고민해야 하는 나라로. 하지만 상황을 뒤집어 보자. 미국은 한국이 미국과 일본 쪽에 확실하게 줄을 서서 한·미·일 3각 동맹이 강화되기를 바라고 있다. 중국은 중국대로 한국을 우호적인 세력으로 잡아두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양쪽 모두 한국을 소홀히 할 수 없는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할까. 이 대목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 남북한 간 긴장이 완화될수록 미·중·일과의 관계에 있어서 한국의 발언권이 훨씬 커진다는 사실이다. 특히 중국에 대해서는 통일된 한반도가 중국에 어떻게 도움이 될지 구체적인 확신을 심어줘야 한다.

 

 

 

1인 가구 시대 도래에서 미래는 인조인간, 로봇인간 시대로

 

며칠 전 안전행정부의 주민등록 통계에 따르면 전국 읍·면·동 중에서 1인 가구가 가장 많은 곳은 서울 강남구 역삼1동인 것으로 집계됐다. 그곳의 1인 가구 수가 전체의 64%를 차지했다고 한다. 2013년 현재 전국에서 약 25%가 1인 가구인 것을 보면 꽤 높다. 네 가구당 한 가구가 혼자 사는 가구인 시대라고 한다.

왜 혼자 사냐고 물으면 사람 수만큼 다양한 이유가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혼자 살기를 개인화된 삶을 즐기는 것으로만 또는 고독사의 위험군으로만 묘사하든지 아니면 혼자 사는 사람들에 대해 뭔가 성격적인 문제가 있거나 사회에 긍정적 기여를 하지 못하는 사람 취급을 하면서 양분된 평가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취업도 결혼도 어렵고 평생직장은 사라졌다. 비정규직에 언제 직장에서 쫓겨날지도 모르는 삶을 살고 있다. 결혼해도 자녀 양육에 너무 큰 부담이 있고 내집 마련도 거의 불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또 결혼을 해도 이혼율의 증가로 독신가구가 늘어나는 추세다. 부모가 자녀와 분리되어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부부가 잠정 이혼하여 분리되어 사는 가정도 많다. 능력있는 젊은이가 가정이라는 족쇄에 억메여 평생을 고생하면서 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래는 저출산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좁은 국토에 인구가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것도 문제다. 앞으로는 정자.난자은행이 생기고 필요한 만큼 인구를 인공수정하여 출산시킬 것이다. 국가에서 양육을 책임지고 키울 것이며 부모의 권리는 사라진다. 그래서 가정이 사라지고 개인이 단독으로 살아가는 것이 보편적인 사회로 변화될 것이다. 그래서 독신자를 위한 각종 집, 가구, 음식 등 모든 것이 1인 생활사회로 변화할 전망이다.

 

자본민주주의가 유명무실해지고  무능하고 부패한 정권이 사라지고 국경이 허물어지고 민족의 개념이 사라지며 시민단체와 NGO 단체가 지구상에서 대부분의 권력을 글로벌화하고 서로 연대해서 주도해 나갈 것이다. 감언이설에 현혹되기 쉬운 인간이 아닌 기계같은 사고로 만들어진 로봇이 등장하면 종교는 부도덕성과 허언, 탐욕으로 지구상에서 점차 사라질 것이며 일부는 광신도 집단으로 변질되어 지구적 분란과 사회적 혼란을 야기할 것이다.

 

고령화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인체의 대부분의 장기가 인공장기로 대체되어 나이를 셀 수 없을 정도로 장수할 수 있다. 그래서 로봇과 인간이 공존하는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그래서 600만불의 사나이가 나타나고 노인이 아니라 반은 인간인 젊은 로봇인간이 될 것이다. 그래서 미래에는 병원이 인공장기 대체기술, 인조로봇 생산 공장으로 변할 것이다.

 

식량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고농축의 각종 음식물이 생산되어 공급될 것이며 음식문화도 변하고 농촌과 식량산업이 몰락하고 그리고 식당문화도 변할 것이다.

 

성적인 욕구해결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방문, 원정매춘이 늘어나고 혼자 즐기는 성기구가 늘어날 것이며 집단혼음, 스와핑 등 프리섹스 시대가 도래하고 나중에는 사람과 거의 유사한 감정과 신경, 체온, 대화를 할 수 있는 정교한 인공로봇인 남자와 여자가 생산되어 시판될 것이다. 

 

이런 건조하고 무섭고 비참한 시대가 도래하기 전에 먼저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어 다행이다고 생각된다.

 

 

 

 

 

한민족 드라마 제4막

 

역사의 신(神)은 필경 드라마를 좋아하는 것 같다. 20세기 이래 신은 세 민족을 주연으로 발탁했다. 유대인, 독일인 그리고 한민족이다. 이들을 통해 인류는 비극과 희극의 놀라운 조합을 보고 있다.

유대인은 다른 민족에게 고향을 빼앗기고 2500여 년 동안 세계에 흩어졌다. 디아스포라(Diaspora)로 불리는 ‘분산(分散)’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나치에 600만 명이 학살당하기도 했다. 그랬던 민족이 1949년 국가를 세우자 완전히 달라졌다. 안보를 위해선 가장 용맹스러운 나라가 된 것이다.

이스라엘은 자신보다 수십 배 덩치가 큰 아랍을 상대로 네 차례나 전쟁에서 이겼다. 전쟁만이 아니다. 이스라엘 전투기들은 81년 이라크, 2007년엔 시리아 원자로를 부쉈다. 그들은 멀리서 미사일을 쏘는 식으로 하지 않았다. 무거운 폭탄을 싣고 1000여㎞를 날아가 눈으로 보고 때렸다. 조종사들은 기꺼이 목숨을 걸었다. 최근 이란은 핵개발을 포기했다. 그들은 이스라엘 공군이 한없이 두려웠을 것이다.

2010년 11월 연평도 민간인 마을이 불바다가 됐다. 그런데도 한국 공군은 기관총 한 발 쏘지 못했다. 공군은 1000억원짜리 전투기를 40여 대나 가지고 있었다. 100여㎞ 밖에서 창문을 맞힐 수 있는 미사일이 있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그런 공군이 정작 애꿎은 국민이 죽어나가는데도 ‘유람(遊覽) 비행’이나 했다. 지금 한국군은 이스라엘 스파이크 미사일을 사는 데는 열심이다.

독일은 통합의 드라마를 보여주었다. 두 차례 세계대전에서 패해 독일은 잿더미가 됐다. 나라는 둘로 쪼개졌다. 독일인은 그러나 통일을 잊지 않았다. 처음부터 헌법으로 흡수 통일을 정해놓았다.

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서독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통일에는 채 1년도 걸리지 않았다. 통일 독일은 라인강의 기적을 재현하고 있다. 유로존(17개국)은 올해 마이너스 성장이지만 독일은 플러스다. 독일은 흔들리는 유럽의 버팀목이 되고 있다. 경제뿐만이 아니다. 독일은 유대인 학살을 철저히 반성하고 책임지면서 도덕적으로도 감동적인 드라마를 보여주었다.

인류는 지금 또 다른 드라마를 고대하고 있다. 무대는 한반도요 배우는 한민족이다. 4막 중에서 이미 3막은 남한에서 공연됐다. 1막은 건국과 호국, 2막은 경제 개발, 3막은 민주화다. 많은 나라가 못한 걸 남한은 40년 만에 다 해냈다. 1948년 건국부터 88 서울올림픽까지 꼭 40년이다.

남한의 1, 2, 3막은 한국문명(the Korean Civilization)이라 부를 만하다. 문명은 건설이라고들 한다. 이집트는 사막에 피라미드를 세웠고 중국은 거대한 만리장성과 자금성을 지었다. 한국인도 세웠다. 땀과 눈물로 제철소를 짓고 고속도로를 닦았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 가장 큰 유람선, 가장 빠른 스마트폰, 가장 선명한 TV를 한국인이 만들었다.

문명은 색채라고도 한다. 고대 중국과 인도는 붉은색과 황금색으로 문명을 칠했다. 한국은 녹색으로 채색했다. 벌거숭이 산에 나무를 심은 것이다. 문명은 소리일 것이다. 유럽은 아름답고 웅장한 교향곡을 남겼다. 한국에는 여공의 재봉틀 소리와 농부의 새마을 노래가 있다. 그 소리가 5000년 가난에서 수천만 인구를 구했다. 그 노래를 들으러 지금 아프리카 사람들이 한국에 온다.

한반도 드라마는 그러나 미완성이다. 마지막 4막이 남아 있다. 4막은 남한이 북한을 평화적으로 흡수 통일하는 것이다. 그래서 활기차고 왕성한 7500만 자유민주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4막은 머나먼 일로 여겨졌다. 그러나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3대 세습 68년 만에 북한에선 공산 독재 말기적 증상이 이어지고 있다. 새 정권은 1년에 40여 명을 운동장에서 총살해버렸다. 힘없는 주민만이 아니다. 2인자급이던 실세를 하루아침에 숙청하고 그의 측근들을 처형했다. 주민은 굶는데 최고 권력자는 이상한 서양 농구선수를 불러다 호화·사치를 즐긴다. 쌀쌀한 10월에 물놀이 공원 개장식이 열리고 스키장 공사장엔 군인들이 흙 배낭을 메고 뛰어다닌다.

4막은 이제 눈앞에 와 있는지 모른다. 4막이 열리면 남북 통일의 길이 열린다. 길은 멀고 비쌀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에서 더 중요한 건 돈이 아니라 용기다. 삼성전자의 1년 영업이익만 400억 달러다. 이 돈이면 북한 경제를 재건할 수 있다. 북한이 요동치면 남한은 대통령을 중심으로 단결해야 한다. 그리하여 독일 민족이 걸어간 위대한 길을 우리도 걸어야 한다. 굶주리고 고통받는 수천만 인류를 문명으로 끌어내야 한다. 그게 진정한 드라마다.

 

 

 

 

이 세상에는 아름다움과 추함이 동시에 존재하듯이 모든 사물의 이치가 음양의 조화로 이루어져 있다. 숫컷과 암컷이 사랑을 나누고 자손을 번성시켜 대대로 행복한 가정을 이루듯이 모든 동식물이 교미와 교접을 통하여 생명의 환희와 즐거움을 느끼도록 조물주가 만들어 놓은 듯하다. 그래서 수컷은 암컷을 차지하기 위해서 불철주야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전쟁과 질병, 세력을 키우기 위해 숫컷은 절대 한 마리 암컷에 만족하지 않는다. 여러 마리의 암컷을 데리고 자식을 많이 낳아야 생존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암컷은 힘잇고 능력있는 숫컷을 맞아 건강한 새끼를 많이 낳고 평생 부귀영화를 누리며 천국의 공주처럼 자신을 위해줄 숫컷을 찿아 오늘도 찬바람 눈비 맞으며 밤거리를 교태와 추파를 숫컷에게 던지며 헤매고 있을 것이다.

 

미인은 고급 레스토랑에서 안심 스테이크를 칼로 썰지만 못생긴 여자는 평범한 고기집에서 가위로 고기를 썬다. 이제 우리 사회는 순결과 순수함, 애틋함, 감미로움, 은끈과 끈기, 그리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등 서정적인 면은 사라지고 말초적인 쾌락과 매춘에 몰두하는 성풍속도로 변질 된 듯하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가 가져다 준 인간사회의 말기적 현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돈이 권력을 낳고 권력이 돈을 낳는 돈이면 안되는 것이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돈이 사람의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물론 죽어가는 사람도 살리고 승진도 가능하고 수많은 사람을 부리고 조아리게 만든다. 그래서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는 돈, 그것을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절세 미인도 하룻밤 즐기는데 돈만 주면 아무런 장애가 없다. 돈을 위해 몸을 팔고 돈을 위해 살인을 저지르고 돈을 위해 절도를 서슴치 않는다. 최근 뉴스에 가진자들에게 매춘을 했다고 여배우들이 조사받고 있다고 언론에 났지만 누가 그녀들을 욕할 것인가? 이 사회가 그렇게 만든 것인데......돈을 보태줄 능력이 없으면 그녀들을  욕하지 말자. 

 

우주의 역사는 과학자들이 무수히 우주의 생성에 대해서 논문을 발표했지만 솔직히 아무도 정확하게 잘 알 수가 없는 수수께끼다. 무한대의 우주 한켠에 태양계, 그 중에서도 지구라는 행성, 그 속에 60억이 넘는 인구에 200개 국이 넘는 지구상의 동북아 반도 남쪽 대한민국. 그 중 5,000만 인구 중 나 한사람. 어쩌면 우리는 우주의 먼지에 불과한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인간이 과학문명의 발달, 경제력 증가, 남녀 평등 사회, 결혼 조건 및 자녀 양육 부담 등으로 결혼을 거부하고 독신, 이혼, 집단혼음, 프리섹스 등의 사회현상 변화로 1인 가구가 증가하고 나중에는 이성 상대가 인조인간으로 대체된다면 그것은 자연의 순리에 역행하는 행위다. '아이로봇' 이라는 영화도 나왔지만 인류는 그러한 문명의 변화는 어쩌면 인류의 종말을 초래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앞선다. 빙하기, 대지진, 해성충돌, 전염병 등으로 인류가 멸망할지도 모르지만 그 보다도 먼저 이러한 인류 문명 발달 자체가 인류를 멸망시킬지 모른다는 것이다.

 

모두에게 똑같이 나누어 주어도 부자와 가난한 자가 생기고 건강한 자와 병든 자가 나타난다. 강대국 국민은 호의호식을 누리며 세계를 지배하는가 하면 힘이 역한 약소국 국민은 기아와 가난, 굶주림, 질병으로 고통받으며 평생을 노예처럼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인류 역사의 굴레는 수천 년을 통해 지속되어 왔다.

 

지금은 선진국이라는 스페인, 포르투칼이 과거 남미를 정복하면서 저지른 잔학상, 네들란드,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이 식민지 지배를 하면서 인도, 아프리카, 아시아 등지에서 저지른 잔학상은 일제에 버금간다. 인간은 잔학함이 몸에 베인듯 권력의 2인자를 개구리 죽이듯이 처형한 김정은도 별반 차이가 없다.

 

길바닥을 지나는 개미나 개구리, 들고양이가 차량이나 사람 발에 밟혀 죽듯이 오늘도 길거리에는 목숨을 건 수많은 차량들이 빙판길임에도 불구하고 부지런히 지나 다니고 있다. 사람들에게 순수함이나 서정적인 심성은 사라지고 오로지 돈을 향해 무차별로 무한질주하는 자본주의 사회 사람들...... 그들이 지향하는 돈이 종국에 가져올 인생의 허무한 종말을 아는지 모르겠다. 돈을 벌기 위해서 육신이 떼묻고 만신창이가 되고 걸레처럼 변하고 말초적인 쾌락에 배설의 즐거움을 만끽하며 학문을 멀리하고 현실에 급급하다보면 머리에 든 것이 없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들은 정신이 허한 사람들로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려도 한편으로 심한 갈증을 느끼는 것은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찿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절제와 자제를 할 줄 아는 고등동물이다. 그러나 절제를 하지 못하고 만족을 모르는 탐욕은 하등동물의 본성이다. 재물과 섹스, 탐욕에 대한 조절 능력이 없다면 그 사람은 결국 한갖 하등동물에 불과할 것이다.

 

자본주의가 만개하자 인간의 존엄성이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 돈이면 무엇이던지 할 수 있는 사회, 돈을 위해서는 인륜도, 사랑도, 순결도, 양심도 버려야 하는 이 세상, 정신문화의 피폐가 가져온 현실의 엄청난 부조리를 우리는 직감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최근 유명 중견 여배우들 수십 명이 매춘에 관련되어 수사에 착수하였다는 뉴스가 난 것도 대부분 돈을 위해서는 몸도, 양심도, 명예도, 인기도 헌신짝처럼 버려야 하는 이 사회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 이처럼 정신이 퇴폐해진 현실에서 서정성과 순수함의 정수를 보여준 '실걸이꽃'이라는 단편을 소개하려 한다. 우리 마음 속  본심에는 동전의 양면처럼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잠재되어 있는 이러한 서정성과 순수함을 한편으로 그리워 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러한 마음에 다시 불을 지피기 위해 지난 세월의 이야기를 해 보려 한다.

 

 

                                                                               우리 동네 몽마르뜨 공원 설경

 

 

'실걸이꽃'과 5분 드라마

 

70년대 중반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대장을 마친 뒤 중위 때 경남 김해에 있는 교육기관에 교관으로 발령을 받았다. 당시 피교육생들이 대부분 후반기 교육을 받는 신병들이라 힘든 내무반 생활과 훈련 등으로 낮에 교실에서 교육받는 시간에는 대부분 조는 것이 다반사였다. 당시 난 군사학처 교관으로 독도법 강의를 맡았는데 아무리 열심히 강의를 해도 사방에서 꾸벅꾸벅 조는 신병이 대부분이었다. 교실에서 교육하는 시간은 어쩌면 신병들에게는 조는 시간, 휴식 시간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중급반 하사관반 등도 독도법 교육을 실시하였다.

 

피교육생들이 교육 시간에 졸지 않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를 고민하다가 동기유발을 위한 방안을 구상하였는데, 졸지 않고 교육을 잘 받고 질문에 답변도 잘하고 교육 받는 태도가 양호하면 교관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마지막 5분 동안 매시간 연속 드라마처럼 교육이 종료되는 시간까지 해주는 방안을 구상하게 되었다. 물론 교육 태도가 불량하면 이야기는 없는 것으로 했다.  

 

그래서 생각 끝에 언젠가 현대문학 68년도에 발행된 책에서 오영수 작가의 '실걸이꽃'이란 단편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 내용이 젊은이들에게 절제된 사고와 행동 등 교훈적인 내용이고 줄거리가 재미있고 서정적이며 스승과 제자 사이에 일어난 남녀간의 사랑의 감정을 다룬 감질나는 내용이라 그 줄거리를 요약하여 5분 드라마로 나름대로 각색하여 재미있게 만들었다.

 

그래서 교육 시간에 교육을 받는 신병들에게 50분 동안 교육 진도는 나가돼 졸지 않고 교육을 잘 받으면 40분까지 교육하고 5분간 수강 상태를 점검한 다음 양호하면 마지막 5분 동안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겠다고 공포했다. 그러자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 한 명이라도 졸면 이야기는 없는 것으로 했다. 그러자 옆 동료가 졸면 서로 동료를 쿡쿡 찌르면서 깨우는 분위기가 되었다. 무서운 교관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준다고 하니 교육을 열심히 잘 듣고 숙지하지 않으면 이야기는 없는 것으로 했다.

 

교실에만 들어오면 피곤해하던 신병들의 눈이 금새 초롱초롱해지기 시작했다. 교육을 40분 정도 하고 무작위로 지명하여 질문을 하면 답변도 잘하려고 노력했다. 교육내용 숙지 상태가 불량하면 역시 이야기는 없는 것으로 했기 때문이다. 당시 교수부장이 호랑이 부장이라 교관들에게 항상 철저한 교육 시간 준수를 명령했고 수시로 교수부 교실을 불시에 돌면서 교관들의 교육 상태를 점검하여 강의 차드와 강의 내용이 사전 작성된 시간대별로 맞지 않는 등 제대로 교육을 시키지 않는 교관은 징계위에 회부하여 처벌을 내리곤 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이런 방법은 어쩌면 내가 교관 군생활에 목숨을 걸고 시도한 방법이었는지도 모른다.

 

 

 

 

창가에 보초도 세우고, 차드도 시간에 맞게 넘겨 놓고 교육 태도가 양호하여 처음 이야기를 시작했다. 군대 생활 교육 중 피교육생 시절만큼 5분 드라마가 그렇게 좋은 경우는 대부분 경험하여 알겠지만 부담없는 가장 재미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물론 이야기 내용은 내가 군에 오기 전에 경험한 스토리로 각색했다. 나의 과거이자 오영수 작가의 실걸이꽃 이야기는 이렇게 전개되었다.

 

이야기는 지금부터 '약 5년전 내가 부산의 어느 여자고등학교 교사 시절'이야기부터 시작되었다. 모두가 신기한듯 5분 드라마를 평안하게 듣고 있었다. 교육시간에는 그렇게 졸던 교육생들이 5분 드라마를 시작하면 누구도 졸지 않는 신가한 현상이 벌어졌다. 5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오늘은 여기까지, 이상! 교육끝!" 

 

그러자 피교육생들이

 

"와! 와!"

 

하면서 아쉬워 했다.

 

다음날 교육 시간이 되자 피교육생들이 싱글벙글하면서 교실에 들어섰다. 그러자 자리에 앉은 교육생들의 눈빛에 되살아 났고 자세도 달랐다.

 

"오늘도 마찬가지 교육 태도가 양호하면 마지막 5분 동안 어제 이야기가 연속해서 해 줄 것이다. 교육 잘 들어야 돼!."

 

하면서 교육이 시작되었는데 신기하게도 한 명도 졸지 않고 모두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있었고 모두가 45분이 빨리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는 눈빛이었다. 그렇다고 교육 내용을 소홀리 할 수도 없었다. 나중에 질문에 답변을 소홀히 답변하면 이야기는 없기 때문이었다. 45분이 지나니 보초도 자동으로 창가로 가 서 있고 모두 자세를 바로 세우고 책상에 바짝 다가 앉아 나를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쳐다 보았다. 그래서 다시 어제에 이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말씨도 경상도 말씨에 부산이 이야기 현장으로 나오니 모두 나의 이야기로 진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렇게 교육 종료시까지 연속 드라마 식으로 계속하면 교육 태도가 아주 좋았다. 시험을 보아도 성적이 잘 나왔고 평가도 우수했다. 마지막 이야기 말미에 오영수씨가 쓴 실걸이꽃 단편 소설이야기라고 하면 모두가 "와!" 놀라면서 기대와 현실이 순식간에 엇갈리는 묘한 웃음을 웃었다. 그러나 나의 이야기가 대부분 집중하여 감명 깊게 들은 이야기라 머리 속에 오랫동안 남았을 것이다. 그 증거로 90년대 초 강원 현리에 근무 할 당시 어떤 교육 파견나온 한 하사관(부사관)이 나를 보더니,

 

"아니! 그때 00학교 교관님 아니십니까?" 하면서 나를 보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니까

 

"그때 실걸이꽃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게 들어서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고 하면서 반가워했다.

 

당시 독도법 교육 내용은 다 잊어 버렸지만 5분 드라마 이야기 내용은 기억에 남는다...... 그렇다 .인간은 자신에게 자극을 주고 깊은 감명을 준 상황은 오랫동안 기억하기 마련이다. 그 당시 교육 받던 피교육생들은 이미 나와 나이가 비슷한 세대들로 이 사회의 주역을 담당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쯤 자녀들이 성장하여 결혼을 했거나 앞두고 있을 것인즉, 혹시 나의 이야기가 기억이 난다면 자녀들에게 서정적이고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갖도록 주지하는 부모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실걸이꽃

 

 

오영수 단편 '실걸이꽃'

 

 

줄거리 요약

 

그가 부산시 K여고에 재직시 그의 담임반에 제주도가 고향인 해정(海貞)이라는 학생이 있었다. 별 두드러진 특징도 없고 성적도 중상 정도였다. 그러나 그가 (여학교에서는 삼가야 할)해정이를 좋아한 것은 해정이가 그를 무척 따르기도 했지만 그가 지도하고 있는 문예반 반원이었기 때문에 자주 가까이 대할 수 있었다는 것과 까바라지지 않은 순진하고 밝은 성격 때문이었다.

 

그는 그때 바다를 좋아하는 해정이에게, 남에서 온 철새도 남쪽으로 뻗은 가지를 골라 깃을 든다고 하니 네 이름도 갈매기를 뜻하는 해연(海燕)으로 하라는 얘기를 건네기도 하였다. 해정의 가족이 부산으로 이사를 오고 얼마 안 돼서 그는 서울로 전직을 했다.

 

한 삼사 개월 뒤에 해정은 인제 두어 달만 있으면 졸업을 한다는 편지를 보내오고는 근 이년 동안이나 소식이 없었다. 거리에서 우연히 해정의 동창인 영자라는 아이를 만나, 해정이의 집에서 우격다짐으로 약혼을 시켰는데 어떻게 해서 그만 파혼을 하고 지금은 제주도 어느 국민학교에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런 두어 달 뒤, 그러니까 이월 초순경이었다. 영자가 편지를 했는지 모르긴 하지만 뜻밖에도 해정이에게서 편지가 왔다. 겉봉 뒤에는 해정이 아니고 해연이라고 쓰였다. 그런데 이주일이 채 못가서 또 편지가 왔다. 여기는 봄이면 물때가 좋아 바다에도 나가야 하고 밭일도 해야 하기 때문에 봄방학이 기니까 그때쯤 한 번 오시지 않겠느냐, 오시면 선생님이 좋아하신다는 해물을 실컷 대접하겠다고 해왔다.

 

삼월 중순경이었다. 마침 제대를 하고 새 학기부터 복교를 한다면서 내일 집(제주도)으로 내려간다는 S군이 인사를 왔기에, 동행이 믿음직해서 간다면 좋을 기회다 싶어 말을 꺼냈다가 적극적인 S군의 권유로 제주도에 가게 되었다.

 

제주도에 내리자마자 해정이가 있는 애월로 내려갔다. 처음에 몰라보던 해정은 뭐라 소리를 지르고 마치 껴안기라도 할 듯이 왈칵 달려들어 가방과 바바리를 낚아채고는 사람들이 수상하게 생각할까 보아 여관 가서 자겠다는 걸 굳이 만류했다.

 

해연이가 딱 밥 한 술 씹다가 손등으로 반쯤 입을 가리면서,

 

“선생님”

 

“왜?”

 

“날 한번 불러 보세요.”

 

“아니 밥 먹다가 갑자기 왜 그래?”

 

해연이는 씹던 밥을 삼키고 손을 내리면서,

 

“내가요 선생님, 아무래도 꿈이 아닌가 했어요. 지금 꿈 속에서 선생님과 이렇게 겸상으로 밥을 먹고 있지 않나 해서 그래요.”

 

“그렇게 말하면 나도 마찬가지야.”

 

해연이는 숭늉대접을 올려놓고,

 

“선생님 며칠이나 계시겠어요?”

 

“내일은 가야지.”

 

“착해서 내일 못가요.”

 

“가면 어쩔래?”

 

“누가 보내주나요.”

 

“내가 뭐 어린앤가 보내주고 안 보내주고…….”

 

“저는 실상, 적어도 한 일주일쯤은 예정하고 스케줄을 짜는 중이예요.”

 

“이왕이면 한 달쯤 않고서…….”

 

“암튼 내일 가신다는 건 단념하세요. 절대로 안 놓아 드릴 테니깐요.”

 

사오년 동안의 세월은 해연에게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연령의 성장도 크다. 장난기도 다분히 있기는 하지만 때로는 행동거지가 어른스러워 그는 어떤 모성까지 느끼곤 한다.

 

“그런데 해연이는 언제까지나 여기 이렇게 있을 텐가?”

 

“갈매기가 바다를 떠나 어디서 살겠어요!”

 

“멋진 청년이 범선을 타고 모시러 올 기약이라도 있는가?”

 

“기약은 없어도 한때는 그런 꿈도 꿔봤어요. 그렇지만 인젠 그런 꿈마저 짠 바닷물에 절여버렸어요.”

 

“절였으면 썩지는 않겠군?”

 

“형태도 없이 몽땅 썩어버렸으면 좋겠어요!”

 

해연이는 어렵게 물어본 파혼에 관한 얘기와 함께 뭍사람들의 인정과 세태에 대해 환멸을 느껴서인지 순하고 인심 좋은 사람들이 사는 제주도에서 순박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즐겁고 보람 있다고 했다.

 

해연이는 자신이 직접 바다에 들어가 잡아온 갖가지 해물로 상을 차려주는 등 여러 가지 흥미 있는 구경거리를 보여주며 결국 며칠을 머물게 만들었다.

 

약속이 늦어져 그만 떠나겠다니까 제주도에서 태어난 자기만큼 제주도를 잘 아는 사람은 없다면서 안내를 자청하고 따라나섰다.

 

한림과 모슬포, 천지연 폭포, 밀감원, 성산포 등을 구경하고 허술한 어느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고 제주행 버스에 올랐다.

 

세화라는 면소재지를 조금 지나 김녕이란 데서 해연이가 내리라고 한다. 뱀굴을 보고 가자는 것이다. 이러다간 오늘도 제주까지 못 갈 것 같다.

 

그만 가자니까 해연이는 벌써 내려버렸다.

 

“선생님. 낚시 해보실래요?”

어떻게?”

 

“배 좀 빌리면 되잖아요!”

 

“애, 인제 그만둬. 넌 물귀신이야.”

 

“왜, 어째서요?”

 

“사람을 잡고는 어디든 끌어 갈려고만 하니깐 말야. 그것도 꼭 내 약점을 알고 말야!”

 

“물귀신이 아니고 실걸이 꽃이죠.”

 

“실걸이 꽃……. 어떤 꽃인데?”

 

“그 꽃에는 전설이 있어요!”

 

“어떤 전설인데?”

 

“얘기 안 할래요!”

 

제주에 닿기는 아홉 시 경이었다.

 

방을 둘 부탁했는데 한 방에다 자리를 둘 해 놨다. 딴 방이 없냐니까 모두 손님이 들어 없다고 한다.

 

상당히 피로하다. 눈을 감는다.

자야지! 그러나 쉬이 잠이 들지 않는다.

솔직히 말해서 그는 해연이를 안고 싶었다.

품속에다 꼭 껴안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용기를 내지 못한다.

 

그는 이때처럼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이성(理性) 즉 사제간이니 도덕이니 윤리니 하는 따위의 어휘들이 거추장스러운 때도 없었다.

 

그러나 더 거추장스러운 것은 그에 대한 해연이의 신뢰감이다. 사제라는 전제를 두고 한창나이의 해연이가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한 방에서 자겠다는 그 신뢰

 

를 그로서는 배반할 수가 없다.

 

“해연이 손 이리 좀 주겐?”

 

해연이는 암말도 없이 손을 내준다.

 

그는 해연이의 손을 꼭 잡았다.

 

손을 꼭 잡으니까 마음이 좀 가라앉는다.

 

“이러고 자, 해연이-”

“예!”

 

그가 더 힘을 주어 당겼는지, 아니면 해연이가 더 힘을 주어 당겼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서로 체온을 느낄 정도로 가까워진 것만은 사실이었다.

 

다음날 C다방으로 되돌아오자 S군이 와있었다.

 

사흘을 꼬박 기다렸노라고 다소 불평했다. 차를 마시면서 제주도 인상이랑 잡담을 하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실걸이 꽃에 관해 물어보니

 

“노란 꽃인데 낚시 바늘 같은 가시가 돋았죠?”

 

그 꽃을 지방에 따라서는 실걸이 꽃, 옷걸이 꽃 또는 배걸이 꽃이라고도 한다면서 꽃에 얽힌 전설을 들려준다.

 

옛날 어느 외로운 바닷가 마을에 젊은 과부가 살았다. 젊은 과부인 만큼 먹는 것 보다도 옷 천이 소원이었다.

 

그래서 이 과부는 푼푼이 돈을 모아서 대처로 나가 옷감(베)을 사가지고 돌아오게 됐다.

 

그런데 갑자기 일어난 풍랑에 배가 기우뚱거리자 그 천보따리를 그만 물속에 빠뜨려버렸다.

 

보따리를 건지려고 이 과부도 물속으로 뛰어 들었다. 그러나 다시는 과부도 보따리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과부의 넋이 실걸이 꽃이 돼서 낚시 바늘 같은 가시를 달고 사람만 얼씬하면 옷을 걸어 당기고 한 번 걸면 가시가 부러지기 전에는 놓아주

 

지 않는다.

 

그는 ‘물귀신이 아니라 실걸이 꽃이죠!’라면서 굳이 이야기를 안 하던 해연이를 생각하고 한동안 숙연해지면서 눈시울이 서물거리는 것을 찻잔으로 얼버무렸

 

다.

 

비행기는 지금 서울을 향해 북으로 날고 있다. 그러나 그의 마음 한 가닥 실은 실걸이 꽃 가시에 걸려 마치 고치에서 실이 뽑히듯 반대쪽으로만 풀려가고 있었

 

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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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걸이 꽃

 

실걸이나무는 띠거리나무, 살거리나무라고도 하는데 산기슭 양지에서 자란다. 몸 전체에 밑으로 굽은 낚시 같은 가시가 있어 옛날에는 출입을 못하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담벼락에 쌓기도 하였다. 어렸을 적 연을 날리다가 그 곳에 실이 걸려 못 쓰게 되기도 했고, 옷이 걸려 낭패를 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이런 나무의 특성 때문에 실걸이꽃 전설이 제주도 전역에 구전되고 있다.

 

 

 작가 오영수, 그는 누구인가?

 

고향의 서정 읊은 한국 단편문학 대표주자

   
 

두개의 오영수문학비. 1992년 10월30일 오영수문학비건립위원회가 남구문화원 뜰에 건립(왼쪽) 했으며, 1996년 모교인 언양초등 교정에 이 학교 총동창회가 동문 소설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 했다.

오영수(吳永壽). 호는 월주(月州), 난계(蘭溪). 본관은 해주(海州). 1909년 울주군 언양면 동부리 313번지에서 아버지 오시영과 어머니 손필옥 사이에 5남 5녀(혹은 4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한 때 오영수의 출생일이 1914년(혹은 1911년) 2월11일로 알려졌으나 이호종이 '난계 오영수론'에서 호적부에 '명치 42년(1909년) 2월11일'인 것으로 밝혀졌다.


 

1917년 서당 세심원에서 육개월 가량 수학했다. 1920년 4월1일 언양공립보통학교(지금의 언양초등)에 입학했다. 일학년에서 특별히 배울 것이 없어 이학년 과정을 공부했다. 집안이 어려워 공부룰 하면서 당시 김기오(훗날 <현대문학> 초대이사장)씨가 운영하는 조선일보, 동아일보 지국에서 배달, 우송, 수금업무를 맡아 일했다. 한 달에 오십전을 받아 십오전은 월사금으로, 나머지는 집안 살림에 보탰다.

1926년 언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이 무렵, 학교장의 추천으로 우체국의 견습공으로 취직해 잠시 근무했다. 1932년 일본 오사카(대판, 大阪)의 나니와 중학 교 속성과를 수료했다.

 

1935년 일본대학 전문부에 적을 두었으나 '부친별세'의 거짓 전보를 받고 급히 귀국했다. 동아, 조선일보에 동시를 발표했다.
1937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국민예술원에 입학 한 뒤 학도병에 징집 당하지 않으려고 숨어다닌다.
1938년 예술원을 졸업 후 귀국 후 오영수는 동래 일신여고 교사인 김정선(金貞善)과 결혼했다. 장녀 숙희가 태어났다.

1939년 만주 신경으로 가서 잠시 방랑생활 

1940년 차녀 국이 태어났으나 2년 뒤에 사망했다.

1943년 일본에서 돌아와 처가가 있는 양산군 일광면 화전리로 이사했다. 그 곳에서 김범부 선생을 만나 그의 동생 동리를 앓게 됐다. 장남 철이 태어났다.

 

1944년 부친이 타계했다.

 

1945년 8월15일 광복 후 경남여고에서 미술교사로 교편생활을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국어를 가르쳤다.

 

1946년 차남 윤(潤)이 태어났다.

1947년 장남 철이 사망하고, 1948년 삼남 건이 태어났다.

1948년 시 [산골 아가]([백민])를 발표하고,

1949년 단편소설 '남이와 엿장수'(뒤에 '고무신'으로 개제)가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입선되고,

1950년 단편 '머루'가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이 해에 오영수는 청마 유치환 등과 함께 동부전선(제3사단 22연대) 종군작가로 나섰다.

1951년 부산시 동구 수정동 664로 이사했다. 차녀 영아가 태어났다. 오영수는 부산중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1954년 조연현과 함께 문예지 <현대문학> 창간을 위해 서울로 올라와, 아우 오생근의 집에 머물렀다. 첯 창작집 머루를 문화당에서 간행

1955년 평론가 조연연씨가 주간(실무책임자), 오영수가 편집장을 맡아 1966년까지 일했다. 제1회 한국

1955년 단편소설 '박학도'로 제1회 한국문학가협회상을 수상했다. <속, 낙향산고>에 당시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서울서 삽십년, 옆눈 한번 팔지 못하였다. 자신을 위해 택시를 타지 않았고, 양담배 한갑 산 적이 없었다. 친구들과 점심 한끼를 떳떳이 사보지 못하였다. 주간은 아침에 잠깐 들렀다가 딴 직장으로 가버리면 종일 사무실을 지켜야 했다. 실례지만 문단 거지들과 지방 문인들의 시중까지 그 알량한 월급으로 감당을 못해 원고료를 쬐끔 협잡을 해서 문인 거지들과 지방문인들의 찻값에 보태기 위해 아무도 몰래 서랍에 넣어두고, 반품을 표지만 뜯어버리고 휴지로 팔아 충당하기도 하였다.'

1954년 첫 창작집 [머루]를 문화당에서 간행한다.

1955년 조연현을 주간으로 [현대문학] 창간호를 편집, 발행하고 제1회 한국문학가협회상을 수상한다.

1956년 제2창작집 [갯마을]을 간행하고

1957년 서울 성북구 돈암동으로 이사하는데, 이 무렵부터 신경성 위궤양을 앓는다.

1958년 제3창작집 [명암]을 간행하고

1959년 제7회 아세아자유문학상을 수상한다.

1960년 제4창작집 [메아리]를 간행한다.

1963년 서울 도봉구 우이동으로 이사하고,

1965년 제5창작집 [수련]을 간행한 뒤 1966년 위궤양으로 현대문학사의 실무를 떠난다.

1968년 [오영수 전집] 전 5권을 현대서적에서 간행하고

1970년에는 한국문인협회 소설분과위원장에 피선된다.

1974년 [오영수 대표작 선집] 전 7권이 동림출판사에서 간행되고, 서울 도봉구 쌍문동 486번지로 이사횄다. 지병이던 위궤양으로 사경을 헤매다가 회생하면서 아호 '월주'를 '난계'로 바꾸었다.

 

월15일 오영수는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울주군 웅촌면 곡천리로 낙향했다. 대숲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시골집을 하나 구해서 구둘을 고치고, 도배를 하고, 대를 쪼개어 사립문을 얽어 달았다. 그리고 그 집을 침죽제(枕竹齊)로 명명했다.

침죽제에서 생활하며 오영수는 부산과 울산의 제자들과 문인들이 찾아 오면 기꺼운 마음으로 함께 어울렸다. 추어탕집으로 문우들을 데려가기도 하고, 막걸리를 주거나 받거니하면서 문단 아팎의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윤정규, 최해군, 구본룡, 윤진상, 정종수 등 부산의 문인과 김영진, 이재기, 서상연, 김성춘, 신필주 등 울산의 문인들이 침죽제를 자주 찾았다. 오영수는 생전에 낚시와 난을 특히 좋아했다. 침죽제 앞의 도로를 건너면 술도가가 있고, 그 아래 소롯길을 따라 내려가면 회야강이 나타났다. 오영수는 그 화야강 주변 바위나 풀숲에 터를 잡고 앉아서 낚시를 드리웠다.

오영수는 대숲에 비가 내리는 밤이면 만돌린을 켜면서 대중가요 <고향초>와 <울릉도 뱃사공>을 애수어린 목소리로 노래했다. 1979년 <문학사상>(1월호)에 발표한 '특질고'를 발표했다. <특질고>는 우리나라 각 지방의 방언과 지방색의 특질을 다룬 작품이다. 그러나 이 글로 해서 한국문인협회로부터 제명되는 등 뜻하지 않은 필화사건에 휘말렸다. 이 해에 <월간문학>(2월호)에 마지막 작품인 편지를 발표했다.

오영수는 특질고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짐짓 초연한 자세로 사태의 심각성을 속으로 삭였다. 그러는 가운데 충격의 여파가 깊어져 지병인 위궤양이 다시 악화됐다.

1977년 제22회 대한민국예술원상을 수상한다.

1978년 창작집 [읽어버린 도원]을 간행하고

1979년 5월 15일 경남 울주군 웅촌면 곡천리 자택에서 간염으로 타계한 뒤 언양면 송태리 선영에 안장된다.

 

3대바람소리가 유난히 화사하던 날 밤, 오영수는 아들과 제자가 두는 바둑을 말없이 지켜 보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인 1979년 5월15일 오영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향년 71세. 오영수는 울주군 언양읍 송대리 선산에 묻혔다.

1983년 5월15일 울산문협(지부장 서상연)과 부산소설가협회는 공동으로 오영수의 무덤가에 '작가 오영수 여기 잠들다'라고 적은 묘비를 세웠다. 1992년 10월30일 오영수문학비건립위원회는 울산문화원 뜰(지금의 남구문화원)에 '오영수 문학비'를 건립했다.

1993년 5월15일 지역일간지 울산매일이 오영수의 문학정신을 오래도록 기리기 위해 <오영수문학상>을 제정하고, 매년 전국의 작가를 대상으로 수상자를 선정해 시상을 해오고 있다. 1996년 '문학의 해'를 맞아 언양초등학교 총동창회는 교정에다 동문 소설가를 기리는 '오영수문학비'를 세웠다. 1999년 소설가 이재인(경기대 교수)은 오영수의 소설미학과 삶을 탐구한 연구서 <오영수문학연구>(문예출판사)를 펴냈다.

오영수는 전형적인 단편 작가로 한국적인 소박한 인정이나 서정의 세계에 기조를 두고 있는 작품들을 창작했다. '화산댁이'(1952), '윤이와 소'(1952), '코스모스와 소년'(1953), '갯마을'(1953), '박학도'(1955), '여우'(1957), '후조'(1958), '명암'(1958), '메아리'(1959), '은내골 이야기'(1961), '수련'(1961), '실걸이꽃'(1968), '어린 상록수'(1975) 등 150여 편의 단편을 발표했다. <머루>(1954), <갯마을>(1956), <명암>(1958), <메아리>(1960), <수련>(1965), <황혼>(1976), <잃어버린 도원>(1978) 등의 창작집과 <오영수전집>(1968), <오영수대표작선집>(1974)이 있다. 1955년 한국문학가협회상, 1960년 대한민국 예술원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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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토착적인 한국인의 정서와 풍경을 간결하고 서정적인 필치로 그려내는 데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작가다. 향토성 짙은 서정성을 바탕으로 자연과 인간의 조화와 대립을 통해 선량한 인간성을 탐구하고 묘사해 온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서민층 생활의 애환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을 드러낸 작품세계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실되어 가는 인간성의 회복을 제시해 줄 뿐만 아니라, 각박한 현실의 폐해를 비판함으로써 따사로운 인정의 미학을 선보인다.


 

평소 성품이 소박하고 낚시와 그림을 좋아했던 그는 만년에는 고향 근처로 낙향하여 요양과 창작에 정진했으나 1979년 발표한 단편 [특질고(特質考)]로 인해 뜻하지 않은 파문을 일으켜 정신적인 타격을 받는다. 이 작품은 지방의 사투리와 지역민의 특성을 담은 작품으로 작가의 의도는 향토성의 고찰 속에 방언의 고수를 피력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지만, 소설의 내용이 사실적 기록으로 받아들여져 특정 지역을 비하했다는 시비에 휘말리면서 결국 문협에서 오영수가 제명되고, 그의 사과문이 공개됨으로써 사건이 마무리된다.


 

약력 및 수상경력

[수상내역]

1955년 제1회 한국문학가협회상
1959년 제7회 아세아자유문학상
1977년 제22회 대한민국예술원상

 

[문학]오영수

오영수 

 


오영수는 1979년 타계할 때까지 꾸준하게 순수소설을 지향했던 대표적 서정작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서정적 단편 소설인데, 그는 ‘예술품을 담는 그릇으로선 장편보다 단편이 더 적당’ 하다는 작가적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의 소설은 무한한 인간애와 영원한 생명성을 바탕으로 순수 자연의 시대를 지향함으로써 동양적인 생명사상에 심취되어 있다.

 

그의 소설에 나타나는 작가정신은 인간긍정에서 인간옹호로, 다시 자연과 생명을 추구하는 생명존중사상으로 나아간다. 인간의 편리를 위해 자연을 이용한다는 왜곡된 명분은 생태계를 파괴하고 도리어 인간의 생명에까지 위협을 준다는 것을 그는 자신의 소설에서 잘 보인다. 그의 소설에서의 자연과 농촌은 정신적인 축면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측면에서도 인간을 풍요롭게 해주는 농민들의 생활터전이요, 인간의 생명을 만들어내는 인류역사의 장이다. 그의 휴머니즘 정신은 농민들의 땅에 대한 귀착의식과 더 나아가 자연인으로서의 생명의식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는 인간과 자연이 하나임을 인식하고 자연을 생의 근원으로서 파악하고 있었던 작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