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한국의 역사 1,009 : 일제강점기 54 (노동운동)

 

 

 

 

한국의 역사 1,009 : 일제강점기 54 (노동운동)

 

 

 

 

 

           

 

 

노동운동

 

'노동자 조직의 형성과 발전'

 

 

1920년대 들어 노동계급이 성장하자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합법운동 영역에서 노동단체가 생겨났다. 곳곳에서 노동친목회.노동회.노우회 같은 지역합동노조를 만들었으며, 인쇄직공.철공.고무직공처럼 좀더 숙련을 요구하는 직종에서는 직업별 노조를 만들었다. 1920년 4월에는 최초의 근대적이며 전국적인 노동단체였던 '조선노동공제회'를 창립했다. 노동공제회는 기관지 <공제>를 발행하여 사회주의사상을 선전하고 노동야학과 노동강연회를 여는 등 계몽활동도 했다. 그러나 지도부가 통일되지 못한 채 갈등을 겪었으며, 노동자와 소작농민을 노동공제회로 한데 묶으려 했던 것은 조직에서 큰 약점이 되었다.

 

노동공제회 대신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1922년 10월 '신사회 건설', '계급적 단결'을 강령으로 내건 '조선노동연맹회'를 결성했다. 또 서울의 양말공장.고무공장 직공의 파업을 지도하고 경성여자고무직공조합과 경성양말직공조합을 지원했다.

 

이와 같이 노동 조직이 발달하면서 1924년 4월 전국 260여 노농단체와 5만 3천여 회원을 거느린 '조선노농총동맹'을 결성했다. 노농총연맹은 "우리는 노동계급을 해방하여 완전한 신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목적으로" "철저하게 자본가 계급과 투쟁" 한다는 강령을 내걸었다. 노농총연맹은 노동문제, 소작문제를 해결하는 데 앞장서려 했으며, 민족개량주의 사상을 선전하는 <동아일보> 불매운동을 결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과 지도부의 대립은 가맹단체에도 영향을 미쳐 조직이 잘 운영되는 것을 가로 막았다. 또 이해관계가 다른 노동자와 농민을 같은 조직으로 아울렀다는 것은 조직에서 큰 한계였다. 이 한계를 극복하려고 조선공산당은 1927년 8월에 노농총동맹을 노동총동맹과 농민총동맹으로 분리했다.

 

 

 

'노동운동의 성장과 원산총파업'

 

1920년대에 노동자 조직이 발전하는 것과 발을 맞추어 노동운동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921년 9월 부산 부두노동자들이 최초로 대규모 연대파업을 일으킨 것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파업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1923년 경성고무여공 300여 명은 회사가 임금을 깍고 공장 감독이 인권을 짓밟자, 굶어 죽을 각오로 싸우겠다는 '아사동맹'까지 맺어 파업했다. 1920년대 전반기 파업은 정미업.고무업.양말업 등 규모가 작은 공장노동자, 그리고 운수와 부두 노동자가 중심이 되었으며, 경기도.경상남도.전라북도에서 많이 일어났다.

 

1920년대 후반기에 들어가면서 파업 기간과 참가인원 수가 크게 늘고 파업 범위도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1926년 목포 제유노동자 파업과 1927년 영흥 흑연광산노동자 파업은 50~70일 동안이나 계속되었고, 이때 노동자들은 규찰대를 만들어 일제경찰과 자본가의 탄압에 맞서 싸웠다.

 

1920년대 후반에 투쟁을 통해 조직과 계급의식을 강화해 노동운동은 1929년 '원산총파업'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일제는 1920년 후반부터 함경남도를 중심으로 중화학공업을 일으키고 대륙 침략을 위해 군수체제를 정비했다. 원산총파업을 지도한 원산노동연합회(원산노련)는 원산 지역 노동조합 연합체로 산하에 8개 단위노조가 있었으며, 단위노조의 노동쟁의를 적극 지도하여 대부분의 노동분쟁을 노동자에게 유리하게 해결했다. 원산노련에 대응하는 자본가 단체로는 '원산상업회의소(원산상의)'가 있었다.

 

원산총파업은 1928년 9월 함남 덕원군 문평리에 있는 라이징 선 석유회사의 일본인 악질 감독 고다마가 조선인 노동자를 구타한 사건이 발단이 되었다. 이 회사 노동자 120여 명은 일본인 감독 파면, 최저임금제 실시, 해고수당제 실시 등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회사는 마지못해 요구조건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했으나 날짜가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이에 원산노련은 문평제유 노조에게 파업할 것을 권고하고 다른 노조도 문평제유소의 화물을 취급하지 말도록 했다. 원산상의는 원산노련의 회원을 고용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일제도 '치안'과 '사회보장'을 핑계 삼아 경찰과 소방대, 일본군 제19사단 함흥연대 400여 명을 보내어 파업 노도자를 위협했다. 원산노련이 이에 굴하지 않고 1929년 1월 총파업을 선언하자 자본가들은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를 해고하고 인천 등 다른 곳에서 노동자를 모집하여 부두작업을 시작하는 등 파업을 무력화시키려 했다. 또 일제는 원산노련 위원장 김경식을 비롯한 핵심 간부 42명을 구속했다.

 

파업이 차츰 길어지고 확대되자 전국에서 파업을 격려하는 편지와 파업기금이 물려들었고, 자본가들이 인천에서 데려온 노동자들마저 함께 파업대열에 나섰다. 또 중국과 프랑스 노동자, 블라디보스톡 국제해원구락부 노동자에게서 격려 전문이 오는가 하면 원산에 들어와 있던 일본 선원까지도 파업을 지지하는 등 노동자들의 국제적 연대가 시작되었다.

 

원산노련은 2월 위원장 직무대행으로 변호사 김태영을 선출하고, '한 잔의 술, 한 개비의 담배, 한 푼의 낭비도 반동'이라는 구호 아래 '1일 2식과 금연.금주 운동'을 벌이며 장기파업에 대비했다. 직무대행 김태영은 총독부에 진정을 하고 원산경찰서에 조정을 청원하는 등 타협적인 방법에 매달렸다. 그러나 원산노련 산하 노동자들은 타협하지 않고 전투적으로 일제경찰과 자본가에 맞서 투쟁했다.

 

일제와 자본가들은 다가오는 3.1운동 10주년을 앞뒤로 파업이 전국으로 번질 것을 우려하여, 3월 한만노동회라는 어용노조를 만들어 원산노련을 불법화시키고  마침내 원산총파업을 무력으로 탄압했다. 1929년 4월 1일 노동자들은 한만노동회를 습격하는 가두투쟁을 벌였지만, 일제의 무자비한 무력 진압으로 파업을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어 결국 4개월에 걸친 투쟁을 끝냈다.

 

원산 인구 가운데 1/3이 참여한 원산총파업은 일제와 자본가의 탄압으로 실패했지만, 가혹한 착취와 탄압을 일삼던 일제와 자본가들의 본모습을 그대로 폭로했던 거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