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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010 : 일제강점기 55 (농민운동)

 

 

 

한국의 역사 1,010 : 일제강점기 55 (농민운동)

 

 

 

 

 

           

 

 

농민운동

 

'농민운동조직의 형성'

 

1920년대 초반 전국 농촌에는 소작인조합.농민조합.소작상조회.농우회.농민공제회.작인동맹 등 농민단체들이 생겨났다. 이들 단체는 대부분 농사 개량.소작관계 개선.생활 개선 등을 내세우는 지주와 소작인이 만든 상호부조적이고 계몽적인 단체에 지나지 않은 것이 많았다. 그러나 일제와 지주의 수탈이 심해지고 소작쟁의가 크게 늘어나면서 이 단체들은 차츰 농민조직으로 바뀌어 갔다.

 

농민조직은 1922년 23개에서 1923년에는 107개로, 1925년에는 126개로 늘어났다. 소작인 조합이 중심이 된 단체는 "소작인회에 비상사태가 일어날 경우 인접 면에서 응원할 것" 등을 결정하여 연대투쟁을 모색하는 한편, 지주와 일제를 규탄하는 토론회.집회 등을 열어 농민의 계급의식을 높여 나갔다.

 

농민들은 군을 단위로 연대투쟁을 위한 연합회를 만들고, 1924년 4월에는 사회주의자와 노동단체의 지원을 받아 '조선노농총연맹'을 결성하여 전국 범위의 중앙조직을 갖게 되었다. 농민조직이 빠른 속도로 늘어나면서 1920년대 중반 무렵 농민들은 자신들의 대중적 기반을 넓혀나갔다. '소작료 인하, 소작권박탈 반대, 동척이민 반대' 등의 소작쟁의 구호에서 나타나듯이 농민조직이 주요 구성원은 소작농민이었고 그 가운데서도 소작빈농이 중심이었다. 소작인조합에 자작농까지 참가하면서 농민 일반 대중조직인 농민조합으로 확대.개편되었다.

 

1927년 8월 조선노농총동맹이 '노동총동맹'과 '농민총동맹'으로 분리되면서 조선농민총동맹은 32개의 농민단체와 2만 4천여 회원을 거느린 전국적 단일조직으로 발전했다. 농민총동맹은 "농민들은 단결하여 단체의 위력으로 자본가계급과 싸우고, 농민계급을 해방하여 완전한 신사회를 기한다"는 강령을 내세우며 전국 곳곳에서 일제와 지주의 소작료 인상 등에 맞서싸웠다. 그 뒤 농민총동맹은 1933년 가맹단체 35개, 회원 3만 4천여 명으로 확대되었으나 일제의 끓임없는 탄압으로 차츰 힘을 잃어 갔다.

 

 

 

 

 

'늘어나는 소작쟁의'

 

1920년대 전반기 농민들은 소작인조합의 지도를 받으며 대지주를 상대로 생존권 투쟁을 벌였다. 쟁의에서는 주로 높은 소작률을 문제 삼았다.  그밖에 소작권 이동, 지세부담 전가, 부당노동 등의 문제가 많았다. 소작농민들은 일본경찰과 지주의 탄압에 맞서 지주가 소작료를 강제 징수할 때는 소작료불납동맹을, 소작지를 강제로 빼앗을 때는 공동경작동맹.불경작동맹 등을 그때 그때만들어 대응했다.

 

1922년 21건이던 소작쟁의는 해마다 늘어나서 1923년에는 176건, 1925년에는 204건으로 늘어났다. 또 쟁의 지역도 확산되어 황해도 재령군.봉산군.신천군.사리원 평안남도 대동군의 동척농장, 경상북도와 전라남.북도의 동척농장 등지에서 대규모 쟁의가 일어났다.

 

그 가운데서도 1923년 8월부터 무려 1년 가까이 싸운 전라남도 무안군 암태도 소작쟁의는 1920년대 전반기의 대표적인 농민운동이었다. 암태도 소작농민들은 1923년 8월 암태소작회를 결성하여 대지주 문재철의 높은 소작료 착취에 맞서 싸웠다. 문재철은 섬에서만 1만 석 넘게 쌀을 거둬들이는 대지주였으며 수확의 7~8활에 이르는 가혹한 수탈을 일삼았다.

 

1924년 8월까지 1년 남짓 암태도 농민들은 악질 지주 문재철과 이를 두둔하는 일제경찰에 항거해 투쟁한 결과 소작료를 4할로 낮추는 성과를 거두었다. <동아일보>는 암태도 농민들이 목포 재판소에서 단식투쟁을 하는 모습을 보도하기도 했다.

 

1920년대 후반에 들어서 '조선농민총동맹' 결성 등 조직 발전에 힘입어 농민운동은 더욱 활기를 띠었다. 그 결과 1926~1929년 2,486건의 소작쟁의가 일어났으며 전반기 남부를 중심으로 조직되었던 농민조합이 북부와 동해안 지방에서도 생겨났다. 1926년 평안북도 선천농민조합, 함경남도 북천군 양가면 농민조합, 1927년 함경남도 정평농민조합, 경기도 부평농민조합, 동해 양양농민조합, 삼척농민조합 등이 조직되었다.

 

1927년 11월 전라북도 옥구군 이염농장 농민들은 조작료 불납동맹투쟁을 벌이고, 1928년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도 소작농 1,200여 명은 농민조합을 파괴하려는 일본인 농장주를 상대로 격렬한 투쟁을 벌였다.

 

이러한 소작쟁의 말고도 농촌 곳곳에서는 산미증식계획과 관련하여 수리조합 설치와 운영을 둘러싼 분쟁이 자주 일어났다. 수리조합이 생기는 곳에는 반드시 민원이 일어나고 분규가 끓이지 않았다.  황해도 안령수리조합(1926), 부평수리조합(1927), 봉산수리조합(1928) 등에서 농민들은 수리조합 반대운동을 벌이며 일제에 거세게 항의했다.

 

1920년대 농민들은 자신의 조직을 바탕으로 항쟁을 벌여 산미증식계획 등을 통해 조선 수탈에 혈안이었던 일제 식민정책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일제는 농민조합이 농민운동의 강력한 거점이고 사회주의자들의 지도와 지원 아래 성공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여러 집회를 금지시키며 소작료 인하와 같은 경제 요구조차도 가혹하게 탄압했다. 농민조합 등 합법단체를 중심으로 벌인 농민운동은 1930년대 들면서 차츰 비합법적인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으로 바뀌어 갔다.

 

 

 

 

기타 여러 부문 운동

 

 

'청년학생운동'

 

1920년대 들어 민중운동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많은 청년단체들이 조직되었다. 청년학생들은 3.1 운동에 앞장서서 참여한 경험을 갖고 있었기에 식민지 현실과 그들이 지닌 이상이 서로 충돌하면서 자신의 처지를 자각했다.

 

1920년대 초 많은 청년단체가 만들어지면서 자연히 이들을 하나로 묶는 전국 범위의 중앙조직이 필요하게 되자, 1920년 12월 116개의 청년단체가 모여 조선청년연합회를 결성했다. 청년운동이 발전.분화하면서 1924년 4월 224개 청년단체가 참여해 전국적인 청년대중조직인 '조선청년동맹'을 창립했다. 조선청년총동맹은 서울청년회 등이 중심이 되어 전국 600여 개의 청년단체 가운데 250여 단체를 하나의 조직으로 모은 것이며 청년운동 발전에 큰 디딤돌을 마련했다.

 

조선청년동맹은 '대중 본위의 신사회 건설'과 '조선민족해방운동의 선구자가 될 것'을 강령으로 내걸었으며, 노동.농민운동 등을 저지하려고 일제의 식민교육에 맞서는 등 여러 부문운동에 개입하려 했다.

 

청년운동이 활성화되면서 각급 학교를 중심으로 1920년대 학생운동이 성장했다. 1920년 5월 1천여 명의 학생들은 독서회 등의 교내조직을 바탕으로 조선학생대회를 결성했다. 조선학생대회는 중등학교 이상을 조직 대상으로 하여 주로 지.덕.체를 기르려는 학생계몽 단체였다. 그러나 일제가 탄압하고 서울사립중등학교 교장들이 단체활동을 막아, 결국 이 단체는 1923년 2월 전문학교 학생만으로 조선학생회를 새롭게 결성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사회주의를 널리 받아들이면서 경성학생연대(서울파), 서울학생구락부(북풍파), 조선학생과학연구회(화요파) 등 사회주의 학생단체가 만들어졌다.

 

학생단체가 만들어지면서 1920년대 각 학교에서는 일제의 식민교육에 반대하는 운동이 널리 일어났다. 학생들은 식민지의 열악한 교육조건 속에서 "조선 사람들을 해부학적으로 야만에 가깝다" 든가 "조선인은 망국인이다. 월사금이 30전이니 하루 1전어치면 된다"는 등 일본인 교원들이 저지르는 민족적 모멸감을 견뎌야 했다. 조선인 학생들은 민족 멸시와 열악한 교육 여건의 개선을 요구하며, 등교거부.수업거부.농성 등의 동맹휴교로 일제에 맞섰다.

 

1925년 11월 조직된 조선학생연구회는 조선공산당의 학생조직으로 순종 장례날을 맞아 전국적인 반일운동을 일으키려고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1926년 6월 10일 경성제대.연희전문.보성전문.중앙고보.중동고보.휘문고보 등이 학생을 동원하여 장례행렬이 지나가는 시내에서 과감하게 만세시위를 벌였다. 6.10 만세시위는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했지만 그 뒤 학생운동은 더욱 조직적으로 발전했다. 학교마다 사회주의 독서회, 비밀결사 등을 조직하여 동맹휴교을 이끌었다. 1920년대 후반 동맹휴교의 구호도 '조선어 교육'. '조선역사.지리교육', '식민교육 반대' 등을 내걸어 일제의 민족말살교육 자체에 저항하는 등 반일 성격을 분명히 했다.

 

1920년대 학생운동은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을 계기로 절정에 이르렀다. 10월 30일 광주에서 나주로 가는 통학열차 안에서 일본인 남학생이 조선인 여학생에게 모멸적 행위를 한 것이 도화선이 되어 이 사건은 성진회 등 비밀결사의 활동에 힘입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또 11월 3일 광주 학생들은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피억압 민족해방 만세" 등을 외치며 시위에 나서는 등 광주학생운동은 민족해방운동으로 발전했다. 이 운동은 곧바로 목포.나주를 거쳐 서울로 이어졌고, 해를 넘겨 1930년 새 학기가 되면서 전국 항일운동으로 번졌다. 광주학생운동은 전국 149개 학교에서 5만 4천여 명이 참가했고 투쟁 형태도 동맹휴교에서 가두시위로 옮겨 갔다.

 

1920년대 들어 노동.농민.청년학생운동 등 각 부문운동이 성장해 가는 가운데 여성운동도 활기를 띠었다. 비록 신민지 상황이지만 봉건제가 해체되고 여성들이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인식히면서 여성단체를 만들어 여성해방을 위한 사회운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1920~1922년 종교적.계몽주의적 성격을 띤 여성단체들이 먼저 만들어 지기 시작했다. 조선여자교육회.경성여자청년회.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YMCA).조선불교여자청년회 등 30개 남짓한 단체가 조직되었다. 1923년 이후에는 사회주의 영향을 받은 단체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1924년 5월 주세욱.허영숙.박원희 등 사회주의운동에 참여했던 여성운동가들이 '조선여성동우회'를 만들었다. 이어 1925년 1월 화요파는 경성여자청년동맹을, 서울파는 경성여자청년회를 각각 만들었다. 두 단체는 1926년 12월 '중앙여자청년동맹'으로 통합하여 '무산계급의 승리 및 여성해방을 위한 청년여자의 단결과 분투, 청년여자의 대중적 교양과 조직적 훈련'을 내걸고 활동했다. 이들 단체는 민족주의세력의 계몽주의 단체와는 달리 여성해방과 사회주의운동을 결합시키려 했다.

 

민족주의세력과 사회주의세력으로 나뉘어 있던 여성단체들은 1927년 신간회가 창립되면서, '조산여자의 공고한 단결과 지위 향상'을 목적으로 전국 범위의 '근우회'를 출범시켰다. 근우회는 기관지 <근우>를 발간하고 전국순회강연회 등을 통해 여성해방에 대한 인식을 확산시키는 한편, 노동.농민 등 사회운동에 적극 개입하면서 민족해방운동의 중요한 부분을 맡았다. 그러나 1931년 일제의 탄압으로 신간회가 해소되면서 근우회도 해체되고 말았다.

 

1923년 4월에는 도살과 고기 파는 일을 하던 '백정'이라는 특수직업인들이 자신들의 신분 차별과 사회적 멸시를 타파하려고 경남 진주에서 '조선형평사'를 조직했다. 형평사는 1927년 전국 곳곳에 지사와 분사 147개를 두고, 사원 7.581명을 거느린 대규모 전국조직으로 발전했다. 형평사는 이러한 조직을 바탕으로 백정의 인권운동에만 그치지 않고 사회 각 부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형평사는 일제의 탄압을 받아 점차 힘을 잃어갔다. 1920년대 노동.농민운동을 비롯하여 청년학생.여성.형평운동 등의 대중운동은 다양한 사회경제적 처지를 개선하려는 것이었지만, 일제의 억압과 수탈 구조 때문에 반일의 성격도 띠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들 운동은 민족해방운동의 폭을 넓히고 가혹한 식민통치 아래서도 민족해방운동을 이어가게 하는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