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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011 : 일제강점기 56 (신간회 운동)

 

 

 

한국의 역사 1,011 : 일제강점기 56 (신간회 운동)

 

 

 

 

 

           

 

 

 

 

신간회 창립과 활동

 

 

반일민족통일전선의 등장

 

1920년대 초반 민족해방운동의 주도세력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사회주의자들은 단일한 반일전선을 건설하려 했다. 1924년 4월 조선청년총동맹 임시대회에서는 "타협적 민족운동은 절대 배척하고 혁명적 민족운동은 찬성한다"고 했고, 북풍회는 창립 선언에서 "사회운동과 민족운동의 일시적 협동.제휴가 필요함"을 제기했다.

 

사회주의자들이 구체적으로 내놓은 '반일민족통일전선'에 대해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은 "해방전선에 두 진영이 나란히 나타난 것은 필연 또는 당연한 형세"라고 하며 사회운동과 "견고한 공동전선인 반일민족통일전선이 필요함"을 인정했다.

 

이러한 반일민족통일전선 논의는 조선공산당이 창건되면서 더욱 활발해졌다. 반일민족통일전선은 조선 사회주의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던 코민테른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 코민테른은 1920년 제2차 대회에서 '민족 식민지문제 테제'를 채택한 뒤 반제민족통일전선전술을 강조했다. 또 1924년 중국의 국공합작을 반제통일전선의 구체적 본보기로 들면서, 1926년 3월 '조선 문제에 대한 결정'에서 '통일적 민족혁명전선' 수립을 제시했다.

 

이 무렵 조선공산당은 천도교를 '국민당'의 기초로 할 것을 결의하고 천도교 구파의 권동진 등을 만나 민족운동과 사회운동 세력이 함께 행동하기로 합의했다. 반일민족통일전선을 건설하려는 두 진영의 노력은 1926년 11월 '정우회 선언'으로 촉진되었다. 정우회 선언에서는 "사회주의 운동의 파벌 투쟁을 극복하여 운동의 통일을 꾀하고, 경제투쟁을 정치적 형태로 비약시켜야 한다"는 방향 전환을 주장했다. 또 "민족주의세력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성질을 인식함과 아울러 동맹자적 성질을 인정하며, 그것이 타락하는 형태로 출현하지 않을 때에 한해서 적극 제휴해야 함"을 강조했다.

 

이 무렵 민족개량주의자들이 비밀리에 '연정회'와 같은 자지운동단체를 만들려 하자 반일민족통일전선으로서 신간회를 창립하려는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1926년 말에서 1927년 1월 사이 민족.사회 두 진영은 신간회 창립을 위한 발기인 모임을 거듭하면서 창립 준비를 서둘렀다.

 

 

 

 

신간회 조직과 활동

 

1927년  1월 조선공산당의 김준연.한위건.언론계 대표 신석우.안재홍.홍명희.기독교 대표로 이갑성.이승훈, 천도교 대표 권동진, 불교계 대표 한용운 등 27명이 발기인이 되어 신간회 결성을 발표했다.

 

1927년 2월 15일 서울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250명 남짓한 회원이 출석한 가운데 신간회 창립대회를 열었다. 이 날 대회는 방청인까지 더하면 1천여 명이 넘는 성황을 이루었다. 대회에서 회장에 이상재, 부회장에 홍명희를 뽑고 "우리는 정치적.경제적 각성을 촉진한다",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한다",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한다"는 강령을 내걸었다.

 

신간회는 단체 가입을 허용하지 않는 개인 본위의 조직이었으며 경성에 본부를, 군 단위에 지방지회를 두었다. 10개월 뒤에는 지회 100개를 돌파할 정도로 폭발적인 성원이 조성되었다. 지회 100개 돌파 기념식 뒤에, 본부의 개편과 일제의 탄압, 그리고 내부 분열과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지회조직과 회원 수는 계속 늘어 신간회가 해소될 때까지 1941년 5월 지회 수는 141개, 회원 수는 4만여 명에 이르렀다.

 

신간회는 창립 뒤 지회와 회원이 늘어나는데도 민족주의세력이 우세한 중앙본부에서 합법성을 지키는 데 힘을 쏟아 구체적인 활동을 하지 못했다. 이에 견주어 사회주의세력이 우세했던 지회에서는 일제가 "반항적 기운을 선도하고 민족적 반감을 유발한다"고 평가할 만큼 활동이 활발했다. 지회는 각 지방의 노동.농민운동과 크고 작은 사건에 직접 개입하여 민중의 이익을 대변하고 일제의 탄압과 수탈에 맞선다.

 

시간이 지나면서 일부 지회에서는 신간회가 단체가입을 배제하는 중앙집권적 조직 형태와 모호한 강령 때문에 정치투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노동자.농민 등으로 구성된 튼튼한 하부조직도 갖출 수 없다면서 조직 형태와 강령 개정을 요구했다. 특히 지회, 조선공산당, 코민테른은 조직 형태와 관련해 개인가맹제 대신 단체가입제를 요구했다.

 

일제 탄압으로 해마다 열기로 되어 있던 전국대회를 열 수 없게 되자, 1929년 6월 몇 개의 지방지회끼리 대표를 뽑아 정기대회를 대신하는 '복대표대회'를 열었다. 복대표대회로 신간회의 강령과 규약을 개정하고 간사제를 중앙집행위원제로 바꾸고 지역연합기관으로 도연합회를 두고 지회를 분회로 세분하여 직업별.지역별 조직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또 집행부도 크게 개선되어 허헌을 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는 등 사회주의자들이 적극 진출하여 새 집행부 가운데 46%를 차지했다. 그러나 신간회 조직 강화를 목적으로 제기되었던 단체가입제는 채택되지 못했다.

 

복대표대회를 계기로 활기를 되찿은 신간회는 그뒤 여러 사회문제에 개입하여 반일 정치투쟁에 나섰다. 1929년 원산총파업 때 원산지회가 적극 개입하여 노동운동을 지원했고, 전라남도 소작쟁의 사건, 함경남도 수력 발전소 매입지구 토지상환사건 조사단 파견, 1929년 7월 21일 함경남도 단천산리조합시향령 반대 등 여러 쟁의나 사회문제에 대해 적극 개입하여 민중의 권익을 옹호했다. 특히 산간회는 1929년 7월 일제가 아무 까닭 없이 갑산화전민 부락을 불지르고 화전민을 추방하는 데 항의해 진상보고 연설회를 열었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신간회는 곧바로 조사단을 구성하여 대표를 광주에 보냈다. 광주학생운동의 항일 열기를 전국 형태의 시위로 확산시키려고 12월 13일 '민중대회'를 열 계획이었으나 이를 미리 알아챈 일제가 민중대회가 열리기 8시간 전에 허헌.홍명희 등 신간회 간부 44명을 체포하는 바람에 대회는 무산되고 말았다.

 

민중대회 사건 뒤 신간회는 김병로를 위원장으로 하는 새로운 집행부를 갖추고 신간회의 비타협적인 투쟁을 비판하고 타협노선을 적극 옹호하는 인물들이 많이 참여했다. 그러면서 신간회의 노선도 빠르게 우경화되어 갔다. 새 집행부는 "종래의 신간회 운동이 쓸데없이 관헌과 항쟁.대립하여 그 억압을 받게 되어 하등 조선민족을 위하여 공헌하는 것이 없음"을 반성하자고 하며 자치운동파와 손을 잡자고 주장했다.

 

이에 각 지회들은 새 집행부의 주장에 크게 반발했고 이것은 사실상 신간회를 해체하게 될 '해소론'이 등장하는 배경이 되었다. 

 

 

 

 

신간회 해소와 역사적 의의

 

 

신간회 해소

 

신간회 해소는 코민테른의 노선 변화에 큰 영향을 받았다. 코민테른은 1927년 4월 장제스 군대가 쿠테타를 일으켜 중국 국공합작이 깨어지자 '식민지 반제민조통일전선'에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되었다. 그 뒤 열린 1928년 크민테른 6차 대회는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에서 민족부르주아는 큰 역활을 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이들과 투쟁해야 한다는 '계급 대 계급' 투쟁 전술을 내걸었다. 코민테른과 산하 조직에서는 신간회를 민족개량주의 단체라고 못박았다.

 

이것은 조선 사회주의자들이 신간회 해소를 주장하는 한 근거가 되었다. 1930년 5월 사회주의자 고경흠은 "민족주의 그룹은 민족개량주의파와 좌익민족주의파로 나뉘었지만, 반제.반봉건투쟁에서 혁명노선인 공산주의를 반대할 때 남는 것은 자치주의의 길뿐이기 때문에, 이 두 파는 결국 국민혁명에서 개량적인 노선의 쌍둥이일 뿐"이라고 하면서 신간회를 곧바로 해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코민테른의 노선 변경은 민중대화 사건 뒤 국내 정세와 맞물리면서 신간회 해소를 서두르게 했다. 1930년 12월 6일 부산지회에서 신간회 해소론이 처음으로 결의되었다. 뒤이어 함남의 이원.평양.경서.인천.단천.성진.칠곡.서울 등지의 지회에서도 해소를 결의하였다.

 

해소론자들은 신간회를 만든 근본 정신인 비타협주의가 무시되고 도리어 개량화했다고 주장했다. 또 신간회가 개인가입제의 중앙집권적 정당조직 형태이기 때문에 민중의 계급 이익을 옹호할 수 없고, 강령도 구체적 운동지침이 없어 투쟁의식을 말살시키고 있다고 했다. 그리하여 해소론자들은 해소는 한 조직체의 해산을 뜻하는 '해체'와 다른, 한 운동에서 다른 형태의 운동으로 전환하는 자기발전을 뜻한다"고 했다. 언어를 이용한 교묘한 전략이랄까?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은 해소를 비판하거나 보류하자는 태도를 보였다. 이들은 "신간회 이상으로 진보적인 조직 형태가 나타나기까지 해소애서는 안 된다"거나 "신간회가 결집시키고 있는 대중적 역량을 분산시키지 않고 재조직하기까지 해소해서는 안 된다"는 현실론을 내세웠다.

 

해소론을 두고 의견이 갈리는 가운데 김병로 집행부는 해소론을 반대하고 신간회를 유지시키려고 일제의 허가를 받아 1931년 5월 16일 창립대회 후 처음으로 마지막 전체회의를 열었다. 일본경찰이 찬반토의를 금지시킨 가운데 해소안은 대의원 76명 중 찬성 43, 반대 3, 기권 30으로 가결되었다. 결국 사회주의자들의 의도대로 결정되고 말았다.

 

 

 

역사적 의의

 

해소결의안이 통과되는 뒤 대회에서는 "앞으로 해소운동에 대한 구체적인 선언, 방침 발표는 신임 중앙집행위원회에서 결정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 대회는 끝내 신간회 해체대회가 되고 말았다. 해소론자들은 해소를 해체와 구별했지만, 일제가 해소 뒤 어떠한 집회도 허용하지 않아 실제로 해소대회는 해체대회가 되고 말았다.

 

일제의 탄압과 우경화 된 민족개량주의자들의 방해로 신간회 조직이 타격을 받아 활동이 침체되고 우경화 되어 갔지만,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진영이 함께 일제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대중적 합법공간을 스스로 허물어뜨린 것은 잘못이었다. 또 신간회 해소는 반제투쟁의 주요한 역량인 비타협적 민족주의세력이 구심점을 잃고 그 뒤 분산.고립되어 일부가 친일의 길을 걷는  한 원인이 되었다. 신간회는 1920년대 중반 새롭게 발흥하는 사회주의세력과 비타협적인 민족주의세력의 힘을 합쳐 결성한 최초의 '반일민족통일전선'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를 찿을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