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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012 : 일제강점기 57 (일제의 전시체제와 식민지 지배정책 1)

 

 

 

 

한국의 역사 1,012 : 일제강점기 57 (일제의 전시체제와 식민지 지배정책 1)

 

 

 

 

 

           

 

 

 

 

세계공황과 일제의 지배정책

 

 

세계공황과 일제

 

1929년 세계자본주의의 중심국인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공황은 수많은 생산시설을 멈추게 하면서, 1차 세계대전 뒤에 안정되오던 자본주의체제를 뒤흔들었다. 상품이 한쪽에서는 썩어 가는데도 기계가 멈춘 공장 밖에서는 수많은 굶주린 실업자가 거리로 내몰렸다. 공황은 미국 증권가에서 주식가격이 폭락하면서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그 근본 까닭은 가본주의 자체 모순 때문이었다. 미국은 국가가 경제에 개입하여 유효수요를 창출하는 이른바 '뉴딜정책'으로 산업을 재건하고 수요를 늘림으로써 실업문제 해결하려고 했다. 또 영국과 프랑스는 식민지와 식민지 모국을 묶는 블록경제를 만들어 공황의 위기를 벗어나려 했다. 후발 자본주의 국가인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즘 세력은 대외침략을 통해 위기를 벗어나려 했다.

 

세계공황은 후발 자본주의국가였던 일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차 세계대전 동안 급격히 발전된 생산력을 바탕으로 경제호황을 누렸던 일본경제는 전쟁이 끝나자 판매시장을 잃어 버리고 만성적인 불황에 빠졌다. 공황으로 생사를 비롯한 상품 수출이 크게 줄고 많은 공장이 문을 닫았으며, 실업자가 크게 늘어났다. 농업공황도 심각했다. 실업자들이 도시에서 농촌으로 돌아오고 누에고치와 쌀 값이 크게 떨어지는  가운데 지주들은 농민을 더욱 수탈했다. 일본 농가소득이 1926년에 견주어 1931년에는 50~60%나 줄어들 만큼 농촌경제가 무너져 내렸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노동자와 농민들의 투쟁이 많이 일어났다.

 

공황의 여파로 위기가 깊어진 일본 독점자본은 자본 수출을 확보하려고 일본.조선.만주 블록체제를 만들어 공황에서 벗어나려 했다. 일본은 1931년 만주 침략을 계기로 군수 부문과 만주에 자본을 투자하면서 중화학공업화로 나갔으며, 한동안 불황을 어느 정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러나 만주 투자에 기대를 걸고 있던 중화학공업화는 제품과 원료를 여전히 미국과 유럽에서 들여왔으므로 큰 무역적자를 낳았다. 무역적자가 커지자 일제는 군수공업을 바탕으로 하는 중화학공업을 키워 적자를 줄이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려고 침략전쟁을 계획했으며, 마침내 1937년 중일전쟁, 그리고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억압기구 강화와 사상 통제

 

1930년대 초 일제는 식민지 조선민중을 탄압하고 만주로 진출하려는 사전작업으로써 경찰력과 군사력을 늘렸다. '문화정치'때 2개 사단이던 조선주둔 일본군을 만주사변 뒤에 1개 사단을 더 늘려 3개 사단이 되었다. 차츰 군사력을 강화하여 태평양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23만 명 남짓 군대를 두었다. 만주사변 뒤 경찰은 치안을 유지하고 전시물자를 동원하는 임무까지 맡았다. 일제는 경찰조직을 보조하고 조선민중을 더욱 통제하려고 지방 '친일공공단체'를 할용했다. 그래서 일제는 관변 청년단체.자경단.경방단.방공단.재향군인회 등 반관반민 단체를 이용하여 경찰 임무를 보조하도록 했다.

 

일제는 1930년대 초반 일본에서 공산주의자를 검거하는 데 효과를 본 '경무관' 제도를 조선에도 실시했다. 이것은 경무관이 사상운동 탄압을 전문으로 맡아 지방 경찰과 중앙의 보안과를 밀접하게 연결시키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일제경찰이 통일적인 공조체제를 마련한 것은 조선 곳곳에서 혁명적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이 일어나고 있었고, 사회주의운동도 생산현장과 결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제는 1932년 '사상결찰망'을 크게 늘려 사회주의운동이 노동자, 대중과 결합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던 것이다.

 

일제는 군대.경찰.사법기관 같은 억압기구와 그 밖의 보조기관을 통해 민중을 옥죄는 한편, 사상마저 철저하게 통제하려고 했다. 일제는 '치안유지법'을 비롯한 '사상통제법'으로 민족해방운동가와 대중을 분리시키려 했으나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1930년대 전반기부터 '사상선도'를 빌미로 운동가들에게 사상전향을 강요했다. 1936년에는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을 만들어 사상전향을 강요했다. 일제는 경성.함흥.청진.평양.신의주.대구.광주 등 7곳에 '보호관찰소'를 마련하고 사상범들을 보호관찰대상으로 삼아 '국제의 본의(本義)'를 몸에 익히라고 강요했다. 또 일제는 전향자에게 형을 감면, 면제해 준다고 선전하면서, 가족을 통해 비전향자들을 압박하기도 했다. 1930년에서 1935년 사이에 사상사건으로 일제에 체포된 조선인은 약 1만여 명에 이르렀다.

 

 

 

 

지방자치 정책

 

일제는 식민지 지배체제를 안정되게 유지하려면 자치제가 필요하며, 자치제를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자치운동이 일어난다면 조선의 민족해방운동을 분열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일제는 허울뿐인 '자문기구'를 만든 뒤 조선인에게 '참정권'을 주겠다고 하면서 일부 조선 자산계층을 끌어들여 식민지 지배체제를 돕는 세력으로 이용하려 했다. 이러한 일제의 구상에 발맞추어 1920년대부터 '자치운동'을 벌였던 '민족개량주의자'들은 자본가, 천도교 신파와 <동아일보> 간부들을 중심으로 '자치운동'을 다시 벌였다. 이들은 자본이 성장하려면 최소한의 정치적 권리를 가져야 하며, 일제가 조선을 지배하는 것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일제 권력과 타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일제는 조선인에게 '자치의회나 참정권'을 주는 것은 아직 이르다고 생각하고, 1930년 말 지방지치 문제를 단순한 지방제도 개정으로 매듭지었다. 이것은 자문기관의 성격만을 가지고 있던 도평의회.부협의회.면협의회 등을 형식적인 의결기관인 도회.부회.면회로 바꾸는  정도의 지방제도 개혁이었다. 민족개량주의 기관지나 다름없었던 <동아일보>는 조선인으로서 최선 또는 최강한 항의를 주장할 만한 자들을 뽑아 부의원으로 내보내는 것이 오늘날 가장 타당한 문제다"(1931.5.21)라고 하면서 일제의 정책을 지지했다. 지방행정에 참여한 자본가나 지주 출신들은 부.읍.면의 공사를 맡거나 금용기관을 쉽게 이용하는 등 이권과 특권을 받을 수 있었다.

 

자치운동을 펼쳐 나갔던 조선인들은 '전시체제'가 되자 총독부 동원기구에 참여해 조선인을 동원하는 데 적극 앞장섰다. 도회의원이던 김갑순.민규식.방의식.현준호 등은 '임전보전국회', '황도선양회' 등 갖가지 '일제동원기구'의 간부를 맡아 온갖 친일행동을 서슴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