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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966 : 일제강점기 11 (구국계몽운동 2)

 

 

한국의 역사 966 : 일제강점기 11 (구국계몽운동 2)

 

           

 

 

 

구국계몽운동 2

 

 

4. 민족교육운동, 종교운동

 

개항 직후부터 일기 시작한 근대교육의 열기로 경향 각지에서 사립학교가 세워지기 시작하였고, 갑오개혁 때에는 교육입국의 조서가 발표되면서 서양식의 근대교육 제도가 도입되어 각종 관립학교가 세워졌다.

 

근대민족교육이 절정에 이른 것은 을사늑약 이후부터였다. 이제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되찿는 길은 장기적으로 교육을 통하여 애국적인 인재 양성밖에 없다는 자각이 널리 퍼지면서  확산되엇다.

 

선각적 지식인과 자산가들 사이에서도 '배우는 것이 힘이다'라는 구호가 유행할 만큼 앞다투어 학교설립에 나섰다. 교육을 중시하는 것은 조선왕조의 오랜 전통이기도 하지만 그 전통이 구국적 애국심과 연결되어 폭발적인 교육열기를 몰고 온 것이다.

 

그리하여 불과 3~4년 사이에 전국적으로 3천여 개의 사립학교가 세워졌는데, 대부분은 서울에 집중되었으나, 평안도의 평양, 정주, 선천 등지에 많은 학교가 세워진 것이 눈길을 끈다. 이것은 이 지방에 자산가층과 기독교인들이 많은 것과 관련이 깊다.

 

을사늑약 이후 세워진 사립학교 가운데 오늘날까지도 명문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학교들은 1905년의 '양정', 1906년에 세워진 '보성', '진명', '숙명'(엄귀비), '중동', '휘문', 정주 '오산'학교 등이다. 특히 서울에는 황실과 관련이 깊은 인사들이 세운 학교가 많은 것이 주목된다. 이는 대한제국이 황실재정의 일부를 근대교육에 투자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한말 사립학교의 교육내용은 서양의 학문, 사상(신식학문)과 우리나라의 역사와 지리가 중심을 이루었다. 즉 민족교육과 서양의 신학문을 병행시킨 '동도서기적 교육'이라 말 할 수 있다. <애국가>와 <권학가>가 애창된 것도 이 시기였다. 그리고 이에 따라 각급 학교의 교과서들이 편찬되었다.

 

일본은 이러한 교육열이 항일운동과 연결된다는 것을 깨닫고 이를 탄압하는 일에 나섰다. 1908년에 '사립학교령'을 만들어 통감부의 인가를 받도록 하고 교과서도 검정을 받은 것만 사용하도록 통제하였다. 배일적 내용을 담은 교과서은 금서로 지목되어 이를 사용할 경우 처벌을 내렸다. 

 

한편, 구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서 종교운동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당시 종교운동으로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것은 기독교였다. 이미 개항 직후부터 미국선교사들의 활약으로 개화파인사들 사이에 기독교인의 수가 부쩍 늘었는데, 특히 서북지방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이 지방은 유학의 뿌리가 약할 뿐 아니라 상공인 세력이 상대적으로 강하여 자본주의  문명과 결합된 기독교를 한층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당시 저명한 기독교인 개화사상가들은 서재필, 이상재, 윤치호 등을 들 수 있다. 서울의 기독교인들은 1903년 '황성기독청년회'(YMCA의 전신)를 조직하여 시민들의 애국심과 근대사상을 주입시키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벌였는데, 그 영향을 받은 청년 중에 적지 않은 애국지사들이 배출되었다.

 

민족종교로 창도된 동학은 일본의 가혹한 탄압과 회유정책으로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다. 동학교인 이용구가 친일단체인 '일진회'와 '시천교'(1907)를 창시하여 동학의 전통을 왜곡하게 되자 동학혁명 당시 북접의 지도자였던 손병희(3세 교주)는 이에 대항하여 '천도교'(1906)를 창설하여 정통성을 이어가면서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손병희는 이용익과 더불어 보성사라는 출판사를 차리고, 이용익이 세운 보성학교를 인수하고 동덕여학교도 인수했다. 또한 <만세보>라는 기관지를 발행하기도 하였다.

 

유교계에서도 유학의 약점을 버리고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이념에 적합한 부분을 극대화하여 새로운 민족종교로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유교구신론>(1909)을 쓴 박은식은 그 대표적인 인사로서, 공자의 '대동주의'와 맹자의 '민위중설'을 발전시켜 민주적.평등적 종교로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유교개혁주의자들은 서민적이고 실천성이 강한 양명학에도 주목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들 가운데서 김택영, 박은식, 정인보 등 애국적인 역사가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불교계에서도 한용운(1879~1944)이 나와 일본불교의 침투에 대항하면서 민족불교의 자주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가 쓴 <불교유신론>(1913)은 불교를 한층 현대적이고 사회개혁적인 방향으로 개혁하려는 의도를 담은 것으로 한용운은 뒷날 3.1`운동에 주동적으로 참여하였다.

 

한말의 종교운동으로서 특기할 만한 것은 1909년에 창립된 단군교(뒤에 대종교로 개칭)였다. 을사늑약에 참여한 대신들을 응징하려다 실패한 일이 있었던 나철, 오기호, 이기(호남학보 발행) 등 호남 출신 지식인들은 예로부터 민간신앙으로 전해오던 단군신앙(선교 혹은 신교)을 현대종교로 발전시켜 국수주의 성향이 가장 강한 종교운동을 전개하였다. 단군교는 일제의 탄압으로 이름을 대종교로 바꾸었으나, 1910년대에는 많은 애국지사들이 여기에 가담하여 간도, 연해주 등 해외 항일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으며, 그 신도수는 20만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단군교를 일본의 신도와 일치시키고, 단군을 일본의 천조대신과 형제로 해석하여 친일에 이용하기도 하였다.

 

일본은 이러한 종교운동을 억누르기 위해 '대동학회'(1907)라는 유교단체, '동양전도관'이라는 기독교단체, '본원사'라는 불교단체 등을 세워서 친일적인 종교로 유도해 나갔다. 이에 따라 종교계에도 친일파와 민족주의자의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5. 국학운동과 신문학운동

 

구국계몽운동은 국사와 국어를 연구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려는 국학운동으로도 나타났다. 이미 학교교육에서도 민족교육이 강조되었지만, 신문.잡지와 같은 언론기관도 국학에 관한 많은 글을 실어 국민계몽에 앞장섰다.

 

국어 분야에서는 국한문이 병용되는 추세에 따라 국문표기방법을 통일할 필요가 생겨서 이 방면의 연구들이 나타났다. 유길준의 <조선문전>(1895)에 이어 이봉운의 <국문정리>(1897), 지석영의 <신정국문>(1905), 주시경의 <국어문법>(1906)과 <말의 소리>(19124) 등이 이러한 필요에서 저술되었다.

 

한편, 1907년에는 최초로 학부 안에 국문연구소가 설립되어 여러 학자들이 국어정리에 참여하였는데, 주시경, 지석영 등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이 기관이 뒷날 '조선어학회'의 모체가 되었다.

 

국사 분야에서는 갑오개혁이후 근대학교가 설립되면서 각종 국사교과서도 펀찬되엇다. 이때 교과서펀찬에 참여한 이는 장지연.김택영.현채 등이었는데, 그 내용은 대체로 안정복의 <동사강목>을 서양식 역사서술체계에 맞추어 축약한 것이었다. 이를 '신사체'라 불렀다. 그러나 이때부터 일본인이 쓴 왜곡된 한국사 서술의 영향을 받아 임나일본부의 설치와 신공황후의 신라정벌을 인정하는 등 문제점도 많이 나타났다.

 

국사교과서의 친일성향을 맹렬히 비난하면서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새로운 근대사학을 성립시킨 이는 신채호였다. 그는 을지문덕.강감찬.최도통(최영 장군).이순신 등 애국명장에 대한 전기를 써서 애국심을 고취하고, <독사신론>(1908) 등의 사론을 발표하여 만주와 부여족(단군족)을 중심에 둔 새로운 역사체계를 세우기 시작하였다. 이는 중국 동북지방에 독립운동기지를 두려는 목적과 관련된 역사의식을 말해준다.

 

한국사뿐 아니라 세계사에 대한 관심도 컸다. 특히 서양에서 근대 민족국가 성립을 주도한 영웅들에 대한 관심에서 스위스의 건국을 그린 <서사건국전>, 미국독립을 그린 <미국독립사>, 이태리독립을 그린<의대리독립사>와 <이태리건국삼걸전>, 독일 통일을 가져 온 비스마르크의 전기인 <비사맥전> 그리고 러시아 근대화를 이룩한 피오트르 대제 전기인 <피득대제> 등이 펀찬되고, 베트남과 폴란드의 망국에 대한 역사책도 나오게 되었다.

 

한편 민족고전을 출간하여 민족의식을 높여 주려는 출판활동이 전개되었다. 최남선이 조직한 '조선광문회'에서 실학자들의 저술을 간행하기 시작한 것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문학 분야에서는 서양의 소설과 시의 형식을 따르는 이른바 신소설과 신체시가 나타났다. 그 내용은 자유.평등.미신타파 등 근대사상을 고취하면서 순국문으로 쓰여져 형식면에서 근대적인 문학의 모습을 띠어 갔다. 신소설의 개척자는 이인직으로서 <혈의 누>, <귀의 성>, 치악산> 등의 작품을 남겼다. 이밖에 안국선은 <금수회의록>, 이해조는 <자유종>, 최찬식은 <추월색> 등을 썼다. 신체시운동의 선구자는 최남선으로 <소년>지에 발표한 <해에게서 소년에게>라는 신체시는 현대시의 효시를 이룬다.

 

그러나 신문학은 자주성보다 근대성을 적극 추구하면서 점차 친일문학으로 흘러갔다. 이에 반하여 전통적인 한문학을 계승하면서 자주정신을  고취하는 또다른 문학풍조가 있었다. 신채호가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한 <천희당시화>를 비롯하여 국내.국외의 위인들의 전기를 엮어낸 것이 그 대표라 할 수 있다. 이 흐름은 1910년대에 들어와 꿈의 형식을 빌어 애국심을 고취하는 각종 '사화(史話)식 소설'로 발전되어 갔다.

 

한편,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전통을 계승하여, 여기에 애국심과 근대정신을 담으려는 노래가 유행하였다. 이른바 '창가'라고 불리는 노래 가운데에는 <독립가>, <권학가>, <한양가> 등이 널리 애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