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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965 : 일제강점기 10 (구국계몽운동 1)

 

 

 

한국의 역사 965 : 일제강점기 10 (구국계몽운동 1)

 

           

 

 

 

구국계몽운동 1

 

 

1. 구국계몽운동의 두 흐름

 

을사늑약을 전후하여 지방유생과 평민들의 항일의병전쟁이 격렬하게 전개되고 있을 때, 서울 및 지방도시의 자산가, 지식인, 관료, 그리고 개혁적 유학자들은 교육, 언론 등 문화활동과 산업진흥을 통해 문화.경제적 실력을 양성함으로써 국권을 회복하려는 평화적인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계몽운동가들은 당시의 국제정세를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원리가 지배하는 치열한 힘의 각축시대로 인식하여 부국강병한 나라를 만드는 것을 급선무로 생각하였다. 그들은 제국주의 이론을 뒷받침하고 있던 스펜스의 사회진화론을 수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구국계몽운동은 실천방법을 둘러싸고 크게 두 개의 흐름으로 갈라졌다. 하나는 실력양성이 선행되어야 궁극적으로 독립을 달성할 수 있다고 믿는 부류이고, 다른 하나는 독립이 선행되어야 실력양성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는 부류였다. 전자는 온건적인 독립운동을 추구하는 국내파로 일제의 회유와 압력에 의해 점차 친일파들로 변질되어 갔으며 후자는 급진적인 독립운동가들로 해외파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독립보다 실력양성을 앞세우는 부류는 변법개화사상을 게승한 인사들로서 서양의 자유, 평등, 민권사상을 선호하면서 서양식근대국가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이 부류의 인사들은 일본을 우호적으로 바라보고 일본의 통감정치를 오히려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우리나라를 문명국가로 발전시킬 수 잇는 좋은 기회로 믿었다. 그리하여 일본과 협력하는 길을 찿고, 의병전쟁은 나라를 망하게 하는 비문명적인 폭력으로 비난하기도 하였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될 수록 결국 친일파로 전락해갔다. 일진화가 그 대표적인 단체이다.

 

한편 실력양성보다 독립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ㅜ류는 혁신적 유학자불신의 지식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읻르은 위정척사사상을 계승하면서 서양문물을 부분적으로 채용하여 부강한 국가를 건설하려는 동도개화파 계열의 사상가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유교의 폐단을 비판하면서도 유교문화를 새롭게 혁신하여 계승해야 한다고 믿었고, 우리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컸다. 이들은 일제의 침략성을 폭로, 규탄하면서도 민족주의사상을 퍼뜨리는 데 충력을 기울였다. 대체로 <황성신문>이나 <대한매일신보> 계열의 인사들이 이 부류에 속하였다. 일제의 침략과 탄압이 가속화되면서 이 부류 인사들은 지하운동으로 숨어들었다가 1910년 이후에는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1907년에 조직한 신민회는 그 대표적인 단체이다.

 

 

 

2. 정치, 사회단체의 활동

 

독립협화가 해산된 뒤 정치적 사회단체를 다시 만들어 구국계몽운동의 선봉에 선 것은 1904년에 송수만, 심상진 등이 조직한 '보안회'였다. 이 단체는 일본이 '황무지개척'을 구실로 토지를 약탈하려 하자 대중적인 반대운동을 일으켜 이를 철회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일본의 압력으로 곧 해산되었다.

 

1905년에는 윤효정, 이준, 양한묵 등이 '헌정연구회'를 조직하여 의회제도를 중심으로 한 입헌정치의 수립을 목표로 활동하였으나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정치집회를 금지하자 해산당하였다.

 

헌정연구회를 이끌었던 윤호정이 장지연, 심의성 등과 함께 1906년 4월에 조직한 것이 '대한자강회'였다. 교육개발과 식산흥업, 외세배격 등을 내걸었다. 이 조직은 전국에 25개 지회를 두고, 월보를 간행하는 등 활동을 넓혀갔는데, 통감부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하였다(1907.7). 이 단체는 일본인 요가키를 고문으로 앉히고 활동하였는데, 1907년에 해산되자 다시금 천도교의 오세창, 권동진 등과 합세하여 '대한협회'(19807.11)를 조직하였다. 이 조직은 전국에 70개 소에 지회를 둘 정도로 그 세력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통감부 통치를 문명지도로 긍정하면서 그 속에서 의회정치, 정당정치구현에 목표를 두고 있어 친일적인 색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는 독립보다 민주화와 실력양성을 중요시하다가 구국계몽의 목표를 상실하고 말았던 것이다.

 

정치단체들이 일제의 탄압으로 활동이 위축되면서 교육과 식산흥업에 역점을 둔 각종 학회가 전국 각지에서 조직되었다. 평안, 황해도의 '서우학회', 한강 이북지방의 '한북흥학회', 경기도와 충청도의 '기호흥학회',  전라도의 '호남학회', 강원도의 '관동학회' 등이 대표적인 학회였다. 이 학회들은 기관지를 발행하여 애국사상과 민족사상을 고취시키고 사립학교를 세워 애국지사를 양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이름은 학술단체지만 실제로는 국권회복을 목표로 한 정치, 사회단체와 다름이 없었다.

 

한말의 정치.사회단체 중 끝까지 친일을 거부하고 실력양성의 실효를 거둔 것은 '신민회'(12907.4)였다. 안창호, 양기탁, 이동휘, 이승훈 등 평안, 함경도 출신의 실업인, 지식인, 종교인과 신채호, 이동녕 등 충청도 인사들이 비밀결사로 조직한 신민회는 한편으로 민족자본을 육성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교육, 문화사업을 통해 국민들의 민족의식과 민주의식을 고취시키는 일을 병행했다. 그리하여 평양에 '대성학교', 정주에 '오산학교', 그리고 평양과 대구에 '태극서관'을 설립하여 교육, 출판사업을 벌이고 , 인격수양단체로서 '청년학우회'를 조직하였으며, 평양 근교에 자기회사를 설립하여 운영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국권상실이 기정 사실로 되면서 회원들 사이에 실력양성에 주력하려는 온건파와 무장투쟁을 주장하는 경경파 사이에 노선 갈등이 일어났다.  안창호를 중심으로 하는 실력양성파는 나락 망한 후 미구으로 건너가 '흥사단(1913)'을 조직하여 무실역행의 문화운동을 계속하였으며, 이동휘를 대표로 한믄 무장투쟁파는 중국 동북지방과 연해주로 이주하여 독립기지를 건설하고 무장독립투쟁을 전개하엿다. 그리고 국내에 남아 있던 인사들은 일본이 조작한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에 연루되어 탄압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105인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져 흔히 '105인 사건(1911)'이라고도 부른다.

 

 

3. 언론활동과 국채보상운동

 

국민들의 구국정신을 계몽하기 위해서는 언론기관과 교육기관의 설립이 필요하였다. 이에따라 많은 신문이 발행되었고 학교들이 설립되었다.

 

먼저 구국계몽운동에 앞장섰던 신문으로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제국신문', '만세보' 등을 들 수 있다. 1898년 남궁억 등이 창간한 황성신문은 동도개화파의 대변자로서 국한문혼용체로 발간되었다. 한문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이 주로 구독하였는데, 서양지식의 보급보다는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주력하여 항일의 선봉에 섰다. 을사늑약이 발표되자 이 신문은 장지연이 쓴 '오건조약체결전말'과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유명한 논설을 실어서 일제침략과 매국관료에 대한 국민들의 비분강개한 의사를 대변하였다. 황성신문이 발행되던 해(1898)에 이종일 등이 순 한글로 간행한 것이 제국신문으로서 정치적 논설보다는 일반대중을 위한 사회계몽기사를 많이 실었다.

 

일본의 검열을 피하면서 구국계몽운동의 실효를 거두기 위하여 양기탁이 영국인 베델을 발행인으로 초빙하여 만든 것이 <대한매일신보>(1904)이다. 당시 영국은 일본과 동맹을 맺고 있었으므로, 영국인이 경영하던 신문사에 검열을 가할 수가 없었다. 이 점을 이용하여 이 신문은 일본의 침략행위와 일부 한국인의 매국행위 그리고 항일운동을 낱낱이 보도하였다. 특히 신채호, 박은식 등이 쓴 애국적인 논설은 독자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고종이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폭로하는 친서를 발표한 것도 이 신문이었다. 양기탁이 신민회를 조직하면서 이 신문은 신민회의 기관지가 되었다.

 

이 신문은 처음 국한문 혼용으로 간행되엇으나, 뒤에는 일반대중을 위하여 순한글판을 발간하였고, 외국인을 위한 <The Korea Daily News>도 간행하였다.

 

1906년에 손병희, 오세창 등 천도교측에서 발행한 <만세보>는 국한문 혼용체 신문으로서 일진회 등의 매국행위를 주로 비난하였으며, 이밖에 장로교 계통의 <그리스도신문>, 천주교 계통의 <경행신문>(1906, 주간지), 그리고 대한협회의 기관지인 <대한민보>(1909)도 계몽운동에 참여하였다. 한편 해외에서는 미국교민이 <신한신보>를, 연해주교민이 <해조신문>을 각각 발간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일본은 한국 언론의 구국계몽활동에 당황하여 <한성신보>, <국민신보>(일진회기관지), <경성일보> 등 친일신문을 발행하여 대응하였으나 실효가 없자 제도적으로 민족언론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통감부는 이른바 '신문지법'(1907.7)을 공포하고, 이어 '출판법'(1909.2)을 제정하여 모든 출판물의 원고를 사전에 검열하였다.

 

한말의 민족언론이 일으킨 구국계몽운동 가운데 한가지 특기할 것은 '국채보상운동'(1907)을 주도한 일이었다. 정부가 일본으로부터 빌어온 차관이 1,300만 원에 달해 빚더미 위에 올라서자, 이를 상환하여 경제적 독립을 이룩하기 위해 1907년 대구에서 '국채보상기성회'가 조직되었고, 당시 민족언론들이 모금운동을 일으키면서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국민들은 이에 호응하여 남자는 담배를 끊고 절약한 돈으로 모금에 참여하고, 부녀자들은 비녀, 가락지 등을 팔아서 이에 호응하였다. 그러나, 이 운동은 통감부가 배일운동으로 간주하여 그 지도자인 양기탁을 구속하는 등 탄압을 가하여 중지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