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한국의 역사 964 : 일제강점기 9 (항일의병운동)

 

 

 

한국의 역사 964 : 일제강점기 9 (항일의병운동)

 

           

 

 

 

항일의병전쟁

 

 

1. 을사늑약(1905) 전후의 의병항쟁

 

을사늑약을 계기로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이에 분노한 국민들의 항일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서울에서는 언론이 앞장서서 국민의 여론을 환기시키고 집단시위와 철시가 행해졌다. 정부 관료 중에는 분함을 참지 못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가 나왔다. 고종의 시종무관이던 민영환이 국민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목숨을 끊은 데 이어 좌의정 조병세, 홍영식의 형이며 전 참판인 홍만식, 전 대사헌 송병선, 학부 주사 이상철, 황현 등이 음독자살하여 국민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다.

 

한편 무장집단을 조직하여 적극적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의병부대들이 전국 각지에서 형성되었다. 그들은 일본군과 시설을 공격하는 한편, 친일파 인사들을 응징하기도 하였다.

 

을사늑약 이전의 러일전쟁기에도 을미의병의 전통을 계승한 원주의 원용팔, 단양의 정운경, 김도현, 유인석, 허위, 이강년, 장성의 기삼연, 이인영 등의 의병활동이 있었지만 을사늑약 이후에는 민종식, 최익현, 정용기, 신돌석, 임병찬 등의 의병부대가 새로이 조직되어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전 참판인 민종식은 충남 내포지방에서 1천여 명의 의병을 규합하여 100여 명의 일본군을 사살하였고 홍주성을 점령하였고, 최익현과 전 군수 임병찬은 전라북도에서 9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태인, 정읍, 순창 등지에서 활약하다가 패하여 대마도로 유배당하였으며, 경상북도 영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정용기는 600여 명으로 산남창의진을 편성하고 청하, 청송지방에서 활약하였다. 평민 출신의 의병장이었던 신돌석은 경상북도 영해에서 300여 명의 농민을 모아 봉기하였는데, 강원도, 경상도의 해안지역을 무대로 활약하면서 3,000여 명의 대부대로 성장하여 일본군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의병활동이 치열했던 곳은 전라, 충청, 경상도 지방으로서 그 지도자는 유교를 숭상하는 전직관료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그 밑에는 농민들이 전투병력의 주축을 이루고 있었으며, 광무년간에 활동하던 동학당, 영학당, 화적, 활빈당 등의 무리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2. 군대해산 후 의병항쟁(1907~1910)

 

을사늑약 후의 의병항쟁을 한층 고양시킨 것은 1907년의 군대해산이었다. 대한제국의 기간부대였던 서울의 시위대와 지방의 전위대 군인들은 군대해산에 반대하여 일본군과 시가전을 벌이기도 하였으나 무기가 떨어지자 지방의 의병부대에 합류하였다. 그 중에서도 원주진위대와 강화분견대의 투쟁은 가장 치열하였다. 김덕제와 민긍호가 이끈 원주진위대의 군인들은 근대적인 무기로 무장하고 원주, 충주, 여주, 평창, 강릉, 장호원 등 강원, 경기, 충북 지방에서 여러 차례 일본군을 격파하여 타격을 주었다. 또한 지홍윤, 유명규 등이 지휘하는 강화분견대의 군인들은 600여 명의 의병과 합세하여 일본군 및 친일파들을 응징하면서 경기, 황해도 등지로 활동 범위를 넓혀갔다. 이밖에 홍주, 전주 등지의 분견대도 의병에 가담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해산 군인들의 의병 가담은 의병의 사기와 전투력을 높여 주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과거에 유생과 농민들이 중심이 되었던 의병부대는 더 많은 평민층의 참여를 가져와 신돌석, 홍범도, 김수민 등과 같은 평민 의병장이 나타났으며, 농민 이외에도 상인, 광산노동자, 머슴, 포수 등 각계 각층의 인사들이 참여하였다.

 

한편, 의병전쟁이 확산되는 가운데 점차 의병부대 상호간에 연합전선이 형성되었고 서울의 통감부를 타도하여 잃어버린 국권을 되찿으려는 적극적인 서울진공작전이 시도되었다. 이 운동을 주도한 것은 관동창의대장 이인영으로서 그는 전국 의병장들에게 격문을 보내 경기도 양주에 집결할 것을 호소하였다. 동시에 서울의 각국 영사관에 통문을 보내 의병을 국제공법상의 전쟁단체로 인정하고 후원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는 의병을 폭도로 규정하고 있는 일본의 부당성을 알리며 정당한 독립전쟁임을 밝히기 위함이었다. 

 

1907년 겨울, 마침내 전국 각지에서 1만여 명의 의병이 양주에 집결하여 '13도 창의군'을 결성하고(1907.12), 총대장에 이인영, 군사장에 허위를 중심으로 각 지방 창의대장을 정하여 24개진을 편성하였다. 이들은 1908년 1월, 서울진공작전을 개시하였는데, 허위가 거느린 300여 명의 선발대가 동대문 밖까지 진출하여 일본군과의 벌인 전투에서 패하고 총대장 이인영이 때마침 부친상을 당하여 '불효는 불충'이라고 하면서 귀가해버리는 바람에 서울진공작전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처럼 조선 선비들의 의병으로 분연히 일어난 기개와 명분은 좋았으나 무장도 아닌 선비들이 사전 충분한 정보와 준비도 없이 겨우 1만여 명의 의병으로 서울 진공작전을 벌인 것은 어쩌면 무모한 짓이었다. 이는 임진왜란시 용인전투에서 패한 조선근왕군이나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을 구하기 위해 올라온 팔도근왕군이 수백명의 청나라 기병에게 기습을 당하자 4~5만여 조선군이 패한 것처럼 의병들은 오합지졸에다가 무기와 장비도 적에게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빈약한 상태였고 지휘통솔면이나 지휘체계가 전혀 수립되지 않은 머리숫자만 채운 의병 부대였다. 불효는 불충이라는 허울아래 그것도 총사령관이 부대를 내팽개치고 전장을 이탈해버렸다는 사실은 무책임하기 그지없는 행동이다. 그것은 유교사회였던 조선의 이중성과 허울성을 잘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서울진공작전이 실패한 뒤 창의군은 해체되고, 의병부대들은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허위부대는 임진강 방면으로, 이강년부대는 충북, 경북 지방으로, 이인영,민긍호부대는 강원도로 각각 철수하여 대일항전을 계속하였다. 이 과정에서 민긍호는 전사하고, 이인영, 이강년은 체포되어 사형을 당아하였으며, 허위는 체포되어 옥사했다.

 

연합의병진과는 별도로 함경도의 국경지대에서 맹활약을 펼친 홍범도 의병은 특이하다. 머슴, 광산노동자, 산포수로 전전하던 홍범도는 산포수들을 모아 의병을 구성하고 삼수, 갑산 등지에서 일본군과 37회의 전투를 벌이고 친일파세력을 응징하는 데 큰 공을 세우는 등 기동력과 전투력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였다. 

 

한편, 전라도지방에서는 전해산, 심남일, 임창모, 강무경 등 다수의 의병부대가 크게 활약했다. 의병활동은 경상, 강원, 경기, 황해, 전라의 여러 도에서 특히 심하였으나, 거의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지 않은 군이 없을 정도였다.

 

일본은 범국민적인 의병투쟁에 당황하여 1개사단 이상의 보명, 1개연대 이상의 기병, 6천여 명의 헌병을 투입하였고, 새로 개설된 철도망과 도로망을 이용하여 기동성을 최대로 발휘하면서 의병진압에 나섰다. 의병은 화승총, 칼, 활, 곤봉과 같은 낡은 무기로 싸웠지만 기관총과 소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을 당할 수가 없었다.

 

1907년~1910년 사이에 이르기까지 의병과 일본군 사이에 교전 수는 3,600여 회에 이르고 전투에 참가한 의병은 15만여 명에 이르렀다. 그 중에서 1908년은 의병전쟁의 절정기로 2,000여 회의 전투에 연인원 8만여 명이 참가하였다. 그중 전사자가 1만 7천여 명, 부상자가 3만 6천여 명에 달하였으니, 독립전쟁의 치열함을 짐작할 수 있다.

 

일본군의 의병탄압은 포악하기 그지 없었다. 특히 전라도 지방의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1909.9~1909.10)계획을 세우고, 교반작전을 써서 의병이 근거지로 삼을 만한 촌락과 가옥을 닥치는 대로 방화, 약탈, 폭행을 자행하였다. 일본의 국권강탈은 이와같은 야만적인 무력행사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일본군의 악랄한 탄압으로 국내에서의 의병전쟁은 1909년 이후로 점차 약화되고 국치 이후에는 그 무대를 중국 동북(간도), 연해주지방으로 옮겨가서 독립군으로 가담하였다. 통화, 집안지방의 유인석부대, 장백.임강지방의 이진룡부대, 환인지방의 조채준부대, 장백현의 홍범도부대 등이 그 대표적인 무장투쟁 세력이었다. 그 중에서도 홍범도 의병부대는 3.1운동 이후 대한독립군으로 재기하였다. 국내에서도 임병찬 등이 독립의군부를 조직하던 중에 발각되어 미수로 끝났다.

 

중국 동북 지방에서의 항일 무장투쟁 가운데서 대한의용군 참모중장이던 안중근에 의한 이토 통감 처단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어려서 한학과 천주학을 공부한 그는 1909년 10월 26일 아침 한국침략의 원흉인 이토를 하얼빈역에서 사살하고, 곧 체포되어 여순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순국했다. 그는 <동양평화론>을 집필할 정도로 역사감각이 뛰어난 지식인이었으며 많은 유묵을 남겨서 지금까지도 한국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의 유해는 아직 찿지 못하고 있으며 그의 빈 무덤은 독립유공자들과 같이 아직도 고국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

 

 의병의 항일구국전쟁은 멀리는 왜란 때의 반일의병에서부터 시작하여 개항 전후 시기에는 위정척사운동으로 이어져 왔으며, 그것이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계기로 다시금 반일의병으로 나타났고, 을사늑약과 군대해산을 거치면서 한층 대규모 항일전쟁으로 발전해 온 것이다. 그 과정에서 참가 주도층 세력도 양반, 유학자에서 점차 평민 출신으로 바뀌어 갔으며, 유교적 충효사상에서 근대국가의 주권옹호를 위한 독립전쟁의 형태로 변화되어 갔던 것이다. 그리고 이 흐름이 일제시대의 항일무장투쟁으로 이어지면서 가장 적극적인 항일운동을 이끌어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