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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963 : 일제강점기 8 (일제의 주권 탈취)

 

 

 

한국의 역사 963 : 일제강점기 8 (일제의 주권 탈취)

 

           

 

 

 

일제의 주권 탈취

 

 

1. 일제의 침투와 러일전쟁(1904~1905)

 

고종황제의 광무개혁은 사구식 민주주의는 아니었지만 식산흥업의 경제정책과 국방강화 그리고 열강간의 세력균형 유지정책은 상당한 효과를 가두고 있었다. 궁내부가 광산, 철도, 인삼, 포사 등을 직접 관장한 것도 이들의 이권을 열강에게 넘겨주지 않으려는 의도가 있었으며, 국가재정을 확충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열강의 압박이 워낙 거세고 또 모든 산업을 자체적으로 개발하는 것이  어려운 점을 고려하여 부득이 수입의 일부를 징수하는 조건으로 철도, 광산, 산림, 어장 등의 각종 개발권을 러시아, 미국, 영국, 일본 등에게 골고루 넘겨 주었다.

 

러시아에서는 대체로 두만강, 압록강 그리고 동해안 연안지대의 광산, 산림, 어업권을 넘겨 주고, 미국에는 운산금광채굴권(1899)과 서울의 전차운영권(한미합작), 영국에는 은산금광채굴권, 독일에는 강원도 당현금광채굴권을 각각 양도하였다.

 

그러나 열강 중에서 가장 많은 이권을 얻은 것은 군대파견을 협박하면서 나선 일본이었다. 일본은 경부철도(1898)와 경인철도 부설권(1899)을 얻어냄으로써 한반도 남북을 관통하는 주요 간선철도를 모두 장악하게 되었다. 이 철도부설공사로 많은 농민들이 토지를 빼앗기고, 또 철도공사에 강제로 동원되어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었다. 농민들이 반일의병운동을 일으키게 된 주요 원인이 여기에 잇었다.

 

일본은 철도뿐만 아니라 여러 지역의 금광과 전국 각지의 어업권을 획득했으며, 무역분야에서도 대한제국 수출의 80~90%를, 수입액의 60~70%를 차지하였다. 일본은 주로 무명제품을 들여오고, 쌀, 콩 등 식량을 가져갔다. 또 서울을 비롯한 개항장 일대에 은행을 설치하여 금융시장을 장악하였다. 일본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제일은행권'이라는 지폐를 강제로 통용시켰다. 

 

농촌 내부모순에 더하여 일본이 경제적 침투는 농민, 어민, 부두노동자 그리고 소상인들의 처지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이에 전라도 일대에서는 동학농민전쟁의 연장선상에서 다시금 하층농민들의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1898년~1899년에 일어난 이른바 '영학당의 운동'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충청, 경기, 경상도 일대에서는 행상, 무직자, 빈농, 노동자, 걸인들이 '활빈당'(1900~1905)을 조직하여 외국의 경제적 침투에 항의하면서 일본상인과 부자들을 습격하였다. 활빈당이라는 이름은 <홍길동전>의 활빈당처럼 의로운 도적이 되겠다는 뜻이 담긴 것이다.

 

수천명에 달하는 지방의 보부상들이 '황국협회'를 조직하고, 서울의 시전상인들이 '황국중앙총상회'를 조직한 것도 일본상인들의 경제적 침투에 대한 전통적인 상권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일본은 우리나라에 대한 독점적인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가장 강력한 경쟁자인 러시아의 침투를 저지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1896년 5월 웨베르-고무라 각서를 시작으로 잇달아 러시아와 의정서(1896.6), 협약 등을 맺으면서 러시아를 견제해오던 일본은 1902년 1월 영일동맹을 맺어 우리나라에 대한 특수권익을 영국으로부터 인정받았다. 영국은 중국의 '의화단의 난'(1900)을 함께 진압한 후 만주를 차지하려고 획책하고 있던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의 조선독점을 승인하는 대신 청에 대한 지배권을 보장받았다.

 

영일동맹에 의해 입지가 강화된 일본은 러시아를 무력으로 제압하기로 결심하고 먼저 외교교섭을 벌여 우리나라에 대한 내정간섭을 인정할 것과 만주에 대한 경제침투를 허용할 것을 러시아에 요구하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오히려 일본이 한반도를 군사적으로 이용하지 말 것과 북위 39도선 이북의 땅을 중립지대로 만들 것을 제안하였다. 러시아는 경부철도건설이 군사적으로 이용될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협상에 실패한 일본은 바로 전쟁에 돌입하였다. 일본은 경부철도를 빨리 건설할 것을 명령하고(1903.12), 1904년 2월 최후통첩과 함께 인천 월미도에 정박하고 있던 러시아 군함(1903.12 입항)을 습격하고, 요동반도의 여순항을 기습공격하였다(1904.2). 이로써 러일전쟁이 벌어진 것이며 이보다 앞서 대한제국은 러일전쟁을 에상하고 미리 국외중립을 선언하였다(1904.1).   

 

 

 

2. 을사늑약(1905), 정미조약(1907), 경술국치(1910)

 

일본은 무력으로 러시아를 선제공격하여 전쟁을 도발함과 동시에 우리나라에 대한 독접적 지배권을 명분화 하기 위해 서울을 점령한 후 대한정부에 '한일의 정서'(1904.2)의 체결을 강요하였다. 이 의정서는 일본이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보존을 위한다는 미명하에 정치적 간섭과 군사적 점령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한 것이다. 이에 따라 '경부철도'(1905.5.28 개통)와 '경의선' 그리고 '마산철도'의 부설이 강행되었다. 이에 앞서 1900년에 부설된 '경인철도'와 아울러 우리나라 주요 간선철도가 전쟁을 위한 군용으로 건설되었으나, 토지와 노동력을 강제로 징달당한 주민들의 분노와 저항이 거세게 일어났다. 일본은 1905년 을릉도 속도인 독도를 강제로 약탈하여 시네마현에 귀속시켰다.

 

또한 일본은 한국주차군(1904.3)을 설치하고 '군사경찰제'(1904.7)를 실시하여 군대와 경찰이 우리나라를 지배하는 체제로 만들어 갔다. 일본은 한걸음 더 나아가 대한제국의 내정에 속속들이 간섭하기 위해서 이른바 '한일협정서'(제1차 한일협약, 1904.8)을 강제로 맺고, 일본이 추천하는 외국인 고문을 두게 하였다.

 

한일협정서에 따라 일본인 메가타 쇼타로가 재정고문으로 와서 '재정정리'라는 이름으로 재정권을 박탈하고, 황제가 근대화사업기금으로 축적한 황실 재산을 해체시켜 나갔다. 그리고 미국인 스티븐스가 외교고문으로 오게 되었는데, 그는 뒤에 미국으로 돌아가 일본의 통감정치를 찬양하다가 재미동포 전명운, 장인환에게 사살당했다(1908). 이어서 일본은 협정서에 규정이 없는 군부고문, 경무고문, 궁내부고문, 학부참여관 등을 멋대로 보내 왔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형식상 주권국가였으나 실제로는 고문정치에 의해 실권이 일본으로 넘어가고 외국에 나가 있던 대한제국의 공사들도 강제로 소환되었다.

 

러일전쟁은 세계 여러 나라의 예상을 뒤엎고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러시아 발틱함대가 1905년 5월 7일 대한해협에서 일본 연합함대에 격파당하고 이어 6월 제1차 러시아혁명이 일어나 국내가 어수선한 가운데 결국 러일전쟁은 패전으로 끝나고 말았다. 러시아혁명의 주동자 레닌에게 혁명자금을 제공한 자는 일본이었고 이러한 일본의 기막힌 외교술과 첩보전이 러일전쟁의 승리를 가져왔다.

 

일본의 조선침략은 이미 영일동맹에서 영국으로부터 인정을 받았지만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도 필리핀에 대한 지배의 댓가로 일본의 한국지배를 승인하였다. 미 육군장관 테프트와 일본 수상 가쓰라 타로 사이에 맺어진 이른바 테프트-가쓰라 각서(1905.7)가 그것이었다. 이에 자극을 받아 영굳도 열일동맹을 개정하여 일본이 한국을 위해 보호조치를 취하는 것을 승인하였고(2차 영일동맹, 1905.8), 이를 총괄하여 러일간에 '포츠머스 조약'(1905.9)이 체결되었다. 미국의 중개로 맺어진 이 조약에서는 한국에서의 일본의 특수이익과 한국에 대한 보호, 지도, 감리 등의 모든 행동을 러시아가 인정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으며, 러시아는 남사할린을 일본에 양도하였다.

 

한국을 식민지화하는 데 대한 영, 미, 러시아의 승인을 얻은 일본은 제1단계로 한국의 황제를 그대로 두고 일본의 통감부로 하여금 실권을 장악하게 하는 간접식민지국가를 만들고자 획책하였다. 이를 위해 일본은 우리나라를 보호국으로 만든다는 거짓 명분을 내걸고, 송병준, 이용구 등으로 하여금 일진회라는 친일매국단체를 조직케 하여 보호조약의 필요성을 선전케하였다. 이미 1904년의 러일전쟁 중에 일본이 우리나라 국토의 1/3에 해당하는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여(1904.6) 국민들의 반일감정이 높아져 있음을 안 일본은 친일단체를 내세워 국민여론을 오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원세성, 송순만, 이기 등이 조직한 보안회, 이준, 이상재 등이 조직한 협동회 등의 반일단체가 결성되고, 최익현 등 유림들이 전국에서 일어나 보호국 음모에 항의하고 나서는 등 여론이 악화되자, 일본은 총리를 지낸 거물급 정치인 이토 히로부미를 조선에 보내 강압적으로 조약을 체결하려 하였다.

 

이토는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와 함께 일본군대를 거느리고 경운궁 중명당에 들어가 고종황제와 대신들을 위협하면서 보호조약에 서명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황제와 수상들이 끝내 서명에 반대하자 일본군이 외무대신 박제순의 직인을 가져다가 날인해 버렸다(1905.11). 그러나 황제는 끝까지 서명을 거부하였다. 당시 대한제국은 황제가 외국과의 조약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황제의 재가 없이는 이 조약은 당연히 무효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것을 유효라고 우기고 나섰다. 이 불법적인 조약을 '제2차 한일협약' 혹은 '을사늑약'이라고 한다.

 

을사늑약의 불법성으로 국민들의 감정은 극도로 악화되어 전국 각지에서 의병들이 일어났다. 그 과정에서 한국침략에 앞장섰던 이토가 안중근 의사에 의해 만주 하얼빈역두에서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1909).

 

일본의 강도행위와 같은 만행에 분노한 고종황제는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전세계에 알려 인류의 양심에 호소하고자 계획했다. 먼저 <대한매일신보>에 친서를 발표하여 황제가 이 조약에 서명하지 않았음으로 밝히고, 이어 1907년 6월 마침 네들란드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게 되자 이상설, 이준, 이위종 3인을 대표로 파견하여 한국의 억울함을 전세계에 호소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으로서 외교권이 없다는 이유로 회의 참석이 거절당하자 이들은 외국 언론을 통하여 이 조약이 무효임을 폭로하였다. 그리고 대표 중 이준이 분사하였다는 사실은 신문에서 사실 확인도 않고 내보내는 바람에 잘못 알려진 내용이다.

 

일본은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고종황제를 1907년 7월 강제로 퇴위시키고 황태자인 순종을 즉위케 하였으며, 연호를 융희라고 고쳤다. 고종황제의 퇴위는 국민들을 더욱 흥분시켜 연일 시위운동이 일어나고 일진회의 기관지인 <국민신보> 사옥이 파괴되었으며, 일본인이 도처에서 습격당하였다. 그리고 을사늑약에 찬성한 내무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외무대신 박제순, 학부대신 이완용, 농산부대신 귄중택을 '을사오적'으로 지목했다.

 

을사늑약의 기본 내용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일본이 장악하고 일본의 승인 없이는 어느 나라와도 교섭할 수 없다는 것이며, 일본인 통감을 둔다는 것이었다. 국제관계가 중요하던 당시의 실정으로 보아 외교권의 박탈은 실제적으로 주권의 박탈과 다름없었다.

 

초대 통감 이토는 순종이 즉위한 직후 이른바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맺어 내정에 간섭할 수 있는 권한까지 강탈하였다(1907.7) 이 조약에 의하여 국가의 법령 제정, 중요 행정처분, 고위관리의 임명에 대한 사전 승인을 통감으로부터 반도록 하였고, 통감이 추천한 일본인을 관리로 임명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각 부의 차관자리에 일본인 관리가 다수 임명되어 이른바 차관정치가 시작되고 고문제도가 폐지되었다. 그러나 이 조약에 서명한 순종의 수결(사인)이 필체가 달라 타인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의심을 받고 있다.

 

나라의 외교와 내정간섭권을 강탈한 일본은 8,800명밖에 남지 않은 군대마저 해산하여(1907.8) 대한제국을 허수아비 국가로 만들고 '보안법'과 '신문지법'을 만들어 일본을 비판하는 언론활동을 봉쇄해 버렸다. 그리고 한국의 영토를 멋대로 요리하였는데 이미 러일전쟁 중에 독도를 빼앗았던 일본은 백두산정계비(1712) 이후로 청나라와 계속 국경분쟁을 일으켜 오다가 대한제국이 적극적으로 관리해오던 만주의 간도(지금의 연변) 지방을 마음대로 청에 넘겨주었다(간도협약, 1909). 그 대가로 일본은 안봉선철도(안동-봉천) 개설권을 얻어내었다.

 

대한제국의 외교, 내정 그리고 군대마저 빼앗은 일본은 이제 마지막으로 국가의 상징으로 남아 있는 황제마져 퇴위시킴으로써 대한제국을 일본의 영토로 편입시키는 일에 나서게 되었다. 1910년 5월 일본은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새 통감으로 임명하고, 2천여 명의 헌병을 데리고 들어와 경찰업무를 담당케 하고, 항일 언론기관과 애국단체를 탄압하는 가운데 드디어 8월 29일 황제로 하여금 양위 조서를 내리도록 강요하였다. 순종은 황제가 된 뒤 창덕궁에서 집무하였으므로 이른바 '한일합방조약'은 인정전에서 맺어졌다.

 

총리대신 이완용과 일진회 등 친일단체의 찬성운동도 있었으나, 국민들의 절대다수가 완강하게 반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포분위기에서 맺어진 국권강탈조약의 서문에는 양국의 상호행복을 증진하여 동양평화를 영구히 확보하기 위하여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다고 선언하였다. 남의 나라를 강탈하는 것을 행복과 평화를 위해서라고 파렴치하게 위장한 것이다.  이제 2천만의 울분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지고 36년간에 걸친 피나는 광복투쟁의 역사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