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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강남의 여름 8 : 고난의 역사 광복, 그리고 현실과 미래 2

 

 

 

강남의 여름 8 : 고난의 역사 광복, 그리고 현실과 미래 2

 

 

                                                                                우면산의 여름 모습, 외로이 핀 코스모스

 

 

독립운동가와 동포들의 귀국

 

일제 식민체제가 붕괴되자 우리 민족 모두는 새로운 독립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이제 한국은 오랜 전쟁과 동원 체제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고 활기찬 사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국내에서 독립운동과 문명개화운동에 전념하던 민족 지도자들과, 해외에서 오렛동안 독립운동을 하다 귀국한 독립운동 세력들은 모두 근대적인 국가를 건설하는 데 뛰어들었다.

 

국내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은 일제의 탄압과 전시 동원 때문에 주로 문화, 교육, 언론 운동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해외에서의 독립운동은 1919년 이래 명맥을 유지해온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왔다. 해외 독립운동의 중심 인물은 미국에서 민족독립운동을 해왔던 이승만이나, 임시정부를 지켰던 한국국민당의 김구, 이동녕, 조소앙과 민족혁명당의 김규식, 김원봉, 이청천 등이었다. 그들은 1948년 가을 국민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면서 귀국하였다.

 

일본과 만주 혹은 태평양 지역 등지에서 나가 있었거나 군인이나 노동자로 동원되었던 약 320만 명의 한국인 가운데 약 250만 명이 고국으로 되돌아왔다. 귀환한 동포 대부분은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서울, 부산 등 대도시에서 새로운 생활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총인구의 10%에 해당하는 해외 거주 엘리트 및 해외 경험을 가진 노동자들의 귀국은 한국 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한국 사회가 더 이상 식민지 이전의 마을 공동체적 봉건사회가 아닌 근대적인 시민사회로 나가는 데 커다란 동력이 되었다. 한마디로 격동의 세월이었으며 혼란과 대변혁의 시대가 전개된 것이다.

 

한편 조선에서 거주했던 75만의 일본인들도 대부분 자신들의 재산을 긴급히 처분하거나 남겨둔 채 일본으로 떠나갔다.

 

 

 

 

 

북한 주민의 월남과 좌우 대결

 

소련군에 의해 점령된 북한 주민들은 소련군이 주최하는 전체주의적 각종 집회에 동원되어야 했고, 집회와 학교에서는 "스탈린 대원수 만세"를 외쳐야 했으며 일본 군가 대신에 이제는 소련 군가를 따라 불러야 했다. 조선민주당의 조만식 등 공산주의 체제에 동의하지 않는 민족주의 계열 및 기독교 계열의 인사나 단체는 활동의 제약을 받았으며 특히 기독교에 대한 탄압은 강화되었다.

 

반면 남한 지역에서는 미국과 싸웠던 일본의 전시 선전 때문에 반미적 정서가 확산되어 있었다. 그러한 상태에서 갑자기 미군이 진주하자 미군을 적극 지지하게 된 낯선 상황 변화는 많은 혼돈을 초래하였다. 더구나 1개월 정도 먼저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을 보고 서울에도 곧 소련군이 올 것으로 판단했던 사람도 많았고, 섣부르게 소련군 환영 준비도 했다. 게다가 소련은 일제 시대 일제와 우호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서울의 영사관을 통해 비밀리에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을 지원하고 통제하면서 공산주의 확산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해방된 남한 지역에서는 미국식 민주주의냐, 아니면 소련식 공산주의냐를 두고 대립하고 있었지만, 시민사회는 해방과 함께 자유스런 분위기가 넘쳐흘렀다. 미군 진주 이후부터 미국의 영향력과 미국의 자유주의 문화가 남한 사회에 급속도로 확산되었고, 그에 따라 구한말부터 시작된 서구식 교육과 기독교 등이 다시 횔력을 찿기 시작했다.

 

다른 한편 남한 사회에서는 소련 공산주의 체제를 피해 북한에서 내려온 지식인, 기업인, 종교인 들을 중심으로 반소련, 반공산주의의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반공적인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냉전의 전개

 

소련은 일본 패망 이전부터 미국, 영국과 대립하기 시작하였고 자신들이 점령한 동유럽 지역에 공산주의 체제를 이식시키고 위성국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소련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던 폴란드에 친소련 정부를 세우기 위해 당시 영국에 망명해 있던 망명 정부를 부정했다. 그리고 폴란드 공산당을 내세워 독자적인 공산주의 정부를 구성하였다. 나아가 체코, 루마니아 등 점차 다른 동유럽 국가들까지 그들의 지배하에 두었다. 그리고 터키, 그리스 등에서도 공산주의 세력을 선동하여 소련을 모국으로 삼고 소련의 지시를 받는 국가를 만들고자 시도하였다.

 

이에 따라 미.영 등 자유주의 진영과 소련을 위시한 공산 진영 간에는 급속도로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영국 수상 처칠은 '철의 장막'이라 부르며 소련에 의한 경찰지배가 확산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미국의 트루만 대통령도 1947년 3월 '트루만 선언'을 통해 소련 공산주의 팽창을 저지하고 약소국가들의 독립과 자유를 유지하는 것이 미국의 핵심 정책임을 밝혔다. 그에 따라 미.소의 대립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간의 본격적인 체제 경쟁인 냉전으로 격화되었다.

 

이에 따라 미국은 자유 체제의 서유럽 국가들에 대한 대대적인 지원을 펼치고, 북대서양 조약기구를 결성하였다. 이에 소련은 베를린을 봉쇄하는 등 반발을 하면서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결성함으로써 나토에 대응하였다.

 

한편 소련은 동아시아 지역에서도 그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고자 하였다. 소련군은 몽골을 점령해 10만의 군대을 주둔시키고, 사할린과 쿠릴 열도를 점령, 차지하였다. 중국의 대련과 여순항을 조차하고 철도운영권을 얻는 등 만주 지역에 대한 우선적인 이권을 확보하였다. 그외에도 스탈린은 중국 공산당의 마오쩌뚱을 적극 지원하면서 중국내 공산주의 확대와 공산 혁명을 적극 지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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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전역의 공산화를 기도한 소련

 

한반도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확대되자 공산주의 세력은 급격히 커졌다. 서울의 소련 영사관은 한국의 좌익들을 지원하고 지도할 수 있었고 그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소련 공산당으로부터 조선공산당을 재건하라는 지령을 받은 박헌영은 공산주의 세력을 확대하면서 실질적으로 통제하였다. 그리고 북한에 들어온 소련군 공산주의자 김일성을 소련의 주선하에 비밀리에 만나 협조체제를 구축하였다.

 

당시 한국은 통일 된 민족 독립국가가 되기 위해 미.소의 협조가 절실했다. 그러나 소련이 한반도 북부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와 미.소간에 본격적인 냉전체제 전개로 통일된 독립국가를 만드는 것은 점차 불가능하게 되었고 소련은 한반도 전체를 동유럽과 같은 위성국가로 만들기 위한 계획을 추진하려 하였다.

 

그래서 소련과 남한 공산주의 세력은 남한마저 공산주의 체제로 구축하려 하였는데, 이에 박헌영 등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은 남한도 북한처럼 소련의 연방에 편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소련이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따라 혁명적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사실, 전쟁 후반기 태평양전쟁에 참전했다는 사실, 그리고 소련군이 한반도 북부를 점령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모두 한반도의 체제 분단은 물론, 그것과 연결된 김일성의 남한 침공인 민족해방전쟁(6.25전쟁)을 예고하고 있었다.

 

  

    

 

 

모스코바 3상회의 결정에 대한 한국인의 반응

 

소련군과 미국군의 한반도 분할 주둔 이후 한국  국민을 혼란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사건은 한국에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미.소.영 3개국의 모스크바 외무장관 회담의 결과였다.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 발표된 것은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최고 5년 기한의 미.영.중.소 4개국 협의하에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신탁통치 결정은 곧 독립국가가 건설될 것으로 기대했던 국민 모두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독립국가 건설의 희망에 부풀었던 국민들은 또다시 외국에 의한 통치가 시작되는 굴욕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신탁통치가 실시된다는 것은 곧 소련이 동의하고 인정하는 체제만이 한국에 들어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신탁통치 결정이 알려지자마자 즉각적으로 전국적인 신탁통치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민족 세력의 중심에 있던 이승만은 신탁통치라는 것은 자주독립의 능력이 없을 때나 있을 수 있는 것이라고 명확한 반대를 표명했고, 김구도 반탁운동을 또 다른 '새로운 독립운동'으로 규정지었다. 조선공산당이나 건국 동맹 등 좌익 계열들도 신탁통치란 민족적 치욕이라고 반대하였다.

 

마치 3.1독립운동 때 처럼 휴업, 철시 등과 같은 전국민적인 신탁통치 반대운동이 펼쳐졋다.'신탁통치 반대 서울시민대회'와 같은 각종 반탁시위가 계속되었다. 김구 중심의 임시정부 계열은 민족의 자유를 위해 즉각적인 독립국가를 건설하자는 취지에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더 나아가 미군정을 부정하는 불복종운동을 벌이기까지 했다. 한편 이승만은 신탁통치 반대를 확고히 하면서도, 더 근본적으로 '미.소 합의에 의한 한국 문제 해결'이라는 미국의 정책 노선을 바꾸기 위해 모든 힘을 기울였다. 왜냐면 그러한 정책은 소련의 영향력을 인정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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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익의 태도 돌변

 

신탁통치 결정에 대해 온 한민족이 전국적인 반대를 분명히 했던 것과는 달리, 좌익은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방향으로 갑자기 태도를 돌변하였다. 소련의 지시를 받고 비밀리에 김일성을 만나고 돌아온 박헌영의 조선공산당과 좌익 계열은 며칠 만에 신탁통치 찬성으로 돌아섰던 것이다. 조선공산당과 좌익 계열은 1946년 1월 2일부터 신탁통치를 결정한 모스코바 협정을 지지하며 오히려 반탁운동 세력을 공격하기 시작하엿다. 좌익들은 신탁통치를 '세계민주주의 발전에 있었서 또 한걸은 진보이다."라고 주장하고 반탁운동은 대중을 기만하는 정책이라고 비난하고 나섰다. 이처럼 좌익 세력은 민족 국가의 독립은 외면하고 소련의 지시를 받아 김일성의 사주로 찬탁으로 돌변하게 된 것이다.

 

북한 지역에서는 소련의 공식적인 지시 이외에는 그 어떤 의사 표명도 자유롭지 못했다. 조만식의 조선민주당 등 민족 계열만은 반탁을 분명히 하였다. 그렇지만 다른 모든 단체와 조직은 일제히 신탁통치 찬성을 주장하였다.

 

신탁통치를 둘러싸고 남한 사회에서는 이에 찬성하는 공산주의 및 좌익 계열과 그것에 반대하는 민족 계열 간에 극한적인 대립이 나타나기 시작하엿다. 우익 민족 계열은  '대한독립촉성국민대회'를 조직하고, 좌익 공산 계열은 '민주주의 민족전선'을 결성하였다. 1946년 3월 1일 3.1운동 27주년 기념식에서 민족주의 계열은 동대문운동장에서 약 10만이 참석하여 대집회를 열었고, 이에 맞서 공산 계열은 1만 5,000명이 참여한 집회를 남산에서 따로 열었다. 집회 후에는 좌.우 간에 폭력 유혈충돌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공산주의자 및 좌익 계열은 겉으로 위장된 민주주의와 민족주의를 표방하면서 소련과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남한 사회에서 분열을 초래한 공산혁명의 하수인에 불과했다.

 

 

 

 

 

민족 진영의 뒤늦은 각성

 

우파적 민족 진영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와 같은 조직은 대대적인 반탁운동을 통해 비로소 지방 조직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좌익에 비해 우익 민족계열의 조직화는 미약한 상태였다. 반탁학생연맹의 활동과 함께, 북한 지역에서 공산주의를 경험하고 남한으로 내려온 월남인들이 민족세력의 조직화에 큰 힘이 되었다. 그들은 서북청년단 등의 반공 조직을 통해 공산주의로부터 자유 체제를 지키는 투쟁에 앞장섰다.

 

남한 지역에서는 국민적 반탁 열기 때문에 미.소 협의나 미군정에 대한 정책추진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남한 지역의 국민 의사를 임시적으로 대표하는 협의체로 미군정이 자문기관으로 설립한 대한민국 대표 민주의원에서 조차도 44대1이라는 압도적 차이로 반탁을 결의하였다.

 

그러므로 1946년 5월에 신탁통치 방식을 결정할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자, 반탁의 목소리는 더욱 거세어졌다. 결국 반탁 세력을 임시정부 구성에서 배제시키라는 소련의 입장과, 반탁도 민주주의적 의사 표현의 한 형태이기 때문에 배제해서는 안된다는 미국의 입장이 대랍했다. 미소공동위원화는 몇 차례의 회의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성과 없이 공전되다가 결국 1947년 8월 완전 결렬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은 곧 남.북한 지역에 소련과 미국 주도의 독자적 정부 수립을 촉진시켰고, 미국으로 하여금 신탁통치 방식을 포기하고 유엔으로 한국 문제를 이관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따라서 전국민적인 반탁운동은 남한 지역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공산주의 확산을 저지하기 위해 독자적인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가속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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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재아시아 전략의 오류 역사

 

 

미국은 아시아 지역에서 전략적인 판단과 예측이 매우 어두운 나라였다. 동과 정의 차이, 문화와 관습, 사상과 이념 등의 차이로 동양인들의 내면을 읽지 못하는 그들의 취약점일 것이다. 그래서 한반도는 미국의 우매한 전략적인 실수로 인해 반토막 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는데, 태평양 전쟁에서 너무나 많은 인적자원의 손실로 인해 큰 부담을 느끼고 있던 미국은 일본 본토 상륙전을 전개할 경우 또다시 엄청난  인적 피해가 우려되는 만큼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해 주기를 정상들과 회담에서 여러차례 희망하였다. 그러나 소련은 당장 급한 쪽이 서부전선 독일과 전쟁이었다. 소련의 심장부인 스탈린그라드까지 진격한 독일군을 반격을 하면서 독일군 괴멸과 서부 유렵의 영역 탈취에 바쁜 그들로서는 당장 대일전에 참전은 불가하였다.  그러다가 소련은 서부 유럽전선에서 결국 독일이 패망하자, 즉시 동유럽 점령 지역을 소련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정권을 내세워 대부분 공산화시켰고, 그제서야 태평양 전선에서도 극동아시아 일대를 공산화시킬 계획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한편 미국은 이러한 소련의 의도를 인지못하고 자신들의 인적 자원의 희생을 감소시킬 대안으로 소련군의 참전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소련으로써는 극동 지역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넓힐 수 있는 믿기지 않는 호기였다. 그래서 소련은 종전이 가까워 올 무렵에서야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사할린을 침공하였으며 동시에 원자폭탄에 의해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하자 만주 지역의 관동군 무장해제를 미군과 협의에 따라 담당하였다. 그런데 그 당시 하필이면 일본 관동군이 소련의 침공에 대비하여 편제를 조정하면서 북한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대본영 예하부대를 관동군 소속으로 변경시켰던 것이다. 이에 소련군은 북한 지역의 관동군까지 무장해제의 담당지역으로 확대되었고, 한반도의 운명은 기구한 역사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소련이 북한에 진주하여 소련군에서 근무하던 무명의 김일성을 내세우며 친소련 정권을 수립하며 일체의 민족적인 단체와 독립국가 수립 세력을 탄압하였고, 주민들은 각종 집회와 통제로 소련식 전체주의적인 체제로 급속히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그런 가운데 미군은 소련군이 북한이 진주한 시기보다 한 달이나 늦게 한반도 남쪽 인천에 상륙하였다. 북한 지역에 소련군 진주는 관동군 무장해제 지역이므로 미군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여기서 미국은 한반도가 한민족의 한 나라였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일본군 관동군 무장해제에만 주력하였고 소련의 음흉한 흉계를 사전 인지하지 못햇던 것이다.

 

역사를 보면 미국은 대아시아 전략에서 대부분 실패하였는데, 청조말 중국과 극동 지역에서 대부분 영향력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미온적이엇으며, 중국의 국공내전에서도 부패한 장개석의 국민당을 지원하다가 실패하였고, 60년대 베트남 전쟁에서 남베트남을 지원하다가 결국 베트남 전쟁의 수렁에 뻐져 엄청난 인적.물적 피해를 보고 물러나면서 남베트남의 공산화를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또 중국의 티베트 점령과 유혈사태, 신강.위그루 독립운동과 유혈사태, 외몽고. 내몽고 포기, 인도-파키스탄 분쟁, 인도-중국 국경분쟁, 필리핀 미군기지 철수, 오키나와 미국기지 분쟁, 동남아시아 공산화 방치, 아프칸 전쟁 실패, 대일본 정책 등에서 전략전인 사고 부족과 판단 미숙으로 성공한 예가 거의 없다. 

 

이런 미국이라는 나라가 앞으로 한반도에서 과연 얼마나 중국과 소련, 북한의 의중을 알고 전략적인 성공을 성취할 것인지는 의문이다. 중국의 대국화와 러시아의 흉계,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과 성장, 북한의 능멸전술과 핵무기 위협 등 산적한 문제를 안고 있다. 건국 200년 후 제1,2차 세계대전의 전승국으로 세계 최강의  강대국이 되면서 전 세계 자원을 싹쓸이 하고 부를 끌어모으면서 지금까지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리고 있으나, 최근 경제발전으로 국력이 성장한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 움직임, 러시아의 지속적인 남진 정책 등과 맞물려 가장 우려되는 것은 미국의 심각한 경제적인 붕괴가 곧 미국의 추락을 의미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동시에 중국은 미국이 휘청거리는 모습이 보이면 미국의 패권경쟁에서 한 판 승부는 언젠가는 일어날 것이다.

 

우리는 미국의 핵우산 아래서 지금까지 기적같은 경제발전을 이루었고 지금은 먹거리 타령을 하면서 비만을 걱정하며 살고는 있으나, 개인들의 삶의 질은 점차 더 어려워 지고 있는 가운데 불안한 평화를 누리고 있으며, 최근 한국 정치, 사회에서 강도를 더해가는 국론 분열과 좌익 세력들의 성장 등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그래서 과감하고 지혜로우며 능력있는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고, 국방 제분야에서 연일 도출되고 있는 불안하고 무력한 전비태세, 각종 비리와 군에 대한 국민적 반발, 군을 우습게 아는 사회 풍조 등 각종 국방취약점, 무역과 자원을 모두  해외만 의존하는 불안한 경제구조, 복지 포플리즘 확산, 정부 및 개인의 재정부채 증가, 초고령/저출산의 기형적인 사회, 부패와 삶의 지수가 꼴지 기록하고 있는 현실에서 언제까지 버틸 것인지가 미지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