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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강남의 여름 7 : 고난의 역사 광복, 그리고 현실과 미래 1

 

 

강남의 여름 7 : 고난의 역사 광복, 그리고 현실과 미래 1

 

 

 

                                                                                우면산의 여름 모습

 

광복절

 

광복절(光復節)은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연합군에 패하여 항복하게 되어 한반도일제일제 강점기에서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날이다. 광복은 문자 그대로는 “빛을 되찾음”을 의미하고 국권을 되찾았다는 뜻으로 쓰인다. 1948년 8월 15일의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기념하는 날이기도 하다.

 

 

 

광복절(光復節)
광복절(光復節)
천안 독립기념관 〈불굴의 한국인〉
장소 대한민국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형태 공휴일
중요도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
날짜 매년 8월 15일
축제 경축 행사
행사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
관련 대일승전기념일

 

 

개요

제2차 세계 대전1943년에 접어들면서부터 점차 연합군측에 유리하게 되어, 그해 11월말에 미국·영국·중화민국 3국은 소위 카이로 선언을 발표했다. 이어 1945년 5월에 나치 독일이 항복하였고, 8월 8일에는 미국과 영국, 소비에트 연방이 모여 포츠담 선언을 발표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드디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하였다. 한민족은 카이로 선언과 그것이 다시 확인된 포츠담 선언에 의해서, 그리고 한민족의 오랜 투쟁을 통한 민족의 극복에 의해서 일제의 학정으로부터 독립을 맞이하였던 것이다.

 

1949년 10월 1일〈국경일에 대한 법률〉에 따라 국경일로 지정되어 대한민국에서는 전국적으로 각종 경축 행사가 거행되며, 공공기관, 가정에서는 태극기를 달아야 한다. 광복회원 및 동반 가족에게는 광복절을 전후하여 전국의 철도·시내버스와 수도권 전철 무임승차, 고궁 및 공원 무료입장 혜택이 주어진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민족해방 기념일로 부르고 있지만, 그 내용은 본뜻과 무관한 "김일성 동지께서 항일의 혈전만리를 헤치시며 찾아주신 조국해방의 날"로 정치적으로 선전한다.

 

 

8월 15일

 

 

서울 필동에 위치한 한국의 집. 이곳은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관저로 1945년 8월 15일, 아침에 여운형이 이곳에서 총독부로부터 치안권과 행정권을 이양받았다.

 

 

그날 아침 여운형엔도 류사쿠 정무총감과 교섭을 벌여 5개 조항을 요구했고 이를 관철하였다.

  1. 전국적으로 정치범, 경제범을 즉시 석방할것.
  2. 서울의 3개월 분 식량을 확보할 것.
  3. 치안 유지와 건국 운동을 위한 정치 운동에 대하여 절대로 간섭하지 말것.
  4. 학생과 청년을 조직, 훈련하는 데 대하여 간섭하지 말 것.
  5. 노동자와 농민을 건국 사업에 동원하는 데 대하여 절대로 간섭하지 말 것.

 

그날 정오에 히로히토 천황항복 방송이 라디오로 중계되었다.

 

 

 

8월 16일 오전 9시 마포형무소

 

 

물론 그날 중대 발표가 있으니 조선인들은 경청하라는 벽보가 나붙었으나 당시 라디오를 가진 조선인들은 많지 않았고, 히로히토 천황의 항복 발표 방송은 잡음이 심했고 어려운 한자가 섞여있던 데다가, 결정적으로 이게 그 당시 쓰던 일본어도 아니고 일본 황족어로 나왔기 때문에 때문에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였다.

 

 

8월 16일

다음날이 되자 비로소 조항 내용대로 형무소에 있었던 정치범과 경제범이 석방되기 시작했다. 그 때서야 경성(서울)시민들은 어제 방송이 히로히토 천황의 항복 방송인줄 알게 되었고, 해방을 환호하기 시작했다. 그대로 시민들은 계동에 있는 여운형의 집에 몰려가 연설을 해달라고 요구하였고, 여운형은 집 바로 뒤에 있는 휘문중학교 운동장으로 가서 해방을 맞이하는 연설을 한다.

 

조선민족의 해방의 날은 왔다. 어제 15일에 원등(엔도 류사쿠)이가 나를 불러가지고 '과거 두 민족이 합하였던 것이 조선에게 잘못 됐던가는 다시 말하고 싶지 않다. 오늘날 나누는 때에 서로 좋게 나누는 것이 좋겠다. 오해로 피를 흘리고 불상사를 일으키지 않도록 민중을 지도하여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나는 다섯 가지 조건을 요구하였다.

 

우리 민족해방의 제일보를 내딛게 되었으니 우리가 지난날의 아프고 쓰리던 것을 이 자리에서 다 잊어버리고 이 땅에다 합리적· 이상적 낙원을 건설하여야 한다. 이때는 개인적 영웅주의는 단연 없애고 끝까지 집단적으로 일사불란의 단결로 나아가자! 머지않아 연합군 군대가 입성할 터이며, 그들이 오면 민족의 모양을 그대로 보게 될 터이니 우리들의 태도는 조금도 부끄럼이 없이 하자. 세계 각국은 우리들을 주시할 것이다. 그리고 백기를 든 일본의 심흉을 잘 살피자. 물론 우리는 통쾌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에 대하여 우리들의 아량을 보이자.


세계문화 건설에 백두산 밑에서 자라난 우리민족의 힘을 바치자. 이미 전문·대학·중학생의 경비대원이 배치되었다. 이제 곧 여러 곳으로부터 훌륭한 지도자가 들어오게 될 터이니 그들이 올 때까지 우리들의 힘은 적으나마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1945년 8월 16일, 서울 계동 휘문고보의 군중 속 여운형. 여운형은 이곳에서 연설을 하였다.

 

 

그런데, 연설도중에 '소련군이 서울역에 온다'는 소문이 나돌아 수많은 시민들이 연설 도중 청중들 사이에서 고함소리가 들렸다. 청중의 일각이 웅성거리는 가운데 여운형은 연설을 이어나갔으나 소련군의 경성 입성 소문은 순식간에 운동장을 한 바퀴 돌았다. 이에 흥분한 군중의 일부가 아우성치면서 교문 밖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여 여운형의 이날 연설은 중단되고 말았다. 그래서 기록으로 전하는 연설문도 반토막뿐이다. 연설이 중단된 원인은 흔히 소련군의 경성 입성 소문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조선사람들의 습격을 두려워한 조선총독부 관료들이 전향자들을 동원해서 벌였던 공작이었다.

 

여운형은 기존에 자신이 1944년 8월에 결성하여 운영했던 비밀결사 조직인 조선건국동맹을 기본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조직하였고 YMCA 건물에서 건준 강령을 발표하였다.

  1. 우리는 완전한 독립국가의 건설을 기함.
  2. 우리는 전 민족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기본 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민주주의적 정권의 수립을 기함,
  3. 우리는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국내 질서를 자주적으로 유지하며 대중생활의 확보를 기함.

 

 

 

 

당시 상황

 

 

1945년 8월 25일 남산 태극기.

 

 

해방소식을 듣자 반일인사들을 옥에 가두고 고문했던 친일경찰들은 도망가기 바빴으며,[7] 일본군들은 미군에 의해 무장해제되는 9월 9일까지 시내를 돌아다니며 해방을 환호하는 군중들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지시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을 염려해 비행기로 경거망동을 삼가라는 건준 명의의 삐라를 뿌렸다.

 

한편 건준은 8월 말까지 전국에 145개 지부를 두고 일본인 자본가와 지주로부터 재산과 토지를 접수하여 조선인들에게 배분하는 것을 도와주었으며, 경찰들이 도망간 빈자리를 대신하여 전국의 뜻있는 청년들을 모집해 치안대를 결성해 치안을 유지하였다. 여기에 지방 경우는 사회주의,민족주의등 이념을 떠나서 지방의 유력한 유지들 및 지주들 역시 적극적으로 나서서 건준에 활동하기도 했다.

 

경성 같은 경우 조선군사령부의 방해로 2중 정부와 같은 혼란이 야기되기도 했다.

 

 

광복 이후

 

그러나 가혹한 압제로부터의 돌연한 광복은 과격한 흥분상태를 가져왔고 수많은 정당과 사회단체가 통일적 핵심체 없이 난립하게 되었다. 임시 정부가 곧 귀국하여 정권을 담당할 것을 기대하는 송진우 계통과, 연합군이 진주할 때까지 민족대표기관을 설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여운형 계통과의 행동이 분열된 것이다. 이리하여 여운형 계통에서는 안재홍을 비롯한 일부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로서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했으며, 이때 잔류한 좌익세력은 소위 인민공화국이라는 정권조직을 급조하여 한민당과 민족주의자들의 지지를 받던 충칭의 임시정부와 대립할 기세를 취했다.

 

한편, 해외에서 독립운동 활동한 한국 광복군은 미군첩보부대 OSS와 함께 국내 진입작전을 추진하던 이범석, 장준하, 김준엽, 노능서 등 4명의 광복군 요원이 1945년 8월 18일 낮 여의도비행장에 착륙하면서 해방된 조국땅을 밟았다. 무장한 채 여의도에 착륙한 이들은 그러나 미군이 "휴전조약이 체결된 다음에 다시 오라"는 일본군의 협박에 굴복하는 바람에 다음날 오후 다시 중국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한국광복군을 비롯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5년 11월이 되어서야 귀국할수 있었다.

 

국내에서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의 대립이 첨예해갈 때에 미·소 양군이 각기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삼아 남북으로 갈라서 1945년 9월 한반도에 진출했다. 남북한을 분할한 미·소 양군은 점령 지역에 군정을 실시하였다. 소련은 처음 조만식을 내세워 인민위원회를 조직케 하고 군정하의 행정을 담당케 하였으나, 이어 김일성(金日成)을 위원장으로 하는 소위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조직, 공산주의 정치 체제를 갖추어 나갔다. 한편 남한에 진주한 미군도 군정청을 설치하고 남한의 모든 행정을 담당하였다. 미군정은 정치활동의 자유를 허용하여 모든 한국인 정당에 대한 절대 중립 태도를 언명했다. 그리하여 송진우 등우 '한국민주당', 안재홍 등의 '국민당', 여운형 등의 '조선인민당', 박헌영(朴憲永) 등의 '조선공산당'을 위시한 50여 개의 정당이 난립하였다. 미국 본토와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초대 임시정부 대통령인 이승만(李承晩)이 귀국하고, 중국과 만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김구를 비롯한 임정요인들도 귀국하였으나 혼란은 여전하였다.

 

 

광복절 노래

1.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기어이 보시려던 어른님 벗님 어찌하리
이 날이 사십년 뜨거운 피 엉긴자취니
길이 길이 지키세 길이 길이 지키세

2. 꿈엔들 잊을 건가 지난 일을 잊을 건가

다같이 복을 심어 잘 가꿔 길러 하늘 닿게
세계의 보람될 거룩한 빛 예서 나리니
힘써 힘써 나가세 힘써 힘써 나가세

 
정인보 작사 / 윤용하 작곡

 

 

 

 

 

 

 

광복의 의미 

 

광복은 빛을 다시 찿음이요, 해방은 억압과 착취로부터 풀려난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일제에 의해 빛을 잃었고 영토와 주권을 강탈당했다. 우리는 왜 빛을 잃었고 영토와 주권을 강탈당하였는가?  당시 조선은 내부적으로 나태와 무능에 빠져 국가의 수명을 다하던 중이었고 주변 국제정세는 힘을 바탕으로 한 약육강식의 정세 속에 일제의 군국주의가 급속히 팽창하면서 시기적으로 조선이 망할 수밖에 없었던 내외적인 여건이 형성되었다.

 

그당시 조선은 영조 이후 노론 일당독재가 300년 가까이 지속되면서 안동 김씨 등 외척들의 세도정치가 권력을 장기간 장악하면서 무능과 부패의 극을 달리고 있었고 백성들은 수탈로 토탄에 빠져 사방에서 민란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또 마지막 왕 고종이 등극하매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치가 실패하고 쇠국정책으로 일관하면서 지배층의 지지를 제대로 얻지 못하였고 고종비 민비와 권력의 주도권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면서 서로 일,청의 외세를 끌여들였고, 외국 군대가 조선에 주둔하면서 권력다툼에 이용되면서 실질적인 힘이 없었던 조선은 친일파들의 주도적인 매국행위와 일제의 강압적인 압력에 결국 국권을 넘겨줌으로써 식민지배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광복은 일제 식민지로부터 우리 민족이 해방된 날이다. 그러나 그 명칭은 우리들에게는 부끄럽기 그지없는 명칭이다. 오죽 못났으면 나라까지 망해 먹고 36년 동안 잔학한 식민지배를 받으면서 전 민족이 노예처럼 살다가 제 힘도 아닌 남의 힘에 의해 해방이 되었으니 이 얼마나 부끄러운 명칭인가! 광복은 축하할 일이 아니라 부끄러운 국치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광복의 그날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서 앞으로의 우리들이 가야할 길을 역사에게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이탈리아와 독일의 패망에 이어 일본의 항복 선언으로 전 세계를 전쟁의 참화로 몰아갔던 제2차 세계대전은 끝이 났다. 일본의 항복은 우리 민족에게 36년 가까운 오랜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이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일본은 1910년 조선을 강제 합병한 이래 만주사변(1931년)과 중.일전쟁(1937년) 등의 승리에 힘입어 동남아 전 지역과 태평양 지역으로까지 제국의 길을 확대해나갔다. 그렇지만 미국과 벌인 태평양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일본 군국주의 체제는 막을 내리고 동아시아 전역에서 일본 식민지 체제도 해체되었다.

 

독일, 이탈리아 등 추축국들 형성하고 일본의 대외팽창에 열을 올리고 있는 와중에 미국은 참전을 꺼리며 지원자 역활에만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1941년 12월 7일 화와이 진주만이 일본 함재기들의 의해 기습을 당하자, 미국은 본격적으로 참전하게 되었다. 미국은 홀로 일본을 상대하여 태평양에서 전쟁을 치루었는데 처음에는 열세를 면치 못하다가 미드웨이 해전의 승리를 계기로 전세를 역전시키고 이오지마 전투 등 여러 전투를 거치면서 오키나와 섬까지 진격하였다.

 

맥아더와 니미츠 제독 휘하의 미군은 오키나와 전투에서만 2만 5,000명에 달하는 전사자를 내는 등 일본과 거의 4년 동안 총 30만에 가까운 전사자를 내는 참흑한 전쟁을 치루면서 일본 본토 공략을 눈앞두고 있던 1945년 8월 6일과 9일, 미국은 그동안 비밀리에 개발해온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을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투하함으로써 일본으로부터 항복 선언을 받을 수 있었다. 그 결과 한국을 비롯하여 필리핀, 대만, 싱가포르 등 대부분의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일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추축국들이 패망함에 따라 승전국인 미국,영국,소련의 연합국 국가 수반들이 참석한 1945년의 얄타회담과 포츠담 회담에서 이루어졌다. 한국은 이미 1943년의 카이로 선언에서부터 원론적 수준에서나마 독립을 약속받고 있었지만, "적절한 절차를 밟아' 이루어진다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일본의 패망과 민족 해방

 

 

소련의 태평양 전쟁 참전과 그 파장 

 

일본의 항복 과정에서 한반도 운명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은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일본이 항복 선언이 있기 전인 1945년 8월 9일에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이로써 소련은 유럽에서뿐만 아니라 태평양전쟁에서도 승전국의 일원이 되었고, 그것은 소련이 일본의 북방에서 압력을 가하도록 소련의 참전을 미국이 바라던 바이기도 하였다.  그에 따라 일본의 지배하에 있던 중국 및 한국의 장래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유럽 지역에서 독일과 대결하고 있는 동안 소련의 스탈린은 일본과 1941년에 중립 조약을 맺어 일본의 대외팽창과 한반도 지배를 묵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과 홀로 싸우고 있던 미국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일본의 강력한 저항으로 미군의 희생자가 계속 늘어나자, 앞으로 있을 일본 본토 공략에 따른 희생 확대에 크다란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소련이 가능한 빨리 대일전에 참전하도록 요구하였고 그 때문에 소련의 스탈린은 얄타회담에서 중국에서의 우선적인 이권 등 미국으로부터 참전에 따른 대가를 약속받을 수 있었다. 

 

소련은 참전을 미루다가 1945년 8월 9일에야 일본에 대해 선전을 포고하였다. 그 때는 이미 일본이 미국 공군의 공격을 받아 국토가 초토화 되었고, 또한 8월 6일에는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어 일본이 미국에 항복 의사를 타진하고 있던 전쟁 종결 단계였다. 그러므로 소련은 8월 9일부터 무력화된 일본군을 쉽게 밀어붙이며 만주 지역과 한반도의 북부를 점령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소련군은 8월 12일에는 함흥, 청진, 원산을 점령하고, 24일에는 평양까지 점령해 38도선 이남인 개성까지 물밀듯이 진출하였다.

 

종전을 앞둔 시점에 소련의 대일전 참전은 전후 동북아시아 지역에 소련의 영향력을 확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순식간에 중국, 몽골, 한반도 북부에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따른 소련의 공산 전체주의 체제가 옮겨졌다. 그에 따라 북한에서도 예외 없이 공산주의 세력에 의한 계급독재 기구인 '인민위원회' 중심의 소비에트 체제가 수립되어 갔다.

 

 

 

 

 

뒤늦은 미군의 남한 진주

 

미군은 소련군보다 한 달이나 늦은 9월 6일에야 인천에 상륙하였다. 그럼으로 해방일로부터 그때까지 약 3주일 간은 일본 총독부에 의해 행정 및 치안 질서가 계속 유지되었다. 각종 행정 조직과 관리는 물론, 치안, 방송, 무역 등도 종전대로 일본인들을 중심으로 수행되어 나갔다.

 

그 사이 한국의 지도자들과 단체들은 독립된 나라를 만들기 위한 노력에 착수했다. 건국동맹을 계승한 여운형 중심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박헌영 주도의 '조선공산당', 그리고 김성수, 송진우 등의 기업인과 지식인이 중심이 된 '한국민주당'과 같은 단체들이 속속 만들어졌다.

 

특히 일본 총독으로부터 치안 유지 협조를 받은 사회주의자 여운형은 다른 단체보다 빠르게 중앙의 '건국준비위원회'와 지방의 '인민위원회' 조직을 확대해나갔다. 미군 진주가 임박하자 조선공산당의 박헌영 등 좌익 세력이 가세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재빨리 독자적인 정부를 구성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본인의 승인도 받지 않은 채 정치적 이용을 목적으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고, 여운형, 허현, 김구, 김규식, 김성수 등과 같은 좌.우파 인사들의 이름을 넣어 '조선인민공화국'을 급조해 조직을 발표했다. 그리고 각 지방에서 실질적으로 공산 계열이 주도하는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기 위해 활발히 움직였다.

 

그것은 미군이 한반도에 진주하기 전에 미리 정국을 장악함으로써 미군의 개입 여지를 없애기 위한 공산주의 세력의 전략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뒤이어 진주한 미군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였다.

 

이러한 공산주의자들의 발빠른 주도권 장악 시도에 국내 지도자들과 해외 독립운동 세력의 결집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에 따라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국민적 단합과 협력이 어렵게 되었고, 남한 사회는 분열과 혼란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북한의 소력식 공산주의와 남한의 미국식 자유주의가 이미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었다.  

 

 

 

 

 

38도선 설정과 민족 분단

 

소련군의 점령 계획

 

한반도 분단은 소련군이 한반도 점령 계획과 군사 작전 지역의 확대로부터 비롯되었다.

 

스탈린은 한반도 북부 지역 점령을 완수하자, 폴란드 등 다른 동유럽과 마찬가지로 한반도를 소련 체제의 일부로 만들고자 하였다. 스탈린 최고 총사령관이 승인한 극동작전계획 제2호, 말리노프스키 사령관의 작전 계획, 그리고 포츠담 회담 시 열린 군사 회담에 제출된 소련군의 작전 계획은 소련군이 한반도 전역을 점령하고 한국 수도인 서울을 점령하겠다는 의사를 지속적으로 표명해 왔었다.

 

그러나 미국은 소련군의 한반도 전체에 대한 점령 계획을 거부했고, 얄타 회담 때부터 소련군의 군사작전 범위가 만주 지역의 일본 관동군 관할 지역임을 분명히 하였다. 소련군과 대결을 준비하고 있던 만주의 관동군과는 별도로, 한반도에는 일본 대본영군인 제17방면군이 주둔하여 일본 본토와 한반도 방위를 담당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때까지의 일본군 편제에 따르면 앞으로 소련군이 참전하더라도 소련군의 주둔 지역은 관동군의 관할 지역인 만주 지역에만 국한 될 것이었다. 따라서 한반도는 소련군의 관할 지역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소련의 참전이 임박하자, 일본은 소련의 공격에 대비하여 군편제를 변경시켰다. 일본은 한반도 북부 지역의 재34군을 만주국 관동군 관할로 재편했던 것이다. 그리고 한반도 남부 지역은 종전대로 제17방면군이 맡고 그 관할도 일본 대본영이었다. 오히려 제주도 지역에는 3개 사단을 증강시켜 본토 방위를 위한 최후의 전쟁 준비를 강화하였다.

 

일본군 대본영 관할 지역이었던 한반도 북부 지역이 갑자기 일본 관동군 관할로 재편되자, 한반도 북부는 소련군 점령 지역이 될 운명에 놓이고 말았다. 그것은 얄타 및 포츠담 회담의 합의대로 소련군이 관동군에 대한 무장 해제를 담당한다는 약정에 따른 것이었다. 결국 38도선 분할이란 얄타회담과 포츠담회담의 연장선상에서 미국과 소련의 군사 작전 지역의 범위이자 무장 해제 관할 지역의 구분에서 시작된 것이다.

 

미국의 하지 장군도 한반도가 38도선으로 분할되어 남.북한에 미국과 소련이 각각 주둔하게 된 것은 일본군의 군편제에 따른 미.소간의 합의사항의 이행 조치 결과였음을 분명히 하였다. 한반도 북부인 함흥에 주둔했던 제34군 세이부치 사령관은 일본 관동군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연길로 가서 만주 지역의 다른 관동군 부대와 함께 소련군에 항복하고 정전협정에 서명하였다. 한반도 남부에 주둔했던 아베 노부유키 일본 총독과 일본군 제17방면군 사령관 우에쓰키 등은 하지가 이끈 미군에게 항복 서명을 하였다.

 

 

 

38도선의 의미

 

38도선은 소련군과 미국군이 일본군의 항복을 받고 무장 해제를 하기 위한 군사적 편의에 따라 설정된 경계선이자 소련 공산주의의 남하에 대한 저지선이기도 했다. 소련은 38도 군사 경계선 이북 지역을 소련의 공산주의 체제 및 영향력의 확장선이자 통치 지역으로 간주하였다.

 

그에 따라 소련군은 북한의 공업 지대에 있던 수많은 선업시설을 철거하여 가져갔는데, 수풍 발전 시설 및 함흥, 원산 등 지의 각종 산업 및 기계 시설을 해체하여 소련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한국인의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고 가혹한 전체주의적 통치를 주도하였다. 그와 같은 소련의 만행은 우리 민족의 원성을 샀고, 급기야는 1945년 11월 학생을 중심으로 한 수천 명의 '신의주 반소의거'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자 소련군은 비행기를 동원하여 기총 사격, 탱크와 기관총을 동원한 대량 살상을 통해 진압하였다.

 

더구나 치스차코프 사령관의 소련 제25군은 8월 말부터 경기도 전곡과 동두천 간의 경원선과 금교와 신막 간의 경의선 철도 교통을 차단하였다. 곧이어 38도선 경계의 모든 도로 교통을 차단하였다. 며칠 뒤인 9월 2일에는 남한과 연결되는 전화와 우편마져 단절시켰다. 따라서 한반도는 미군이 서울에 들어오기 이전에 이미 소련군에 의해 실질적인 분단 상태에 들어가 있었다.

 

일본군 편제 변경에 따른 한반도 북부 지역까지로의 소련군 작전 지역의 확대는 한반도 북부가 스탈린 체제하의 소련 지배 지역으로 편입되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한반도 남부마저 스탈린 전체주의 체제로 편입되지 않는 한, 분단으로 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실제로 해방 직후인 9월 20일, 북한 지역에 독자적인 정부를 구성할 것을 지시한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한반도는 이미 1945년 9월부터 분단국가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