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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강남의 여름 9 : 고난의 역사 광복, 그리고 현실과 미래 3

 

 

 

강남의 여름 9 : 고난의 역사 광복, 그리고 현실과 미래 3

 

 

                                                                                우면산의 여름 모습, 가을을 부르는 코스모스

 

 

 

좌익의 무장 폭동

 

대한민국 건국이 가시화되자, 좌익 공산 세력들은 대한민국 건국을 저지하기 위한 극렬투쟁에 나섰다.

 

소련 공산당의 지침을 받은 좌익 공산 세력들은 처음부터 미국이 남한에서 손을 떼도록 만들 목적으로 사회 혼란을 일으키며 미군정의 활동을 방해하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좌익들은 1946년 7월부터 미국을 반동적이라고 규정짓고 반미운동을 적극 전개할 것을 선언하고 폭력 투쟁에 나섰다. 그리고 미군정을 향하여 권력을 좌익 계열이 만들어 놓은 인민위원회에 넘기라고 요구하였다.

 

조선공산당 박헌영 계열의 좌익들은 노동자와 농민을 선동하여 9월 총파업과 대구를 중심으로 한 10월 폭동을 일으켰다. 남로당은 북한 주둔 소련군 정치국으로부터 직접적인 지휘를 받고 자금을 받았다. 공산당 산하의 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와 전국농민조합 총연맹(전농)을 중심으로 한 파업은 전국적으로 번져나갔고, 한국 사회를 혼란으로 몰아갔다.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는 공산 좌익들이 대규모 무정폭동을 일으켜 대구경찰서와 달성경찰서를 습격하였고, 경찰 무기로 무장한 좌익들은 무차별적인 습격.방화에 나섰고, 경찰과 우익 인사에 대해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하였다. 대구 폭동은 경북 및 경남 지역으로 확대되었고 경북 22개군 중 16개 군, 경남 18개군 중 10개 군에서 폭동이 발생하였다. 한마디로 풍전등화의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경찰관 39명, 민간인 44명 등 총 83명의 사망자를 포함한 큰 희생이 발생하였다. 공산좌익들은 이 폭동을 '위대한 10월 인민항쟁'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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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익의 반미 투쟁

 

좌익 공산 계열은 1947년 2월부터는 철도 파업과 폭동 방식을 통해 미군정 거부운동에 들어갔다. 좌익의 궁극적인 목표는 미군정으로 하여금 소련에 양보케 하여 한국에서 미군을 철수시킴으로써 한반도 전체를 소련의 위성국으로 만들려는 것이엇다. 1947년 3.1절 집회를 독자적으로 개최한 좌익 공산 계열은 3월 22일 주요 도시와 공장에서 공산당 계열인 '전평' 주도의 총파업 및 대중 폭동을 일으켰다.

 

또한 공산 계열은 7.27 군중집회와 각종 폭동을 통해 사사건건 한국 사회를 혼란으로 몰고갔다. 미 군정청이 일제시대의 9개 전문학교를 통합하여 '국립서울대학교설립법'을 만들자, 박헌영의 공산당은 북한 주둔 소련군 사령부의 지시를 받아 '국대안(국립대학교안) 반대투쟁위원회'를 구성하고 대대적인 반대 투쟁을 벌였다.

 

박헌영은 김일성과 소련을 방문한 이후 '일국일당의 원칙'에 따라 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좌익 계열을 통합하여 남조선 노동당을 만들어 놓았었다. 그들의 투쟁 목표는 남한에 공산주의 정부를 구성함으로써 공산화된 통일을 이룩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남한의 민족 진영 지도자들은 남한만이라도 공산화되지 않은 나라를 만듦으로써 소련 및 공산화된 북한에 맞서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남한의 독자적인 정부수립운동의 필요성을 제기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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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의 좌우합작 실패

 

미군정은 냉전이 본격화되기 전까지는 미소공동위원화를 통해 소련과의 합의를 이끌어내고 좌우합작을 통해 얄타 체제 및 모스크바 협정에 따라 한반도 문제를 해결한다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에 따라 미군정은 신탁통치를 극렬히 반대하는 이승만, 김구의 우파나 불법 폭동을 일삼는 박헌영의 좌파를 배제시켰다. 그리고는 독립촉성회 부의장이던 김규식과 인민공화국 부주석이던 여운형과 같은 중도 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좌우합작 세력을 내세워 소련과 협상하려 하였다.

 

그러나 전국민적으로 신탁통치 반대 열기가 거셌고, 이승만, 김구를 중심으로 하는 민족 계열의 결집력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미군정의 좌우합작 노력은 성공할 가능성이 없었다. 그리고 여운형의 중도좌파조차도 소련의 지시를 받는 박헌영의 공산당으로부터 배제되어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미군정의 뜻과 달리 좌우합작위원회는 영향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그 과정에서 미군정은 정식으로 독립정부를 구성하기 이전에 과도적인 입법기구를 설치하였다. 과도입법의원은 민선 대표 및 관선 대표 90명으로 구성되었다. 그것은 독립에 대비하여 남한 지역에서 국민들의 의사를 수렴하고 정치 참여를 확대시킴으로써 민주주의 경험을 쌓기 위한 것이엇다.

 

과도입법의원이야말로 성인 모두가 참여하여 리 단위에서 대표를 선출하고, 그 대표가 입법의원을 간접 선출하는 민주적 방식으로 이루어진 대의기구였다. 이처럼 국민의 민의를 물어본 최초의 선거 결과는 이승만 중심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17명, 한국민주당이 14명 등으로 제1, 제2당이 되었다. 민선 당선자의 대부분이 민족 진영의 우익 인사였다. 미군정이 암묵적으로 후원한 좌우합작위원회는 많은 후보를 냈지만, 당선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미소공동위원회와 좌우합작위원회의 실패에 이어 과도입법의원에서도 민족 진영이 승리하자, 미군정은 더 이상 소련과의 합의에 의한 통일 정부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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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민족 세력의 건국운동

 

반탁을 통해 즉각적인 독립정부를 구성하자는 데에는 민족 진영의 의견이 일치했다. 그러나 독립정부를 우선 남한만이라도 구성할 것이냐, 아니면 북한까지 참여하는 정부를 추진할 것이냐를 두고 민족 진영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났다. 신탁통치 반대라는 데는 공동전선이 이루어왔지만, 소련의 영향을 받은 북한을 포함시킬 수 있느냐를 두고 의견을 달리하였던 것이다.

 

이승만은 소련의 합의가 없는 상태에서 남북 총선거는 실제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으로 남한만이라도 정부를 수립하자고 하였다. 그렇지만 김구, 김규식은 이를 끝내 거부하고 김일성과 회담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김구를 비롯한 남북협상파는 이미 남한에서 유엔 감시하에 총선거가 준비되던 1948년 4월, 국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북한으로 올라가 김일성을 만나 담판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남북협상이라는 회담 자체부터가 김일성의 남한 사회 분열책의 일환이었다. 따라서 김구, 김규식은 남한에서 진행되고 있던 제헌의회 선거에 대한 거부와 미군 철수 등에 관한 결의 등에 찬동하는 등 김일성과 공산주의자들에게 끌려다니다가, 본격적인 회담도 제대로 진행하지 못한 채 국민들의 비난 속에 내려와야 햇다.

 

게다가  남한으로 송전을 계속하겠다던 북한이 약속과 달리 5월 14일부터 전기 공급마저 중단하고 말았다. 전국적 전력 생산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북한으로부터 갑작스런 전기 공급이 차단됨에 따라 남한 경제는 마비되었다. 그에 따라 남한은 미국이 제공한 발전용 선박에서 공급받는 전기를 통해 겨우 유지될 수밖에 없었다. 남북협상이 실패하고 대한민국 건국 움직임이 강화됨에 따라 김구, 김규식은 정국의 주도권을 잃고 말았다.

   

    

 

  

 

미군정 시기와 한국 사회의 변화

 

미군정의 성격

 

한국이 해방되자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한국인의 영웅적인 민족임을 치겨세우면서 높이 평가하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독립국가의 기능과 책임은 한국인 스스로 담당하게 될 것임을 천명했다.

 

미군정은 일본 도쿄의 맥아더 사령관이 주도하는 극동군 사령부 산하의 존 하지 장군이 이끄는 미 제24군이 맡았다. 미군정청의 각종 정책은 미국무부의 지시를 받고 이루어졌다. 미군정은 한국에 대한 지식도 많지 않았고, 준비도 없었기 때문에 혼란스런 한국사회에서 군정을 실시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가능한 한 빠른 시간 이내에 한민족이 독립국가를 구성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자 했다. 정부 이양에 앞서 군정 업무도 가능하면 한국인 중심으로 추진해 나가자고 하였다. 1946년 9월부터 미군정은 한국인의 역활을 확대시키고, 미군정의 민정 장관에는 좌우합작 중심 인물인 안재홍이 임명되엇다.

 

물론 이과정에서 일제시대 행정 겅험을 가진 관리와 경찰들이 대거 다시 등용되었고 그것은 미군정의 효율성과 전문성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미군정의 성급한 조치는 친일파 제거라는 이승만 정권의 청산작업이 처음부터 불가능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일제시대는 행정직 중 고급 직위의 18%, 중간급 직위의 32% 정도만을 한국인이 맡고 있었지만, 미군정하에서는 주요 정책 결정직을 제외한 모든 영역을 한국인들이 맡게 되었다. 1947년 6월부터 행정기관은 '남조선과도정부'라 불렀고, 19개 각 부처 책임자와 각 도지사는 모두 한국인이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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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의 자유화 정책

 

미군정은 봉건적인 조선시대와 식민지 일제시대를 살아온 한국민에게 커다란 역사적인 전기가 되었는데, 비록 3년이라는짧은 기간이었지만 한국 사회는 서양  문명이 주도하는 사회로 급속도로 탈바꿈을 하고 있었다.

 

일본군 무장해제와 치안 및 질서 유지라는 차원에서 시작된 미군정은 한국의 사정에 어두웠고 사행착오가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좌익의 무장폭동 등 어려운 사회적 조건 때문에 혼란도 불가피하게 나타났다. 신탁통치와 좌우합작을 추진하려 했던 미군정과 그것에 반대하고 즉각적인 독립노선으로 나아간 한국 지도자의 갈등도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정시대를 통해 행정 체제, 교육 제도 및 군사 제도에서 발전적인 변화가 나타났고, 봉건시대 내지 전시동원 시대의 사회, 마을이나 씨족 공동체 및 국가라는 틀에 묶여 있던 일반 개인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기반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미국의 건국 지원

 

세계적 차원에서 펼쳐지는 소련의 적화야욕이 드러나면서 냉전이 격화되자, 1947년 3월 공산주의를 막는 것이 미국의 행후 정책이 될 것임을 예고하는 트루먼독트린이 발표되었다. 그에 따라 소련과 합의에 의한 신탁통치로 한국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미국의 전략도 수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을 기점으로 미국은 남한에 독자적인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1947년 7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소련과 는 합의에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미국은 한국 문제를 유엔으로 넘겼다. 미국은 1947년 11월 유엔 결의안을 통해서 유엔 감시하에 남.북한에서 인구비례에 의한  총선거를 실시하고, 그 선거 결과에 따라 통일정부를 수립한다는 결정을 통과시켰다. 이는 유엔을 통해 소련의 기도를 분쇄하고 한반도 통일 정부를 수림하고자 하는 것이 미국의 기대였지만 그것은 소련이 유엔감시단의 북한 지역 입국 거부로 물거품이 되고 만다. 스탈린의 야욕과 탐욕에 비해 트루만의 우유뷰단과 우매함이 크게 드러나는 것이기도 했다.

 

이에 따라 1948년 1월부터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구성되어 한국에서의 선거 관리를 맡았다. 소련의 거부로 위원단이 북한 지역에서는 활동할 수 없게 되자, 유엔은 다시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만 우선적으로 선거를 통해 정부를 구성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1948년 5월 10일 총선거에 의해 제헌의회가 구성되고, 제헌헌법이 마련됨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질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미국은 제2차 대전 체제에서 평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한국 주둔 미군을 철수시키려고 하였다. 미국은 한국 내 독자적인 방위 체제 구축을 위해 한국과 1948년 8월에 '잠정작인 군사안전에 관한 행정협정'을 체결하고, 한국군의 무기 장비 조달과 군사 훈련에 대한 대부분의 비용을 부담하였다. 그리고 1949년 10월에 맺은 '상호방위원조법'에 의거하여 방위물자 및 교육 지원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미군이 지원한 군사 물자는 대부분 제2차 대전시 미군이 사용하던 M-1 소총, 칼빈 소총, 박격포, 3.5 무반동총, 105밀리 곡사포, 차량 등 낡은 장비들이 대부분이었고 그것도 소화기 위주의 경장비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북한 김일성은 소련으로부터 막대한 군사물자를 지원받고 있었으며 소련의 최신형 T-34 전차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또 중국 모택동으로부터는 조선인 출신 중국 팔로군을 넘겨 받았고 그들은 모두 실전 경험이 뛰어난 부대들로 한국전쟁 발발시 북괴군 최선두에서 남침의 주력을 담당한 부대로 활약하게 된다.

 

 

   

 

 

갈등의 시간들

 

1945년12월31일 모스크바 3개국 외무장관 회의의 결의가 알려진 후 서울운동장에서 벌어진 우익의 신탁통치 절대반대 시위
1945년12월31일 모스크바 3개국 외무장관
회의의 결의가 알려진 후 서울운동장에서
벌어진 우익의 신탁통치 절대반대 시위

 

 

미·소공동위원회에서 한반도 문제에 대한 합의를 보지 못하자, 미국은 미·영·중·소 4대국 회담으로 이관할 것을 제안했다. 영국과 중국은 4개 국 회담 초청을 받아들였으나 소련은 그 회담이 모스크바 협정을 벗어나는 것이라며 거부하였다.

 

미국은 모스크바협정 노선을 포기하고 한국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였다. 이미 1947년 초부터 트루만 행정부는 소련과의 협력을 통한 한반도에 통일된 정부를 수립하겠다는 기존의 방침을 점차 포기하고, 남한으로부터 군대를 철수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였다. 1947년 7월 하순, 국무부·육군부·해군부 대표로 구성된 3부조정위원회(SWNCC)에 의해 설치된 한국문제특별위원회에 한국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할 것이 제안되었다. 9월 l7일, 미국은 한국의 독립문제를 유엔 제2차 총회에 제기하였다. 이는 ‘다자적 해결’ 방식으로 국제공조를 통해 소련과 타협하지 않고도 한국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명분을 획득할 수 있었다. 또한 철군 후 남한의 안전보장도 가능한 방안이었다.

 

미국안에 맞서 미·소공동위원회 소련대표단은 한국문제가 제2차 세계대전 중 발생한 문제로 유엔은 관할권이 없다고 반대하면서, “조선인민이 자유의사를 표현하는 것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조선에서 미소 양국 군대를 동시 철거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를 1947년 10월 유엔총회에서 미·소 양국 군대를 1948년 초 동시에 철거하자는 안으로 다시 제안하였다. 이에 대하여 미국은 유엔의 감시 하에 남북 총선거로 통일정부를 만들고 그 통일정부 스스로 치안군을 편성한 후 그 치안군이 전 한국의 치안을 보장하기를 기다려 미·소 양군이 철퇴할 것을 주장하였다. 미 군정측은 소련안이 일제로부터 독립한 한국인의 자주적 정서에 부합하였기 때문에 그 파급력을 우려하였지만 좌익세력을 제외하고는 일방적인 철수에 신중한 입장이었다. 이승만, 김구, 한국민주당을 비롯하여 좌우합작위원회에서도 한국문제가 유엔으로 이관되어 유엔 감시 하에 남북통일 총선거로 정부를 수립하자는 안을 지지하였다.

 

좌익측은 소련안을 적극 지지하면서 유엔한국위원단이 “미국의 식민지가 될 남한 단독정부를 강제로 수립하기 위한 도구”라고 주장하였다. 북한도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유일한 길은 외국군대가 철수한 후 한국 전역에 걸쳐 실시될 인민위원회 구성을 위한 총선”이라고 강조하였다.


유엔에서 선(先) 정부수립·후(後) 외국군철수를 주장한 미국과 그와는 정반대의 입장을 고수한 소련이 크게 대립하였다.


미 군정은 이제 좌익세력에 대항하기 위하여 프랑스에서 드골, 중국에서 장개석(蔣介石) 등과 같은 우익지도자들과 함께 남한만의 정권이라도 세우려고 하였다. 1947년 11월 14일, 미·소 양국군을 1948년 1월 1일까지 철수시키자는 소련안을 부결시키고, 유엔총회는 한국독립의 절차를 규정하는 미국의 결의안을 가결하였다. 그러나 소련은 점령군이 양 지역에서 동시에 철수함으로써 한국인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 결의안에 반대하였다. 한반도에서 국회를 구성하고 통일정부수립을 위해 선거를 실시하는 데에 소련의 협력을 기대할 수 없었다. 이제 미국과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의 동맹관계에서 완전히 멀어져 갔다.

 

유엔은 총회의 결의에 따라 총선을 감시하기 위해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을 구성하여 파견함으로써 한국문제에 대한 유엔의 개입을 본격화했다. 위원단은 오스트레일리아·캐나다·중국·엘살바도르·프랑스·인도·필리핀·시리아·우크라이나 등 9개국 대표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1948년 1월 초부터 서울에서 활동을 개시하였다. 1948년 1월 8일, 공산진영의 우크라이나공화국을 제외한 8개국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이 서울에 도착하여 12일부터 덕수궁 석조전에서 동 위원회를 열고 인도대표 메논(Crishna Menon)을 임시의장으로 선출하였다. 이어서 13일에는 한국인대표들과 협의할 것을 결의하고, 19일에는 3개 분과위원회와 특별위원회, 그리고 감시단을 설치하고 남북을 통한 전 한국의 총선거방안을 본격적으로 논의하였다. 메논 의장은 하지 중장을 요담하고, 북한주둔 소련군 사령관에게도 면담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소련군사령관이 소련점령하의 북한으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입국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위원단은 남한에서만 총회의 계획을 실시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 대하여 소총회와 협의할 것을 결정하였다. 1948년 2월 26일, 유엔 소총회에서 “1947년 11월 14일의 총회결의에 설정된 계획은 실시되어야 하며, 이 목적을 위하여 필요한 조치로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전 한국을 통한 선거 감시에 임하여야 하며, 그것이 불가능한 경우에는 위원단이 접근 가능한 지역에서라도 선거 감시에 임하여야 한다”는 미국의 결의안이 압도적 다수로 가결되었다. 이는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실시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미소공동위원회의 회의 절차를 토의하는 양국 대표들(왼쪽은 미국대표 하지, 오른쪽은 소련 대표 슈티코프)
미소공동위원회의 회의 절차를 토의하는 양국 대표들
(왼쪽은 미국대표 하지, 오른쪽은 소련 대표 슈티코프)

 

1948년 5월 10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감시 아래 제헌국회를 구성하기 위한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위원단은 총선거에 대해 그들이 접근할 수 있고 전체 한국 인구의 2/3에 해당하는 주민을 가진 한국내 지역에서 유권자들의 자유의지의 정당한 표현이었다고 평가하였다. 유엔한국위원단은 남한에 국회가 구성되고 정부가 수립되자 한국을 떠났다. 대한민국이 수립된 후에도 양대 진영이 날로 대립되어 가는 정세 속에서 자유진영은 한국에 대한 대책으로 유엔한국위원단을 재조직하였다. 왜냐하면, 미국은 남한에서 위원단이 남한 내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북한의 남한 전복활동을 억제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즉 미국은 미군의 철군 후 유엔을 남한방어의 최소한의 기제로 간주하였다.

 

1948년 12월 파리에서 개최된 제3차 유엔총회에서는 소련을 비롯한 공산주의국가의 반대를 일축하고 48 대 6이라는 압도적 다수로 한국정부를 승인하는 동시에 ‘유엔신한국위원단’을 설치하였다. 그 후, 1949년 11월 유엔 제4차 총회의 결의로 중국, 필리핀, 오스트레일리아, 인도, 프랑스, 엘살바도르, 터키 등으로 새로 구성된 위원단은 전쟁직전까지도 한국 내에 군사충돌 사태를 감시하고, 한국통일과 남북 교역장벽 제거방안을 계속 강구하였다.

 

한국인들은 대한민국이 유엔에 의하여 창립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한국내의 많은 문제에 대한 해결방법을 유엔에 기대하였다. 그러나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진정한 통일의 길은 조선인민 자체의 힘만이 해결할 수 있는 인민의 길”을 강조하였으므로 이전 한국위원단의 입국을 거부하였듯이 신한국위원단의 활동을 부인하였다. 위원단의 보고처럼 전 세계에 걸친 미·소간의 대립은 그들의 활동을 제약하는 근본 원인이었다.

 

이에 따라 1948년 1월부터 유엔한국감시위원단이 구성되어 한국에서의 선거 관리를 맡았다. 소련의 거부로 위원단이 북한 지역에서는 활동할 수 없게 되자, 유엔은 다시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만 우선적으로 선거를 통해 정부를 구성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1948년 5월 10일 총선거에 의해 제헌의회가 구성되고, 제헌헙법이 마련됨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질 수 있었다.

 

그리고나서 미국은 제2차대전 체제에서 평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한국 주둔 미군을 철수시키려고 하였다. 미국은 한국 내 독자적인 방위 체제의 구축을 위해 한국과 1948년 8월에 '잠정적인 군사안전에 관한 행정협정'을 체결하고, 한국군의 무기와 장비의 조달과 군사훈련에 대한 대부분의 비용을 부담하였다. 그리고 1949년 10월에 맺은 '상호방위원조법'에 의거하여 방위 물자 및 교육 지원을 제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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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의 종결과 미군 철수

 

당시 미국은 소련의 공산주의 확산을 저지하는 데 한반도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더구나 당시 중국에는 모택동의 공산정권이 들어서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아시아에서 스탈린 공산주의 체제의 확산에 대한 미국의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또한 미국 정부는 주한 미군의 주둔에 따른 막대한 비용 소요에 미국민들의 부정적인 여론에 많은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한국 전부 수립 직후인 1948년 9월부터 3만 명에 이르렀던 미군 중 500여 명의 군사고문단만 남겨놓은 채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철군은 1949년 6월말에 완료되었다.

 

나아가, 1950년 1월 미국의 애치슨 국무장관은 미국의 방위선은 일류산 열도-일본-필리핀으로 이어지는 선으로 되어 있고, 한반도가 제외되어 있음을 발표하였다. 미군 철수와 애치슨 선언으로 대한민국은 결국 소련과 김일성 체제에 의한 대남 침략 전쟁에 무방비 상태가 되고 말았다.

 

 

 

 

 

미국의 경제원조

 

한국은 식민사회를 거치면서 농업 종사자 인구가 다수인 농업 중심 사회엿지만, 이미 공업 생산이 노업 생산을 능가하는 사회로 진입하고 있었다. 남한 지역에서는 방직, 식료, 기게 공업이 성장해 있었고, 북한 지역에서는 화학, 전력, 금속산업이 성장해 있었다.

 

그러나 해방 후 일본 기술자와 자본이 돌아가고 일본과의 무역도 거의 중단된 상태에서 설상가상으로 남북한으로 분단되자, 농업을 제외한 모든 산업 생산에서 가동률은 급격히 줄고 실업률은 치솟았다. 가동 공장 수와 생산량이 이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자, 국민들은 극심한 생필품 부족에 시달렸다. 특히 ㅈ너력, 화학, 석탄,금속, 요업 등은 북한 지역에 편중되어 있어 남한 경제에는 타격이 극심하였다.

 

따라서 미군정은 대대적인 우너조와 지원 없이는 ㄴ마한이 정상적인 경제 안정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당장 소비품에 대한 원조에 치중하였다. 우너조는 점령지역의 경제부흥자금이나 점령지역 행정구제자금 등의 우너조와 차관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정부 수립 전까지의 기간에만도 식료품 등 5억 달러에 달하는 원조가 주어졌다.

 

 

 

 

미군정의 농지 개혁

 

미군정청은 1945년 10월 포고령 제1호를 통해 가을 추수부터 일제시대의 공출제를 폐지하고 자유거래제를 도입하였다. 그리고 군정법령 제9호를 통해 소작료도 생산량의 절반 이상이었던 고율제를 폐지하고 3분지 1만 받도록 하는 3.1제를 적용하였다.

 

또한 미군정은 일본인이 소유하던 토지는 남한 총경지의 13.4%에 해당하는 토지를 농민들에게 신한공사를 설립하여 불하 방식으로 분배하엿다. 분배 방식은 토지 생산량의 3배에 해당하는 양을 현물로 20%씩 15년에 걸쳐 분할상환하는 유상분배 방식이었다.

 

또 미군정은 일보이 소유 재산도 인수하여 일반인들에게 불하하였다. 이에 따라 기업체, 은행과 보험회사 등 약 3,053억 우너에 해당하는 일본인 소유 재산이 미군정으로 귀속되었다가 한국인이나 한국 정부에 넘겨졌다.

 

미군정은 신한공사를 통해 공장, 과수원, 주택, 대지, 접포 등을 처분하고 총 3,551개의 귀속 사업체가 한국 민간인들에게 불하되었고 대규모 사업체는 한국 정부로 이관되었다. 그러나 상당수의 소규모 일본인 재산은 신고되지 않은 채 일본인과 한국인 사이에 개인적으로 매매되었다.

 

이렇게 하여 한국 사회는 자유시장경제 제도가 정착되기 시작하였고 곡물자유거래제,소작료의 조정 등 모두가 자유로운 갱니의 생산 의욕을 고취ㅎ시키고 마을 공동체를 넘어 시장을 통한 경제 활동을 보다 활성화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 때 공장이나 토지에 대해 가능한 정부가 아닌 민간인들에게 불하하였고 이 귀속재산을 불하받아 성장한 기업으로 현대토건, 삼성물산, 럭키화학, 한진상사 등이 있었고 이들 기업체들이 오늘말 한국 경제개발의 주역이 되었다.

 

미군정의 노력은 조선시대 봉건경제와 일제하 통제경제를 넘어서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정착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고 공산주의 확대에 맞서 자유민주적 체제가 형성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한국인은 수천 년간 지속되어 오던 중국 문화 교류와 그 이후 형성되엇던 일본의 문화교류를 넘어 ㅁ니좃사상 최초로 미국 중심의 서양문명권과 대대적인 교류를 시작하게 되었다. 일제치하에서 미국을 철천지 원수로 각인 되었던 한국인들에게 미국 중심적 사회로 갑작스런 탈바꿈은 한국 사회에 전통의 붕괴와 사상의 혼란, 고유한 정신세계의 함몰, 유교 봉건 폐습의 타파, 양반.선비.양인.천민 등 사회계급질서 파괴 등 외부 세력에 의해 급격한 문명사적 대전환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미국 문화의 유입과 교육의 확산

 

해방 후 산업 체계의 붕괴와 정치적 혼란으로 사화적 안정은 확보되지 못햇지만, 자유로운 문화와 사상, 언론의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태평ㅇ야 전쟁 발발 후 페간되엇던 동아, 조선일보가 1945년 말에 각각 복간되엇고 국민의 의사를 대변하기 시작하였다. 1946년 마라토너 서윤복 선수가 보스톤 마라톤대회에서 1위를 함에 따라 국제 무대에서 한국인의 가능성과 미래에 대한 기대를 갖게 만들었다.

 

자유롭게 영화를 보고 문학잡지를 구독하고 옷차림도 전통 한복이나 일본식에서 서양식으로 변해갔다. 라디오 보급이 확대되어 세계 소식과 전국적인 상황에 대한 뉴스를 접할 수 있었다.

 

또 큰 변화는 국민 교육의 보편적 확대였다. 초등학교 등 정규 교육을 받은 인구가 불과 25%, 문맹률이 80%에 달하던 나라였지만, 해방 후 높은 교육열은 향후 시민의식 함양과 한국 사회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전국민 6년제 초등학교 의무교육제를 도입하고, 정부 예산의 10% 이상을 교육에 배정하였다. 이에 따라 1950년대 후반에 이르면 취학 년령의 95%가 의무교육을 받는 나라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교육 제도의 비약적인 발전은 신분이나 출신 배경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전근대적 사회구조에서 기회 균등이 보장되는 사회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고 개인이 미래를 준비하고 자기 가치에 따라 직업을 선택하고 사회 활동을 해나가는 자우주의 사회로 변화하도록 만드는 출발점이 되었다.

 

종교 영역에서도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주둔 미군의 영향으로 한국 사회에 기독교 문명이 확산되었고, 60만 명 정도의 기독교 인구가 급격히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또 교화와 성당에서 각종 구호물품을 분배하는 방식을 통해 기독교와 천주교를 보급하였고 기독교 계통의 교육 기관 및 구호 단체와 기관 설립이 잇따라 나타났다.

 

또 개신교가 번성했던 평양을 비롯한 북한의 평안도,황해도 지역에 소련 공산 체제가 들어섬에 따라 탄압이 강화되자, 기독교 인구가 대대적으로 월남하여 남한에서는 기독교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게 되었으며, 이는 서양 문화와 문물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데 커다란 역활을 하였다.

 

이는 동로마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공인함에 세계적으로 확산된 것이나, 이슬람교가 점령지 마다 급속히 확산된 것이나 마찬가지로 전승국의 종교는 군대를 따라 점령지역으로 신속하게 확산을 하는 방법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사실은 역사를 통해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나라는 전통 종교는 상실하고 외래 종교들이 난립하여 종교 박물관이 되었다. 그동안 비대해진 종교가 많은 신도와 거액의 재물을 바탕으로 이제는 정치에 관여할 뿐만 아니라 권력까지도 넘보며 은행을 설립하여 부를 다욱 탐하고 정당을 만들어 정치 권력을 향유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현실이 되었다. 그래서 지금 한국 사회는 정치가 헌법과 표를 의식하여 종교인를 우대하지 않을 수 없고, 종교 천국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 최근에는 종교 간의 갈등은 물론 같은 종교내에서 종파 간에도 수많은 분파가 조성되어 종교 권력과 재산을 두고 치졸한 싸움질을 벌이고 있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농촌 사회도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5일 장을 넘어 주변 도시에서 형성된 상설시장이 나타나고 마을 공동체를 넘어 경제단위가 형상되었다. 그러나 농촌은 여전히 대가족 중심의 가족 노동력을 통한 농업 생산 활동이 주를 이루었고 마을 공동체는 과거 봉건시대 권력을 휘둘렀던 씨족적 집성촌이 여전히 다수를 이루고 있고, 유교적 문화가 뿌리 깊게 남아 있는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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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적극적인 군사 지원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더불어 소련은 유럽에서의 공산세력 확대에 주력하는 한편, 아시아에 있어서는 중공이 아시아에서 주도권을 장악할 때까지 조용히 정세를 관망하면서 한반도의 적화통일을 위한 시기의 성숙을 기다린다는 전략을 수립하고 있었다.

 

소련의 북한 진주는 시초부터 한반도에서 당분간 남북한의 분단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우선 38도선 이북에 장차 한반도의 적화통일과 남진정책의 성공적인 수행을 위한 강력한 군사기지를 확보하고, 시기가 성숙할 때까지 전력을 비축하려는 공산기지화 정책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소련의 북한 점령정책은 1945년 8월 이후 북한지역에서의 소련식 공산정권의 토착화를 위한 김일성 중심의 체제 형성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소련은 북한으로 진주하자마자, 곧 북한 내 민족계열의 인사를 숙청한 다음 1946년 2월 8일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조직하였으며, 2년 후인 1948년 2월 8일에는 최신 소련장비로 무장한 인민군을 창설하는 등 적화전략을 수행하기 위한 체제와 무력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소련은 이미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을 때부터 스티코프 소련대표를 통하여 제기해온 미·소 양군의 한반도 철수 문제를 서두르기 시작하였다. 이는 가급적이면 빠른 시일 내에 미군을 한반도로부터 철수시킴으로써 남한지역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감소시켜 힘의 불균형을 조성한 후 한반도를 공산화시키기 위한 전략적 포석이었다.

 

1948년 9월 12일 북한은 최고인민위원회의 간부회의에서 남북한 점령군의 조속한 동시철수를 촉구하는 호소문을 채택하여 미국과 소련측에 각각 발송함으로써 소련측의 철수 주장에 명분을 실어 주었다.


1949년 8월 소련의 원자폭탄 실험과 10월의 중국대륙의 공산화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서 진영의 한반도를 둘러싼 극동지역의 역할관계에 일대 전기를 맞게 하였다. 소련의 핵 실험 성공과 중공정권의 등장으로 공산세력은 극동에서 새로운 팽창의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으며, 이는 아시아에서의 미·소 대립에서 소련의 지위를 더욱 강화시켰다.

 

이와 같은 호기를 이용하여 북한정권 수립이후 북한군의 근대화 및 전력보강 작업에 착수하였던 소련의 스탈린은 1949년 3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일성과 함께 회의를 개최하고 북한군의 전력화를 구체화하였으며 그 이듬해인 1950년 4월 또다시 비밀리에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일성과 함께 남침계획을 구체적으로 공모하였다.

 

                                                                               운무 속 국립국악원 전경

 

미국의 소극적인 군사 지원

 

동북아 정세에 많은 역사적 파장을 던진 애치슨 미 국무장관이 발표한 미국의 극동방위선
동북아 정세에 많은 역사적 파장을 던진 애치슨
미 국무장관이 발표한 미국의 극동방위선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전후처리 방안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한반도가 특정한 단일국가의 독점적인 지배하에 들어갈 경우 정치적으로 중대한 결과를 초래할 것으로 우려하여 한반도에 대한 연합국의 공동작전과 신탁통치 문제를 구상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포츠담회담 훨씬 이전부터 싹트기 시작한 미·소간의 대립적 관계는 신탁통치의 실현을 불가능하게 하였으며, 신탁통치안은 한반도를 둘러싼 미·소간의 대립을 표면화하는 직접적 계기가 되고 말았다.

 

미국의 한반도에 대한 정책은 1947년 미·소 공동위원회의 결렬과 중국 대륙의 국공간의 사태발전을 계기로, 미국이 한국문제와 더불어 동북아 지역의 전반적인 상황으로 재검토하면서부터 더욱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종전 후 급속한 감국과 국방예산의 감축으로 지상병력의 부족을 나타내게 된 미국은 1947년 5월부터 주한미군의 철수를 거론하기 시작하였다.

 

미군 철수(1949년 6월)후 날로 심화되어 가는 남·북한간의 군사적인 불균형과 북한의 남침 징후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오히려 남한의 북침 가능성을 우려하여 한국군의 증강과 군사 원조에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견지하였다. 미국은 방어를 위한 최소한도의 군원인 육군 병력 6만 5천 명을 기준으로 한 소요장비와 소수의 해군함정을 제공하는 데 그쳤다. 이는 북한의 군사력을 현저하게 증강시킨 소련의 군사정책과는 대조적이었다.

 

당시 미국은 한반도에 있어서도 소련이나 북한이 남한의 내부적인 혼란을 틈타 간접적으로 침투나 교란활동은 벌일 수 있을 것이나 전면적인 무력침공은 일으키지 못할 것으로 낙관하고 있었다. 더욱이 미국은 중국문제에 대한 불간섭 원칙을 계속 견지하면서 일본열도를 미국의 전략적 방위선으로 하여 공산세력의 팽창을 저지한다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중국문제에 대한 불간섭과 일본열도의 확보라는 전략개념 하에 설정되었던 미국의 한반도정책은 1950년 1월 12일 애치슨 미 국무장관에 의한 미국의 태평양방위선 선언에 의하여 대체적인 윤곽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 선언에서 미국은 알래스카-알류산 열도-오끼나와-류큐-필리핀을 연결하는 태평양방위선의 확보가 미국의 안전에 필수적임을 밝힘으로써, 이때 한국은 미국의 전략적인 극동지역 방어선에서 제외되었던 것이다. 이때 미국은 이때에 태평양방위선 외곽지역에 대한 침공 사태가 발생할 경우 이에 대한 유엔의 지원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음으로써 미국이 필요할 때 참여할 수 있는 융통성을 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