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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강남의 여름 10 : 고난의 역사 광복, 그리고 현실과 미래 4 (마지막)

 

 

 

 

 

강남의 여름 10 : 고난의 역사 광복, 그리고 현실과 미래 4 (마지막)

 

    

                                                                            서울 강남의 새벽 하늘이 맑고 청아하다                              

 

 

남.북한의 정세

 

남·북한의 정세는 여러 측면에서 상호 상반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북한에서는 소련의 비호 하에 실권을 장악한 공산당이 북한 사회를 철저하게 공산조직으로 체계화하기 시작하였다. 반면 남한에서는 미국이 공산주의 활동마저 용인함으로써 정국이 좌우로 분열되었고 공산분자들의 잇단 폭동사건으로 민심의 동요가 극에 달하고 있었다.

 

북한은 정권수립 후부터 모든 북한 주민들에게 한반도의 적화통일 사상을 주입시켜 전쟁을 준비하는 데 급급하였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모든 산업을 국유화하여 비교적 튼튼한 산업구조를 바탕으로 산업시설을 복구하고 생산을 증가하기 시작하였으며, 1948년부터는 2개년 경제계획에 착수하여 산업중산에 박차를 가함으로써 남침에 필요한 준비에 주력하였다.

 

남한은 미국이 현실을 외면한 채 민주주의의 이상만을 내세워 정책을 추진한 결과 여러 방면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특히 공산주의자들이 주동이 된 제주 4.3사건과 여순 10.19사건 등으로 사회 혼란을 극에 달하고 있었다. 이와 더불어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화폐 발행고가 불과 2년여 만에 7배로 증가하고 산업분야도 크게 위축되어 거의 방치되어 있는 상태였다. 물가는 3년 동안 무려 33배나 폭등하여 국민들의 생활고를 더욱 어렵게 하였다.

 

 

 

냉전으로 인한 세계의 블록화
냉전으로 인한 세계의 블록화

 

 

이 같이 남·북한간에 정치와 경제면에서 격심한 이질성과 격차를 나타내고 있는 가운데, 1948년 말경부터 북한에서는 군사력 증강작업에 착수하였으며 이때부터 북한은 소련제 탱크와 기계화 부대를 중점적으로 편성하기 시작하였다. 북한은 1949년 초부터 수시로 38도선 일대의 국군의 진지를 공격하여 탐색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북한군이 대규모의 무력남침을 자행할 수 있을 정도로 군사력이 증강된 것은 1949년 여름이 지나서였다. 북한군의 전력이 현저히 증가하기 시작한 것은 1949년 7월∼8월 경 소련장비들이 대규모로 밀반입되기 시작하고 또 중국대륙으로부터 5만 명에 가까운 중공군 출실 한인들이 귀환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이와 같이 날로 심화되어 가는 남북한 군사력 불균형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군사적 공백을 메우기 위한 한국군의 현대화와 군사력 증강의 요구에 대해서는 매우 미온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미국은 오히려 한국의 북침 가능성을 우려하여 군사원조에도 지나치게 소극적이었다. 미국은 육군병력 6만 5천 명을 기준으로 한 소요장비와 소수의 해군함정을 한국에 지원하였으며, 이 외에 약 479명으로 구성된 미 군사고문단을 설치하였을 뿐이었다. 따라서 이때의 한국군은 현대전 수행을 위하여 필수장비인 전차나 대전차무기조차도 보유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리고 한국군은 1948년 말 이후 각처에서 준동하고 있던 공비를 토벌하기 위하여 많은 병력을 전국에 분산시키고 있었다.

 

 

                                                                   아침 하늘이 맑고 더운 날씨가 낮에는 기승을 부릴 것 같다

 

국군의 창설

 

대한민국 국군의 창설은 미 군정법령에 의해 1945년 12월 군사영어학교와 조선 국방 경비대가 창설되면서 시작되었다. 1948년 8월 정부 수립과 함께 한국군은 5개 여단 15개 연대로 약 10만에 못미치는 병력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군사영어학교는 일시적으로 운영되었지만, 110명의 임관 군인들은 창군 과정 및 6.25전쟁 시 전쟁 지휘의 중심이 되면서 군수뇌부로 성장하였다. 조선경비사관학교에 뒤이어 전쟁 중이던 1952년에야 비로소 육군사관학교가 개설되었다.

 

창설된 한국군의 주요 인사는 주로 광복군 출신이 맡았다. 광복군 참모장과 제2지대장을 지낸 이범석은 국방장관이 되었고, 광복군 총사령관이었던 이청천은 초대 내각의 무임소장관에 등용되었다. 그 외에도 광복군 참모장이던 김홍일은 한국군 중장으로 육군참모학교장, 광복군 참장이던 최용덕, 송호성과 광복군 대령이던 안춘생, 김국주 등은 각각 공군참모총장과 경비대총사령관, 그리고 육사 교장과 군관구사령관 등에 보임되었다.

 

일본군 및 만주군 출신도 군의 중추가 되었다. 일본군 및 만주군 출신으로는 이용문, 박정희, 정일권, 백선엽 등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군은 취약한 군 조직과 빈약한 무기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6.25 전쟁 발발 직후 일방적으로 후퇴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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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색 물감을 풍어놓은 듯...... 하늘이 맑다

 

 

좌익의 건국 반대투쟁

 

유엔의 결의에 따라 한국에서 총선거에 의한 정부 수립이 기정 사실화되자 좌익 공산 계열은 총선 거부 및 대한민국 건국 반대투쟁에 나섰다. 일찍부터 "한국이 소련 연방의 하나로 편입되기를 원한다"고 밝혀왔던 박헌영의 남로당은 테러, 폭동 등의 불법 지하활동을 벌여왔다. 남로당 수뇌부는 나중에 대거 북한으로 월북했지만, 상당수는 김일성의 조선 노동당으로부터 지원을 받으며 대남 폭동 활동을 전개해나갔다.

 

그래서 그들은 '2.7구국투쟁'을 벌였는데, 총선을 앞둔 한국을 파업과 시위, 그리고 방화와 살인 등 혼란으로 몰아갔다. 좌익들은 유엔조사위원단을 몰아내고 미군 철수를 통해 '조선인민공화국'을 수립하자는 구호를 내걸고 유엔 결의안 반대투쟁에 나섰다. 그들은 미국은 제국주의 국가로, 우익 민족 세력은 남한을 미국 식민지로 만드려는 '반민족.반통일 세력'으로 매도하였다.

 

한편 좌익들은 북한 정권이 수립된 후에는 김일성 정권을 지지한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인공기를 내걸거나 소련 스탈린에 대한 감사문 서명운동을 벌이기도 하였고 평양 정부가 한반도를 대표한다고 주장했다.

 

김일성을 비롯한 공산주의자들은 스스로 '민주주의자'라고 말하고 '민주 개혁'을 완수하기 위해 '민주기지'를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대한민국에 대해서도 '국토완정'적 차원에서 공산화된 통일로 가야 한다고 공공연히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북한 공산주의를 추종하는 남한의 좌익들은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5.10총선을 방해하기 위해 선거 거부 무장폭동과 선거 무효화투쟁을 벌였다.

 

이처럼 좌익과 공산당 계열은 겉으로는 민족, 민주를 내세우며 소련에 예속되기를 원했고 민족통일을 주장했다. 그래서 폭동과 무장폭력을 사용하여 남한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시위와 반정부 활동을 적극 전개하였던 것이다.   

 

                                                                             청색 하늘에 새털 구름이 날아가듯이 흘러간다

 

 

좌익의 반란과 국가보안법 제정

 

전국적으로 펼쳐진 선거 파괴투쟁 가운데서 가장 전형적인 대규모 폭동이 바로 제주도의 4.3폭동이었다.  좌익들은 '미군 철수' 및 '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치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 및 총선 반대투쟁을 벌였다. 특히 제주지역의 공산 좌익 약 1,500여 명은 총과 죽창 등으로 무장하고 5.10 총선을 위해 선거인 명부를 열람을 진행시키던 제주 지역 치안 담당 경찰지서 13곳을 습격하였다. 좌익들은 경찰관서 및 행정관서를 장악하고, 경찰, 군인과 그 가족, 우익 인사들을 무참하게 학살하였다.

 

김달삼 등 폭도 지도자들은 북한으로 넘어가 투쟁 방향에 대해 지침을 받아 이를 실천하였다. 그들은 '이승만, 김구를 처단하라'고 외치며 대한민국 건국을 부정하였다. 진압군이 출동한 이후에도 좌익들은 한라산을 근거지로 하여 몇 년에 걸쳐 빨지산 투쟁을 전개하였다. 진압과정에서 2만 명에 달하는 군과 경찰, 좌익세력 및 무고한 민간인들이 희생당하는 비극을 초래하게 되었다.

 

또한  1948년 10월에는 제주 지역의 4.3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하려던 여수, 순천 지역의 육군 제14연대 700여 명의 군인들마저도 침투된 좌익의 선동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제주 지역의 폭동이 완전히 진압되지 않은 상황에서 여순반란으로 반란 세력이 장악한  '유격구'가 주변 지역으로 확대되자, 건국 직후의 대한민국에는 불안정이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지리산, 태백산 지역으로 후퇴한 공산 빨치산 세력들은 6.25 전쟁이 발발하자 인민군과 결합하여 유격투쟁을 통해 후방 지역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대한민국의 건국 과정과 건국 직후의 상황은 군국주의에 이은 또 다른 전체주의인 공산주의 세력과의 투쟁이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공산주의 투쟁을 통해 형성되고 지켜졌으며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과 1949년에 공산화된 중국을 옆에 둔 한국은 공산세력의 확산이라는 거센 파도에 맞서면서 근대적인 국민국가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건국 직후 만들어진 제헌국회는 '국가보안법'부터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정부는 전국적인 공산 좌익 계열의 폭력투쟁 및 테러에 맞서야 했다. 또 지리산, 한라산 등 산악지역으로 숨어들어간 대규모 빨치산 세력으로부터 위협에 맞서야 했고, 한반도 전역의 공산화를 노리는 김일성 정권과도 맞서야 했다. 

 

    

                                                     이수역 구산빌딩 뒤에 심어놓은 소나무, 아마 값이 꽤 나갈 것 같다

 

 

친일행위 처리 문제

 

민족 해방을 맞이하고 독립정부를 구성하면서부터 36년간의 식민지배 상황에서의 친일행위를 처벌하는 문제는 중요한 사회적 관심사였다.

 

친일행위에 대한 응징은 미군정기인 1946년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의 구성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래서 일제하에서 중추원 참의, 도회의원, 부회의원 및 칙임관급 이상의 지위에 있었거나 자기 이익을 위해 조선인에 피해를 끼치며 일본에 협력한 사람은 피선거권이 제한되었다.

 

더 구체적인 한국의 친일행위 처벌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9월 '특별법'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36년 가까운 오랜 기간 동안 일본 식민지배가 계속되어왔던 상황, 또한 동남아시아 대부분의 국가와 만주를 비롯한 중국까지도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던 상황, 그리고 우리 민족 독자적인 항쟁과 독립운동에 의해 일본 제국주의를 물리치지 못한 상황, 그리고 특히 미군정이 군정통치를 위해 대거 친일행위자도 대거 재등용하였던 상황 등에 비추어 볼 때, 친일행위 처벌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되자 제헌국회는 곧바로 일제강점기의 친일반민족 활동자를 처벌하기 위한 '반민족행위특별법'을 통과시키고, 곧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와 특별재판부를 구성하였다. 이에 따라 기업인 박흥식, 김연수 그리고 작가 이광수와 최남선, 경찰 간부 노덕술 등 총 559명이 체포되었다. 그리고 221명이 특별법에 따라 기소되었으며 재판 결과에 따라 처벌받았다.

 

그러나 좌우 대립과 냉전 체제의 형성, 그리고 공산 좌익의 대한민국 반대투쟁이 가열되면서, 친일행위 처벌은 철저하게 진행될 수 없었다. 특히 좌익들에 의한 사회 혼란이 계속되고 반민특위 활동을 하던 국회 특위 위원의 일부가 남조선노동당과 관계된 '국회 프락치'사건 등이 발생함으로써, 조사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더구나 반민특위의 조사 대상이 된 일제시대 경찰직에 있었던 고위 경찰들이 친일 조사를 조직적으로 방해하고 반민특위 습격사건을 일으킴으로써, 특위 활동은 조기에 종결되고 말았다.

 

한편 북한의 친일행위 처벌은 소비에트 공산화를 추진하는 과정의 일환일 뿐이었다. 그것은 재산을 가진 인사에 대해 '재산 뺏기'나 조선민주당의 조만식, 여운형과 같은 민족 계열 및 기독교 계열을 숙청, 배제하는 일을 친일자 및 민족반역자에 대한 처단 활동과 동일시하였다.

 

1946년 인민위원회위원 선거를 하면서 정적들에 대한 피선거권 및 선거권을 제한한 행위, 그리고 나중에는 재산을 국유화하는 공산화 작업과 소련의 만행을 거부하는 세력에 대한 응징을 친일파 숙청인 것처럼 몰아갔다. 즉, 북한은 토지를 가진 지주나 기업, 공장, 과수원, 건물 등을 소유한 사람 중 재산을 포기하지 않고 소련 군정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친일자라고 규정짓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아 국유화하는 과정을 '친일 청산'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하늘과 빌딩, 그리고 소나무가 어울린다

 

 

이승만 정부의 농지 개혁

 

국민의 70%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던 한국 사회에서 소작농 문제는 농민의 노동 의욕을 떨어뜨리고 봉건적 형식의 신분 불평등과 부의 대물림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었다. 그 때문에 농지개혁은 해방 이후 한국 사회의 핵심적 사안으로 부각되었다. 당시 한국에는 자작농이 14% 내외에 불과하였다. 소작농은 전체 농가의 절반에 이르렀으며, 경작지의 60% 이상이 소작지로써 지주의 땅을 경작하여 지주와 경작자가 반반씩 나누는 소작제가 보편화되어 있었다.

 

당시 북한에서는 '인민민주주의 노선'에 따라 노동자와 농민들을 동원하여 독재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방안으로 1946년 3월부터 '무상몰수 무상분배'라는 공산주의 혁명적 방식의 토지 재분배가 실시되었다. 이는 궁극적으로 토지의 협동농장화나 국영화라는 목표를 향한 일시적인 방편에 불과하였다. 그럼에도 토지의 농민 분배라는 충격적인 요법은 남한 사회에서도 영향을 주어 농지개혁을 불가피하게 하였다.

 

남한의 토지 개혁은 미군정기에 총경지의 약 13%에 해당하는 일본인 소유의 토지 불하로부터 시작되었다. 1946년 6월 토지개혁법 이전에 이미 전체 소작지 151만 정보 중 약 45%에 해당하는 68만 정보가 지주와 소작농 간의  자유스런 계약에 따라 농민 경작자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한국 전쟁 직전인 1950년 3월 의 농지 개혁법으로 전체 소작농지의 36%에 해당하는 나머지 54만 정보가 다시 소작농민에게 분배되었다.

 

남한의 농지개혁은 지주로부터 '유상몰수'와 '유상분배'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것은 행정구역별로 구성된 농지위원회의 조사와 감독에 의해 3정보 이상의 토지를 가진 지주들로부터 연간 생산량의 1.5배의 가격으로 발행된 지가증권을 주고 토지를 매수한 다음, 비용을 소작농에게 5년에 걸쳐 상환하도록 하는 방식이었다. 농지개혁 결과 3정보 이상의 소작토지 가운데 81%가 지주로부터 소작농에게 돌아갔다. 그에 따라 소작지 비율은 해방 당시 전체 농지의 63%에서 1949년에 40%로 낮추어졌다. 토지개혁법 실시 이후 소작지가 12%로 축소되었던 것이다.

 

농지개혁은 대단히 성공적인 것이었다. 필리핀에서는 토지개혁이 실패하였고, 대만의 토지개혁은 연간 생산량의 2.5배 가격으로 유상분배되었다는 사실과 함께 비교한다면, 한국의 농지개혁 성공은 혁명적인 것이었다. 그 결과 한국 사회는 봉건적인 지주 계급은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농지개혁은 한국 전쟁시 북한 인민군이나 공산당의 게급투쟁적 선동에 동조하지 않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토지자본의 일부가 근대적인 산업자본이나 상업자본으로 전환되어 산업경제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파란 하늘이 너무 보기 좋다

 

 

미국의 전시 동원 해제

 

미국의 군사 전통은 평시에는 대규모 상비군을 유지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제2차 대전 이후 미군의 상비군 감축은 당연하였다. 미국의 여론과 의회, 지식인들은 군사력의 대폭적인 감축을 원했다. 게다가 국가 재정상의 압박이 겹쳐 미국은 전시동원체제를 해제해야만 했다.

 

그 결과 미국의 재래식 병력은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의 영향력 확대에 대처할 수 없는 수준으로 급격히 줄었다. 종전 당시 1,200만이었던 미군은 1950년에는 146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미국은 핵무기를 독점하고 있었고 공군력에서 우위를 보이기는 했으나, 대폭 감축된 육군으로 전 세계에 걸친 소련의 위협에 대처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당시 미국은 국가 이익의 우선 순위상 아시아보다 유럽을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스, 터키 등 유럽에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는 데 더 큰 관심이 있었기에, 아시아 지역의 미군 철수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내방역 사거리에 광복절 68주년 현수막이 걸려 있다

 

 

남한에서의 미군 철수

 

1947년 당시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한국의 낮은 전략적 가치와 병력 부족을 이유로 조기 철군의 긴급성을 강조했다. 한국은 소련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어 미군 주둔의 위험도가 높을 뿐만 아니라, 안보를 책임 지기에는 너무 많은 보병이 필요한 지역이라고 평가하여 남한 지역에 점령군으로 주둔했던 미군을 조기에 철수시키기 시작했다. 또한 1947년 미국 합동전략조사위원회는 한국을 18개 원조 대상국 중 긴급성 면에서 그리스, 터키, 이탈이아, 이란에 이어 5번째, 안보 요구 우선순위에서 16개국 중 13번째로 낮게 평가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주한 미군은 1948년 9월 15일부터 철군을 시작하여 ,1949년 6월 29일에는 군사고문단 495명을 제외한 모든 철군을 완료했다. 한국 정부는 주한 미군의 철수를 막아보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목적을 이룰 수 없었다.

 

한국 정부는 차선책으로 미국으로부터 군사 원조를 얻기 위해 적극적으로 대미 외교 활동을 전개했다. 그 결과 1950년 1월 '한미상호방위원조협정'을 체결, 미국의 군사 원조를 받을 수 있는 법적인 조치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군사 원조는 북한의 위협에 대응하는 수준이기보다는 치안을 유지하는 정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미국의 군사 원조는 1950년 당시 8만 명이던 한국군 중 3만 5,000명은 아예 무장을 시킬 수 없을 정도로 부족한 수준이었다. 미국 정부는 주한미군사고문단이 요청한 항공기와 해군용 함포, 육군의 각종 탱크와 포를 지원하지 않았다. 중국과 소련으로부터 대량의 막대한 군사 원조를 지원받고 있던 북한과는 대조적인 상황이었다.

 

 

 

                                                                        아침 테니스장, 사람들이 열심히 아침 운동을 하고 있다

 

 

 

김일성과 스탈린, 마오쩌뚱의 침략 전쟁 공모 

 

김일성의 스탈린, 마오쩌둥 설득 작업

 

6.25 한국 전쟁의 원인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김일성과 스탈린이라는 두 인물은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전쟁을 통한 한반도의 공산화에 두 사람이 합의하지 못했더라면 한국 전쟁은 발발하지 않았을 것이다.

 

1946년 김일성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탈린으로부터 직접 낙점을 받아 북한의 통치자가 된 김일성은 1949년 3월 스탈린에게 남한 전체를 적화시킬 전쟁에 대한 요청을 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의 이러한 요구에 적극 수용하여 군비 증강에 협조하였다. 그러나 남침 침공 요구에는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다. 당시 국제 정치 상황이 불투명하였고 비록 군사지원단만 남아 있지만, 남한을 침공할 경우 결국에는 핵보유국인 미국과 일전을 벌이게 될 것이라는 예상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기에 부담도 작용하였다. 또 중국의 내전이 아직 끝나지도 않았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결국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승인하였는데, 차후 국제 정치 상황이 소련에게 유리하게 전개될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었다. 또 그러던 차에 미국의 국무장관 애치슨이 선언을 통해 동아시아의 방위선을 설정했는데, 한국은 애치슨 선언에 벗어나 있었다.

 

또한 중국 내전에서 마오쩌뚱의 공산당이 승리했고, 소련도 비밀리에 원자폭탄을 개발하여 보유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상황을 고려할 때 스탈린은 한반도에 전쟁이 발발하더라도 미국의 개입 가능성은 훨씬 줄어들었다고 판단했다. 김일성은 1950년 1월 17일 스탈린에게 38도선을 돌파하겠다는 남침 계획을 올렸고, 1월 30일 스탈린은 이 남침 계획을 승인하는 비밀 전보를 평양으로 보냈다.

 

1950년 4월 김일성이 다시 모스크바를 극비리에 방문했을 때, 스탈린은 마오쩌뚱의 동의를 얻어 추진하라는 조건으로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재차 승인했다. 스탈린은 만약의 경우 미국과 일전을 벌이는 상황이 전개되면 소련은 빠지고 소련의 위성국이면서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중공군을 이용하여 대리전을 전개하기 위해 중국을 대신 끌여들여 미국과 대적하게 할 심산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소련의 음흉한 흉계는 결국 자신들의 피해는 최소화하면서 김일성과 마오쩌뚱을 이용하여 남한을 적화하여 공산 세계의 영역을 확장할 요량이었다.

 

소련에서 귀국한 김일성은 곧바로 베이징의 마오쩌뚱을 방문했다. 5월 13일 김일성의 방문을 받은 마오는 남침 전쟁이 시기 상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스탈린의 승인을 확인한 후 김일성의 남침 구상에 동의했다. 일단 동의한 이상 내키지는 않지만 마오는 적극적으로 북한을 돕겠다고 생각했다. 중국은 중국공산군 소속 한인 병사들을 북한으로 보냈는데, 이들은 남한 침공의 주축이었던 제5, 제6, 제12사단의 핵심이 되었다. 북한이 남침할 당시 전체 병력의 약 3분지 1 정도가 중국 등지에서 전투를 치른 경험이 있는 역전 노장의 병사들이었다.

 

 

  

 

 

 

남.북한 군사력 불균형

 

북한이 전쟁을 도발할 당시, 북한군의 군사력은 신생국으로서는 막강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김일성은 1945년 12월 북한을 남한 적화를 위한 '민주 기지'로 건설해야 한다고 선언한 직후부터 북한의 군수산업 육성을 추진, 일본 제국주의가 북한 전역에 건설했던 군수 공장을 모두 국유화하고 무기 생산에 노력을 집중했다.

 

북한은 1948년 3월 기관단총(따발총)을 자체 생산했으며, 권총, 박격포, 탄약, 포탄, 수류탄도 자체 생산할 수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가 만들어 놓은 군수산업이 동족상잔의 전쟁을 일으키는 무기 생산에 동원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쟁 도발 당시 북한군의 주력 무기들은 대부분 소련으로부터 공급받은 것이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인 무기로 소문나 있던 소련제 T-34 전차 242대, 120밀리 포 225문, 82밀리 포 1,141문 등 각종 포 3,040문, 야크-9 전투기 100대 이상, 그리고 아이엘-10 폭격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10만에 달하는 북한의 군대는 개인화기를 제외한 중장비 면에서는 거의 완벽하게 소련제로 무장했다.

 

소련에 의해 북한군이 신식으로 무장한 1950년 1월 21일 북한 민족보위상(국방상) 최용건은 "비행기, 탱크, 전함과 현대무기로 무장한 인민군은 어떤 전투 임무도 효과적으로 완수할 수 있고, 조국의 통일과 독립의 적을 분쇄하기 위해 언제나 전투할 태세가 되어 있다."고 큰소리 치기도 했다.

 

반면에 한국군은 소련의 T-34전차를 공격할 수 있는 대전차 화기나 북한의 전투기를 격추할 수 있는 대공화기를 전혀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북한군은 한국군보다 곡사포는 8배, 박격포는 2.4배 더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 한국군이 유일하게 북한보다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57밀리 로켓포(무반동총)였는데, 그것은 북한의 전차를 파괴할 능력이 전혀 없는 것이었다.

 

북한의 포병은 양적인 면에서 물론 질적이 면에서도 한국군을 완전히 압도하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순간 한국군이 가지고 있던 가장 우수한 무기는 105밀리 곡사포 91문이었다. 그러나 북한이 176문이나 보유했던 자주포는 한 대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한국이 보유하고 있던 22대의 비행기는 모두 연락용 및 훈련용 연습기들이었고 전투기는 한 대도 보유하지 못한 상태였다. 반면 북한은 전체 항공기 211대 중 170대가 전투기였다.

 

 

                                                                       산청마을 전경, 20년 전부터 사람들이 줄지 않고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일부는 딱지를 노리고 장기 거주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이제는 전쟁이 나면 이런 판자집도 필요없이 이순간에 우리들은 사라질 것이다 

 

                                                                                     산청마을 입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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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청마을 철거를 반대하난 현수막, '주거권 쟁취'가 그들의 목적이다

 

 

불법 남침 전쟁의 발발

 

북한의 기습 공격

 

북한은 1950년 5월 29일 이미 남침 공격 계획을 완성해 놓은 상황에서 남한을 대상으로 적극적인 평화 공세를 펼쳤다. 작전 계획 명칭은 '선제타격작전계획'으로, 원래 러시아어로 작성된 것을 극비리에 한글로 옮긴 것이었다.

 

침략 전쟁의 작전 계획은 북한군 총참모장 강건과 바실리예프 소련 군사고문단장이 중심이 되어 만들었다. 당시 북한군 고급 장교들 중에서는 사단급 이상의 작전을 지휘해본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군단급 이상의 작전 계획은 소련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김일성의 제안에 의해 6월 16일 슈티코프를 통해 스탈린의 최종 동의를 받은 남침 개시일은 6월 25일이었다.

 

예정대로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은 38도선 전역에서 동시에 남침을 개시하였다. 같은 시각 김일성은 내각 비상회의를 개최하여 "이승만의 매국 역적 군대가 38도선 전역에서 공화국 북반부를 반대하는 무력 침공을 개시했다"고 허위 선전을 하였다. 평양 방송은 같은 날 오전 11시 "남조선이 북침했기 때문에 자위 조치로 반격을 가해 전쟁을 시작했다"는 내용의 선전포고를 하였다.

 

북한은 전쟁 전날부터 중대 발표가 있을 것이라며 북한 주민들에게 소집명령을 내려놓았다가, 전쟁을 시작하고 나서는 남한이 북침을 감행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전쟁에 나섰다고 선전하였다. 김일성이 전쟁을 도발한 그 순간부터 자신이 일으킨 전쟁이 남한의 북침에 대항하는 '방어 전쟁' 이자 '해방 전쟁'이라고 날조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일요일 아침 반포운동장에서 아침 운동하는 시민들, 평화롭다

 

 

약세 국군의 필사적인 저항

 

북한이 주도면밀하게 준비한 기습에 대해 남한은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고 있었다. 북한의 남침 징후 때문에 4월 21일 이후 계속되고 있었던 비상경계령도 6월 23일 자정에 오래된 데다가 농번기가 되었다는 이유로 해제하였다. 그래서 6월 24일 토요일 오전 일과를 마친 전 부대 병력은 외출과 외박을 허가했다. 6월 24일 밤 육군회관 낙성식에 참석한 전후방 부대 지휘관들은 저녁 늦게까지 파티를 계속했다.

 

서쪽 옹진 반도에서 동쪽 끝 강릉에 이르는 38도선 전역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선도하는 T-34 전차와 SU-76 자주포들이 국군의 방어 진지를 향해 돌진해오자 한국군은 이를 막을 어떠한 무기도 보유하고 있지 못했다. 전 전선에서 국군의 방어 진지는 돌파되기 시작하였고 국군 장병들은 용감하게 싸웠지만 사상자는 늘어만 갔다.

 

국군 병사들은 화염병을 들고 적 전차에 맞서거나 박격포로 전차에 대항했다. 폭탄을 등에 멘 채 육탄으로 전차를 향해 돌격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군가의 노래 가사처럼  국군은 새로운 신형 무기를 앞세워 공격해오는 적을 그야말로 '맨주먹 붉은 피'로 막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8월의 가로수가 마음껏 잎을 피우며 뽐내고 있다

 

서울의 함락과 피난

 

전쟁이 시작된 지 단 하루 만인 6월 26일 오후 1시경 서울의 북부 관문인 의정부시가 북한군에게 점령당했다. 이에 전방에서 철수한 제7사단장 유재흥 준장은 창동을 중심으로 도봉산-수락산을 연결하는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려 했다.

 

다음날 27일 아침 북한군이 40여 대의 전차와 자주포를 앞세우고 공격을 시도하자, 방어 부대는 창동 지역을 포기하고 미아리와 태릉 일대로 철수했다. 제5사단장 이응준 소장은 미아리 일대에서 새로운 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제7사단은 제5사단과 함께 정릉-미아리-청량리을 잇는 미아리 방어선을 구축했다. 도로만 잘 차단하면 적의 전차를 막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 결과였다.

 

그러나 날씨는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날 밤, 북한군 전차들이 미아리 삼거리에 설치해 두었던 장애물을 그대로 밀치면서 돌파하여 길음교를 통과, 서울 도심으로 진출했다. 북한군 전차가 서울 도심으로 진입한 사실을 모른 채 미아리 방어선을 지키던 국군은 다음날 28일 아침 적의 후속부대의 공격을 받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 방어의 최후 보루였던 미아리 방어선마져 무너져 버렸던 것이다.

 

국군이 서울에서 시가전을 실시하는 방안은 고려하지 않고 철수하자 북한군은 28일 아침부터 서울 도심으로 진입하여 점령하게 되었다. 미처 피난하지 못한 채 강북에 남아 있던 서울 시민들은 국군이 다시 수복하는 9월 28일까지 3개월간 공산 치하에서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국군은 북한군의 서울 이남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한강 철교와 한강 인도교를 폭파시켰다. 밀려오는 피난민 속에 적 침투부대가 섞여 언제 폭파장치가 해체될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한강교 폭파가 실패한다면 적이 한강을 신속하게 건너 남쪽으로 진격할 수 있었기 때문에 폭파 담당 공병장교는 고심끝에 상부와 통신도 두절되었고 명령이 위임된 상태였기에 폭파를 실행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이 조기폭파 문제는 공병감 최창식 대령이 총살당하는 비극의 원인이 되고 말았다.  28일 새벽 2시 30분경 한강교를 폭파한데는 조기 폭파로 시간상의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한국군의 전력 태반이 강북에 남아 있던 상태였고 한강 이북에서 미쳐 철수 명령을 받지 못하고 북한군과 교전 중이던 한국군의 퇴로마저 차단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한국군 총병력의 약 절반이 분산되었고, 강북에 있던 중장비와 차량, 곡사포, 박격포, 기관총 등 장비와 무기들 대부분을 버린채 맨몸으로 한강을 건너 남으로 철수하였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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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들의 미래가 결코 밝고 비젼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의 현실과 미래'

 

 광복을 되돌아보며 해방에서 한국 전쟁 발발까지 살펴보았다.

 

우리는 광복의 기쁨을 이야기하기 전에 나라가 망한 이유와 광복 후 혼란하던 우리 사회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를 되씹어 보아야 할 것이다. 나라의 망국이나 광복은 우리들의 힘으로 이루어진게 아니라 모두 남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며 우리 스스로 그러한 원인을 제공한 것이라는 점이다.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 갈등으로 혼란스러운 사회는 백성들의 삶을 비참하게 만들고 결국은 나라까지 망해먹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이다.

 

우리는 역사의 주체자가 되지 못했고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의 충돌지점으로 지정학적으로도 중요한 반도에 위치한 나라이다. 지금은 남북이 서로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극단적인 대립으로 갈등의 골이 깊어가고만 있다. 북은 세습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불안한 나날을 보내면서 그동안 강성대국의 기치를 내걸고 핵무기 개발에 온 힘을 집중하여 왔고 지금쯤은 소형 핵무기를 개발. 보유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판단하고 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미국과 한국에 대해서는 능멸전술로 시간을 벌고 사방에 구걸을 하면서도 김정은이 권력을 이양받고 세습체제를 공고히 하고 있다. 그러나 탈북자가 줄을 잇고 꽃재비 등 굶어 죽는 사람이 늘어나고 경제는 파탄나고 가난이 평등화되어 북한 주민들은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한편 한국은 무능한 정치판이 경제를 발목잡고 종북.친북 세력들이 사방에 포진하여 간첩들과 공조하여 정부를 뒤흔들고 있다. 노사분규장에 어김없이 희망버스를 타고 나타나는 등 전국의 모든 갈등 지역에 제3의 세력이 선동과 선전을 일삼으며 정부와 공권력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재야.진보 세력들도 마찬가지로 그들과 합세하여  정권 탈취에 목표를 두고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으며 사회 지도층과 권력층은 비리와 부패로 연일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군대는 사기가 땅에 떨어졌고 부패의 도가 한계를 넘었다. 방산장비가 비리로 불량장비가 납품되었고 오작동되거나 불발되는 등 군납비리가 연일 터지고 있는 현실이다. 군은 당나라 군대가 되었고 패망한 월남 군대를 닮아 가고 있다. 또 그런 군대가 이제는 갈 곳도 없다. 군이 허약하니 불순 세력들이 제주해군기지 건설에 목숨걸고 반대하고 사회 제 분야에서 침투하여 독버섯철럼 자라고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마치 광복 후 혼란스럽던 사회와 너무나 비슷하게 전개되고 있다.

 

군을 우습게 보고 비리와 부패가 만연하여 망하지 않은 나라가 없듯이 우리도 월남이 패망한 것과 같은 그 전철을 밟고 있지 않는지 걱정스럽다. 군도 이제 거듭나야 한다. 전작권 환수 연기를 외치며 미국에 의지하려 하지 말고 우리 스스로 북한의 위협에 대처할 수 있는 자주국방력을 키워야 한다.

 

국민들도 이제는 군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어 경제.문화적 환상에 젖어 한여름 나무밑에서 종일 키타나 치고 노래 부르며 즐길 것이 아니라 북한의 위협에 단호하게 대처하며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워야 한다. 우리 경제와 문화 성장과 확산, 그리고 우리가 배가 부르게 된 것은 지금까지 미국의 힘에 안보를 의지하면서 꽃을 피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국가 위기시 그러한 경제와 문화창달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국민들이 고속도로와 해수욕장을 가득 메우며 여름 휴가를 가고  유명 먹거리를 찿아다니고 장수와 건강을 위해 목숨을 거는 이 시대에 비만을 걱정하며 자만과 착각에 빠져 지난날의 고난의 역사를 망각하고 있다. 국민들의 사고와 사회 분위기가 비리와 부패에 빠지고 정의 와 공정이 사라지고 법치가 바로 서지 못한다면, 그리고 도덕불감증과 양심상실증이 팽배한 현실을 실감하고 반성해야 할 것이다. 이제는 모두가 정의와 공정 속에 인권이 보장되며 누구나 평등하고 법치가 바로서는 이상적인 올바른 사회를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들의 미래는 국민 모두가 다불어 잘 살아갈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 길이다. 5%의 가진가 층이 95%의 가난한 서민을 위해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할 것이며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법치, 윤리와 도덕,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길이 시급하다. 그것은 몇 사람의 지도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 국민 대부분이 공감대를 형성하고 자정 노력에 앞장설 때 사회는 달라질 것이다. 환상을 걷어내고 실체를 바로 보고 다변적이며 유연한 자세로 주변 강대국과의 국제외교를 벌이면서 우리들 스스로 통일 한국을 만들어 나가는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