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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94 : 조선의 역사 436 (절망을 넘어서 11) 본문
한국의 역사 894 : 조선의 역사 436 (절망을 넘어서 11)
절망을 넘어서 11
11. 독립전쟁론의 씨앗
"신흥무관학교, 항일 무장투쟁의 중심이되다"
빼앗긴 나라를 전쟁으로 되찿자는 독립전쟁론의 구체적인 실현이 신흥무관학교 건설이었다. 기대했던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전면적인 독립전쟁까지 나아가지는 못했지만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이후 항일 무장투쟁을 주도하게 된다.
1911년 12월 신흥무관학교는 제1회 특기생으로 김연, 변영태, 이규봉, 성준식 등 4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독립전쟁의 거대한 첯발을 땐 것이다. 압록강을 건널 때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시련을 이겨내고서 뗀 첯발이었다.
신흥무관학교 생도대장 원병상은 수기 <신흥무관학교>에서 "이 해 이주 동포들의 시련은 너무도 가혹하였다"라고 회상했다. "소위 수토병이란 괴질이 이역의 개척 문턱에 접어든 우리에게 가경할 상처를 남겼다"는 것이다.
경학사 사장 이상룡의 손부인 허은 여사의 자서전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에는 이때의 참상을 적나라하게 실려 있다.
"그해 오뉴월이 되자 동네 사람들 모두가 발병했는데, '수토병'이라고도 하고 '만주열'이라고도 했다. 물 때문에 생긴 전염병 같았다......성산(왕산 허위의 형 허겸)의 처조카 송병기도 이때 사망했고 권팔도네도 하나밖에 없는 애기를 잃었다. 애, 어른 할 것 없이 많이 죽었다...... 망명 온 댓바람에 겪은 일이라 모두들 당황했다. 중국에 자리 잡은 지 두 달 만에 그랬으니까...... 특히 어린아이들이 죽음은 그 부모들 가슴에 못질을 한 것이다."
이시영의 아들이자 신흥무관학교 교사였던 이규봉 남매도 세상을 떠났다. 원병상의 표현대로 '하늘이 무심'하다고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성인들은 싸움다운 싸움 한 번 못해보고 세상을 떠난 데에 대한 한이, 아이들은 성장하기도 전에 죽고 만 데 대한 한이 사무쳤다.
이상룡도 "반년 지나 벽질(수토병)에 걸리니, 신선술(군사훈련) 배우기 전 죽음만 쌓이는구나. 악질이 사납게 만연해 거의 다 죽었다"라고 한탄했다. 원병상은 "임자.계축 양 년은 가뭄과 서리의 천재까지 겹쳐 농사도 치명적으로 실패함으로써 학교 운영도 심각한 재정난에 허덕여 주로 이석영 선생의 사재에서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술회했다.
이런 시련 속에서도 학생들을 미래의 전사로 양성하는 일은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1911년 가을에는 새로운 한인 자치 조직인 '부민단'이 신흥무관학교와 같이 합니하에 조직되었다. 지금의 통화현 광화향 광화촌 고려관자 부근이다.
이상룡은 "정부의 규모는 자치가 명분이고, 삼권분립에 의한 민주공화국 수립이 독립운동의 목표임을 분명히 밝혔다. 무관학교 생도들은 학교 경영에 보태기 위해 중국인의 산황지를 빌려 밭을 일구기도 하고, 학교 건너편 낙천동이라는 산턱에서 적설을 헤치며 나무를 해 땔감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신흥무관학교 생도들의 훈련 모습
원병상은 "힘든 노동에도 아무 불평 없이 이극 교관의 함경도 사투리 섞인 산타령에 장단을 맞추어 즐겁게 노동했다."고 전한다. 신흥무관학교의 교과 내용은 학과 10%, 교련20%, 민족정신교육 50%, 건설 20%의 비중으로 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자신이 왜 싸워야 하는지를 아는 목적의식의 군대를 만들려고 노력한 것이다.
그러나 보니 상황은 열악했어도 의기만은 드높았다. 1914년 조선총독부 시보 이마무라 등은 헌병 대위 오오타 등과 함께 압록강.두만강 유역 교민들의 실태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한인 보조원 정모 씨를 시켜 신흥무관학교를 탐방케 했다. 정 보조원이 이씨 댁에서 하룻밤 자면서 벌어졌던 일이 '국경지방시찰복명서'란 보고서에 실려 있다.
" 야반에 생도 20여 명이 침소에 돌입하여 와서 혹은 치고 찌르며 매도하기를 '너는 어떤 연유로 일본인에게 시역되느냐. 빨리 가래 한 자루를 들고 우리들과 같이 행동을 같이하라. 우리들은 배우며 갈며 스스로 의식을 해결하고 있다. 너는 돌아가서 일본인의 수족이 되어 사는 것보다 깨끗이 이곳에서 죽지 못하겠느냐. 또한 살아서 돌아간다 해도 너의 생명은 장백부를 무사히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고 하며 마침내 감격에 벅차 체읍하고 호호하는 자가 있었다."
스스로 감격에 벅차 울고 고함지르던 무관 생도들이었으니 전투만 벌어지면 당장 총 들고 달려갈 의기가 충분했다. '합니하 군교'로도 불렸던 신흥무관학교는 추가가와 합니하, 그리고 유하현 고산지 하동, 통화현 쾌대무자 등지에도 설치했던 본교 또는 분교에서 1920년 8월 폐교될 때까지 약 3,5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들이 후일 항일무장투쟁의 중심 인물들이 된다. 졸업생들은 2년간 의무적으로 독립군에 편성되어 무장투쟁을 전개하거나 각지에 파견되어 교원 생활을 해야 했다.
교육열이 높았던 한인 사회에서 문무를 겸전한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에 대한 요청이 쇄도했다. 그래서 압록강 대안인 서간도뿐 아니라 장백, 화룡, 연길, 왕청, 훈춘 등 두만강 대안의 북간도 지역까지 파견되어 교사로 근무했다. 무관학교 출신들은 낮에는 학과를 교육하고 밤에는 지방 청년들에게 군사교육을 실시했다. 졸업생들이 파견된 지역에는 유사시 독립군으로 편성될 예비군이 즐비했다.
졸업생들은 1913년 3월 삼원보 대화사에서 '신흥학우단'을 결성했다. 신흥학우단은 교장 여준과 교감 윤기섭을 비롯해 제1기 졸업생들인 김석, 강일수 등의 발기로 조직되었다. 교원과 졸업생은 정단원이 되고, 재학생은 준단원이 되는 일종의 동창회 조직이었다. 신흥학우단은 첯째 강령이 "다물의 원동력인 모교의 정신을 후인에게 전수하자"는 것이어서 '다물단'이라고도 불렀다. 다물은 '고토를 회복한다'는 뜻의 고구려어로서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되찿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부민단과 신흥학우단이 1914년 통화현 제8구 소배차 심산유곡에 건설한 것이 '백서농장'이었다. 무관학교 1~4회 졸업생들과 각 분.지교에 설치한 노동강습소 등에서 양성한 독립군 등 모두 385명이 모였는데, 명칭만 농장이지 사실은 독립군 군영이었다. 이상설이 이회영에게 '조만간 동양에 전운이 일 것'이라고 예견한 것처럼 일본과 중국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면 즉각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전면전을 전개하려고 조직한 것이다.
그런데 1914년 중일전쟁이 일어나기를 기다렸으나 중국 대총통 원세개의 야욕으로 굴욕적인 21개 조약이 체결되면서 계획은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1915년 1월 일본에 대해 산동성 내 철도 및 광산 이권과 만주에 조차지를 주고, 중국 연안의 섬.항구.만 등을 일본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21개 조항을 원세개가 받아들이면서 예견했던 중일전쟁이 무산되었던 것이다.
3.1운동 이후에 부민단은 한족회로 확대 개편되면서 산하에 '서로군정서'를 두었는데 제1중대장 백광운을 비롯하여 김철, 김학규, 오광선, 현기전 등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중견 간부진을 형성햇다.
1919년 8월 북만주에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가 조직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신흥무관학교 교관 이장녕은 대한군정서 요청으로 참모장의 요직을 맡았으며 소속 무관학교인 사관연성소에도 교관 이범석과 졸업생 김훈, 오상세, 박영희, 강화린, 최해, 이운강 등이 파견되었다.
1920년 10월, 박영철, 강회린, 오상세, 백종렬, 김훈 등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의 중견간부로서 '청산리대첩'을 치른다.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과 함께 일본 정규군 1,200여 명을 시살한 '청산리대첩'은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장교들이 독립군을 지휘하였기에 가능한 전투였다.
1919년 11월 10일 만주 길림시 파호문 밖 중국인 반모 씨의 집에서 결성되어 일제를 경악에 빠뜨리는 '의열단'도 신흥무관학교 동문 모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둠의 동토를 박차고 압록강을 건넌 멍명객들이 심은 독립전쟁의 씨앗이 각지에서 꽃을 피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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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무관학교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는 현 경희대학교(慶熙大學校)의 전신으로 1911년 서간도(길림성 류하현)에서 개교한 독립군 양성 기관이다. 신흥무관학교의 졸업생들은 서로군정서 의용대, 조선혁명군, 대한독립군,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등에 참여해 무장 독립운동의 한 축을 차지하며 민족 해방에 크게 기여했다. 광복 후에는 1947년 서울 종로에 신흥무관학교의 역사와 전통을 계승한 신흥전문학원(新興專門學院)이 설립되었고, 1949년 신흥초급대학(新興初級大學)으로 인가 받았다.
이후 1952년에 4년제인 신흥대학(新興大學)으로 전환되었고, 1955년에는 종합대학인 신흥대학교(新興大學校)로 승격이 되며 교사를 서울 회기동(현 경희대학교 서울캠퍼스)로 이전한 후, 1960년대에 '신흥대학교'였던 교명을 현재의 경희대학교로 바꾸었다. 경희대학교는 무관학교의 전통을 계승해 국내에서 최초로 체육대학을 만들었으며, 정통 민족대학으로서 민족의학인 한의학과 민족무예인 태권도를 세계 최고의 수준으로 육성시키며 신흥무관학교의 명맥과 전통을 잇고 있다. 참고로 민족무예인 택견을 중요무형문화재 제76호로 지정시키고 본인도 제1호 택견 무형문화재가 된 신한승(辛漢承)도 신흥대학(新興大學) 체육학과 1기생이다.
신흥대학교 사적지
배경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조선에서는 일본 제국의 침략 야욕에 맞서 항일 의병 전쟁과 같은 저항이 있었다. 특히 을사조약 체결 전후와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후에 의병 활동이 활발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민간인을 학살하고 마을을 불태우는 남한 대토벌 작전과 같은 잔혹한 진압작전을 도입하여 한반도 내에서의 의병 활동이 점차 어려워지게 되었고 1910년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만주와 연해주 등지로 활동무대를 옮기게 되었다.
1910년대 국외 독립운동 및 독립군 기지는 러시아와 만주의 국경지역인 흥개호 부근 봉밀산, 북간도 왕천현의 라자구 등 여러 곳에 세워졌다. 당시 독립운동 단체로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창립된 권업회, 북간도의 간민회 등이 있었다. 신흥무관학교는 서간도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설립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 이상룡을 주축으로 이시영, 이회영 형제와 김형선, 이장녕, 이장직, 이동녕 등 군인 출신이 중심이 되어 설립하였다. 신흥무관학교는 일제의 눈을 피하고 중국 당국의 양해를 얻기 위해 신흥강습소란 이름을 내걸었으나 초기부터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군사학교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신흥이란 이름은 신민회의 신자와 부흥을 의미하는 흥자를 합쳐 만든 것이다.
신흥강습소는 1919년 삼일운동이후 신흥무관학교로 이름을 변경하였다. 신흥무관학교는 유하에서 동쪽으로 40 km 정도 떨어진 대두자(大肚子)에 위치해 있다. 학교터는 현재 마을 뒷산의 밭으로 변해 있다.
1911년 4월(음력)에 유하현 추가가 대고산에서 노천대회를 열어 경학사를 결성하였고, 한 달 후, 대고산 아래, 토착민들의 옥수수 창고를 빌어 신흥강습소를 세웠다. 이후 1912년 통화현 합니하로 학교를 옮겼다. 1919년 3.1운동 이후 조선의 젊은이들이 몰려와 더 이상 수용할 수 없자 다시 유하현 대두자로 학교를 옮겼다. 그래서 대두자가 본교, 기존의 합니하는 분교의 형태를 띄게 되었다. 대두자 학교터에서는 2~3,000여명(추산)의 학생이 교육을 받았다.
이상룡
이상룡은 안동 유림의 명문가 출신으로 양기탁, 이시영 등의 신민회 운동가의 권유에 따라 만주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기로 결심하고 서간도로 이주하였다. 그는 노비문서를 불태워 자신의 노비들을 해방시킨 뒤 가산을 모두 정리하여 식솔을 이끌고 만주로 이주하였으며, 경학사라는 결사를 조직하여 서간도에 정착촌을 건설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초대 교장으로 역임하였다. 이상룡은 후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6대 정신
- 임무에 희생 한다.
- 체련에 필승 한다.
- 간고에 인내 한다.
- 사물에 염결 한다.
- 건설에 창의 한다.
- 불의에 항거 한다.
교가
1절
서북으로 흑룡태원 남에영절에
여러만만 헌원자손 업어기르고
동해섬중 어린것들 품에다품어
젖먹여 기른 이 뉘뇨
우리우리 배달나라의
우리우리 조상들이라
그네가슴 끓는 피가 우리핏줄에
좔좔좔 걸치며 돈다.
2절
칼춤추고 말을달려 몸을단련코
새론지식 높은인격 정신을길러
썩어지는 우리민족 이끌어내어
새나라 새울 이 뉘뇨
우리우리 배달나라의
우리우리 청년들이라
두팔들고 고함쳐서 노래하여라.
자유의 깃발이 떳다.
서로군정서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서로군정서 창립의 모태가 되었다. 서로군정서는 경학사의 후신인 한족회의 독자적인 정치 군사 조직이었다. 다음은 님 웨일즈의 저서 《아리랑》에 나오는 김산의 서로군정서에 대한 발언이다.
“ | 조선인들은 자기들의 인민 정부와 재판소를 가지고 있었으며, 진정한 자치제를 실시하고 있었다. | ” |
— 김산, 《아리랑》, 내일을 여는 역사 제25호에서 재인용 |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서로군정서는 독립운동의 대의를 위해 임시정부에 합류하기로 하고 윤기섭을 상해로 파견하였다. 서로군정서는 후일 청산리 전투에 참가하여 일본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다.
졸업생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결사였던 의열단의 많은 단원들과 김좌진 장군 등이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었다. 김좌진 장군이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이라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신흥무관학교가 일제에 의해 폐교된 이후 졸업생들이 김좌진, 홍범도 부대를 찾아가 합류하였고, 청산리 전투를 함께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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