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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면산의 겨울 20 : 우리시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10 본문
우면산의 겨울 20 : 우리시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10
새벽 신반포 아파트 근방, 편의점 앞에서
'시대정신으로서의 산업화와 민주화'
박정희와 노무현
박정희와 노무현, 산업화와 민주화의 상징
지식인과 정치가는 사실 중첩되는 영역이 적지 않다. 지식인의 과제 중 하나가 지식 탐구를 통해 새로운 비젼을 모색하는 데 있다면, 정치가 역시 자기 사회의 미래에 대한 새로운 비젼을 제시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지식과 정치 또는 지식과 권력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다. 지식은 정치 또는 권력을 위해 봉사하기도 하지만, 바로 그 권력과 정치를 혁신하는 문제틀을 제공하기도 한다.그런 문제들이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시대정신이기도 하다.
이제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우리 현대사에 큰 그늘을 드리우고, 아직도 여전히 영향력이 지대한 두 명의 정치가를 다루고자 한다. 그들은 바로 박정희와 노무현이다. 우리가 통상 역사를 보는 눈과 시대를 평가함에 있어 우릴 범하기 쉬운 것은 편향된 시각을 가지고 평가하기 쉽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공과 과를 고루 살펴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박정희와 노무현은 물론 지식인은 아니다. 한 사람은 정치가가 되기 전에 군인이었으며, 다른 한 사람은 변호사였다. 하지만 이들은 지식인적 성향이 두드러진, 각각 보수적.진보적 지식인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친 정치가들이었다.
문제적인 이 두 사람을 다루는 이유는 바로 시대정신에 있다. 해방 이후우리 사회를 이글어온 대표적인 시대정신은 산업화와 민주화였다.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된 우리 사회에 부여돤 가장 중요한 시재적 과제는 '나라 만들기' 이 나라 만들기의 구체적인 목표가 경제적 산업화와 정치.사회적 민주화였다. 산업주의와 민주주의로 바구어 서도 좋은 이 시대정신을 대표한 정치가로는 박정희, 김대중, 노무현을 꼽을 수 있다. 박정희 시대에 우리 사회 산업화는 본궤도에 올랐으며, 김대중 시대와 노무현 시대에 민주화는 본격화되었다.
박정희가 산업화의 상징이라면, 김대중과 노무현은 민주화의 상징이다. 여러 점들을 고려할 대 박정희의 맛수는 물론 김대중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김대중이 아니라 노무현을 다루고자 한다. 그들에 대해서 일부 추종 세력들이 영웅담을 섞어 과도하게 부풀리는 모습도 일부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역사가 평가할 일이고 여기서는 노무현을 다루고자 한다. 그의 삶이 더없이 극적이었던 관계로 486세대를 포함한 우리 사회의 젊은 세대들에게 여전히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러 여론 조사를 보더라도 박정희와 노무현이 가장 존경맏는 대통령으로 손꼽히고 있다. 1960년대 이후 우리 사회에서는 산업화 세력 대 민주화 세력, 박정희의 시대정신 대 노무현의 시대정신이 맞서왔으며, 지식 사회 역시 이러한 구도에 대응해왔다. 그러면 두 사람의 삶과 시대정신, 그리고 정치에 대해 이야기 해보기로 하자.
아파트 상가 광고 간판. 대부분 아파트 상가들은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박정희 시대와 모더니티
널리 알려졌듯이 박정희는 산업화 시대를 열고 그것을 강력하게 추진한 정치가였다. 1961년 5.16 쿠테타부터 그가 돌연 서거한 1979년까지 박정희 시대는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변화가 컸던, 경제적 모더니티가 격렬하게 진행되던 시대였다. 19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이 기간에 우리 사회는 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농업사회에서 공업사회로 변화되었다. 모더니티를 향한 신세계의 모험이 시작된 셈이다.
이때 지식인 사회도 역시 박정희 시대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강력한 권력 앞에 지식인들 개인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이른바 '어용'과 '재야'의 이분법이 등장한 것이다. 박정희 시대도 마찬가지로 어느 시대나 그 체제에 동의하거나 반대하는 것은 당시 지식사회는 물론 현재의 지식사회를 가늠하는 중요한 이분법 중 하나다. 현재 우리 사회를 이끌어 가는 50대 이상의 지식인들은 대부분 박정희 시대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여러 지식인들이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해 옥고를 치른 바 있으며, 그들은 1980년대 이후 진보적 지식인운동과 시민운동을 이끌어 왔다. 그 중 한 사람이었던 사회학자 조희연씨는 <박정희와 개발독재시대>라는 책을 통해 박정희 시대를 분석하기도 했다. 이 책은 비판적 관점에서 박정희 시대를 검토했지만, 새마을 운동을 포함해 박정희 체제의 긍정적인 면도 적극적으로 주목했다. 이러한 양면적인 평가는 박정희 체제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던 진보적 지식인이 갖는 복합적 내면의식의 일단을 보여주는데, 이는 박정희 시대가 그만큼 문제적 시대였음을 증거하고 있다.
박정희의 개인 역사는 드라마틱하다. 1917년 경상북도 선산에서 태어난 그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교사로 길을 걸었다. 이후 만주의 신경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군인이 됐다. 해방 후 그는 육군사관하교 전신인 조선경비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군인이 돼 김종필, 이후락 등과 함께 1961년 5.16쿠테타를 감행함으로서 우리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그동안 5.16을 어덯게 명명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었다. 당시 쿠테타 주역들은 5.16을 군사혁명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배계급 내의 일부 세력들이 무력 등 비합법적인 수단으로 정권을 탈취하는 기습적인 정치 활동'이 쿠테라면, 5.16은 명백히 쿠테타다. 문제는 쿠테타가 낳은 결과다. 쿠테타에 성공한 박정희는 1963년 결국 대통령에 당선됐고, 산업화를 향한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박정희 시대는 우리 산업화의 역사에서 일대 전환기였다. 구체적으로 1960년에 64%였던 농.어민이 1980년에는 31%로 감소했다. 또 중화학공업화가 진행된 1970년대에는 2차 산업이 1차 산업을 능가하고 중공업이 경공업의 비중을 추월하는 선진국형 산업구조를 이루게 되었다.
생활수준과 생활양식 역시 크게 변햇다. 1961년 87달러에 불과했던 1인당 국민총생산이 1979년에는 1,597달러로 증가해 절대빈곤에서 벗어났다. 더불어 급속한 경제성장은 아파트.텔레비젼 등으로 대표되는 도시적 생활양식을 보급했고, 팝뮤직.헐리우드로 대표되는 미국 문화의 유행을 가져오기도 했다.
현재 50대 이상 대부분은 1960년대에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던 농촌에서 자랐으며, 이후 젊은이들은 새로운 희망을 찿아 도시로 이주해와 1970년대에 본격적인 모더니티 세례를 받았다. 월남파병, 서독 광부.간호사 파견, 경부고속도로 건설, 포항,울산 등 공업단지 조성, 수출 장려 정책 적극 시행, 새마을 운동으로 농촌 개량 운동 등이 숨가쁘게 진행되었다. 동시에 남북 대립이 극도로 긴장되는 가운데 긴급조치 등으로 인권이 유린되고 억압받는 등 암울한 정치 현실이 전개되었고, 박정희 정권의 장기 집권을 위한 3선 개헌 등 무리수를 두는 바람에 이에 대한 반발로 재야.대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민주화 운동이 극렬하게 전개되었다.
해방 이후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서 폭리를 취하던 한국통신의 전화 박스, 이제는 거의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국가와 혁명과 나>, 박정희 시대정신
박정희의 책 국가와 혁명과 나는 그의 시대정신을 집약하고 있다. 이 책은 1963년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초고를 받아 박상길이 정리한 것이다. 박상길에 따르면, 이 책은 철학에서부터 정치.경제.사회관, 그리고 인생관에 이르기까지 박정희의 사상을 가장 정확하게 담고 있다고 한다.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나서기 직전에 쓰인 만큼 이 책은 그의 정치철학과 시대정신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먼저 5.16 쿠테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이 혁명은 정신적으로 주체의식의 확립 혁명이며, 사회적으로 근대화 혁명이요, 경제적으로 산업 혁명인 동시에, 민중 중흥의 창업 혁명이며, 국가 재건 혁명이자 인간개조, 즉 국민 개혁 혁명인 것이다."
이러한 혁명이념의 연장선상에서 1960년대의 조국 근대화 전략이 놓여 있다. 박정희는 가난이 자신의 스승이자 은인이라고 말한다. 이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그는 자립경제를 위한 산업화를 강조했다. 자립경제 건설은 "혁명을 통한 민족국가의 일대 개혁과 중흥 창업의 성패 여부를 판가름하는 문제의 전부이며. 그 관건"임을 주장한다. 자립경제에 대한 그의 열망은 앞서 말했듯이 19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고도 경제성장을 이루는 경이로운 결과를 가져왔다.
주목할 것은 이 책에서 박정희가 자신의 주요 이념의 하나로 민족주의를 표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손원의 중국, 메이지유신의 일본, 케말파샤의 터키, 가말 압델 나세르 이집트 등 민족주의가 두드러진 외국 사례를 들어 비교하고 있다. '퇴폐한 민족 동의와 국민 정기를 바로잡기 위해 청신한 기풍을 진작한다'는 쿠테타의 공약은 5.16 군사정부의 민족주의적 지향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의 시점에서 '박정희 시대의 산업화 정책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이와 연관된 핵심 쟁점은 경제적 산업화에 권위주의 정치가 불가피한 것인가에 대한 문제다. 이는 권위주의가 경제성장에 효율적이라고 해서 민주주의를 유보하고 개발독재를 선택해야 하는가, 경제성장과 사회안정이 인권과 정치적 자유보다 중요한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1960년대 당대의 시선에서 보면 박정희식 발전 모델은 상당한 지지를 얻고 있다. 한국전쟁에 대한 생생한 기억은 사회안정에 대한 희망을, 보릿고개의 암울한 현실은 경제성장에 대한 열망을 낳았으며, 이러한 희망과 열망은 위로부터의 국가적 동원을 통한 산업화에 유리한 토양을 제공했다. 1970년대의 흑백 텔레비젼에서 칼라텔레비젼의 보급은 10년도 안걸린 시기였다. 그래서 우리 일상생활을 엄청나게 변모시켰던 기억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문제는 경제성장에 성공했다고 해서 박정희식 모델이 정당화될 수는 있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박정희 모델이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를 결합하는 데 과연 얼마나 노력을 기울였는가에 있다. 1969년의 3선 개헌에서 1972년의 10월 유신에 이르는 절차적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 특히 유신체제의 암울한 독재는 이 시대가 얼마나 비민주적이었는가를 보여준다.
박정희식 모델은 경제적 산업화를 위해 정치.사회적 민주화를 희생시켰으며, 이를 정당화하려고 무리수는 둔 꼴이 되고 말았다. 통상 사람들은 배가 고플때는 당장 먹고 살기 위해서는 정치에도 민주화에도 관심이 적다. 그러나 배가 부른 후에는 달라진다는 점을 박정희 정권은 간과하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박정희의 통치 방식은 경제적 산업화에는 성공을 가져왔으나 정치.사회적 측면에서는 중앙정보부로 대표되는 물리적 폭력에 기반을 둔 정치적 지배를 획책했으며, 그 결과 국가보안법과 긴급조치로 나타난 침묵의 사회는 박정희 시대의 또 다른 아픈 자화상이었다.
요컨데 박정희 시대는 그 명암이 뚜렷한 시대였다. 우리 사회를 농업사회에서 공업사회로 변화시키는 고도성장을 가져온 산업화의 시대였지만, 동시에 정경유착이 심화되고 인권탄압이 가해진 권위주의 시대이기도 했다. 더불어 박정희 시대에 뿌리내린 성장지상주의와 군사문화는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 심층의식의 일단을 이루고 있다.
커피 전문점 시대, 내방역에서 방배역 사이 커피 전문점이 한 집 건너 간판을 내걸고 있다
박정희 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
박정희 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그동안 숱한 학술 토론을 비롯해 정치 비사, 개인 회고, 소설화, 영화화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조명돼왔다. 박정희 개인에 대한 평가 역시 '민족의 영웅'에서 '독재의 원조'에 이르기까지 다각도로 이뤄져왔다. 이러한 풍경은 개인적 존재로서의 박정희는 1979년에 서거했으나 역사적 존재로서의 박정희는 여전히 우리 사회에 살아 있으며 또 매우 강렬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발전사회학적 측면에서 박정희 체제는 '발전국가' 또는 '개발독재' 체제다. 개발독재는 경제적 개발과 정치적 독재가 결합돼 있다는 의미다. 박정희는 쿠테타로 권력을 장악하였고, 3선 개헌으로 절차적 민주주의를 훼손했으며, 나아가 1인 지배의 유신체제를 만든 독재자였다. 하지만 그는 본격적인 산업화를 모색했고,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했으며, 의료보함으 포함한 복지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지도자이기도 했다.
이러한 두 얼굴을 가진 박정희였기에 어떤 이들은 여전히 그를 옹호하는 바면 다른 이들은 그의 시대를 완강히 부정한다.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이렇게 명암이 뚜렷이 갈리는데도 박정희와 그의 시대에 대한 향수가 끊이지 않는 이유에 대한 질문이다. 왜 우리 사회는 박정희 시대를 여전히 그리워하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상황은 최근 우히 사회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사회 양극화가 심화되어 가고 적지 않은 국민들이 사회 주변으로 내몰리는 게 우리 사회의 현주소라면, 이러한 삶의 불안정성은 과거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게 마련이다. 바로 그곳에 강력한 리더쉽을 상징화한 박정희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박정희의 모델이 옳아서라기보다는 현재의 곤궁이 과거를 그리워하게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더불어 주목할 것은 박정희 세대에 대한 정치적 독법이다. 박정희 시대는 33년 전에 마감됐다. 하지만 이 시대를 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는 최근 정치 세력들의 정당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쳐왔다. 박정희 시대의 평가에 대해서 과도한 이분법이 강조되는 것도, 박정희 시대의 과거사에 대한 규명이 논란이 되는 것도 바로 이런 맥락일 것이다.
과잉 정치화한 역사 해석은 현재를 과거에 지나치게 묶어두게 한다. 그것은 역사 해석이 반드시 합의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역사를 보는 눈은 복수일 수도 있고 열린 토론을 통해 역사의 교훈을 이끌어 내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점에서 박정희의 리더쉽을 일방적으로 옹호하거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극단적인 사고는 적절하지 못할 것이다. 30여 년의 세월이 그 상처를 다스리기에는 짧은 시간일지는 모르겠으나, 박정희 시대에 대한 더욱 객관적인 평가가 이뤄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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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과의 만남
박정희 시대를 생각하면 언제나 떠오르는 사람은 50대를 넘긴 우리들 아버지 할아버지 세대이다. 그들은 가난에서 벗어나게 만들었고 산업 근대화를 이루어 한강의 기적이라는 경이적인 경제발전을 이루게 한 박정희에 대한 깊은 향수와 성취에 공감하는 세대들이다. 조선 500년 기간에도 해결하지 못했고 해방 이후에도 일제의 잔학한 수탈과 한국전쟁 등으로 이 땅은 초토화되다시피 한 나라, 자유당 정권의 정치적 장기집권과 4.19 혁명이라는 역사적인 학생혁명의 결과 나라는 극도의 혼란과 무질서한 상황에서 궐련히 일어난 5.16 군사혁명, 그리고 강력한 사회개조 운동과 경제개발로 가난과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해준 주인공이 바로 박정희라는 사실에 깊은 공감을 하고 있는 세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자녀들은 장준하의 <돌베개>, 황석영의 <삼포로 가는 길>,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읽고 기성 세대와 박정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흘러 그 젊은 세대들이 지금 아버지가 된 지금, 그때의 아버지, 할아버지 세대를 이해하고, 그 험난한 길을 살아가신 그들을 그리워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성 세대의 생각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설령 소망적 사고라 하더라도 박정희 시대는 경제성장과 민주주의가 함께 갔어야 했다. 세계 역사를 보다라도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국가들 처럼, 경제발전과 민주주의가 동시에 추구되어 후발 산업화의 사례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람에겐 빵은 더없이 중요하지만, 빵이 풍족해지면 사람은 달라지기 때문이다.우리 산업화 과정 안에서 바로 이런 맥락에서 민주주의의 가치가 배태되고, 사회운동의 분출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노무현은 이러한 민주화의 시대정신을 대표하는 정치가였다.
노무현을 가까이 모신 사람들은 이렇게 그를 평가한다. 그는 더없이 인간적인 사람이었으며, 무엇보다도 민주화 세력으로서의 정치적 자기정체성이 분명하고 민주화의 시대정신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노무현은 1946년 경상남도 김해에서 태어났다. 부산상고를 졸업하고 1975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대전지법 판사를 지내다가 1978년 변호사를 개업한 그는 1980년대 인권변화사로 민주화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열린 민주화 공간 속에서 제13대 국회의원이 됐으며, 제15대 극회의원과 김대중 정부에서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냈다.
노무현의 삶에서 극적이 전환은 5공 청문회에서 전두환을 질타하는 과정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그 결과 2002년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되면서였다.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극적으로 꺽고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2003년 2월에 출발한 노무현 정부는 민주화의 거대한 실험실을 이뤘다. 열린우리당 출범과 함꼐 2004년 탄핵, 4대 개혁입법 추진과 대연정 제안, 한.미자유무역협정 체결과 지방선거.대선의 잇단 패배, 그리고 2008년 퇴임 후 주변 사람들의 잇단 비리혐의가 밝혀지고 나중에는 자신의 가족.친지까지 연계되자 도덕적.양심적인 충격과 심적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2009년 결국 퇴임 후 기거하던 김해 고향 마을 뒷산에 올라 스스로 비극적인 자살로 이어진 그의 삶과 시대는 박정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드라마틱했다고 말하는 것 이외에 달리표현하기 어려울 것이다.
휴대폰 대리점, 휴대폰 제조사와 통신사들의 농간에 소비자들은 주머니를 털리고 있다
노무현 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인권변화라는 자신의 삶이 보여주듯이 노무현의 시대정신은 민주화였다. 이러한 노무현 시대의 시대정신은 노무현 정부가 내건 국정 목표인 '국민과 화합하는 민주주의, 더불어 사는 균형발전사회,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 시대'에 집약되어 있다. 이 국정 목표는 민주화라는 시대정신을 참여민주주의와 균형 발전으로 구체화하고자 했으며, 또한 우리 사회가 놓여 있는 동북아시아의 지정학과 지경학의 조건을 적극적으로 고려하고 있었다.
노무현 시대는 이 세 가지 국정 영역에서 성공과 좌절이 공존했다. 먼저 참여민주주의 영역에서 노무현 정부는 권력기관의 민주화와 시민사회와의 거버넌스(다스림, 협치) 구축을 모색하고자 했다. 우리 현대사를 돌아볼 때, 권력기관의 민주화를 과감히 시도한 노무현의 용기는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집권 초기 화물연대 파업에서 시작해 새만금방조제 건설 논란, 천성산 터널공사 논란 등 상당한 갈등비용을 지불했지만, 동시에 국민참여수석실과 시민사회수석실 설치, 국민대통합 연석회의 추진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국가와 시민사회 간의 새로운 거버넌스를 구축하는 데 노무현 정부는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노무현 정부가 세계화와 정보사회의 진전에 따른 시민사회 구조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1987년 민주화 시대가 열린 이후 우리 사회에서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개인주의와 자유주의가 성장해왓으며, 이러한 변화는 시민들의 적극적인 정치참여와 욕구를 증대시켰다. 비록 서툰 부분들이 적지 않았지만, 노무현 정부가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읽어내고 이를 국정 운영에 반영하고자 했던 것은 새롭게 평가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노무현 정부는 행정수도 이전, 공공기관 이전 등 획기적인 균형발전을 추진하고자 했다. 이 균형발전은 노무현 대통령이 일관되게 주장해온 지역주의 극복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는데, 지역주의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경제.사회적으로 중앙 대 지방 불균형 발전을 해소해야 했다.
군형발전 정책이 추진되는 일련의 과정이 물론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균형발전이 수도권의 퇴행적 발전을 낳고, 결국 국가경쟁력을 약화시킨다는 반대 논리가 제기되었으며, 이는 정치적 논란을 넘어서 법적 논란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국토 균형발전이 '정권적 과제'가 아니라 '국가적 과제'라는 점에서 행정수도 이전 논란 등의 이슈들이 과잉 정치화되고 제동이 걸린 것도 바람직한 일은 아니었다. 여하튼 행정수도 이전을 둘러싼 이러한 논란 과정은 국민적 공감대 확보를 포함한 여론 형성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잇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수 있는 것이 동북아 정책이다. 동북아 시대 구상의 목표는 미국 중심의 외교정책에서 동북아 중심의 외교정책으로 전환을 모색하려는 데 있었는데, '동북아 균형자론'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여전히 냉전과 탈냉전이 교차하는 동북아의 현실에서 동북아 시대의 구상은 상당히 신선한 문제의식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은 북한의 핵실험, 중국의 동북공정 등 적지 않은 시련들에 직면했으며, 특히 2006년 북한의 핵시험은 대북 포용정책의 한계를 드러나게 했다.
동북아 시대론과 연관해 검토해볼 것이 한.미 자유무역협정의 추진이었다. 노무현 정부의 시각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우리 경제의 대외의존도를 고려한 일종의 선진통상국가 전략의 하나로 이해할 수 있다. 적극적인 관점에서 볼 때, 한.미 자유무역협정의 목표는 '제1차 개방'인 개항(1876)과 '제2차 개방'인 박정희 정부의 근대화(1960~1970년대)를 이은 '제3차 개방'인 1990년대 농산품 시장 개방에 이어 '제4차 개방'을 성취하고자 했던 데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사회적 합의를 형성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으며, 그 논란은 국회 비준을 마친 후에도 계속되었다. 한 걸음 물러서서 볼 때, 자유무역협정의 결과가 농.어민과 자영업자 등을 포함한 사회적 약자들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충분한 시간을 갖고 국민적 공감대를 이뤄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정부는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햇다.
요컨데 노무현 시대는 우리 사회에서 민주화와 세계화 시대가 극적으로 교차하는 막간에 놓여 있었으며, 그러기에 민주화와 세계화가 충돌하는 긴장과 모순들에 내내 대면해 있었다. 세계사적으로 보수의 시대가 절정으로 보인 한가운데 진보적 가치를 추구해야 했던 것이 노무현 정부의 시대적 조건 또는 숙명이었다. 이러한 구조적 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노무현과 노무현 정부는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 했지만, 집권 당대에는 그렇게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벤츠 대리점, 외제차 전성 시대
<진보의 미래>, 노무현의 시대정신
<진보의 미래 : 다음 세대를 위한 민주주의 교과서>는 노무현이 대통령을 퇴임한 뒤에 집필한 책이다. 이 책은 미완의 저작이다. 노무현은 2008년 10월 참모진과 가까운 학자들에게 진보주의 연구모임을 제안하고 비공개 연구 카페를 열었는데, 여기에 자신의 생각과 구상을 올리고 이를 직접 토론하기도 했다. ,진보의 미래>는 바로 이 내용을 담고 있다. 제1부가 노무현이 직접 작성한 원고라면, 제2부는 그가 남긴 육성 기록으로 이뤄져 있다.
서문에서 노무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보주의에 관한 책을 만들어보자는 것입니다...... 미래의 역사는 진보주의가 제시하는 방향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사회적 논쟁의 중심 자리를 차지해야 지역주의를 넘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진보의 현재에 대한 진단과 새로운 미래의 모색이 이 책이 겨냥하는 목표다.
책의 차례를 보면 노무현의 깊은 고민을 엿볼 수 있다. 원고로 남긴 제1부의 경우, '국가의 역활을 고민하자', '보수의 시대, 진보의 시대', '보수의 주장, 진보의 주장', '진보란 무엇인가, 보수란 무엇인가'. '세계는 진보의 시대로 가는가'. '한국은 지금 몇 시인가'가 그 주요 내용이다. 이어지는 제2부는 생생한 육성을 통해 제1부 내용을 다양한 각도에서 흥미롭고 설득력 있게 펼쳐 보인다.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는 노무현의 시대정신과 정치철학의 핵심은 국가의 역활이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 노무현이 고민했던 것은 상식과 원칙이 통하는 사회였다. 그에 따르면, 격렬한 산업화를 지내오면서 비상식과 반칙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원리가 되었으며, 그 결과 사람이 사람으로 존중받지 못하고 반칙으로서의 특권이 횡행하는 사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된 노무현의 꿈은 상식과 원칙이 바로 서는 사회였다고 생각된다.
5년의 국정운영 경험은 상식과 원칙이 존중받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국가의 역활이 중요하다는 점을 노무현으로 하여금 재발견하게 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결국 국가의 역활에 관한 문제는 누가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더불어 우리들의 구체적인 삶을 지배하는 문제이자 정치와 민주주의의 핵심적인 의제이다...... 성장과 분배, 감세와 복지를 둘러싼 논쟁, 민영화, 탈규제, 노동의 유연화, 개방, 작은 정부, 이런 논쟁이 정부의 역활에 관한 논쟁이다."
노무현이 제시하는 진보의 미래는 새로운 분배와 재분배 정책의 수립에 있다. 신자유주의가 가져온 사회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시장의 분배인 노동영역과 정부의 분배인 복지영역에 국가가 어떻게, 어디까지 개입할 것인가가 문제의 핵심이라는 메세지다. 다시 말해, 노동시장정책과 복지정책의 재구성이야 말로 진보의 시대정신이 감당해야 할 과제임을 노무현은 힘주어 강조한다.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완성하지 못한 채 2009년 5월 돌연 유명을 달리했다는 점이다.
노무현의 예기치 않은 서거는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가 우리 사회에 남긴 유산은 무엇일까. 노무현의 영결식이 있던 날 저자는 다음과 같은 칼럼을 썼다.
"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하는 행정가로서 노무현은 좌절하고 실패하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권위주의를 지향한 중산층과 서민의 벗으로서 '인간 노무현'과 인권, 민주주의, 사회적 약자 보호라는 '시대정신 노무현'은 살아 있었으며, 그는 자신의 육신을 내던짐으로써 우리 안의 노무현을 다시 말해 '노무현적 가치와 정신'을 재발견하게 한 마지막 선물을 안겨주고 떠났다."
커피 전문점, 한 잔에 5천원 이상하는 커피잔을 들고 다녀야 사람대접받는 이상한 나라전통차와 자판기는
사라져 가고 있고 남이 하니 나도 해야 하는 타인지향적인 국민들......출근 시간에도 스타벅스 안에는 혼자서
창가에 앉아 음료나 빵을 먹으며 시간을 떼우는 젊은이들이 많다.
새로운 시대를 찿아서
돌아보면 우리 역사에서 지식인들의 시대정신 탐구는 대단히 치열했던 것이며 비록 시대적 구속에 갇혀 있었다 하더라도 그 구속을 넘어서서 새로운 인간과 사회를 꿈꾸었고 그것을 구체화하기 위해 헌신했다. 어떤 이들은 인간의 더 많은 자유와 해방을 모색하고자 했고, 또 다른 이들은 부조리한 사회의 모순들을 적그적으로 개혁하고자 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한민족이란 누구인가. 그리고 나와 우리 사회는 어디에 서 잇고 또 어디로 가야 하는가에 대해 이 땅의 많은 지식인들은 끝없이 질문을 던지고 그 답변을 찿고자 했다. 골품제에 맞서 싸운 최치원, 민족의 역사를 체계화한 김부식과 일연, 유교적 개혁을 꿈꾼 정몽주.정도전.이황.이이, 그 유교사회를 혁신하고자 했던 박지원.박제가.정약전.정약용.이건창.최제우, 근대적 민주주의와 민족주의를 모색한 서재필.신채호.이광수, 존재의 의미에 질문을 던진 원효와 경허, 현대적 산업주의와 민주주의, 인간주의와 생명주의를 추구한 함석헌.장일순.황순원.리영희, 그리고 박정희와 노무현에 이르기까지 우리 역사를 대표하는 지식인과 정치가들은 시대정신 탐구의 최전선에서 고투해왔다.
시대적 한계에 맞서고 이를 넘어서고자 했던 이들의 사상적 모험이 주는 중요한 함의는 시대정신 탐구에서의 방향과 방법이다. 예를 들어 정도전과 이이의 유교적 개혁론과 박지원과 정약용의 실학파 개혁론은 조선 사회라는 시대적 조건에 갇혀 있었지만, 현실 문제를 어떻게 진단하고 국가와 사회, 권력과 국민의 관계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 것인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해법을 모색함으로써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안겨주고 있다.
현재적 관점에서 볼 때 21세기 우리 사회의 미래를 이끌어갈 새로운 시대정신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가 될 수도 있다. 함석헌과 노무현의 민주주의, 박정희의 산업주의, 리영희의 민족주의, 장일순의 생명주의, 황순원의 인간주의 역시 모두 소중한 출발점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진정한 지식인이라면 우리 과거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통해 새로운 미래를 위한 가치를 주조하고 그 프로그램을 구체화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우리 역사의 시대정신 탐구를 통해 얻은 결론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첯째, 생산적인 자기 부정이 요구된다. 새로운 시대정신을 모색하기 위해 지식인은 회의적 접근을 통해 자기 사회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해부해야 한다. 무릇 모든 존재가 자기 껍데기를 스스로 깨고 나올 때 성숙해 지듯이 자기 사회의 현재를 냉철히 평가하고 성찰하는 것은 시대정신탐구의 일차적 조건이다. 자신의 선 자리를 정확하게 인식할 때 가야 할 길의 방향이 보이는 법이다.
돌째, 대안 모색이 치열해야 한다. 시대가 주는 구조적 강제가 클수록, 그 경로의존성이 견고할수록 새로운 대안 모색은 결코 쉽지 않은 과제일 것이다. 그러나 대안이 부재한다면 회의와 반성은 결국 자기 부정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역사가 더 나은 삶을 향한 진화를 뜻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진화를 위해 개인과 사회가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가에 대한 새로운 대안과 비젼의 모색은 시대정신 탐구에서 또 하나의 조건이다.
셋째, 개혁과 혁신이 중요하다.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개혁과 혁신이 불가피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 개혁과 혁신은 안정을 중시하는 보수적인 것일 수도 있고, 변화를 중시하는 진보적인 것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역사가 개혁과 혁신을 요구하고 있는데도 그것을회피하거나 거부할 경우 그 사회는 결국 후퇴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자기 사회의 미래를 위한 개혁와 혁신의 프로그램을 구체하하는 것이야말로 자기 시대에 맞서는 지식인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중대한 책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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