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한국의 역사 892 : 조선의 역사 434 (절망을 넘어서 9) 본문
한국의 역사 892 : 조선의 역사 434 (절망을 넘어서 9)
절망을 넘어서 9
9. 건국의 뿌리
"제2독립운동 기지 추가가에 경학사를 설립하다"
수천 년 동안 왕정이었던 나라가 망국 직후부터 민주공화제 건설을 독립운동의 이념으로 삼은 것은 경이로운 일이었다.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지향했던 선각자들의 지혜가 엿보인다. 숱한 갈등에 시달리는 현재의 대한민국이 문제 해결을 위해 더듬어 보아야 할 역시다.
횡도촌에 모인 망명객들이 국외 독립운동의 또 다른 기지로서 주목한 곳이 봉천성 유하현 삼원보였다. 지금은 삼원포라고 부르는데, 작은 강물 세 줄기가 합쳐 흐르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삼원보에서 서쪽으로 3~4킬로미터 떨어진 곳이 '추가가'였다. 추씨 성의 중국인들이 대대로 집단 거주하는 마을로 추지가라고도 불린다.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 여사에 의하면 '이시영이 장구히 유지도 하고 우리의 목적지를 정하여 무관학교를 세워 군사 양성하는 것이 더욱 시급하다면서 1911년 정월 28일 횡도촌에서 유하현 추가가로 가서 방 3칸짜리를 얻어 이석영, 이회영, 이시영 집안이 같이 머물렀다'고 한다. 이곳이 이회영.이동녕 등이 남만주 사전 답사 때 무관학교 설립지로 점찍은 곳이었다. 추가가는 마을 앞으로 너른 농지가 펼쳐져 있고, 마을 뒤로는 600여미터 높이의 대고산과 소고산이 있으며, 그 뒤로 산들이 연달아 있어 유사시 대피하기에 좋은 지역이었다.
그러나 추가가에 무관학교를 설립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먼저 정착을 하려면 토지를 구입해야 했는데 현지인들의 반발이 심했다. 망명객들의 집단 이주 규모가 현지인들을 무척 놀라게 했다. 이은숙은 추가가의 어른인 순경 노야는 "조선인들이 떼지어 몰려오니 필경 일본과 합하여 중국을 치러 온 것이 분명하다며 조선인을 몰아내 달라"고 관서에 고발하였다고 한다.
추씨들은 종회를 열어 '한국인에게 토지나 가옥 매매를 일체 거부하고, 한국인들의 가옥 신축이나 학교 시설도 역시 금지하며, 한국인과의 교제도 금지한다고 결의했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중국 군경 수백여 명이 한인들의 숙소를 급습해 조사하기도 했다. 이회영이 필담으로 일제의 첩자가 아니라 독립운동을 하러 형제지국에서 왔다고 전하자 그냥 돌아갔으나 그 후에도 가옥과 전답은 팔지를 않았다.
이런 곤란한 상황에 맞닥뜨린 한인 망명객들은 '변장운동'을 전개했다. 동지들이 머리를 깍고 옷을 바꾸어 토착인들과 함께 섞였으며, 이름도 바꾸고 중국인 복장으로 중국 국적도 취득하자는 운동이었다.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려면 중국인들고 충돌하면 곤란했다. 그래서 열 보 전진을 위해 일 보 후퇴한 것이었다.
한인들은 유하현에 입적과 토지 매매를 요청하는 한편 이회영과 이상룡의 아우 이봉희를 대표로 동삼성 총독에게 보내 입적과 토지 매매 허용을 요구했다. 동삼성 총독에게 보낸 청원서에 "우리들은 나라를 떠나 이주해온 후 다시는 압록강을 건너지 않겠다고 맹세한 무리들 입니다. 대개 저 원수눔들과는 같이 하늘을 이고 살 수는 없는 존재입니다"라고 쓰기도 했다. 이회영과 이봉희는 동삼성 총독 조이풍을 만나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면담에는 실패했다.
그러자 이회영은 총리대신 원세개를 만나 해결하기 위해 북경으로 향했다. 원세개는 1882년 임오군란 때 북양함대 제독 정여창이 이끄는 청군의 일원으로 조선에 온 적이 있었다. 청국 대표로 부임했던 27세때인 그는 가마를 탄 채 입궐하고, 국왕 알현에도 기립하지 않아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조선 체류 당시 이회영의 부친 이유승과 친교를 맺은 적이 있었다. 더구나 그는 일제에 빼앗긴 한국에 큰 애착을 갖고 있었다.
우여골절 끝에 이회영은 원세개를 만날 수 있었다. 이회영의 설명을 들은 원세걔는 적극 협조를 약속하고 비서 호명신을 대동시켜 동삼성 총독을 방문하게 했다. 원세개 총리의 친서를 받은 동삼성 총독은 자신의 비서 조세웅을 이회영에게 딸려 보냈고, 회인.통화.유하 세 현장에게 이주 한인들과 분쟁을 일으키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세 현장은 다음과 같은 동삼성 총독의 훈시를 게시했다.
"만주 원주민들은 이주하여 오는 한국인들과 친선을 도모하고, 농업.교육 등 한국인들의 사업 일체에 협력할 것이다. 서로 간에 분쟁을 야기하거나 불화를 조성하는 일체의 언동을 절대 삼가할 것이며 만일 지시를 위반한 자는 엄벌에 처할 것이다"
이런 훈시문이 게시되자 이은숙 여사의 회고대로 '3성의 현장들의 눈이 휘둥그레져 이후로는 한국인을 두려워해 잘 바라보지도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드디어 현지인들과의 갈등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동아일보> 1920년 8월 2일자는 '봉천성 삼원보에 자치국'이란 기사에서 "2,000호의 조선 민족의 한족회가 다스리며 소중학교 교육까지 시키는 작은 나라를 이루었다."고 보도했다. 또한 삼원보에서는 1919년 3월 12일 만주 최초로 만세 시위가 일어났는데, 모두 이때 뿌린 씨앗들이 개명한 것이었다. 이주 한인들은 입적과 토지 취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한편 경학사를 설립했다. 1911년 4월쯤 대고산에서 이동녕을 임시회장으로 선출하고 노천 군중대회를 열었다.
대교산이 보이는 추가가 마을, 경학사 설립을 위한 노천군중대회가 열렸던 곳이다.
일제가 이른바 '105인 사건' 판결문에서 "다수의 교육 있는 청년을 모아 서간도로 보내고 민단을 일으키고 학교 및 교회를 배설하고, 나아가 무관학교를 설립하고......"라고 바라본 대로 자치와 독립운동을 위한 민단을 조직한 것이다. 경학사는 낮에는 농사를 짓는 '개농주의'와 밤에는 공부하는 '주경야독'을 표방했다.
이상룡은 경학사 창설시 "아아! 사랑할 것은 한국이요, 슬픈 것은 한민족이로구나"로 시작하는 경학사 취지서를 통해 경학사가 나아가야 할 바를 밝혔다.
"부여의 옛 땅은 눈강(소화강 지류)에 달하였은즉 이곳은 이국의 땅이 아니요, 고구려 유족들이 발해에 모였은즉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엣 동포들이 아닌가......"
만주를 선조들의 옛 강역으로 보는 역사 인식 속에서, 네들란드처럼 독립할 것이라는 미래의 목표를 제시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노천 군중대회의 결과로 경학사를 만들었다는 점에 큰 의미가 있었다. 대고산에 모인 망명객들의 출신을 따지면 앙정복고를 추진하는 복벽(왕정)주의가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이들은 왕정을 배격하고 민의에 의한 민단 건설이란 '민주공화제'의 씨앗을 뿌린 것이다.
채근식의 <무장독립운동비사>에서 경학사에 대해 "동삼성 한국 혁명 단체의 효시"라고 높이 평가하고, 신흥무관학교 출신으로 훗날 광복군 총사령부 참모가 되는 김학규도 "동삼성 한국 혁명 결사의 개시이자 동북 한국 혁명운동의 선성이자 효시"라고 높이 평가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망국 이듬해 망명객들이 노천 군중대회를 열고 조직한 경학사는 대한민국이란 민주공화정체의 뿌리가 되었는데, 경학사 설립과 동시에 부설 교육기관으로 신흥강습소도 설치했다. 그러나 경학사는 1912~13년에 걸친 흉작으로 곧바로 운영난에 부딪힌 데다가 중국 관헌들의 탄압이 겹쳐 1914년 해산되었으며, 그 사업은 같은 해 조직된 부민단(扶民團)에 인계되었다. 경학사는 3년 정도밖에 유지하지 못했으나, 그 조직경험은 그후 중국 동북지역을 주무대로 활동한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계승되었고, 신흥강습소도 후일 신흥무관학교로 개편되어 독립군 양성의 중추기관으로 자리잡았다
'시대의 흐름과 변화 > 생각의 쉼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의 역사 894 : 조선의 역사 436 (절망을 넘어서 11) (0) | 2013.03.20 |
---|---|
한국의 역사 893 : 조선의 역사 435 (절망을 넘어서 10) (0) | 2013.03.19 |
우면산의 겨울 20 : 우리시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10 (0) | 2013.03.17 |
한국의 역사 891 : 조선의 역사 433 (절망을 넘어서 8) (0) | 2013.03.17 |
한국의 역사 890 : 조선의 역사 432 (절망을 넘어서 7) (0) | 2013.03.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