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한국의 역사 890 : 조선의 역사 432 (절망을 넘어서 7) 본문

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한국의 역사 890 : 조선의 역사 432 (절망을 넘어서 7)

두바퀴인생 2013. 3. 16. 01:41

 

 

 

한국의 역사 890 : 조선의 역사 432 (절망을 넘어서 7) 

 

    

                           큰 이미지 보기

                                                             독립운동의 주역들, 왼쪽에서 3 번째가 김구 선생

 

 

 

절망을 넘어서 7

 

 

7. 안동 유림들

 

 

"무릎 끓고 조이 될 수 없다" -이상룡 일가도 집단 망명-

 

 

미래는 꿈꾸는 자의 몫이다. 그 꿈을 현실로 만들려는 신념을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미래를 만든다. 나라가 망했을 때 과거를 반성하면서 새로운 나라를 꿈꾸고 그런 나라를 건설하는 데 인생을 바친 사람들을 역사는 선각자로 기억한다. 그들에 의해 미래는 보다 정의로워진다.

 

1911년 1월 5일 경상도 안동. 석주 이상룡은 새벽에 일어나 가묘에 절했다. 그는 망명일기인 <서사록>에서 "행장을 수습하여 호연히 문을 나서니, 여러 일족들이 눈물을 뿌리며 전송했다"고 전하고 있는데, 이미 만 52세의 나이였다. 그의 집 임청각은 고성 이씨 12세손으로 영산 현감을 지낸 이명이 지었는데, 이삼룡 망명 후 일제가 독립운동의 정기를 끊는다며 그 앞을 철길로 갈라놓았다. 그만큼 그의 망명이 영남 유림에 준 영향을 지대했다.

 

 

                                         

                                                                     안동 이상룡 일가 고택, 앞 쪽을 철길이 있다

 

그는 <서사록>에서 나라의 일이 마침내 그릇되었다. 아직 결행하지 못한 것은 다만 한 번의 죽음 뿐이다"라고 하면서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치겠다고 결의했다. 안동 하회마을과 상주를 지나 1월 12일 새벽 2시 추풍령에서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탔다. 그의 조상들 중 9세손인 고려 말 문신 행촌 이암이 <단군세기>를 지었다고 전하는 것처럼 집안의 전통인지 이상룡도 역사에 밝았다.

 

이상룡은 <서사록>에 "만주는 우리 단군 성조의 옛 터이며, 항도천(횡도촌)은 고구려 국내성에서 가까운 땅이며, 요동 또한 기씨가 봉해진 땅으로 한사군과 이부의 역사가 분명하다. 어찌 이역으로 여길 수 있겠는가" 하고 적었다.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는 훗날 한사군 지역이 한강 이북이라고 왜곡했는데, 이상룡은 마치 그런 사실을 예견이나 한 듯이 한사군이 만주 요동에 있었다고 지적했고, 그곳을 우리 영토라고 바라보았다. 이상룡의 망명도 조직적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역시 독립운동가였던 아들 이준형(자결)이 쓴 이상룡의 일대기인 <선부군유사>는 "1910년 11월 황만영, 주진수가 경성으로부터 와서 양기탁,이동녕의 뜻을 전달하면서 만주의 일을 자세히 말했다. 이 말을 듣고 만주로 건너갈 계획을 결심했다"고 전한다. 이회영.이동녕 등이 국외 독립운동 근거지로 결정한 만주 횡도촌에 합류하기로 했다는 뜻이다. 이상룡이 손자 며느리인 허은 여사는 구술 자서전 <아직도 내 귄엔 서간도 바람소리인가>에서 이렇게 전하고 있다.

 

"이시영 씨 댁은 이 참판 댁이라 불렀다. 대대로 높은 벼슬을 많이 하여 지체 높은 집안이었다. 여섯 형제분인데 특히 이회영.이시영 씨는 관직에 있을 때도 배일 사상이 강하여 비밀결사대의 동지들과 긴밀한 관계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합방이 되자 이동녕 씨, 그리고 우리 시할아버님(이상룡)과 의논하여 만주로 망명하기로 했다"

 

 

                                    

                                                                                              이상룡의  손자 며느리 허은 여사

 

 

 

허은 여사는 13도 의병연합부대의 군사장이었다가 1908년 일제에 체포되어 옥사한 왕산 허위의 집안 손녀였다. 집단 망명의 선이 안동까지 닿았다는 뜻이다. 추풍령에서 기차를 탄 이상룡은 12일 오후 8시경 서울역에 도착했으니 서울까지 18시간 정도 걸린 셈이었다.

 

1월 13일 <대한매일신보>의 주필 양기탁이 이상룡을 예방했다. 두 사람은 초면이지만 이미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이상룡은 지난해인 1909년 2월 안동경찰서에 구인돼 한 달여 동안 호독한 심문을 받다가 석방된 후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만들었는데, 몇 달이 못돼 지회에 가입한 사람이 수천 명이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대한협회가 1909년 일진회와 제휴하는 등 친일 성향을 띠어가면서 안동지회와 충돌했다. 이때 친일파들이 사법권을 일본 정부에 양도했는데, 그러자 이상룡은 드디어 경성의 대한협회에 편지를 보내 그 침묵하고 있는 것을 꾸짓고, 또 경성의 협회가 적당과 연합한 것이라 하여 위원을 파견하여 논쟁했다고 전한다.

 

     

                                                          

                                                                                             석주 이상룡

 

 

 

이상룡은 신의주에 도착해 압록강 상황을 보고 "일본이 장차 강 위에 무지개 다리를 놓으려고 돌기둥을 이미 벌려 세웠다. 만약 저 다리가 한번 낙성되면 연경이며 여순이며 하얼빈 등지가 모두 하룻길이 될 것이다. 일본 국력이 부강함이 두려울 뿐 아니라 그들의 만족할 줄 모르는 큰 야욕이 어디에 목표를 두고 있는지 알 만하다" 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뛰어난 역사가답게 이후 일본의 만주 및 중국 본토 침략을 정확하게 예견한 것이다.

 

신의주에 도착한 이성룡은 1월 25일 저녁 정거장에서 맏아들 준형이 맨 앞에, 동생 이봉희 부자가 매 뒤에 서서 부녀자와 어린아이들을 보호하면서 신의주 정거장에 도착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이성룡 일가도 이회영 일가처럼 집단 망명이었다. 이상룡이 사라진 후 경찰에서 여러 차레 조사했고, 사람들이 경찰서까지 끌려가 조사받았다는 소식을 나중에 들었다고 전한다.

 

이상룡 일가는 내 살을 도려내는 것보다 나라 잃은 슬픔에 더 애간장이 타는 심정을 시로 읖으며 비장한 결의로 압록강을 건넜다.

 

일가는 안동현에 도착해 이윤수 객점에서 잠시 대기하다가, 1월 29일에 마차 두 대에 분승하여 횡도촌으로 향했다. 날씨는 수레 안에서 이불을 덮어야 할 정도로 추웠고 어린이들은 연일 굶다가 병이 날 지경이 되자 도중에 좁쌀을 두 되 사서 솥을 빌려 밥을 지어 먹였다고 한다. "냇물을 따라 가다가 10여 리 쯤에서 산기슭이 트이고 시야가 넓어지더니 멀리 숲 사이로 지붕 모서리가 들쑥날쑥 보이니 바로 그곳이 횡도천임을 알았다"고 전한다. 국외 독립운동 근거지인 횡도촌에 드디어 도착한 것이다.

 

횡도촌에는 먼저 망명한 정원하.이건승.홍승헌 같은 강화학파와 이회영 일가가 반갑게 맞이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이상룡은 도착 당일 "오후에 김 비서장이 계신 곳을 찿아갔다"고 적었는데, 그는 먼저 망명한 처남인 백하 김대략이었다. 김대략은 65세의 노인으로 이상룡보다 일찍 음력 12월 24일 고향 안동을 출발해 압록강을 건너 이 곳으로 망명해 와 있었다. 김대략은 가족은 물론 식민의 땅에서 후세를 낳을 수 없다는 뜻에서 만삭의 손자며느리도 동행시켰다.

 

김대략은 망명지 만주에서 낳은 아이를 식민지 땅이 아닌 중국에서 낳아서 통쾌하다는 뜻의 '쾌당'으로 이름 짓고, 둘째는 고구려 시조 주몽의 땅에서 태어났다는 뜻의 '기몽'으로 지었다고 한다. 안동의 평해 황씨 황호 일문도 집단 망명에 가담했다.

 

김대략은 횡도촌에서 학교를 열어 후학을 길렀는데, 이상룡 일가는 학교 한 칸을 빌려 거주할 수밖에 없었다. 이상룡은 임석호, 조재기가 나중에 도착했는데, 그 편에 양기탁이 붙잡혀 갇혔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때 동토의 조선에서는 '105인 사건'이란 광풍이 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