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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89 : 조선의 역사 431 (절망을 넘어서 6) 본문
한국의 역사 889 : 조선의 역사 431 (절망을 넘어서 6)
절망을 넘어서 6
6. 이회영 일가 망명
"이회영 6형제, 광복자금 600억 들고 집단 망명하다"
한 사회의 지배층이 권력이나 금력이 아니라 도덕성과 정신으로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다면 그것만큼 건강한 사회는 없을 것이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대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지배층의 존재는 그 사회의 가장 강한 힘이다. 게다가 온 가족이 자신들이 가진 모든 것을 바쳤다면 그것은 더 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일제는 '독립운동은 상눔들이나 하는 것'이라면서 선전했다고 한다. 일제가 수직자들과 양반들에게 은사금을 내린 것은 독립운동을 상민들만의 것으로 만들어 천시케 하려는 교묘한 계산이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말을 한 여류 독립운동가였던 정정화 여사는 구한말 공조판서 등을 역임했고 남작의 지위를 받았던 시아버지 김가진이 1919년 10월 상해로 망명한 뒤 일제의 선전에 큰 타격을 받았다는 뜻에서 한 말이지만 사대부 출신으로 독립운동에 나선 인물이 그리 많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에 사대부들의 횡도촌 집단 망명은 더욱 큰 가치가 있었다.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 여사는 자서전에서 "이회영이 안동현 500리 되는 횡도촌으로 가셔서 임시로 자리를 잡고, 석오 이동녕 씨 친족 이병삼 씨를 그곳으로 먼저 솔권해서 안정을 시키고, 앞으로 오는 동지들의 편리함에 대한 책임을 부탁했다"고 전한다. 이상설.이회영.이동녕 등은 1906년 북간도 용정촌에서 서진서숙을 설립했던 경험을 살려 횡도촌에도 설립했다. 이회영은 이병삼에게 식량과 김장을 미리 준비토록 부탁했다. 이런 여러가지 준비를 마치고 귀국한 이회영.이동녕은 이은숙 여사가 회고한 대로 "팔도에 있는 동지들에게 연락하여 1차로 가는 사람들을 차차로 보냈다."면서 집단 망명을 실행했다.
이회영과 다섯 형제
또한 이회영은 집안 형제들을 설득했다. 이회영은 형제들에게 "지금 한일 강제 병합의 괴변으로 인하여 한반도 산하가 왜적의 것이 되고 말았다. 우리 형제가 당당한 명문 호족으로서 차라리 대의가 있는 곳에서 죽을 지언정 왜적 치하에서 노예가 되어 생명을 구차히 도모한다면 어찌 짐승과 다르겠는가?"라고 설득했다고 전한다. 이회영은 만주로 이주하여 일제와 싸우는 것이 "대한 민족 된 신분이요 또 왜적과 열투하시던 백사 이항복 공의 후손 된 도리라고 생각한다"면서 함께 만주로 가자고 설득했다. 이회영은 6형제 중 넷째로 위로 이건영.석영.철영이 있었고 아래로 시영(초대 부통령).호영이 있었다.
이 당시 독립운동에 나섰던 명가 출신들에게는 봉건적 구습 타파에 앞장섰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회영은 첯부인 달성 서씨와 사별 후 한산 이씨 은숙 여사와 재혼했는데, 이 여사는 "무신년 10월 20일에 상동 예배당에서 결혼을 거행했다고 하였다"고 전한다. 전통 명가 출신이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린 자체가 크다란 사건이었다. 이회영은 집안에 거느리고 있던 종들을 자유민으로 풀어주기도 하고 남의 집 종들에게 터무니없이 경어를 썼다고 한다. 횡도촌에서 합류하는 석주 이상룡은 망명하기전 자신의 집 노비들의 노비 문서를 모두 불태우고 각자 양민으로 살아가도록 했다고 한다.
이성룡의 사돈이기도 한 왕산 허위도 마찬가지였다. 1908년 13도창의군 군사장으로 의병들의 서울진공작전을 총지휘했던 허위가 1904년 의정부 참찬으로 임명되자 제출한 열 가지 개혁안 중에 아홉 번째가 노비를 해방하고 적서를 구별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신분제, 남녀차별 같은 봉건적 인습이 조선 사회를 낙후시켜 식민지로 전락시켰다는 뼈아픈 반성이 담긴 행위였다.
이회영 선생의 집단 망명 권유 이야기를 들은 형제들은 모두가 혼연히 찬동하였다. 보통 봉제사를 위해 한 사람 정도는 남지만 이회영 형제는 그리 하지 않았다. 식민의 땅에서 드리는 제사를 조상들이 흠양하지않을 것이라는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섯 대가족의 망명 준비는 그리 쉽지가 않았다. 여러 행제가 일시에 협력하여 만주로 갈 준비를 하였다. 비밀리에 전답과 가옥.부동산을 방매했는데 여러 집이 일시에 방배를 하느라 경황이 없었다. 그때만 해도 여러 형제 집이 예전 대가의 범절로 남종 여비가 무수하여 하속의 입을 막을 수 없는 데다 한편 조사는 심했다고 한다.
급매하다 보니 제 값도 받지 못했다. 그렇게 일가가 전 가산을 정리해 마련한 자금은 40여만 원으로 당시 3원 정도이던 쌀 한 섬을 기준으로 환산하면 현재 돈으로 대략 600여억 원이나 되는 거금이었다.
일가가 이런 거금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둘째 석영의 동참이 결정적이었다. 이은숙 여사의 회고에 의하면 이석영은 우당 둘째 종씨인데, 셋째 종숙 댁으로 양자를 가 양가 재산을 가지고 생가 아우들과 뜻을 합하여 만여 석 재산과 가옥을 모두 방매해서 마련하였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1911년 발생한 '105인 사건'으로 신민회의 자금 모금 계획에 차질이 생기면서 이회영 형제의 재산은 주요한 '광복 자금'이 된다.
이회영 일가는 가산을 급히 정리하고 서울을 떠나 신의주에 도착했다. 그들은 신의주 사막촌에 도착하였는데, 사막촌은 타인이 보기에는 주막으로 행인에게 밥도 팔고 술도 파는 주막이었다. 그들은 국경이라 경비가 삼엄한 압록강을 도강하기 위해 새벽 3시쯤 사전 준비한 중국 노동자가 강빙에서 사람을 태워 가는 썰매를 타고 약 두 시간 만에 안동현에 도착하게 된다. 이때 이동녕씨 매부 이선구씨가 마중나와 처소로 안내를 받아 횡도촌으로 향했다. 횡도촌에는 이동녕의 친족 이병삼이 망명객들을 반갑게 맞이하였다.
이회영 일가는 워낙 대가족이었기에 여럿으로 나누어 각각 압록강을 건넜다. 이은숙 여사는 아이들을 먼저 데리고 압록강을 건넜고 이회영은 뒤따라 오기로 했다. 12월 27일 이회영이 국경을 넘어 도착하니 모두가 반갑게 맞이했다.
1910년에 나라는 빼앗겼지만 1911년 새해는 망명지에서 맞이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1911년 정월 9일, 6형제 일가족 40~60명은 말과 마차 10여 대에 나누어 타고 안동현을 떠나 횡도촌으로 행했다. 그들은 하루 종일 100여 리씩 달려 휴식도 없이 횡도촌으로 향했다. 밤을 새우며 길을 재촉하였고 지독한 추위와 좁은 마차 속에서 고생하면서 6~7일을 달려 이회영 일가는 횡도촌에 겨우 도착하였다.
횡도촌에는 먼저 도착한 정원하.홍승헌.이건승 같은 소론계 강화학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각자 고향을 떠나 이역만리 작은 마을 횡도촌에서 상봉한 것이었다. 두 행차가 서로 만나는 순간, 응당 거긴엔 억제되었던 감정이 폭발할 것 같았지만 서로 아무런 말이 없었고 비정하리만치 무장된 함구가 있을 따름이었다.
망명에 무한책임을 느끼는 선비들로서 망명지에서 상봉한 것을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또한 앞날이 순탄치 못할 것이라 감정 표출도 자제케 했던 것이다. 훗날 민족단일전선 신간회 회장이 되는 월남 이상재는 이회영 일가의 망명 소식을 듣고 "6형제의 절의는 참으로 백세청풍(百世淸風)이 될 것이니 우리 동포의 가장 좋은 모범이 될 것이다" 라고 평했다. 그러나 동포의 가장 좋은 모범에게는 이후에도 시련의 길만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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