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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86 : 조선의 역사 428 (절망을 넘어서 3) 본문
한국의 역사 886 : 조선의 역사 428 (절망을 넘어서 3)
절망을 넘어서 3
3. 만주의 횡도촌
"만주로 망명한 이건승, 홍승헌 독립운동의 씨앗을 뿌리다"
주류가 잘못된 시대에는 그에 맞서는 한 개의 작은 씨앗이 중요하다. 그런 씨앗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면서 잘못된 시대를 무너뜨리고 새 시대를 열기 때문이다. 100여 년 전 온 생애를 걸고 망명했던 소수 사대부들의 결단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들의 결단이 바로 대한민국의 씨앗이기 때문이다.
1910년 9월 26일 강화도에서 개성의 원초 왕성순의 집에 도착한 이건승은 진천에서 문원 홍승헌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개성은 상해 북방 남통으로 망명한 창강 김택영의 고향이었고, 왕성순은 김택영의 문인이었다. 양명학자 김택영은 먼저 배를 타고 남통으로 망명하면서 고려.조선의 문장가 9인(김부식.장유.이식.김창협.박지원.홍석주.김매순.이건창)의 글을 모은 <구가문>을 왕성순에게 주었다. 왕성순은 1914년 여기에 김택영의 글을 더하여 <여한십가문초>를 만들고 그 서문에 "창강 김택영 선생이 개성에서 우뚝 일어나 고문(古文)으로 천하에 이름을 떨쳤다"고 칭송했다. 청나라 학자이자 개혁정치가였던 양계초도 이 책에 "한 나라의 국민성은 문학으로 나타난다"는 내용의 서문을 썼다.
10월 초하루 진천의 홍승헌이 왕성순의 집에 도착했고, 같은 날 이건승의 종제인 난곡 이건방과 조카 범하도 당도했다. 원래 이건방도 망명할 계획이었으나 모두 떠나버리면 조선 양명학을 계승할 사람이 없었다. 살아서는 돌아올 수 없기 때문에 누군가는 식민의 땅에서라도 살아남아서 양명학을 전수해야 했다. 이건승은 을사년 가족들의 저지로 자결에 실패한 후 식음을 전폐하고 두문불출하다가 자신이 죽은들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고 분연히 일어나 학교를 건립했다. 그 학교가 이건승이 강화도 사기리에 설립한 '계명의숙'이다. 자결이 단기전이라면 저항은 장기전이었다. 학문으로 민족의 뿌리를 지키고, 교육으로 먼 미래에 대비해야 했다. 그래서 이건방은 남게 되었고 그의 문하에서 일제에 들러붙은 학문을 허학(虛學)이라고 비판했던 정인보 같은 학자들이 배출될 수 있었다.
10월 2일 밤, 이건승과 홍승헌은 개성 성서역에서 신의주로 올라가는 경의선에 몸을 실었다. 왕성순과 이건방, 조카 이범하는 만주로 떠나는 두 선비를 배웅했다. 떠나는 자와 남는 자의 심정은 같았다. 열차에 몸을 싣고 먼 북방으로 떠나는 홍승헌은 전통 명가 출신의 사대부로, 선조의 부마 영안위 홍주원의 후손이자 이계 홍양호의 5대 종손이었다. 홍양호는 1764년 영조 40년 일본에 가는 통신사 일행에게 벚나무 묘목을 부탁해 서울 우이동을 벗꽃 경승지로 만든 인물로 알려져 있다.
홍승헌의 조부 홍익주는 충청도 진천현감을 역임하면서 진천에도 터를 잡았다. 진천이 강화도와 함께 조선 양명학의 한 반향이 되는 배경이 여기에 있다. 이건승.홍승헌보다 조금 늦게 망명하는 석주 이상룡은 망명일기인 <서사록>에서 홍승헌을 홍 참판이라고 부른다. 홍승헌은 1891년 고종 27년 현재의 검찰총장 격인 사헌부 대사헌을 역임했고 같은 해 종2품 이조참판을 역임했기 때문이다.
압록강 국경 경비병들이 삼엄한 경비를 펼치고 있다. 그러나 일제는 망명으 막을 수 없었다
이건승,홍승헌은 10월 3일 밤 신의주 종점에서 하차했다. 일제가 만주 망명을 막기 위해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 있어 쉽게 도강이 불가했다. 그레서 두 망명객은 사막촌 주막에 몸을 숨긴 채 압록강이 얼기를 기다렸다. 사막촌 주막에는 중국으로 망명하려는 지사들의 비밀 거처였다.
만주에서는 이미 기당 정원하가 망명해 기다리고 있었다. 정원하도 홍승헌 못지 않게 명가 출신이다. 현종 대 우의정을 역임한 정유성이 8대조, 강화학의 비조인 하곡 정제두가 6대조였다. 조부 정문승은 종1품 승정대부까지 올랐고, 부친 정기석도 지평현감과 안성군수 등을 역임했다. 정원하가 어린 나이에 진사과에 합격했을 때 지금의 서대문에서 반송방(지금의 아현동.현저동 부근) 집까지 축하 행렬이 끓이지 않았다는 일화가 남아 있을 정도로 축복받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부친 정기석이 진천에 터를 잡으면서 진천에 살았던 정원하도 1882년 고종 19년 사간원 대사간, 승지, 대사헌 같은 청요직을 역임했다. 그러나 나라의 운명이 요상하게 돌아가면서 정원하는 벼슬을 집어던지고 선조의 고향인 강화도로 들어가 홍승헌.이건창 형제 등과 양명학을 강론했다.
이건창은 난고(難藁)라는 시의 서문에서 '정원하와 홍승헌은 진천에서 출발해 배를 타고 강화도 하현에 도착해 처음 대화를 나누었다'고 전하는 것을 비롯해 자신의 문집인 <명미당집> 곳곳에 두 사람과의 우정과 학문에 대해서 서술했다. 이건승은 황현에게 말한 것처럼 형 이건창이 제 명대로 살지 못하고 죽었는데 살아 있었다면 정원하.이건승.홍승헌과 함께 만주로 망명했을 인물이었다.
나라를 빼앗기자 정원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망명을 결심했다. 이건승, 홍승헌도 마찬가지였다. 그 길은 몸은 죽고 정신이 사는 실이고, 현실에서는 죽고 역사에서는 사는 길이라고 그들은 굳게 믿었다. 광복은 커녕 그 조짐도 찿기 어려웠다. 왕실 일부와 집권당 노론이 조직적으로 매국에 나선 나라였다. 일본군은 '남한대토벌'이란 작전명으로 호남을 중심으로 삼남 일대의 의병들을 그물 치듯 살육했다. 위로 보나 아래로 보나 광복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그 불가능의 길이 바로 성현들의 글을 읽은 인간 세상 식자의 길이었다. 정원하에겐 떠나기에 앞서 처리할 일이 남아 있었다. 어린 손녀들의 혼처를 정하고 15세의 장손녀를 약조대로 이건창의 장손자 이덕상에게 출가시키고 12세의 손녀는 옥천군 청산리 조동식 집안으로 시집보냈다. 모두 평소 교제하던 소론 집안들이었다. 이렇게 주변을 정리한 정원하는 가장 먼저 압록강을 건넌 것이며 당시 그이 나이 55세였다.
이건승과 홍승헌이 신의주 사막촌 주막에서 압록강 물이 얼기를 기다리던 10월 7일, 일제는 76명의 왕족과 사대부들에게 작위와 은사금을 수여했다. 이른바 '합방공로작'이었다. 다음 날 1,700여만 원의 임시은사금을 각 지방장관에게 내려보내 친임관.칙임관 등의 대한제국 전 관료와 양반.유생들에게 '은사공채'를 주었다.
유림 출신의 독립운동가인 심산 김창숙은 그의 자서전 <벽옹칠십삼년화상기>에서 "당시 왜정 당국이 관직에 있던 자 및 고령자, 효자 열녀에게 은사금이라고 돈을 주자 온 나라의 양반들이 뛸 듯이 좋아하며 따랐다"고 전한다. 김창숙은 이런 자들을 비판하며 통곡하였다고 한다.
12월 초하루 새벽, 이건승과 홍승헌은 중국인이 끄는 설매에 몸을 싣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넜다. 압록강 대안 안동현(현재의 단동) 구련성에서 이국의 첯 밤을 보내고 이튼날 새벽 두 선비는 북상 길에 올라 12월 7일 첯 목적지인 '횡도촌'에 도착했다. '흥도촌'.'항도촌'이라고도 불리는 이 마을에서 정원하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도 조선에서 이곳으로 올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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