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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면산의 겨울 19 : 우리시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9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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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면산의 겨울 19 : 우리시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9

두바퀴인생 2013. 3. 10. 16:33

 

 

 

우면산의 겨울 19 : 우리시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9

 

 

 

                                                                                     반포종합운동장 테니스장 전경

 

'지식인의 개인적 책임과 사회적 책임'

 

 

황순원과 리영희

 

시대정신과 지식인의 태도

해방 이후 우리 사히를 대표하는 지식인 중 시대정신의 관점에서 최인훈, 김수영, 고은, 황순원을 들 수 있는데 각자 그 기여가 사뭇 다르다. 최인훈이 중도주의를, 김수영이 자유주의를, 고은은 전통주의와 현대주의를 결합시킨 작가인데 반해, 황순원은 인간주의라 부를 수 있는 흐름을 대표한다.

 

시대정신에서 인간주의란 말은 모호한 말이다. 그것은 어떤 사상이라도 인간주의를 그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순원의 인간주의는 독특한데, 그의 작품에는 두 가지 유형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하나는 현실의 격류 속에 살아가는 인물이며, 다른 하나는 시간의 구속을 벗어난 보편적 존재로 살아가는 인물이다. 황순원의 작품에는 전자보다 후자의 성격이 두드러진다. 그가 펼치는 인간주의는 현실주의보다 오히려 이상주의에 가깝다. 바로 이 점이 황순원을 다루고자 하는 첯 번째 이유이다.

 

황순원의 문학에는 어떤 사조와도 무관하며,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해 그 속에서 한국인이라는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는 자신만의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 이 점이 황순원을 다루고자 하는 두 번째 이야기다.

 

 

                                                                 

 

 

황순원에 비해 리영희는 사뭇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이다. 기자와 신문방송학과 교수를 지냈지만, 그의 사실상 전공은 국제정치학이다. 오랜 외신 기자 경험과 연관돼 있는 국제정치학 분야에서 리영희는 냉전과 반공주의 이데올로기에 맞서왔다. <전환시대의 논리>를 필두로 그가 발표한 책과 글들은 운동권의 필독서이자, 1970년대 유신세대와 1980년대 486세대에게 심원한 영향을 미쳤다.

 

당대의  사회적 환경과 지식의 관계를 중시하는 지식사회학의 관점에서 리영희는 이례적인 사회과학자였다. 두 가지 점에서 그러한데,

 

첯째, 1970년대의 시대적 분위기에서 성역이었던 냉전과 반공주의에 도전한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의 용기가 필요한 것이었다. 냉전분단체제에 맞서는 게 진보적 지식인의 역활이었다면, 리영희는 연구와 저술로 그 최전선에 서 있었다.

 

둘째, 실천적 지식인의 경우 흔히 운동정치에 적극적으로 첨여해왔지만, 리영희는 사회운동보다는 글과 책으로 진보 세력에 기여했다. 해방 이후 우리 현대사에서 말과 글이 사회변동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을 리영희보다 더 강렬하게 보여준 지식인을 찿기는 어려울 것이다.

 

리영희의 정치사상을 관통해온 것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다. 그는 외세 의존적 사상과 외교에 맞서 주체적인 관점에서 자주적인 대응을 요구했으며, 군사독재에 맞서 언론의 자유와 인권의 민주주의를 강조했다. 모더니티의 시각에서 볼  때 그는 진정한 현대주의자였다. 이념적으로 리영희는 사회주의에 가까웠지만, 그가 소중히 생각한 것은 자유, 평화, 민주, 민족 등과 같은 현대적 가치들이었다. 이 가치의 실현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해온 것이 바로 그의 삶이었다.

 

그러나 한편 그의 사상에 대한 비판도 없지는 않다. 그가 뿌린 사상적 씨앗은 그 당시 젊은이들에게 사회주의 이념을 강렬하게 심어주게 되었고 그의 사상적 의도와는 무관하게 그들 중에는 반미.반보수.친북.종북을 추종하는 세력으로 성장하여 우리 사회에 뿌리를 내려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고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북한을 흠모하는 광신적인 부류를 낳게 되었다는 점도 부정하기 힘든 것은 사실이다.

 

이제는 우리 사회가 어느 정도 민주화에도 성공하였고 경제적인 부도 누리고 있는 등 그동안 많은 사회적 변화를 가져온 것도 사실이다. 그의 사상이 박정권의 군사독재와 장기집권에 항거하며 내세운 이상적인 사상이 아니라 항거를 위한 대안의 사상으로 사회주의를 지향하였다면 역사를 통해 세계가 이미 경험한 레닌, 스탈린, 모택동, 카스트로, 김일성 등에 의한 공산주의 일당 독재의 폐해와 이로 인해 수많은 인민의 목숨을 앗아간 역사의 오류를 간과하고 있다는 점도 부정할 수가 없을 것이다. 또 오늘날 북한 김씨 세습왕조에 의해 주민들이 겪고 있는 비참한 고통을 비판하지 못하고 외면할 수밖에 없다면 그 또한 그의 사상이 갖는 이중성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진정 그가 순수하게 의도한대로 이 땅에서 태평성대의 꽃을 피울 수 있는 길이라면 그것은 북한의 위협과 4대 강대국의 침략과 침탈을 억제할 수 있는 국력을 키우는 것이 우선이며 그 후에 민족적 자주통일을 이루어 모두가 더불어 잘 살아가는 자유민주주의의 꽃을 피우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남은 우리들에게 주어진 과제일 것이다.     

 

여기에서는 지식인의 태도에 주목하고자 한다. 어떤 사상이라 하더라도 내용 못지 않게 그 사상에 접근하는 태도 혹은 방법 도한 지식인에게는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황순원과 리영희는 지식인의 태도에서 하나의 모범을 보여준다.

 

 

 

 

 

 

황순원, 고독한 정신의 광휘

황순원은 1915년 평안남도 대동에서 태어났다. 정주 오산학교와 평양 숭실학교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 그는 일제 말기에 평양과 대동군에서 소설 창작에 몰두했다. 해방이 되자 북한에 잠시 머물러 있다가 1946년 월남했다. 서울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1957년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됐으며 1980년 정년퇴직을 맞았다. 그가 발표한 작품들은 문학과 지성사에서 1985년에 <황순원전집>전 12권으로 완간했다. 이후 작품을 더러 발표하던 그는 2000년 세상을 떠났다.

 

황순원은 처음에 시를 썼으나 일본 유학시절 소설가로 변신했다. <황순원전집>의 순서는 단편, 장편, 시, 연구논문들로 이뤄져 있다.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소설가 황순원을 거의 모두가 알고 있는데, 그것은 <소나기>를 비롯하여 그의 몇몇 작품들이 교과서에 실려 있기 때문이다.

 

 

                                               

 

 

문학을 전공하지 않는 사람으로서는 황순원의 작품 세계에 대해 말하기가 조심스럽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주목하려는 것은 그의 작품에 반영되어 있는 어떤 정신 또는 사상이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흔히 <카인의 후예>, <나무들 비탈에 서다>, <일월>, <움직이는 성> 등의 장편소설들이 꼽힌다. 이 작품들은 그 제재가 각기 다르다. <카인의 후예>가 북한 토지개혁을 주목한다면, <나무들 비탈에 서다>는 한국전쟁이 남긴 상처를 다룬다. <일월>은 백정을 통해 소수자 문제와 존재의 고뇌를, 그리고 <움직이는 성>은 우리 한국인의 심성구조를 살펴본다.

 

이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은 제목부터 범상치 않은 <카인의 후예>다.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에 박경리의 <토지>, 최인훈의 <광장> 등과 함께 선정되기도 한 이 소설은 해방 직후 북한에서 이뤄진 토지개혁을 배경으로 한다. 지주 아들인 박훈과 마름 출신인 도섭영감의 갈등, 그리고 박훈과 도섭영감의 딸인 오작녀의 사랑을 축으로 전개되는 이 작품은, 한편으로 토지개혁의 진행과정을 살펴보고 다른 한편으로 급격한 변화 속에서 전개되는 다양한 인물들의 대응과 고뇌, 사랑을 서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장편소설 못지않게 황순원 문학 세계가 잘 드러난 것은 단편소설들이다. 국민 단편소설이라 부를 수 있는 <소나기>를 위시하여 <별>, <목넘이마을의 개>, <학>, <잃어바린 사람들> 등 그가 쓴 단편들은 우리 겨레의 역사를 생생히 보여주며, 그 속에서 살아간 이들의 삶을 격조높게 그리고 있다. 일각에서는 황순원의 이런 작품들이 근대적 '소설' 이전의 전근대적 '이야기'라고 지적하지만, 사회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보기에 소설보다 앞서 존재하는 것은 삶이자 그에 대한 증거이다.

 

황순원의 단편소설에서 중요한 변화는 첯 번째 단편집 <늪>과 두 번째 단편집 <기러기> 사이에서 관찰된다. 일제 말에 쓰였음에도 <기러기>는 해방 직후에 쓰인 세 번째 단편집 <목넘이마을의 개>보다도 늦은 1950년에야 출간되었다.

 

시선을 끄는  것은 <기러기> 서문이다. 이 단펹비에 실린 소설들은 <별>과 <그늘>을 제외하고는 발표되지 않았는데, 우리말로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어로 작품을 쓰리고 권유를 받았지만, 황순원은 이를 거부하고 고향에 칩거하면서 <기러기>에 실리게 될 소설들을 써뒀다.

 

다수의 소설가들이 친일로 전향한 당시의 현실을 생각할 대, 비록 독립운동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황순원은 원고지 위에서, 언어를 통한 독립운동을 조용히 전개한 셈이었다. 이 점에서 이육사, 윤동주의 시와 함께 <산골아이>, <황노인>, <독짓는 늙은이> 등 <기러기>에 담긴 소설들은 더없이 소중한 겨레의 유산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책머리에'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냥 되는대로 석유상자 밑이나 다락 구성에 틀어박혀 있을 수밖에 없기는 했습니다. 그렇건만 이 쥐가 쏠다 오줌똥을 갈기고, 좀이 먹어들어가는 글 위에다 나는 다시 글들을 적어 올려 놓곤 했습니다. 그것은 내 생명이 그렇게 하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명멸하는 내 생명의 불씨가 그 어두운 시기에 이런 글들을 적지 아니치 못하게 했다고 보는 게 옳을 것 같습니다.'

 

황순원은 현실 참여에 소극적이었고 그의 주요 관심사는 권력 비판이 아니라 인간 탐구에 있었다. 당시의 현실로 지식인이 가는 길은 국외로 탈출하여 적극적인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것 외에 국내에서는 친일로 전향하거나 칩거하는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그는 권력 비판보다 칩거하여 자연과 인간 탐구가 어쩌면 그가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주제였는지도 모른다.

 

작가는 과연 무엇을 하는, 또 해야만 하는 존재인가. 비록 발표를 기약할 수 없더라도, 소중한 겨레의 언어로 오랜 시간을 견디어온 겨레의 이야기를 전승함으로서 명멸하는 생명의 불씨를 지키려고 했던 그의 태도는 식민지 시대에 우리 지식인이 보여준 최고의 정신적 광휘 가운데 하나였다.

 

 

  

 

 

 

<움직이는 성> 한국인의 심성구조

황순원의 문학사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소설이 바로 <움직이는 성>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은 <카인의 후예>, <일원> 등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움직이는 성>은 황순원이 오랫동안 생각해온 한국인의 심성을 다룬다는 점에서 시선을 끌고 있다.

 

한국인이란 어떤 존재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인문학과 사회과학에서 오랫동안 토의되어 왔다. 우리 민족은 구석기 시대 이후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서 거주해왔다. 고려시대부터 영토가 한반도로 제한되었지만,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를 일궈왔다. 동아시아의 다른 민족들도 그러하듯 농경생활이 기본을 이뤘으며, 따라서 유목민이 아닌 정주민의 특징을 간직해왔다. 누구는 이러한 우리 민족의 문화적 심성을 '한(恨)'에서, 다른 이는 '은근과 끈기'에서 찿기도 한다.

 

황순원의 답변은 이와 다르다. 이 소설은 각각 개성이 다른 세 명의 주인공인 농업기사 준태, 목사 성호, 민속학자 민구가 펼치는 삶과 생각을 다루고 있다. 소설을 통해 황순원은 기독교와 샤머나즘, 구체적인 삶과 추상적 관념, 욕망과 도덕 사이에서 떠돌며 방황하는 한국인의 정신적.종교적 삶을 다각도로 조명함으로써 새로운 구원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이 소설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이성섭도 지적한 바 있는 '유랑민 근성'에 대한 탐구다. 제목에서 암시하듯이 그가 제시하는 한국인의 심성은 유랑민 근성이다. 사회학적으로 유랑민은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피란민과 유목민이 그것이다. 피란민이 전쟁을 피해 멀리 옮겨간 사람들이라면, 유목민은 일정한 거처 없이 이동하며 사는 이들을 말한다. 둘 사이에 공통점과 차이점은 존재한다. 한곳에 오래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게 공통점이라면, 피란민은 전쟁과 같은 외부적인 영향을 크게 받는 반면 유목민은 목초지를 찿는 자발적 선택을 중시한다.

 

내가 말하는 것은 피란민 사회의 그늘이다. 이곳을 잠시 머물러 있는 공간이기에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은 채 삶을 '만인 대 만인의 투쟁'으로 생각하는 게 피란민의 자의식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욕망과 권력을 추구하며, 이를 위해 연줄망을 극대화하는 게 피란민의 전략적 선택이다. 한국 전쟁이 끝난 지 60여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피난민처럼 살아가고 있는 게 우리 사회의 현주소일지도 모른다.

 

황순원은 주인공 목사 성호를 통해 새로운 구원의 가능성을 암시하고 또 모색한다. 이 작품은 산업화 시대가 절정으로 치닫던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에 쓰여졌다. 전쟁과 산업화가 우리 사회에 미친 중대한 영향 가운데 하나는 공동체의 파괴였다. 사회학적으로 볼 때 한번 훼손된 공동체 의식을 복구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황순원이 제시하는 구원의 가능성, 다시 말해 기독교적 사랑과 정의의 수용은 유랑민 근성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의 하나일 것이다.

 

<움직이는 성>과 연관해 흥미로운 것은 유랑민의 현재적 특징이다. 작가 자신도 인식하지 못했을 것인데, 유랑민이 갖는 또 하나의 측면인 유목민 근성인 한 곳에 머물러지 않고 상시 이동하는 새로운 시대인 21세기 신유목민 시대의 특성이 오늘날 정보사회의 진전으로 강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황순원의 메세지를 어떻게 평가하든 이 작품은 한국인의 존재적 특징을 새롭게 조명했다는 점에서 우리 민족의 선 자리와 갈 길을 돌아보게 하고 있다.

 

 

 

  

 

 

 

리영희, 민주화의 상징적 지식인

리영희는 1929년 평안북도 운산에서 태어났다. 1942년 경성공립공업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지만 해방을 맞아 학업을 중단하고, 1946년 한국해양대에 다시 입학해 졸업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입대, 1957년 제대 후 곧 합동통신사에 입사해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1964년 조선일보사로 직장을 옮겼고, 이해 필화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1972년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조교수로 임용됐다. 이후 구속과 기소, 해직과 복직을 거듭하다가, 1995년 한양대를 정년 퇴임하고 2010년 세상을 떠났다.

 

리영희가 펴낸 책들은 2006년 한길사에서 <리영희저작집>전 12권으로 출간했다. 그의 첯 저작은 <전환시대의 논리>였다. 이후 <우상과 이성>, <8억인과의 대화>(편역) 등을 발표해 문제적 지식인으로 부상했다. 이 책들로 인해 그는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지만, 당시 젊은 세대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1987년 민주화 시대가 열리면서 그는 진보 세력의 '사상적 은사'로 평가됐으며, 이후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등의 저작들을 발표했다. 2005년에는 문학평론가 임헌영과 나눈 자전적 대담 <대화 :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을 출간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 우리 현대사에서 리영희는 경제학자 신영복과 함께 민주화의 상징적 지식인이다. 한 사람이 감옥 안에서 자신의 신념을 지켰다면, 다른 한 사람은 구속과 해직을 반복하면서 자신의 신념을 펼쳐 보였다. 리영희는 여러 조사에서 해방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지식인들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됐으며, 지식인의 현실 참여에서 언제나 앞자리에 서 있었다. 이 땅에서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것을 리영희만큼 생생히 보여준 지식인은 없을 것이다.

 

 

 

 

 

 

<전환 시대의 논리>, 그 충격과 영향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전논'이라 불리던 <전환시대의 논리>는 리영희의 대표작이다. 1974년 유신독재 아래서 출간된 이 책이 당시 지식인사회에 준 영향은 충격적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하기 어렵다. '아시아, 중국, 한국'이란 부제를 달고 출간된 이 책은 한국전쟁 이후 우리 사회를 특정지어온 냉전분단체제에 대해 코페르니쿠스적 사고의 전환을 요구했다. 짧은 머리말은 겸허하지만 분명한 메세지를 전달한다.

 

"지동설을 증명한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책의 출판을 위탁 받은 신학자 오리안더는 교회 권력과 신학 도그머와 그에 사로잡혀 있는 민중의 박해 때문에 그 책을 사실로가 아니라 가설이라는 궤변을 서문을 삽입하여 출판했다.(......)격에 안 맞는 코페르니쿠스와 비교를 자청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를 '정치적 신학'의 도그머가 지배하는 날까지는 가설인 것으로 나는 만족한다는 것이다. "

 

가설이라는 겸양의 표현을 쓰고 있지만 이 책에는 냉전분단체제라는 골리앗에 맞서는 다윗의 통찰과 의지가 담겨 있다. 이 책의 구성을 보더라도 리영희의 생각은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제1부 강요된 권위와 언론자유, 제2부 중국 외교의 이론과 실제, 대륙 중국에 대한 시각 조정, 권력의 역사와 민중의 역사, 사상적 변천으로 본 중국 근대화 백년사, 중국 지도체제의 형성과정, 제3부 조건반사의 토끼, 현해탄, 텔레비젼의 편견과 반지성, 외화와 일본인, 사하로프-동정과 반성, 제4부 미군감축과 한일 안보관계 전망, 일본 재등장의 배경과 현실, 한국 유엔 외교의 새 국면, 베트남 전쟁(1), 베트남 전쟁(2), 제5부 직업 수필 4제, 기자풍토 종횡기, 제6부 한.미안보체제의 역사와 전망 등이 그 내용이다.

 

이 책은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번 변화하는 동아시아를 다루고 있다. 중국에 대한 재인식을 중심으로 닉슨 닥트린과 미국의 대외정책, 일본의 군사적 재무장화, 그리고 베트남 전쟁의 역사와 현실 등에 이르기까지 생생한 분석과 날카로운 통찰을 통해 냉전체제에 갇혀 있던 시민들의 의식을 일깨운다. 리영희는 자신의 견해가 단지 가설이라고 말하지만, 그 가설은 이제까지 대외의존적인 사유에서 주체적인 현실인식으로 전환을 열렬히 요구하고 있다. '전환의 시대'에 '의식의 전환'을 촉구하려는 데 이 책의 목적이 놓여 있다.

 

리영희는 대학에서 국제정치학을 전공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오랜 외신 기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변화하는 동아시아 질서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왔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한반도는 동아시아 지정학과 지경학의 중심을 이룬다. 해양 세력(미국, 일본)과 대륙 세력(중국, 러시아)의 교차점에 놓여 있으며, 더욱 남한과 북한으로 분단돼 있다. 리영희는 두 가지를 주문한다. 냉전적 보수주의에서 벗어난 균형적 현실주의의 시각이 그 하나라면, 외세적 관점을 넘어선 주체적 관점에서 평화와 민주주의의 새로운 국제질서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 다른 하나다.

 

 

 

 

 

 

 

리영희 연구의 현재적 의미

<전환시대 논리> 이후 리영희는 <우상과 이성>을 필두로 여러 사회평론집을 출간했다. 그는 합리적 이성의 관점에서 우상파괴자의 역활을 자임했다. 그의 시각에서 우상이란 다름 아닌 냉전분단체제와 군사독재다. 평화와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그는 미국의 패권적 동북아 정책과 일본 군국주의 부활을 주목하고, 중국의 새로운 부상과 분단시대의 현실을 분석하고자 했다.

 

이러한 리영희의 지적 활동은 진보와 보수로부터 상반된 평가를 받았다. 그 자신의 회고에서 볼 수 있듯이 진보 세력에겐 사상의 은사로 추앙받았지만 보수 세력에겐 의식화의 원흉으로 비판받았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활동했던 다른 진보 지식인들과 비교해 그는 진보 성향의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공직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권력 비판을 멈추지도 않았다. 한마디로 그는 비판적 지성의 표본이었다.

 

현재적 관점에서 볼 때 1970년대 리영희가 제시한 '가설'은 그렇다면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가. 1990년대 이후 군사대국화와 점진적 쇠퇴, 그리고 납북 평화공존의 노력과 북한의 핵무기 개발 등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냉전에서 탈쟁전으로의 변동과 탈냉전 속에서 열전의 부상이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동아시아의 현재를 이루고 있다.

 

오래된 그의 책을 다시 펼쳐보면 다소 낡았다는 느낌을 지울수는 없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세세한 가설은 틀렸을지 몰라도 주체적인 대외정책을 모색하고 평화와 민주주의를 증진시켜야 한다는 리영희의 주장은 더없이 선구적이었다.

 

1970년대에 리영희가 제시한 기본 프레임은 냉전적 패러다임에 맞서는 탈냉전적 패러다임이었다. 돌아보면 우리 현대사는 그가 예견한 방향으로 진행돼왔다. 한 지식인의 사상을 평가하는 기준으로는 세세한 나무의 관점이 아니라 전체적인 숲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최근 부상한 '동북아 시대론'이란 것도 '냉전분단체제론'을 넘어서고자 했던 리영희의 사상적 고투의 성과 위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황순원의 태도와 리영희의 태도

이제까지 우리는 유사하거나 차이가 뚜렷한 동시대 지식인 두 사람을 함께 다뤘다. 두 사람은 동시대를 살아왔슴에도 유사성과 차별성을 넘어서는 다른 지층을 걸어온 지식인들이다. 황순원은 평생 잡문을 쓰지 않고 순수문학에 몰두한 반면, 리영희는 현실 가운데서 그 현실에 의연히 맞섬으로서 여러 번 곤욕을 치렀다.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두 사람의 사상보다 지식인의 태도다. 먼저 리영희는 실천적 지식인의 전형이었다. 임헌영과 나눈 <대화>에서 그는 자신의 삶을 이끌어준 근본 이념은 '자유'와 '책임'이었다고 말했다.

 

리영희는 살아오면서 "아홉 번의 연행, 다섯 번의 기소 또는 기소 유예, 세 번의 징역"을 겪었다고 회고한다. 이러한 그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을지는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권력으로부터 계속된 탄압은 그의 건강을 해치게 했을 뿐 아니라 그의 연구를 중단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그가 남긴 저작집을 보면 그가 글 쓰기에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가를 알 수 있다. 리영희의 글은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그 주장이 선명할 분 만 아니라 문체 또한 명징하다.

 

그는 동료와 후학들이 많았더라도 연줄망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 사회에서 어쩌면 적잖이 고독했을 것이다, 그가 2003년 노무현 정부의 집권 초반 이라크 파병 반대에 적극 참여하였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는 노무현 정부의 책임윤리 논리에 맞서 심정윤리의 관점에서 파병의 부당성을 강조했다. 그의 이러한 모습이 바로 리영희 다운 진정한 지식인의 태도라고 생각된다.

 

황순원은 이와 사뭇 다르다. 작가는 오로지 작품을 통해서만 말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그는 잡문은 물론 언론의 인터뷰도 거절했고, 정부가 주는 훈장까지도 거절했다. 그가 작품 속에서 다루는 세계도 정치적 이데올로기로부터 상당히 벗어난 공간이었다. <카인의 후예>에서 황순원이 주목한 것은 북한에서 진행된 토지 개혁에 대한 평가라기보다  급격한 사회 변동에 마주한 인간 군상들의 고뇌에 있었다. 그 고뇌는 현실적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선과 악, 사랑과 증오, 망설임과 결단의 실존적 세계를 포괄하는 것이었다.

 

황순원은 해방 직후 북한에서 월남했지만 1949년 '보도연맹'에 가입해야만 했다. 그의 삶과 작품들을 돌아볼 때 학창시절부터 이념에 가깝지 않았던 황순원에게 이러한 불편한 현실은 그의 탈이념적 성향을 강화시켰을 것이다. 분단과 전쟁, 다시 분단체제의 강화로 이어진 엄정한 현실 아래서 그는 자기검열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성향은 그로 하여금 순수문학에 더욱 기울어지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황순원은 자유를 가장 소중히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어떤 유파에도 속하지 않았다. 일본 유학시절 '삼사문학' 동인으로 참여한 적이 있지만, 그는 어제나 혼자였다. 자유를 얻기 위해 월남했으며, 이후 그 어떤 세력에도 가담하지 않았다. 그가 도달한 유랑민 근성은 바로 이 점에서 황순원의 삶을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유랑민의 본질에는 그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에 대한 갈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자유를 중시했다고 해서 황순원이 이를 일방적으로 강조한 것은 아니다. 자유를 얻는 대신 작가로서의 책임을 그는 묵묵히 수행했다. 판을 달리할 때마다 작품들은 수정했으며, 전집을 출간할 때는 젊은 시절 쓴 시들을 과감하게 빼버리기도 했다. 작가로서 자신에 대해 황순원은 한없이 엄격했다. 자기 속에서 최상의 독자를 키우는 것이 작가가 해야 할 의무의 하나"라고 그는 <말과 삶과 자유>에 적고 있다.

 

황순원과 리영희 의 이러한 삶은 지식인의 태도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맑스 베버가 강조한 것처럼 '현대 사회는 유일신 시대가 아니라 다신의 시대다, 옛날의 많은 신들이 무덤 속에서 다시 걸어 나와 우리 삶을 지배하고자 하며 또다시 서로의 영원한 투쟁을 시작하는' 시대다.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 민족주의와 세계주의, 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 등 다양한 이념과 시대정신들의 경쟁이 현재의 사상적 풍경을 구성한다. 

 

이러한 다신론 시대에는 어떤 시대정신을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 못지 않게 시대정신에 어떻게 접근해갈 것인가의 문제도 중요하다. 굳이 구별하면 황순원의 시대정신은 인간주의와 자유주의에 가깝고, 리영희의 시대정신은 민족주의와 진보주의에 기울어져 있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는 시대정신 못지않게 인간과 현실, 그리고 시대정신에 대한 태도 또한 중요했다. 자유를 중시하되 황순원은 '개인적 책임'을, 리영희는 '사회적 책임'을 최선을 다해 실천했다.

 

보는 시각에 따라서 이러한 개인적.사회적 책임은 소극적.적극적 책임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한 걸음 물러서서 볼 때, 지식인이 개인적 책임과 사회적 책임 가운데 어떤 것에 더 주력할 것인가는 그 자신의 자발적 선택에 맡겨둬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의 지식인들이 갖는 문제는 지식인임을 자처하는 이들이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그 책임을 오히려 방기하는 데 있지 않는가. 이런 점에서 황순원과 리영희의 삶과 책들은 우리 후학들에게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던져주고 있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