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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84 : 조선의 역사 426 (절망을 넘어서 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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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84 : 조선의 역사 426 (절망을 넘어서 1)

두바퀴인생 2013. 3. 10. 03:34

 

 

 

한국의 역사 884 : 조선의 역사 426 (절망을 넘어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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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 주역들, 왼쪽에서 3 번째가 김구 선생

 

 

 

 

 

절망을 넘어서 1

 

 

1. 자결자들

 

 

"황현, "나라 망하는 날 죽는 선비 하나 없어서야......"

 

 

세상은 불공평해 보였다. 숲이 우거지면 그늘도 깊듯이 악한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바로 이런 경우일 것이다. 그러나 때로 역사는 의(義)의 피가 땅에 떨어져 스며들어야 새로운 싹이 난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임시한국파견대사령부에서 일본 정규군을 동원해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이른바 '남한 대토벌'을 자행하던 1909년 가을, 전라도 구례의 매천 황현은 창강 김택영의 귀국 소식을 듣고 서울로 향했다. 개성 출신의 김택영이 성균관 진사가 된 것은 나이 42세 때인 1891년 고종 28년 쯤이었다. 한미했던 그의 부친은 가묘에 이 사실을 고하면서 크게 소리 내 울 정도로 기뻐했다는 일화가 있다. 김택영은 1895년 고종 32년 이듬해 중추원 참서관 겸 내각 참서관이 된다.

 

그의 벼슬길은 순탄한 듯 보였으나 고종 42년 1905년 10월 11일자 승정원일기에 "전 참서관 김택영을 학부위원에서 해임했다"고 전하는대로 을사늑약이 그의 인생을 다른 길로 이끌었다. 김택영은 중국으로 망명해 상해 북방 남통의 한묵림서국에서 교정 일을 보았다. 한묵림서국은 김택영이 김윤식의 소개로 만났던 중국인 장건이 경영하는 출판사였다.

 

 

                                           

                                                                                    황현

 

 

김택영은 1914년 장건에 대해 <정계자 시록서>를 쓰면서 자신을 "같은 현의 신민 한산 김택영"이라고 썼다. '한국 출신'을 의미하는 한산이 자호였다. 김택영은 1927년 끝내 남통에서 사망하는데, 현지에서는 '한국 굴원'으로 불리기도 했다. 남통시 낭산에 '한국 시인 창강지묘'라는 비석이 있다고 전한다.

 

김택영과 황현은 모두 영재 이건창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엇다. 이건창은 철종.고종 때 판서를 역임하다가 1866년 고종 3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를 점령하자 음독 자결한 이시원.지원 형제의 손자이자, 조선 양명학을 뜻하는 강화학파의 적자였다. 이건창은 시대에 뒤떨어지지도 않았지만 부화뇌동하지도 않았다. 그의 눈에는 동학도 문제지만 개화파도 문제였다.

 

이건창은 1876년 고종 13년 충청우도 암행어사 시절 목도한 농사의 참상을 <농가의 추석>이란 시를 남겼다. 이 시는 "서울 부호 집은 항상 좋은 시절이지만, 가난한 농촌 사람에겐 추석만이 좋은 때라네"로 시작된다. 남편은 굶주림을 참으며 작은 논에 모내기를 하고 여름을 넘기지 못하고 굶어 죽었다. 시는 남편이 심은 벼를 수확하는 추석날, "유복자를 안고 죽은 남편을 향해 오열하다가, 기절한 지 오래지 않아, 돌연히 아전들이 사립문을 부수며, 세금 내놓으라고 소리 지른다"는 구절로 끝난다.

 

한성부소윤 시절에는 사실상 상왕 노릇을 하던 청나라 이홍장의 부하 청국 공사 당소의에게 맞서 가옥.토지 매매를 금지시킬 정도로 백성을 아꼈다. 이건창에게는 시세가 아니라 중심이 중요했다. 그는 일본군이 서울을 장악하고 동학농민혁명을 무력 진압한 1894년 고종 31년 서울을 떠나 강화도 사가리로 낙향했다. 제1차 김홍집 내각에서 공조참판을 제수했으나 거부했고, 1898년 만 46세로 숨을 거둔다.

 

김택영이 다시 출국했다는 소식을 들은 황현은 서울에 사는 이건창의 종재 난곡 이건승을 만났다. 다음은 이건승이 을사늑약을 체결 후 황현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황운경(황현)께서는 아직도 인간 세상이 머물고 있습니까? 이보경(이건승)은 어리석고 미련해서 구차하게 살아 있을 뿐입니다. 나라는 망했는데 아직 살아 있으니 마땅히 죽어야 하는데 살아 있는 것은 다 정상적인 도리가 아닙니다"

 

"나라는 망했는데 아직 살아 있으니"가 그들의 마음이었다. 황현, 이건방, 이건승은 강화도 양도면 건평리 이건창의 묘소를 찿았다. 이건창의 무덤에 술을 붓고 절을 올린 다음 황현은 죽은 친구에게 오언율시를 준다.

 

"외롭게 누웠다고 슬퍼하지 말 것을, 그대는 살아서도 혼자가 아니었던가"잘못된 세태와는 어떠한 타협도 거부했기에 이건창은 살아서도 혼자였다. 이건승은 황현에게 보낸 편지에서 "선형(이건창)께서 살아계셨으면 의를 어느 곳에 두었을지 알 수 없지만 하늘이 준 수명대로 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라고도 말했었다. 그랬다. 성현의 말씀을 가슴에 새긴 선비들은 하늘이 준 수명대로 살기 힘들었던 시대였다. 성묘를 마친 황현, 이건방, 이건승은 서울로 올라와 남산에 올랐다. 저 멀리 보이는, 이미 남의 것이 되어버린, 껍데기만 남은 궁궐을 보며 분루를 흘린 황현은 다시 고향 구례로 내려갔다.

 

이듬해가 되자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 일파와 일진회가 누가 망국에 더 큰 공을 세우는지 서로 경쟁을 했다. 김택영이 중국에서 쓴 황현의 소전인 <성균생원 황현전>에는 "국망 소식을 듣고 황현은 비통하여 음식을 먹지 못하다가 하룻밤에 절명시를 넉 장 지었다"고 전한다.

 

"날리 속에 지내다 머리가 세었네

몇 번이나 버리려던 목숨이었나

오늘은 진실로 어찌할 수 없어

바람 앞의 촟불만 하늘을 비추네

......

세 짐승도 슬피 울고 바다 산도 찡거리네

무궁화 세상이 이미 가라앉아버렸구나

가을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천고를 회고하니

인간 세상 식자 노릇 어렵구나"

 

난세에 두 가지 처신은 '인간 세상 식자 노릇'이 어려운 사대부와 '인간 세상 식자 노릇'을 기회로 삼는 사대부로 나눈다. 주역의 대가이자 명필이었던 이완용에게는 식자 노릇이 어렵지 않았다.

 

                                        

                               

                                   황현의 시문집인 매천집, 1911년 친구 김택영이 상해에서 출판사에 근무할 당시 발간했다.

 

 

황현은 독약을 마시고 나서 제자들을 불렀다. 독이 퍼지는 가운데 "내기 죽어야 할 의무는 없지만, 나라가 선비를 기른 지 500년에, 나라가 망하는 날, 한 사람도 죽는 사람이 없어서야 어지 슬프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랬다. 국록 한 톨 먹지 않은 황현이 나라가 망했다고 목숨을 버려야 할 의무는 없었다. 인조반정 이래 300년 가까이 집권당이었던 노론이 당수 이완용이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에게 비서 이인직을 보내 망국 조건을 흥정하는 나라, 자신이 모셨던 황제의 지위를 국왕이 아니라 대공으로 해달라고 흥정하던 나라에서 국록 한 톨 먹지 않은 황현에게 죽어야 할 의리는 없었다.

 

그러나 황현은 "내가 위로는 황천이 준 떳떳한 도리도 저버리지 않고 아래로 평일 읽었던 책도 저버리지 않고서 고요히 죽으면 진실로 통쾌하리니, 너희는 크게 슬퍼하지 마라"고 덧붙였다. "나라에서 선비를 기른 지 500년"이기에 선비는 망국 앞에서 목숨을 끓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달려온 아우 황원에게 황현은 웃으면서 "죽기가 이리쉽지 않은가, 독약을 마실 때 입에서 세 번이나 떼었으니 내가 이토록 어리석은가"라고 토로했다.

 

황현은 세 번이나 약사발을 뗄 정도로 생에 대한 애착도 있었다. '국록 한 톨 먹지 않은 내가 왜 죽어야 하는가?' 하지만 망국에 사대부로서 무한책임을 지는 것이 성현의 글을 읽은 선비의 당연한 처신이었다.

 

1910년 8월, 그렇게 황현은 세상을 떠났다. 약간 사시이기에 그릇된 세상을 똑바로 볼 수 있었던 그는 <매천야록>을 남겼다. 해방 한 해 전인 1944년 2월에는 절망이 비치자 황현의 동생 황원이 구례 월곡마을 뒤 월곡 저수지에 몸을 던졌다. 황현뿐만 아니았다. <한국 독립운동사 자료>제4권 <순국의사>조에는 순국의사 29인의 명단이 실려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많았다.

 

금산 군구 홍범식, 주러 공사 이범진, 승지 이만도, 진사 황현, 환관 반학영, 승지 이재윤, 송종규, 참판 송도순, 판서 김석진, 정언 정재건, 감역 김지수, 의관 소익면, 영양 유생 김도현, 태인 유생 김천술, ..... 연산 이학순.......

 

소설 <임꺽정>의 저자 벽초 홍명희의 부친 홍범식은 후손들에게 "잃어버린 나라를 기어이 찿아야 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사기> '채택열전'은 "이래서 군자는 난리에 의로서 죽는 것을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여긴다"고 적고 있다. 이런 의로운 죽음에서부터 새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