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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83 : 조선의 역사 425 (일제의 조선 병탄 과정 7)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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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83 : 조선의 역사 425 (일제의 조선 병탄 과정 7)

두바퀴인생 2013. 3. 9. 01:56

 

 

한국의 역사 883 : 조선의 역사 425 (일제의 조선 병탄 과정 7)     

 

                  

                                                                          한일합방의 주역들

                

  

 

일제의 조선 병탄 과정 7

 

 

7. 환호하는 수직자들

 

 

"'500년 조선'을 파는 매국 협상, 30분 만에 상황 종료"

 

 

숲이 우거지면 그늘도 깊다. 조선은 일본의 군사 강점과 고종의 무능, 인조반정 이래 집권당이었던 노론의 매국이 결합해 망하고 말았다. 그렇기에 그 폐허 속에서 제국의 복벽(망한 왕조를 다시 세움)이 아니라 민주공화제의 싹이 트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절망 속에서 대한민국이 탄생을 위해 꿈틀대고 있었다.

 

총리 이완용의 비서인 이인직이 한밤중에 몰래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를 찿아가 매국 조건에 대해 협상하고 간 사나흘 후 이인직은 밤중에 다시 그를 찿아갔다. 이완용은 이인직을 통해 "'병합 조건이 이외로 관대하다면서 이런 방침이라면 병합 실행은 그렇게까지 곤란하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단 너무 오래 끌면 여러 장애가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가급적 빨리 실행하는 것이 좋다"는 말을 전하도록 하였다. 자칫 일진회에 매국의 공을 빼앗길까 조바심이 난 것이다. 이완용이 서두르자 고마쓰는 "데라우치 통감은 이토와 달리 복잡하게 얽힌 교섭 등은 아주 싫어한다"면서 "요구 같은 말을 꺼내거나 하면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감정을 해쳐 장래에 불리한 영향을 끼칠지 모른다"고 말했다. 어떤 요구도 하지 말고 주는 떡이나 받아 먹으라는 뜻이었다.

 

고마쓰가 1934년 <경성일보>에 쓴 '데라우치 백작의 외교 수완'의 핵심은 이완용 내각과 일진회를 상호 경쟁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간 일본은 1909년 10월 안중근 의사의 이토 저격이 합방을 앞당기는 계기가 된 것처럼 설명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이토는 이미 그해 4월, 총리대신 가스라, 외무대신 고무라와 3자 회담에서 한국 병합에 찬성했고, 일본 각의는 7월 6일 '한국 병합에 관한 건'을 통과 시켰다.

 

한국을 병합하려면 먼저 격렬하게 저항하는 의병을 진압해야 했기에 8월 14일 임시한국파견대사령부는 이른바 '남한 대토벌 실시계획'을 세웠다. 의병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충청도와 영남까지 일체의 의병을 뿌리 뽑겠다는 군사계획이었다. 계획의 제12조는 "토벌대는 전 지구내를 빠짐없이 수색하여 전후종횡으로 행동하고 특히 산지와 촌락은 엄밀히 수색을 실행한다"고 규정했다. 제14조는 "거주 남자를 대조.조사하고 각 가옥을 임검한다"고 규정해 전체 주민을 작전 대상으로 삼았다. 같은 사령부에서 9월에 보고한 '남한 폭도 대토벌 실시 보고'는 영남과 호서(충청)에도 의병이 자주 출몰하지만 특히 호남은 "다른 도에 비해 적세가 창궐하고 수괴가 각지에 할거하여 그 세력이 강대하다. 대병력으로 일거에 이를 탕진하는 방책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고 보고했다.

 

임시한국파견대사령부 일본측 보고 문서에 의하면 남한 대토벌을 임진왜란의 연장으로 생각하는 사고가 엿보인다. 일본군의 통계는 1906년부터 1911년까지 의병 사상자 숫자가 2만 1,485명이라고 전하지만, 실상은 민간인 사상자가 누락된 숫자다. 일제는 이 토벌 작전으로 전국을 군사적으로 강점한 후 매국 친일파들을 이용하여 병합하는 수순을 밟은 것이다. 고마쓰로부터 보고를 받은 통감 데라우치는 이완용에게 통역관을 보내 통감 저택으로 방문해 달라고 요청했다.

 

 

                                                       

                                                                                    데라우치 조선 총독

 

고마스는 "통감 저택 내의 한 방에서 데라우치 통감은 이.조 두 대신을 만나, 일.한 병합의 피할 수 없는 사정과 장래의 처분안에 대해서 간단하게 말하고, 그 대요를 필기한 각서를 전달했다"고 전한다. 합방 후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장하는 각서를 받은 두 사람은 30분 만에 통감 저택을 나왔다. 혹시 병합 담판이 아닐까 주목하던 내외 신문.통신들도 30분 만에 '500년 종사'를 파는 매국 협상이 도저히 이뤄질 수 없다고 보고 단순한 위로 방문으로 여겼다.

 

고마쓰가 전하는 유일한 이견은 이완용 등이 "한국 황제의 칭호를 대공(국왕과 공작 사이)으로 하는 게 어떠냐는 문의를 해와, 일본 측이 오히려 구래의 칭호인 국왕으로 하는 것이 낫겠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이는 효종 국상 때 국왕이 아니라 사대부가의 예법을 적용해 1년 복설을 주장한 것처럼 조선 국왕을 임금이 아니라 자신들과 같은 사대부 계급으로 여겨왔던 인조반정 이후의 노론 당론이 다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두 대신이 데라우치를 만난 지 6일 만인 8월 22일, 이른바 '한일합방조약'이 조인되었다. 군사 강점 상태에서 매국 친일파들과 맺은 조약이므로 굳이 황제의 재가가 없다는 사실을 거론할 필요도 없는 '불법 조약'이었다.

 

총독부 관보 등에 따르면 두 달이 채 못 된 1910년 10월 12일 조선총독부는 매국 친일파 76명에게 공.후.백.자.남작의 작위를 수여하고 은사금을 지급했다. 이완용과 데라우치 사이의 각서를 토대로 만든 이른바 '한일합방조약문' 제5조에 "일본국 황제 폐하는 훈공이 있는 한국인으로서 특히 표창에 적당하다고 인정된 자에게 영작과 은급을 부여한다"고 명기한 데서 따른 포상이었다.

 

76명의 수작자들을 분석해보면두 가지 흐름이 발견된다. 하나는 왕실 인사들이다. 가장 고위직인 후작은 이완용을 제외하면 이재완.이재각.이해창.이해승 등 모두 왕실 인사였다. 윤택영은 순종비 윤씨의 친정아버지였고 박영효는 철종의 사위였다. 또 하나는 사실상 '노론 당인 명단' 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집권 노론 일색이라는 것이다. 76명 중 소속 당파를 알 수 있는 64명의 당적을 분석하면 남인은 없고, 북인 2명, 소론 6명, 나머지 56명은 모두 노론이다. 후작에서 자작까지 31명의 명단과 소속 당파는 아래와 같다.

 

후작 : 이재완(대원군 조카), 이재각.이해창.이해승 이상 왕족, 윤택영(본관 해평, 순종 장인, 노론), 박영효(본관 반남, 철종 사위, 노론), 이완용(李完用, 본관 우봉, 노론)

 

백작 : 이지용(본관 전주, 노론), 민영린(본관 여흥, 순종비 민씨 오빠, 노론), 송병준(본관 은진, 자칭 노론), 고희경(본관 제주, 중인)

 

자작 : 이완용(李完鎔, 본관 전주, 노론), 이기용(본관 전주, 노론), 박제순(본관 반남, 노론), 조중응(본관 양주, 소론), 민병석(본관 기흥, 노론), 권중현(본관 안동, 한미한 가문 출신), 이하영(본관 경주, 한미한 가문 출신), 이근택(본관 전주, 노론), 이용식(본관 한산, 노론, 훗날 3.1운동 가담 작위 박탈), 김윤식(본관 청풍, 노론, 훗날 3.1운동 가담 작위 박탈), 임선준(풍산, 노론), 이재곤(전주, 노론), 윤덕영(해평, 노론, 순종 처숙부), 조민희(양주, 노론), 이병무(전주, 무과 출신), 이근명(전의, 노론), 민영규(여흥, 노론), 민영소(여흥, 노론), 민영휘(여흥, 노론), 김성근(안동, 노론)

                          

                                               -조선귀족열전(명치 43년 1910년), 조선신사대동보(대정2년,1913년), 조선귀족약력(1929년경)등 참조 작성-

 

 

자작 이상은 소론 조중응 외엔 노론 일색이다. 송상도가 <기려수필>에서 일부는 조선총독부의 강박과 위협에도 불구하고 수작을 거부했다고 전하고 있는 것처럼 작위를 거부한 조정구, 민영달, 한규설 같은 노론 인사들도 있었는데 모두 남작이었다. 조선은 일제의 군사 점령과 고종의 무능에다 집권 노론의 매국 당론이 더해 멸망당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집권당이 나라를 팔아먹는 데 앞장선, 세계사적으로도 희귀한 사례이다.

 

그러나 역사는 음지에서도 꽃을 피운다. 음지일수록 그 꽃은 더욱 찬연하다. 이런 폐허 속에서 새로운 나라에 대한 희망이 싹 움트고 있었는데, 바로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제의 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