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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80 : 조선의 역사 422 (일제의 조선 병탄 과정 4) 본문
한국의 역사 880 : 조선의 역사 422 (일제의 조선 병탄 과정 4)
한일합방의 주역들
일제의 조선 병탄 과정 4
4. 안중근, 일본 근대의 심장을 쏘다
"총독이 지배하는 한인 내각, 이토는 불가능을 꿈꿨다"
안중근의 이토 저격은 상반된 길을 걷던 두 나라의 근대사가 러시아령인 하얼빈에서 충돌한 것이었다. 근대화 성공의 여세로 이웃 국가를 강점하려던 가해자 일본에 던진 피해자 조선의 저항이었다. 의병으로 변신한 교육자 안중근이 제국주의로 변한 근대 일본에 동양 평화란 길을 제시한 역사적인 대사건이었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이토가 탑승한 특별열차가 하얼빈 역으로 들어왔다. 러시아 재무장관 코코프체프가 의장대 사열을 요청하자 이토는 예복을 준비하지 못햇다며 사양하다가 거듭 요청하자 받아들엿다. 하얼빈 역사의 한 찻집에서 이토를 기다리던 안중근은 여순 감옥에서 쓴 자서전 <안응칠역사>에서 이대를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찻집에서 차를 두서너 잔 마시며 기다렸다...... 동정을 살피다가 스스로 '어느 순간에 저격하는 것이 좋을까'라고 십분 생각하였으나 결정하지 못했다. 그 무렵 이토가 하차하자 각 군대가 경례하고 군악 연주 소리가 하늘을 울리고 귀를 대렸다. 그때 분한 기운이 터져 일어나고 3,000길 업화가 머릿속에서 치솟았다.
'무슨 까닭으로 세상일은 이렇게 공평하지 못한가. 슬프다. 이웃 나라를 강탈하고 인명을 잔인하게 해치는 자는 이처럼 기뻐 날뛰면서 아무런 꺼림도 없는데, 죄 없고 어질고 착한 인종은 거꾸로 이런 곤경에 빠져야 하는가?'
다시 더 말할 것 없이 곧 큰 걸음으로 용감하게 걸어 나가서 군대가 늘어서 있는 뒤까지 갔다. 러시아 일반 관리들이 호위하고 돌아오는 맨 앞에 누런 얼굴에 흰 수염을 한 노인이 이렇게 염치도 없이 감히 천지 사이를 돌아다니는가.......하고 단총을 뽑아 그 오른쪽을 향해 4발을 쏘았다."
-안응칠역사-
파란만장했던 이토의 예순 여덟 인생은 러시아령 하얼빈에서 서른 살의 대한민국 안중근에게 이렇게 끝났다.
상대적으로 온건파였던 이토를 저격한 것이 한국에 손해였다는 견해도 있었다. 이토를 수행하던 일본 귀족원 의원 무로다 요시아야가 "범인은 한인이며 곧 체포했다고 고했더니 이토가 이를 이해하고 '바보 같은 눔'이라고 말했다"는 목격담이 이런 견해를 그럴듯하게 포장했다.
이토의 사위 스에마쓰 노리즈미는 강점 후의 식민지 통치 구조에 대한 이토의 구상을 이렇게 전했다. "한국 8도에서 각 10명씩 의원을 선출해 중의원을 조직하고, 양반 중에서 50인의 원로를 호선해 상원을 조직하고, 한국 정부대신은 한국인으로 조직해 책임내각이 되게 하고, 정부는 부왕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다.
안중근의 하얼빈 역에서 이토 저격 장면
이토가 살아 있었다면 이런 구상이 실현되었을지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이 역시 명분과 실상이 달랐던 이토의 모순을 보여준다. 부왕이란 군주를 대신해 식민지와 속주를 통치하는 총독을 뜻한다. 일왕이 파견한 총독의 지배를 받는 한인 내각으로 언활한 통치는 불가능했다. 우리는 대국 중국과 국경을 맞대면서도 한 번도 중국의 식민지배를 받지 않았던 민족이었다. 고종 아래 있었던 이완용 친일 내각도 용납받지 못하는데 일본 총독 아래 있는 내각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고종.순종을 폐위시키고 한국을 강점하는 대신 입헌군주제를 설립해 의회에 입법권과 내각 조각권을 주는 정치개혁이라면 모를까, 한국을 강점하는 순간 일제가 구상한 어던 통치 조직도 한국민의 격렬한 반발을 사게 되어 있었다.
안중근은 자서전에서 이토를 저격한 15가지 이유를 기술했는데, 이 중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이토가 직접적인 책임은 있다고 보기 어렵지만 나머지는 모두 직접 책임이 있었다. 을사늑약과 고종의 강제 퇴위, 군대 해산은 모두 이토가 주도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이 일본의 지배를 받기 원한다고 선전한 것도 이토였다. 안중근 수사 기록인 <공판시말서>에 따르면 안중근은 "의병 참모중장으로서 결행한 것"이라고 말하고 "이번 거사는 나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고 '동양 평화'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의병'과 '동양 평화'가 거사의 핵심 이유였다.
안중근의 이토 저격은 의병전쟁의 연장선상이었다. 계봉우씨의 <안중근전>에 의하면 "의병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하얼빈 정거장에서 독립전쟁을 시작하여 적장 이등박문을 쏘아 죽이고 대승리를 얻었다"고 평가했다. 안중근이 자서전에서 "1907년 이토가 한국에 와서 7조약을 강제로 맺고, 광무 황제를 폐하고 군사를 해산시켰으며....나는 급급히 행장을 차려가지고 가족들괴 이별하고......러시아 영토로 들어가서......"라고 회고했듯이 고향 진남포에서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운영하던 교육자 안중근을 의병 중장으로 만든 인물은 이토 자신이었다.
여기에서 안중근 의사 일대기를 간단히 소개한다.
< 안중근 의사 일대기>
"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나라가 주권을 되�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료들에게 각각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의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큰 뜻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 여순감옥에서 사형이 집행되기전 두 동생과 홍신부에게 -
- 나라가 풍전등화 같은 백척간두에 몰렸을때,오직 나라사랑과 구국의 일념 으로 국권강탈의 원흉을 쓰러뜨린 안의사의 용기야 말로 우리민족의 살아있는 자존심이라 할 수 있다.
- 주변 열강들의 야욕과 그들의 얽히고 설킨 이해관계에 끼어 희생물이 될 수밖에 없었던 그 시대의 아픔을 좌시하지 않고 정의를 위해 용감하게 행동으로 맞섰던 그는 유독 의협심이 강하여 불의를 보고는 그냥 지나치지를 못했다.
- 유년에는 학문보다도 산야를 달리며 사냥에 열중하며 남아의 기상을 길렀고, 성년 이후에는 가산을 털어 기울어져 가는 나라의 인재양성에 뜻을 두고 학교를 세웠으며, 나라의 국권이 완전히 기울었을 때에는 국외로 벗어나 독립을 위한 투쟁과 나라사랑을 외치며 해외동포의 힘을 결집하는데 온 몸을 바쳤다.
-지구촌 사람들이 경천동지케한 거사의 계획도 많은 시간이나 자금이 소요되지 않은 어쩌면 천우신조의 필연적인 결과 였는지도 모른다.
- 안의사는 법정 최후진술에서 " 일본국 4천만 민족이 '안중근의 날'을 크게 외칠날이 머지않아 올 것이다.동양의 평화가 이렇게 깨어지니 백년 비바람 그 어느때에 그치리오!" 라고 외쳤으며
- 형장으로 가면서 " 이번 거사는 내가 할 일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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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중근 의사의 출생과 성장
1879년 기묘년 7월16일.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에서 태어났다. 성은 안씨요 이름은 '중근', 자는 '응칠'이였다. 배와 가슴에 7개의 점이 있으며 성질이 가볍고 급하여 이름을 중근(重根)이라 지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안인수씨로 진해현감을 역임하였고 6남3녀를 두었는데 태진,태현,태훈,태건,태민,태순의 6남중 셋째인 안태훈씨가 안중근의 아버지로 중년에 과거를 보아 진사로 합격하였으며 조씨에게 장가를 들어 3남1녀를 두었는데 중근,정근,공근의 3형제중 장남이 안중근이였다.
1884년 갑신년에 박영효의 천거로 70명의 해외유학생에 뽑혔으나 갑신정변으로 박영효가 일본으로 도망가고 많은 유학생들이 잡혀 살육을 당하거나 귀양을 가게 되자 안중근의 아버지는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으로 70-80여명의 가솔들을 대리고 숨어 들었다.
청계동은 전답이 많고 산천이 수려하고 계곡이 깊어 별유천지라, 안중근은 6-7세때 부터 서당공부를 시작하였고 14세때에 할아버지 안인수씨가 돌아가셨다. 중근은 사냥을 즐기고 글 공부는 소홀히 하여 주변 사람들로 부터 야단도 맞았으나 중국의 초패왕에 비유하면서 '이름석자만 쓸 줄 알면 되지 않느냐'하면서 말타기와 총쏘기를 즐겨하였다. 1894년 16세때에 아내 김씨에게 장가를 들어 두아들과 딸 하나를 두게 되었다.
당시 조선에는 동학당이 창궐하여 청계동에도 그 여파가 미쳐 안중근의 아버지는 포수들을 모으고 전 가솔들과 청계산중에 진을 치고 동학군에 항거하였다. 동학군 2만여명이 몰려오자 70여명으로는 대적이 되지 않자 겨울이라 동학군이 추위에 더 이상 전진을 못하고 진을 쳤다. 안중근 아버지는안중근을 포함하여 포수들과 가솔들 중 청장년들을 모아놓고
'내일이면 2만명의 동학군이 이곳으로 몰려오면 우리들은 전멸을 당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오늘밤에 적들이 방심한 틈을 노려 일시에 기습을 한다면 승산이 있을 것이다'고 설득하여 새벽을 노려 70여명으로 일시에 총포를 쏘며 화공작전으로 기습을 감행하자 2만여명의 동학군은 오합지졸로 변하여 뿔뿔이 흩어져 도망가자 우리는 대승을 거두게 되었다. 동학군이 버리고간 많은 총포와 탄약,쌀 천여포대 등 군수품을 비롯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동학군으로 부터 노획한 쌀 천여 포대가 나중에 확인한바, 탁지부대신 '어윤중', 선혜청 당상 '민영준'의 쌀로 동학군에게 탈취되었던 것으로 조정에서는 안중근의 아버지가 중간에서 가로챈 것으로 안중근의 아버지가 모함을 받게 되자 안중근은 한양으로 달려가서 무고함을 여러 경로를 통하여 여러번 호소하였으나 '어윤중'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며칠되지 않아 다행히 민란이 일어나서 '어윤중'이 살해되자 '어윤중'으로 부터의 모함은 종결되었으나 '민영환'은 계속적인 압력과 모함이 진행되자 '민영환'의 보복을 피해 안중근은 천주교 수도원으로 숨어 들어 수개월 동안 지내면서 그곳에서 홍신부를 만나게 되고 결국에는 천주교에 귀의하게 되었으며 그동안 많은 서적을 탐독하기도 하고 성경을 여러번 읽고는 많은 감화를 받게 되었다.
안중근은 삶을 살아감에 항상 마음속에 지니고 있던 신조가 있었는데
첯째, 친구와의 의를 중히 여기고
둘째, 술과 노래를 즐기며
세째, 총을 쏘며 사냥을 즐기고
네째, 말타기를 즐겨하는 것을 신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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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얼빈역두에 울린 7발의 총성
(아래글은 안중근 의사가 직접쓴 기록)
나는 청년시절 의협심이 강하여 중국상인의 야만적인 행동에 달려가서 담판을 짓거나 하였으며 지방의 사업적인 단체모임에서 문제가 생겨 회원들이집단으로 항거하자 대부분의 간부들이 도망갔으나 나는 단신으로 그들과 설득으로 담판을 짓는 등 어려움이 봉착하면 정면에서 직접 해결하는 해결사였다.
인재양성을 하기 위하여 진남포에 학교를 세우고 나라의 독립은 첫째,교육의 발달이요, 둘째, 사회를 확장하는 것이요,세째, 민심을 단합시키는 것이요, 네째, 실력을 향상시키는 것이 급선무로 생각하였다.
학교운영도 점점 옥죄는 일본관헌의 압력에 더 이상 운영이 어렵게 되자 동지에게 학교운영을 넘겨주고 단신 북간도로 이동하여 '블라디보스톡'등지를 돌아다니며 자금을 모으고 동지를 규합하고 조직을 짜는 등 직접적인 독립운동에 참가하게 되었다. 수백명의 동지들이 모이자 나는 동지들을 훈련시켰는데 말타기,사격 등 훈련을 시키고 조직을 확장하여 나갔다.
나는 독립군 의병장으로 '참모중장'이란 직책에 임명되었으며 정예장병 수백명을 이끌고 함경도 지역으로 숨어들어가 일본군을 기습하고 일본관헌을 습격하는 등 맹활약을 펼치다가 혹한의 산악지역에서 군수품의 부족과 이탈자가 속출하자 몇몇의 동지들과 한달반을 헤메다가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 영토인 '엔치야'에 도착하였으나 피골이 상접하여 동료들이 알아보지를 못하였다.
십수일을 휴식한 뒤에 '블라디보스톡'으로 귀대하자 남아있던 동지들이 대대적인 환영식을 준비하였으나 거절하고 짐을 꾸린 다음 '하바로프스크'-->'헤이롱장(흑룡강) 상류지역'-->수찬(水淸)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단체조직을 확대하고 동지를 규합하고 교육을 통하여 사명감을 확산시켰다. 어느지역에서는 '일진회' 잔당에게 의병장 경력이 발각되어 구금되었으나 그들을 간신히 설득하여 죽음에서 살아나온 경우도 있었다.
1909년에 나는 '엔치야'로 돌아와 동지12인과 결의를 하였는바, 같이 모여 태극기를 펼쳐놓고 왼손약지를 절단하여 피로써 혈의 맹세를 하였는데 태극기 앞면에 '대한독립'이란 글자를 쓰고 장지를 찍었다.
그해 9월경에 '블라디보스톡'으로 귀향하여 정보를 수집중에 '이토'총독이 '블라디보스톡'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그래서 가까운 시일내에 '하얼빈'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듣게 되자 나는
" 여러해 소원하던 목적을 이제야 이루게 되다니! 늙은 도둑이 내 손에서 끝나는구나!" 라고 중얼거리며 '하얼빈'으로 갈 것을 마음먹고 여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그 지역 갑부였던 '이석산'을 찿아가서 여비 백원을 요구하였으나 거절하자 권총으로 위협하여 여비를 강제로 받아내었다.
나는 '우덕순' 동지와 만나 8연발 권총을 준비하고 같이 '쓰이펜호'지방으로 이동하여 통역을 담당할 '유동하'동지를 만나 상의를 하였다. 그들과 같이 '하얼빈'에 도착하여 '김성백' 동지집에서 유숙하면서 신문 등 각종 정보를 수집하였고 정확한 '이토'의 도착 일정을 수집하기 위하여 백방으로 정보를 수집하였다. 우리는 '창춘'으로 이동하여 거사하는 방안도 고려하였다. 나는 '유동하'가 개인사정으로 집에 다녀오겠다 하여 통역을 담당할 '조도선' 동지와 합류하여 김성백 집에서 유숙하였다.
여비가 부족하여 애태우면서 우,조 동지와 같이 '지야이지스고'로 이동하여 현지 정거장을 답사하고 조도선이가 역무원에게 물었다.
"이곳에 매일 기차가 몇차례나 내왕하는가?"
"매일 세번씩 내왕하는데,오늘밤에는 특별열차가 하얼빈에서 창춘으로 가서 일본대신 '이토'를 영접해 가지고 모래 아침 여섯시 경에 여기에 이를 것이다"
나는 '모래 아침 여섯시 쯤이면 아직 날이 밝기 전이니 '이토'가 반드시 정거장에 내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또 설사 차에서 내려 시찰을 한다해도 어둠속이라 진짜인지 가짜인지 분간할 수가 없을 것이다. 더구나 내가 '이토'의 모습을 모르는데야 어찌 능히 일을 완수해 낼 수가 있을 것인가?' 라고 생각하고 다시 앞서 '창춘'을 가보고 싶어도 노자가 부족하니 어쩌면 좋은지를 고민하다가 '김성백' 동지에게 여비를 구하기 위하여 보낸'유동하' 동지에게 전보를 쳤다.
"우리는 여기 이르러 하차했다. 만일 그곳에 급한 일이 있거든 전보 쳐주기 바란다" 황혼이 다 된 뒤에 답장이 왔으나 그 말뜻이 분명치 아니하여 더욱 의아스러움이 적지 않아 그날밤 깊이 생각하고 좋은 방책을 헤아렸다.
이튼날 나는 '우덕순'과 상의하면서
"우리가 같이 이곳에 있는 것은 좋은 방책이 아니다. �째는 돈이 부족하고, 둘째는 '유동하'의 답전이 의심스럽고,셋째는 '이토'가 내일 아침 새벽에 여기를 지나갈 것인즉 일을 치르기가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내일의 기회를 잃어버리면 다시는 일을 도모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여기서 머물며 내일의 기회를 기다려 틈을 보아 행동하고 나는 오늘 '하얼빈'으로 돌아가서 내일 두곳에서 일을 치르면 충분히 편리할 것이다. 만일 그대가 일을 성공하지 못하면 내가 성공할 것이요, 만일 내가 성공하지 못하면 그대가 꼭 일을 성공시켜야 할 것이다. 만일 두곳에서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다시 비용을 마련한 다음 새로 상의하여 거사토록 하는 것이 완전한 방책일 것이다" 라고 하고 '우덕순'은 그곳 정거장에서 새벽에 도착하는 '이토'를 노리도록 조치하고 나는 '하얼빈'으로 돌아왔다.
나는 '유동하'에게 답신내용을 확인한바 제대로 이야기를 못하기에 화를 내었던바 '유동하'는 아무 말 없이 나가 버렸다. 나는 '김성백'의 집에서 유숙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 새옷을 벗고 수수한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권총을 차고 바로 정거장으로 나가니 아침 7시쯤이었다. 정거장에는 러시아 장관,군인들이 나와서 '이토'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차를 파는 집안에서 차를 두세잔 마시면서 초조하게 기다린바 9시쯤 인산인해를 이룬 가운데 '이토'가 탄 특별열차가 와사 닿았다. 나는 찻집에 않아서 그들의 동정을 엿보며 어느때 저격하는 것이 좋은까 하고 십분 생각하였으나 미쳐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던차 이윽고 '이토'가 차에서 내리는게 아닌가!
'이토'가 내려오자 군대가 경례하고 군악소리가 하늘을 울리며 귀를 때렸다. 그 순간 분한 생각이 터져 일어나고 3천길 엄화가 머리속에 치밀어 올랐다.
" 어째서 세상 일이 이같이 공평하지 못한가! 슬프도다! 이웃나라를 강제로 빼았고 사람의 목숨을 참혹하게 해치는 자는 이같이 날뛰고 조금도 꺼림이 없는 대신 죄 없이 어질고 약한 인종은 어찌하여 이처럼 곤경에 빠져야 하는가!"
다시 더 말할것 없이 나는 뚜벅뚜벅 걸어서 용기있게 나가 군대가 늘어선 뒤쪽에 이르렀다. 앞으로 보니 러시아 관리들이 호위하고 오는중에 맨앞에 누런 얼굴에 흰 수염을 가진 일개 조그만한 늙은이가 이같이 염치없이 감히 하늘과 땅사이를 횡횡하듯 걸어오고 있었다.
" 저것이 필시 늙은 도독 '이토'일 것이다!"하며 단총을 뽑아들고 그 오른쪽을 향하여 신속히 네발을 쏘았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십분 의아심이 머리속에 일어났다.내가 본시 '이토'의 모습을 모르기 때문이다. 만일 한번 잘 못 쏜다면 큰 일이 낭패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뒷쪽을 향하여 다시 3발을 잇달아 쏘았다. 또다시 생각하니 만일 죄없는 사람을 잘못 쏘아 다치게 했다면 반드시 잘된 일이 아니라 잠깐 주춤하여 생각하는 사이에 러시아 헌벙에게 붙잡혔다. 그때 나는 곧 하늘을 향하여 큰 소리로 "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대한민국 만세!"란 뜻의 러시아말)를 세번 부른 다음 정거장 헌변파견대로 잡혀 들어갔다.
1909년 음력 9월 13일(양력10월 26일) 상오 9시반쯤이었다
의사 안중근이 제시한 이등박문의 죄는 아래와 같다.
1.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2.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3. 5조와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4. 무고한 한국민을 학살한 죄
5. 정권을 찬탈한 죄
6. 철도,광산,산림,천택을 탈취한 죄
7. 제일은행권 지폐를 발행한 죄
8. 군대를 해산한 죄
9. 교육을 방해하고 신문을 금지한 죄
10.외국유학을 금지한 죄
11.교과서를 소각한 죄
12.일본의 한국보호를 명분으로 세운 죄
13.태평무사로 일본천황을 속인 죄
14.동양평화를 파괴한 죄
15.일본천황의 선제 고메이를 죽인 죄 등을 들었다.
'이토'를 저격한 안중근이 체포되자 '우덕순,조도선,유동하,정대호,김성옥 등이 같이 체포되었으며 법정에서 검찰심문,변호인 변론에 대한 안중근 의사의 질문에 대한 답변내용은 아래와 같다.
검찰의 반복된 심문에 안중근 의사는
(안중근 의사): "일본이 비록 백만명 군사를 가졌고 천만문의 대포를 갖추었다 해도 안응칠의 목숨 하나 죽이는 권세밖에 또 무슨 권세가 있을 것이냐! 사람이 태어나 한번 죽으면 그만인데 무슨 걱정이 있을 것이냐! 더 대답할 것이 없으니 마음대로 해라!"
검찰의 사형에 처하는 이유
( 검찰) : "이런 사람이 세상에 살아 남으면 많은 한국인이 그 행동을 본 뜰 것이다. 일본인들이 두려워 하고 겁이나서 편안하게 살 도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안중근 의사): "옛부터 지금까지 세계 각국의 협객과 의사가 끊이지 않았는데 그들이 모두 나를 본뜨서 그랫단 것인가! 속담에 어떤 사람이던지 열 사람의 재판관과 친해지기 보다는 단 한가지 죄 없기를 원한다더니 정영 옳은 말이다! 민일 일본인이 죄가 없다면 무엇때문에 한국인을 두려워 하고 겁낼 것인가! 그 많은 일본인 가운데 왜 '이토' 한 사람만 해를 입었던가! 오늘 또다시 한국인을 겁내는 일본인이 있다함은 그야말로 '이토'와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내가 사사로운 혐오로 '이토'에게 해를 가했다고 하는데, 내가 본시 '이토'를 알지 못하거늘 무슨 사사로운 혐오가 있을 것인가? 만일 내가 '이토'에게 사사로운 혐오가 있어서 그랬다면 검찰관은 나와 무슨 사사로운 혐오가 있어 이러는 것인가!
미즈노, 가마타 두 일본인 변호사 변론
(변호사): "피고의 범죄는 분명하고 의심할 바가 없다. 그러나 그것이 오해에서 된 일이므로 그 죄가 중대하지 아니하다. 더구나 한국 인민에게 대해서는 일본 사법권의 관할권이 없다"
(안중근 의사): " '이토'의 죄상은 천지신명과 사람이 모두 다 아는 일인데 무슨 오해란 말인가! 더구나 나는 개인으로 사람을 죽인 범인이 아니다. 나는 대한민국 의병 참모중장으로 임무를 띠고 '하얼빈'에 이르러 전쟁을 일으켜 습격한 뒤 포로가되어 이곳에 온 것이다! 여순 지방 재판소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니 만국공법과 국제공법으로 판결하는 것이 옳다"
(재판관): "모래와서 다시 선고하겠다"
(안중근 의사): "모래면 일본국 4천7백만 인격의 근수를 달아보는 날이다! 어디 경중고하를 지켜보리라!"
선고일
(재판관): "안중근은 사형에 처한다! 그리고 우덕순은 3년 징역,조도선.유동하는 각각 1년반 징역에 처한다!"
감옥에 돌아온 안중근 의사 독백
(안중근 의사): "내가 생각했던 것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옛날부터 허다한 충의로운 지사들이 죽음으로써 윗사람의 잘못을 간하고 정략을 세운것이 뒷날의 역사에 맞지 않은 것이 없다. 내가 이제 동양의 대세를 걱정하여 정성을 다하고 몸을 바쳐 방책을 세우다가 끝내 허사로 돌아가니 통탄한들 무엇하랴! 그러나 일본국 4천만 민족이 <안중근의 날>을 크게 외칠날이 머지않아 올 것이다. 동양의 평화가 이렇게 깨어지니 백년 비바람이 어느때에 그치리요! 지금의 일본 당국자가 조금이라도 양식이 있다면 이같은 정략은 결코 쓰지 않을 것이다.
지난 1895년(을미년)에 한국에 와있던 일본공사 '미우라'가 병정을 이끌고 대궐을 침범하여 한국의 '명성황후'를 시해했으나 일본 정부는 '미우라'를 아무런 처벌도 하지 않고 석방하였다...(중략)
그런데 오늘에 이르러 나의 일을 말하면 비록 개인간의 살인죄라고 할 지라도 '미우라'의 죄와 나의 죄가 어느쪽이 중하며 어느쪽이 경한가? 그야말로 머리가 깨어지고 쓸개가 찢어질 일이다! 내개 무슨 죄가 있느냐! 내가 무슨 죄를 범하였느냐! 그래 내가 큰 죄인이로다! 다른 죄가 아니라 내가 어질고 약한 한국 인민이 된 죄로다!"
안중근 의사는 고등법원에 항고를 생각하고 있었으나 고등법원장인 '히라이시'가 �아와서 안중근 의사와 면담하는 자리에서 안중근 의사는 사형판결에 대한 불복하는 이유를 대강 설명한 뒤에 동양대세의 관계와 평화정략의 의견을 말했다. 그랬더니 '히라이시'가 다 듣고 난 뒤에 감격하여 말하기를
(고등법원장 '히라이시'): "내가 그대에 대하여 비록 두터이 동정하지만 정부주권의 기관을 고칠수는 없는 것을 어찌하겠는가! 다만 그대의 진술내용을 정부에 품달 하겠다"
(안중근 의사):" 이같이 공평한 논평이 우뢰처럼 귀를 스치니 일생에 두번 듣기 어려운 일이다! 이 같은 공의 앞에서야 비록 목석이라도 감복하겠다! 만일 허가가 될 수 있다면 [동양평화론]을 저술 하고 싶으니 사형집행 날짜를 한 달 남짓 늦추어 줄 수 있겠는가?
(고등법원장 '히리이시'): "어찌 한달 뿐이겠는가! 설사 몇달이 걸리더라도 특별히 허가 하겠으니 걱정하지 말라!" 고 안중근 의사를 달랜뒤 안중근 의사는 [동양평화론] 저술하기 시작하였는데 1. 전감(前鑑) 2. 현상(現狀) 3.복선(伏線) 4.문답(問答) 등 4개의 제목중 전감에 대한 개요부분만 기술후에 본론 부분은 제목만 적어놓고 끝을 못 맺은채 사형집행을 당했다.
-집행일:1910.음력2.5(양력3.15)-
안중근 의사는 그의 자서전을 기술한 후 고등법원장 '히라이시'에게 [동양평화론]을 저술하겠다고 한 달 동안의 말미를 요청하여 좋다고 쾌락받고 그것도 몇개월이 소요되어도 좋다고 약속받아 고등법원 공소를 포기하고 이 글의 집필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은 안의사의 [동양평화론]이 완성되었다면 당시 그의 예리한 정치적 국제정세판단력과 동양평화에 대한 원대한 구상을 볼 수 있었는데 볼 수 없게 된 안타까움이다.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서문에 "일본이 러일전쟁 때 동양 평화와 대한 독립을 약속해놓고도 한국의 국구너을 배앗고 만주 장춘 이남을 점거했다"고 일본의 위약을 비판했다. 안중근은 자서전에서 "동양 평화가 이렇게 개어지니 백 년 풍운이 어느 대에 그치리오"라고 탄식했다. 일제의 식민지 퍙창 정책과 그에 대한 저항으로 점철될 아시아의 고통스러운 미래를 정확히 예견한 것이다. 그래서 안중근의 총성은 동양 평화란 높은 사상으로 제국주의라는 뒤틀린 길로 매진하던 일본 근대사에 던진 피압박민족의 외침이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안의사의 위대한 조국사랑과 희생정신을 본받아 가슴속으로 뜨거운 느낌을 담아 스스로를 깨우치고 자신의 안위를 버리고 나라의 위태로움에는 초개같이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 안의사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앞날을 살아가는데 각자가 삶의 지표로 삼아야 될 것이며 후세에도 널리 알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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爲國獻身軍人本分
나라를 위해 몸 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다.
見利思義見危授命
위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바쳐라.
人無遠慮難成大業
사람이 멀리 생각하지 못하면 큰일을 이루기 어렵다.
白日莫虛渡靑春不再來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
청춘은 다시 오지 않는다.
<안중근 의사가 혈서로 쓴 대한독립 문서>
담배 한 대를 피우게 해 달라는 흔한 얘기를 하지 않았다.
"5분만 시간을 주십시오, 책을 다 읽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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