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우면산의 겨울 18 : 우리시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8 본문

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우면산의 겨울 18 : 우리시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8

두바퀴인생 2013. 3. 3. 03:45

 

 

 

   

우면산의 겨울 18 : 우리시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8

 

 

 

 

                                                                                          새벽 강남역

 

 

'민주주의와 생명주의의 최전선'

 

 

함석헌과 장일순

 

재야사상가로서의 함석헌과 장일순

지식인과 마찬가지로 사상가 역시 지식 탐구와 생산에 주력한다. 하지만 사상가라는 말이 함의하는 바는 지식인보다 포괄적이다. 사상가는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사고와 생각을 펼치는 이들을 지칭하는데. 사고와 생각은 지식보다 넓은 의미를 가진다. 또 그런 의미에서 사상가는 전문화된 학문 분류체계 속에 가뒤두기 어려우며, 이러한 특징은 사상가로 하여금 지식의 영역은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종교의 영역까지 넘나드는 포괄성을 갖는다. 지식인이 아니라 사상가를 이야기하는 것은 여기서 다룰 두 사람의 정체성이 지식인의 범위를 넘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함석헌과 장일순이 바로 그들이다.

 

두 사람은 지식인이라기보다 사상가였다. 이들은 대학에서 나름대로 전문적인 교육을 받았지만, 대학 또는 전문적 지식사회에 속하지 않았다. 함석헌의 표현을 빌자면 이들은 '들사람(야인, 野人)'이었으며 이들의 사상은 그 들 한가운데서 씨앗이 뿌려지고 꽃을 피웠다.

 

비록 들 한가운데서 잉태된 사상이지만, 이들의 사상이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은 자못 심원하다. 함석헌이 지난 20세기 우리 사회를 이끌어온 시대정신인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장일순 역시 민주주의와 생명사상에 중요한 통찰을 제공했다. 두 사람의 시대정신은 들사람의 사상이라는 점에서 유사하면서도, 각자 걸어온 삶의 경로는 적잖이 달랐다.

 

해방 이후 우리 지식사회는 이중적 구조를 이뤄왔다. 전문적 지식인들이 주축을 형성한 제도적 지식사회가 있었다면, 대중적 지식인들이 주로 활약한 비제도적 지식사회의 역활이 중요했다. 비제도적 지식사회는 우리 시민사회의 한 축을 이룬 이른바 '재야'와 중첩되었으며, 이들은 민주화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함석헌과 장일순은 이러한 재야적 지식인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두 사람의 삶과 사상에 대한 탐구는 해방 이후 기독교의 위상과 의미를 살펴볼 수 있게 한다. 모더니티가 서구적 세계와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면, 모더니티를 향한 시대정신의 탐구에서 기독교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 중 하나다. 함석헌과 장일순은 동서양을 넘나드는 사상가였지만, 동시에 기독교인들이기도 했다. 함석헌은 이병무 등 개신교 신학자들과 가까웠으며, 장일순은 지학순 등 천주교 신부와 함께 활동했다.

 

시대정신과 연관해 함석헌과 장일순을 주목하는 것은 모더니티의 핵을 이루는 민주주의와 민족주의, 그리고 모더니티를 넘어서려는 생명사상에 대한 이들의 기여 때문이다. 함석헌은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민주주의의 대표적인 사상가이자 운동가였다. 민주화 상징이라 할 만큼 헌석헌의 사상과 실천은 거침없었고, 특히 그의 '씨알사상'은 동서양 사상이 융합된 이채로운 것이었다. 더욱이 함석헌은 민족주의를 중시하면서도 협애한 민족의식을 넘어서는 세계주의를 강조함으로써 민족주의가 가져야 할 보편성을 일찍이 부각시켰다.

 

함석헌에 비해 덜 알려져 있지만 장일순 역시 포괄적 의미에서 민주주의의 새로운 통찰을 제공했다. 그가 주목한 것은 중앙과 국가가 아니라 지역과 공동체였고, 이러한 관심은 참여민주주의에 대한 비판과 지연 및 생명에 대한 옹호에 바탕을 둔 생태적 상상력을 강조했다. 이러한 장일순의 사상은 그의 사상적 적자라 할 수 있는 시인 김지하와 영문학자 김종철의 생명 사상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동트는 새벽 하늘

 

함석헌, 씨알의 사상가

함석헌의 사상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씨알의 사상'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잘 모르겠지만 오십이 넘은 사람들은 그를 기억할 것이다. 흰 수염에 두루마기를 걸치고 권력을 준엄하게 꾸짖던 함석헌의 모습은 민주화운동의 대표적인 상징 가운데 하나였다.

 

함석헌은 1901년 평북 용천에서 태어났다. 1916년 평양고등보통학교, 1921년에는 오산학교에 편입해 졸업했다. 1924년에는 동경고등사범학교에 입학, 1928년에 졸업해 오산학교 교사가 되었다. 1934~1935년 <성서조선>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의 역사'를 연재한 그는 일제에 의해 두 번이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45년 해방 직후에 평북 자치위원회 문교부장에 추대되었으며, 소련군에 의해 다시 옥고를 치렀다.

 

함석헌은 1947년 월남하여 YMCA에서 강의를 하는 등 사회 할동을 벌이면서 1956년부타 <사상계>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1958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발표해 큰 관심을 모았고, 이로 인해 서대문 형무소에 구금되기도 했다. 1962년 미국무성 초청으로 미국을 둘러본 다음, 이어 미국과 영국의 퀘이커연구소에서 연구했다. 1963년 귀국하여 왕성하게 글을 쓰면서 한일협정 반대 등 사회운동을 주도했다.

 

1970년대는 함석헌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10년이었다. 1970년 <씨알의 소리>를 창간했고, 1974년 민주회복국민회의 시국선언, 1976년 3.1구국선언 등을 주도해 유신독재에 맞서는 재야 구심을 이뤘다. 그는 1979년 세계퀘이커회에 의해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에 추천되었으며, 1980년대에 들어와서도 민주화를 향한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1978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시대가 열리면서 1988년 <씨알의 소리>를 복간한 그는 다음해인 1989년 그는 세상을 떴다.

 

함석헌의 삶은 지난 20세기 우리 역사와 그대로 대응한다.식민지 시대에 일본식 교육을 받았지만 교사가 돼 독립운동을 벌였으며, 한국전쟁 이후에는 씨알농장을 운영하면서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다. 함석헌은 장준하와 함께 산업화 시대 재야인사의 전형이었다. 재야란 말 그대로 벌판에 있음을 뜻하는데, 여기서 벌판이란 공적 기구가 아닌 민간 조직, 곧 시민사회를 말한다.

 

우리 사회 민주화 과정에서는 이 재야의 역활이 중요했다. 정치사회의 기본 구조가 정당 간의 대립보다는 정부와 재야 간의 대립, 다시말해 정부와 시민사회 간의 대립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특히 1960년대 이후 국가가 산업화를 주도했다면, 재야는 민주화를 이끌었다. 이러한 정치구도의 역사적 기원은 조선시대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겠지만, 한국전쟁 이후 형성된 냉전분단체제로 인한 정치사회의 이념적 협소화, 독립운동으로부터 이어져온 사회운동의 활성화 등 다른 요인들 또한 이러한 구도에 중요한 역활을 미쳤다.

 

어떻게 해석하든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우리 사회 민주화운동의 구심으로 재야의 역활은 막중했다. 재야라는 말에는 권력에 맞서는 민중(씨알)의 뜻이 담겨 있었는데, 함석헌이라는 이름은 바로 이러한 도덕.민주주의.민중을 상징했다. 우리 사회의 민주화 과정에서 관찰할 수 있는 특징이 '사회운동에 의한 민주화'라면 그 사회운동의 맨 앞자리에는 언제나 함석헌이란 이름이 놓여 있었다.

 

  

                                                                    지하철 역 출입구에 뿌려진 쾌락과 환락을 유혹하는 전단지들

 

<뜻으로 본 한국 역사>, 고난의 우리 역사

전문적 학자는 아니지만 함석허은 그 누구보다도 많은 글과 책을 썼다. 도서출판 한길사는 함석헌이 쓴 그을 모아 저작집 30권을 출간했는데, 제1권 <들사람 얼>에서 제30권 <뜻으로 본 한국 역사>에 이르기까지 그는 전문적 학자보다도 왕성한 집필 활동을 벌였다.

 

<뜻으로 본 한국 역사>는 그의 대표적이다. 원본은 일제하에서 <성서조선>에 실린 '성서적 입장에서 본 한국 역사'였는데, 1961는 <뜻으로 본 한국 역사>로 이름을 바꾸고 내용을 수정했으며, 1965년 다시 개정판을 냈다. 제목에서 '성서'가 '뜻'으로 바뀐 것은 함석헌이 종교관을 바꿨기 때문이다. 함석헌은 우라무치 간조의 무교화를 따르다가 나중에는 퀘이커교도가 됐다. 기본적으로 그는 기독교인 동시에 종교다원주의자였다.

 

이 책에서 함석헌이 전달하려는 메세지는 고난의 역사로서의 한국 역사다. 함석헌에게 역사란 기본적으로 고난의 역사이며, 그의 역사철학은 고난사관이다. 상실된 나를, 나와 너를 포함한 씨알의 진정한 자아를 찿아가는 게 역사이며, 한국 역사는 바로 이러한 고난의 과정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개인에게 있어서나 민족에 있어서나 위대한 것은 고난의 선물"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 책에는 식민시대에 함석헌이 가졌던 역사 인식이 반영돼 있다. 당시 그는 조선사편수회의 식민사관에 맞서서 기독교와 민족주의에 기초해 우리 역사를 재구성하고, 고난의 역사에 대한 주체적 인식을 통해 민족적 자아를 회복하고자 했다.

 

전문적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함석헌의 역사 해석이 지나치게 주관주의적이고 과잉 규범적이라고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함석헌의 관심은 과학으로서의 역사학에 있지 않았다. 그는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의 이분법을 넘어서서 민족적 위기라는 시대 인식 아래 상실된 자기를 찿아가는 규범저 지향으로서의 역사 서술을 목표로 했다. 내가 씨알이며 세계이며, 이 씨알들이 세계평화를 추구하는 것이 우리 역사가 나아갈 방향이라는 것이다. 함석헌에게 나와 세계, 민족과 세계는 동등한 의미를 갖고 있으며, 바로 이 점이 그의 역사 및 사회인식의 중요한 출발점을 이루고 있다.

 

 

 

                                                                                           반포천 전경

 

 

씨알사상의 핵심

지난 2008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철헉자대회에서 함석헌의 사상이 재조명되었으며 그가 독창적인 철학을 제시한 점에서 그의 사상이 새롭게 평가받을 충분한 가치가 있으며, 지난 10여 년간 철학.신학.역사학 등 다양한 각도에서 그의 철학에 대한 토론이 활발하게 진행돼오기도 했다.

 

함석헌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앞서 말한 씨알사상이다. 씨알사상은 그의 스승 유영모로부터 배웠는데, 씨알이란 말은 유영모가 <대학>에 나오는 '민(民)'을 씨알로 번역한 것에서 비롯된다. 씨알의 뜻에는 민중의 영적 특성, 주체성과 평등성이 담겨 있다. 이 씨알은 '하나님의 씨'(아들)와 '평민'이라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는데, 유영모가 전자를 중시했다면, 함석헌은 후자를 중시했다.

 

함석헌의 씨알사상은 생명의 주체성.책임성.영성을 되찿고 평화로운 대동사회를 이루겠다는 생명.평화사상으로 특정지어진다. 철학사에서 나, 주체, 인간이란 누구인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현대철학을 보더라도 인간은 실존적 존재이기도 하고(실존주의), 구조적 수인()囚人이기도 하며(구조주의), 상호주관적 관계(하버마스)이기도 하다.

 

험석헌에게 인간은 씨알이다. 그리고 이 씨알은 고유성과 독창성을 지닌 존엄한 생명의 존재 그 자체다. 함석헌 사상의 특징은 바로 존재가 타자와 언제나 동격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타자란 다름 아닌 민중을 지칭하는데, 나와 타자를 연결하는 것은 민중 속에서 나를 새롭게 발견하게 하는 '참 나'. '큰 나'로의 진화를 통해서다. 사회학적으로 보면 이러한 논리는 개인의 의지를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주관주의와 구조적 강제를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객관주의를 모두 넘어서는 것이다. 인간은 자발적 의지와 구조적 강제가 상호작용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해가는 존재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함석헌의 사상은, 설령 그 논리 구성이 정교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사회적 개인과 그 개인들로 구성된 사회, 그리고 그 상호작용에 대한 독창적인 통찰을 보여준다. '참 나'로 나아가기 위해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제도로서의 인권과 민주주의였으며, '참 나'를 이루기 위한 사회적 조건을 만들기 위해 그는 민족주의와 세계주의의 생산적 공존 및 조화를 추구했던 것이다.

 

                                                                                   사당역 근방

 

장일순, 생명의 사상가

함석헌과 비교해 장일순은 그렇게 널리 알려진 사상가는 아니다. 일각에서는 오래전부터 장일순의 삶과 사상을 높이 평가해왔지만, 그가 대중적으로 주목을 받은 것은 1990년대 이후 환경운동이 본격화되면서부터였다. 그는 20세기적 사상가라기보다 21세기적 사상가여며 그의 생명사상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장일순은 1928년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다. 호는 청강, 무위당, 일속자 등을 썼다. 1944년 배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성공업전문대학에 입학했지만 1945년에는 국립서울대 설립안 반대운동에 참여하다 제적됐다. 1946년에는 서울대 미학과에 입학해 학교를 다니다가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학업을 중단하고 원주로 돌아왔다. 이후 원주를 떠나지 않은 채 대성학원을 설립하고 국회의원에 입후보하는 등 교육운동과 정치운동을 벌였다.

 

1960년 4월 혁명 직후 그는 사회대중당 후보로 국회의원에 출마했으나 낙선했으며, 1961년 5.16쿠테타 직후에는 '중립화통일론'이 빌미가 돼 3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그는 '협동조합운동'을 벌이는 동시에 지학순 주교 등과 민주화운동을 전개했다. 1977년에 생명운동으로 전환을 결심하고 그 연장선상에서 1983년 도농직거래조직인 '한살림'을 창립했다. 이후 그는 생명사상을 탐구하고 생명운동을 활발히 벌이다가 1994년 세상을 떴다.

 

장일순의 삶과 사상을 돌아볼 때 지학순과 함께 기억되는 사람은 시인 김지하다. 장일순은 김지하의 사상적 스승이다. 김지하는 1965년 장일순으로부터 첯 가르침 다음과 같이 기억한다.

 

"민중은 삶을 원하지 이론을 원하지 않는다. 이제부터 정당이나 정치 따위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종교로 우회할 수밖에 없다. 그러자면 사회변혁의 정열 이외에 영혼 내부의 깊은 자성의 태도가 필요할 것이다."

 

연보를 보면 장일순이 '종래의 방향만으로는 안 되겠다고 깨닫고' 공생의 논리에 입각한 생명운동으로의 전환을 결심한 것은 19709년대 후반이었다. 하지만 5.16쿠테타 직후 옥고를 치르고 정치활동정화법과 사회안전법 등에 묶여 모든 활동을 철저히 감시당해온 1960년대부터 이미 장일순은 영혼 내부의 깊은 자성을 모색하는 정신운동 또는 생명운동으로의 전환을 모색하고 있었다.

 

 

 

                                                                     사당역 근방

 

 

<나락한알속의 우주>, 거룩하고 평등한 생명

장일순은 저작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목사 이현주와 대담을 나눈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와 <나락 한알 속의 우주-무위당 장일순의 이야기 모음>이 장일순의 육성을 직접 들을 수 있는 책이다. 전자는 그가 직접 쓴 책이 아니라 글과 강연, 대담을 정리한 것이다. 장일순이 책을 남기지 않은 것은 글이 혹시 다른 이들에게 정치적 피해를 줄지 모른다는 배려뿐만 아니라 글보다는 삶 자체를 더 소중히 생각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전자 책에 실린 장일순의 글과 강연은 채 100쪽을 넘지 않는다. 그 대부분 또한 한살림 모임에서의 강연으로 채워져 있다. 하지만 글이 적다고 해서 그 의미가 작은 것은 아니다. '생태학적 관점에서 본 예수탄생', '거룩한 밥상', '시에 대해서'. '자애와 무위의 하나', '나락 한알 속에 우주가 있다' 등 제목들에서 볼 수 있듯이 일련의 강연이 던지는 메세지들은 결코 범상치 않다.

 

그의 사상적 적자라 할 수 있는 김지하는 장일순의 사상적 거처가 동서양을 아우른다고 지적한다. 유학, 가톨릭, 최시형의 동학사상, 간디와 비노바 바베의 사상, 그리고 노자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장일순은 이러한 사상을 언제나 창의적으로 접목하고자 했고, 그것을 생명사상으로 재탄생시켰다.

 

생명사상이란 무엇인가? 장일순의 생명사상은 모든 생명의 거룩성과 평등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생명사상의 의의는 한국 모더니티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계몽한다는 데 있다. 장일순의 생명사상은 우리 근.현대사의 정신사에서 주류가 아닌 비주류의 사상이다. 조선 후기 이후 우리 사상의 주류는 부국강병 사상이었으며, 이는 무엇보다도 효울성과 경쟁력을 강조했다. 앞서 살펴본 다수의 사상들은 바로 이러한 힘의 논리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문제는 부국강병이라는 모더니티의 논리가 가져온 그늘이다. 환경파괴는 이 그늘을 대표한다. 장일순이 비판하고자 했던 것은 환경을 포함한 사회 전체를 지배와 권력의 체제로 만들어버리려고 하는 욕망의 논리다. 이 점에서 장일순의 생명사상은 심층생태론과 사회생태론에 잇닿아 있다. 주목할 것은 그가 도달한 이러한 결론이 다양한 동서양 사상에 대한 독서를 통한 독창적인 사유의 결과라는 것이다.

 

장일순은 자신의 이러한 사상을 다양한 사례를 들어 일상용어로 생동감 있게 이야기 하고 있다.  자신의 구체적인 경험에서 나온 장일순의 이야기들은 밀폐된 공간에서 생성된 언어가 아니라 자연 속에서 영근 살아 있는 언어 그 자체다. 그는 현학적 담론으로 무장된 엘리트 지식인이 아니라 담담하면서도 어느새 가슴에 와 닿는 이야기를 건네는 이웃의 사상가였다.

 

장일순의 사상은 이론 그 자체만으로 존재한 게 아니라 협동조합운동에서 공동체운동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사회운동과 결합돼 있다. 장일순은 1980년대 이후 그가 주도한 한살림운동에 헌신했다. 한살림운동은 우리 사회에서 '선구적인 공동체운동'이다. 이 공동체운동에서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이른바 '호혜의 원리'이다. 호혜의 원리는 시장에서의 '경쟁의 원리'와 국가에서의 '권력의 원리'와 구별된다. 그것은 상호협력과 공존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대안적인 삶의 방식을 모색한다.

 

한 걸음 물러서서 볼 때 이러한 시각에 대해 그 실현가능성과 지속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국지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공동체운동은 내재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또 고도로 분화되고 복합성이 증대된 현대사회에서 호혜의 원리에 기반을 두고 전체 사회를 제조직하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에는 대안적 삶의 방식과 문화에 대한 적극적인 배려가 상대적으로 빈곤하다. 오늘날 자본주의 문명, 특히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신자우주의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관계를 파괴하고 양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법칙을 강제하기 때문이다.

 

주목할 것은 이러한 신자유주의 문명의 일차적 피해자가 다름 아닌 하층계층, 여성, 노인, 그리고 어린이를 포함한 사회적 약자라는 점이다.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하고 대안적인 가치와 문명을 모색하는 공동체운동을 단순히 방어적이며 낭만적인 운동만으로 평가는 하는 것은 이 운동이 갖는 의미를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공동체운동은 우리 삶을 황폐화하는 경쟁을 넘어서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어떻게 상생할 것인가에 대한 지속가능한 대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는 데 그 의의를 찿을 수 있다.

 

 

 

                                                            서초카페 거리 전경

 

 

시대정신의 모험

시대정신의 측면에서 함석헌과 장일순의 기여는 어떻게 볼 수 있는가. 지난 20세기 우리 사회를 이끈 세 개의 시대정신은 민족주의, 산업주의, 민주주의라고 볼 수 있다. 서구적 관점에서 보면 이 셋은 각각 근대적 국민국가, 산업혁명, 시민혁명에 대응하며, 이런 점에서 민족주의, 산업주의 , 민주주의는 모더니티의 세 얼굴이라 할 수 있다. 우리 현대사에서 민족주의가 보수와 진보가 공유한 이념이라면, 산업주의는 대체로 보수에 의해, 민주주의는 진보에 의해 추동돼왔다.

 

함석헌은 이 가운데 특히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민주주의와 민족주의를 일관되게 강조했다. 씨알사상이란 다름 아닌 민주주의의 기초로서의 평민 또는 시민의 중요성을 부각시킨 것이다.

 

함석헌은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사상가로 등장시킨 글은 1958년 <사상계>에 발표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다. 이 글에서 그는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표출한다. "나라의 주인은 고기를 바치다 바치다 길거리에 쓰러지는 민중이지 벼슬아치가 아니다. 구원은 땅에 쓰러져도 제 거름이 되고 제 종자가 되어 돋아나는 씨알에 있지 그 씨알을 긁어먹는 손발톱에 있지 않다"고 당당히 선언한다.

 

현재적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함석헌의 주장이 새롭게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 민주화 시대가 열린 이후 우리 사회에서는 민주주의 담론에 대한 다양한 토론이 진행돼왔고, 민주주의는 결코 주저할 수 없는 자명한 원리로 받아들여져왔다. 하지만 이렇게 민주주의가 당연한 원리로 수용된 것은 앞선 산업화 시대에서 이뤄진 민주주의에 대한 성찰과 사회운동에 힘입은 것이었다. 비록 정교하지는 않더라도 민주주의 주체로서의 씨알의 발견과 사상적 재구성은 민주주의의 시민적 계몽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다.

 

민족주의에 대한 성찰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의 삶이 반영돼 있는 것이지만, 함석헌은 민족주의를 중시하되 그것을 항상 세계평화의 맥락 속에 위치시키고자 했다. 여기에서 보편주의를 지향하는 그의 기독교적 세계관이 기초를 이뤘지만, 그렇다고 그의 사상이 서구 중심주의에 일방적으로 경시되지는 않았다. 21세기 현재 우리 민족주의가 나아갈 길이 민족주의와 세계주의를 화학적으로 결합시킨 '민족적 세계주의' 또는 '세계적 민족주의'라면, 함석헌의 사상은 그 선구적 통찰로 주목받아야 할 것이다.

 

요컨데 함석헌 사상이 겨냥하는 것은 한국적 모더니티의 완성이다. 씨알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사회.경제적으로 골고루 잘 살 수 있으며, 다른 민족들과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세계가 함석헌이 꿈꿔온 나라였다. 이 나라에 도달하기 위해 함석헌은 나와 타자, 기독교와 동양사상, 고난과 평화의 사이에 스스로를 세워뒀으며, 그 경계에 서서 모더니티의 완성을 향한 치열한 사상적 모험을 감행해왔다.

 

 

 

 

                                                           시대정신을 구가한 투쟁한 지식인들은 그의 사상이 이처럼 열매를 맺게 된다

 

 

함석헌과 비교해 장일순은 모더니티의 그복에 상대적으로 더 주목했던 것으로 보인다. 모더니티가 추구하는 민족자결, 경제성장, 민주주의를 마다할 이들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모더니티가 국수주의, 환경위기, 관료제의 심화로부터 완전회 자유로울 수는 없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 사회의 모더니티는 새로운 계몽을 요청한다. 그 계몽은 잘못된 계몽에 대한 계몽, 모더니티 과정에서 드러난 정치적 억압, 경제적 불평등, 문화적 소외를 극복하는, 다시 말해 자유와 평등을 극대화하고 민주주의 영역을 확대하며 상상력을 해방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장일순 사상의 의미는 여기에 있다. 모더니티의 가치를 보존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삶과 사회의 방향을 장일순은 생명사상과 공동체운동에서 찿으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방향은 무한경쟁을 강제해온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위기에 처한 현실을 돌아볼 때 새로운 대안으로서의 의미를 더해가고 있다.

 

새로운 사상적 실천적 대안을 모색하는 데는 단기적 관점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장기적 시각도 중시돼야 한다. 장일순의 사상은 장기적으로 모더니티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낭만적으로 보이는 사상이 때로는 가장 현실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장일순의 사상은 새삼 우리들을 일깨우고 있다.

 

함석헌과 장일순의 삶은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 두 사람은 모두 제도적 영역이 아니라 비제도적 영역에서 활동한 사상가들이었으며, 기독교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기독교를 넘어서 동서양의 사상적 융합을 모색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차이도 존재한다. 함석헌이 민주화운동의 구심을 이룬 반면 장일순은 지역운동에 헌신했다. 정치.사회적 민주주의의 성숙이 함석헌의 목표였다면 엘리트 민주주의를 넘어선 참여민주주의의 추가가 장일순의 목표였다.

 

아카데미의 관점에서 두 사람의 사상은 여전히 거칠고 불완전한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함석헌과 장일순은 전문적인 지식인을 자처한 이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의 관심은 현실 속에서 민중과 함께하며 그들의 목소리를 자신의 사상으로 대변하고자 한 데 있다. 두 사람의 사유가 거칠다는 것은 그만큼 순수하는 것을, 불완전하다는 것은 그만큼 창조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