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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77 : 조선의 역사 419 (일제의 조선 병탄 과정 1) 본문
한국의 역사 877 : 조선의 역사 419 (일제의 조선 병탄 과정 1)
한일합방의 주역들
조선의 역사를 마무리하기 앞서 일제가 조선을 병탄하는 과정을 알아보고자 한다. 일본의 근대화와 조선 병탄에 이르기까지 주역은 단연 이토 히로부미이다. 그의 성장 과정과 일제의 조선 침략전개 과정을 살펴보고 조선 병합에 앞장선 친일파들의 활동과 망국에 따른 항일 투사들의 이야기도 알아보기로 한다.
조선의 멸망 과정을 상세히 살펴보는 것은 이러한 역사의 오류를 두번 다시 범하지 않기 위해서다. 그래서 우리들의 후손들이 이 나라의 미래를 설계하고 이끌어 나가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기대하는 마음에서다.
일제의 조선 병탄 과정 1
1. 이토와 일본의 개화
"극렬 외세배척론자 이토, 영국 유학뒤 개화파로 변신하다"
조선과 일본은 모두 개항 과정에서 격렬한 진통을 겪었다. 일본은 많은 진통 속에서도 개화의 방향성은 잃지 않고 이토 히로부미 같은 개화파 인물들을 길러냈다. 그러나 조선은 반대로 대부분의 개화파 인재가 살해되거나 망명해야 하는 비운을 겪다가 비명에 갔다. ㅡ래서 조선은 몇 번의 기회가 있었으나 고종과 조정은 그 위기 속에서 기회를 찿지 못하고 ㅁㅇ국의 길로 가고 말았다. 그러나 이토는 일본 개화의 역동성을 상징하는 인물이었고 조선을 병탄하는 데 주도적인 역활을 하게 된다.
1870년대 초 조선에 개화파를 양성하던 박규수의 '사랑방'이 있었다면, 일본에는 요시다 쇼인의 '송하촌숙'이라는 서당이 있었다.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급진개화파 김옥균과 온건개화파 김홍집이 나왔다면, 요시다 쇼인의 송하촌숙에서는 개항 후 일본의 문치파를 대표하는 이토 히로부미와 무단파를 대표하는 야마가타 아리모토가 나왔다.
박규수의 사랑방을 일종의 개화파 정치학교로 만든 인물은 중인 역관 오경석이었다. 미국의 페리 제독의 흑선이 일본에 큰 충격을 주었던 1853년(철종 4년), 오경석도 북경에 11개월 동안 머물면서 중국의 실상을 목도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1860년(철종 11) 8월, 영불 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하고 청나라의 수많은 사서와 보물이 가득한 원명원을 불태운 충격적인 현장까지 목격한 후 능동적으로 문호를 열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반면 일본 조슈 지방의 하급 번사의 아들로 태어난 요시다는 천황을 받들고 서양 세력을 물리쳐야 한다는 '존왕양이(尊王攘夷)' 사상을 굳혔다. 존왕은 반(反)막부를 뜻했고, 양이도 개항을 결단한 막부에 대한 비판이었다.
막부에서는 요시다의 사상을 문제 삼아 조슈번에 명을 내려 요시다 쇼인을 에도로 잡아와서 사형시켜 버렸다. 이것이 '안세이 대옥'으로 미.일수호통상조약(1858)과 도쿠가와 이에모치의 쇼군 승계를 반대한 세력에 대한 탄압이었는데, 이때 14명이 사형을 당하거나 옥사했다. 요사다는 사형당하였지만 이토를 비롯한 그의 사숙 출신들이 후일 일본 근대화를 주도하게 된다. 요시다는 번과 신분질서를 근간으로 하는 일본 봉건체제를 신분에 상관없이 참가할 수 있는 통일적인 정치체제로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인물이다. 그래서 그 전에는 허수아비 천황이 이제는 실권을 잡는 존왕사상이 싹텄다.
이토 등은 스승의 가르침대로 존왕양이 운동에 나서는데, 존왕사상은 계속 유지하지만 외세를 배격하자는 양이는 버리게 된다. 스승의 사상을 절반만 계승한 것이다. 14세 때 요시다 쇼인 문하로 들어간 이토는 동문들과 막부 타도와 양이 운동에 나서면서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이토가 정치무대에 첯 모습을 나타낸 것은 극렬 양이론자로서였다. 1862년 이토는 천황가와 막부의 융합론인 '공무합체론'을 주장하는 나가이 우다의 암살을 모의하고, 영국 공사관에 불을 질렀으며, 외국인을 우대하는 식전을 연구하던 하나와 다다토미를 암살하는데 주도적인 역활로 동참했다.
그러다가 이듬해인 1863년(고종 즉위년)에는 느닷없이 영국을 배우겠다면서 영국으로 향했다. 상해를 거쳐 런던까지 가는 동안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가지고 간 영일소사전으로 선원들에게 영어를 배웠다. 그러나 영국 유학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하고 고향 조슈번에서 외국 군대가 침공해 왔다는 소식을 듣고 1864년 귀국하여 포르투칼인 행세를 하다가 막부가 천황에게 정권을 돌려주는 '대정봉환'으로 조슈와 사스마번 중심의 신정부가 수립되면서 이토는 영국 유학 덕분에 외국사무계에 배치되었다. 평민 출신의 이토가 일본 근대 정치사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첯발이 시작된 것이다.
이토 추종자 겐타로가 지은 '이토 전기'에 의하면 이토의 선조가 13세기 여몽연합군 침략 때 몽골 군함을 공격한 고노 마치아리라고 서술하고 있다. 고노의 혈통은 7대 고레이 천황의 아들인 이요 왕자로부터 시작한다. 일본인 스스로가 제15대 응신천황 이전의 천황들은 실존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점을 별개로 치더라도 이토 히로부미가 고노 미치아리와 연결되는 어떠한 중간 고리도 없다는 점에서 이는 전형적인 족보 위조에 해당된다. 부친 이토 주조는 날품 팔던 하층민으로 하급 무사 아시가루보다도 낮은 신분이었다. 부친이 지어준 이토의 첯 이름 리스케는 미천한 가문의 자식이 갖는 흔한 이름이었다. 그래서 여기에 항상 불만을 가졌던 이토는 자신의 이름을 도시케스->슌스케를 거쳐 최종적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된다. 그만큼 신분에 대한 콤플렉스가 컸음을 알 수 있다.
이토가 외국사무계에서 처리한 첯 번째 사건은 히젠 번의 양이파 병사가 외국 군인에게 상해를 입힌 '고베 사건'이었다. 이때 대장 다키 젠사부로에게 할복령이 내려졌는데, 이토는 외국인들 앞에서 할복을 감시하는 입회 역활을 맡았다. 영국 공사관에 불을 질렀던 이토가 외국의 앞잡이가 돼 양이파 장교의 할복을 감시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1871년 11월 이토는 구미로 향하는 이와쿠라 사절단의 일행으로 선발돼 두 번째로 해외로 나갔다. 일본을 개국시키겠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던 미국은 이와쿠라 사절단을 크게 환영하였고, 사절단은 1872년 1월 그랜트 미국 대통령을 예방했다. 사절단은 구미 문물시찰과 불평등조약 개정 등의 목적을 갖고 있었지만 치외법권 등의 조항이 담긴 불평등조약 개정에는 실패했디. 일본에는 아직 헌법이 없고 재판 또한 구미 각국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미국이 거부했디 때문이다.
사절단은 다시 독일로 가서 황제 빌헬름 1세와 재상 비스마르크와 회견하는 등 서구를 배우고 있던 한편 1873년 무렵의 일본 본토는 이른바 '정한론'으로 시끄러웠다. 신정부 수림 다음 해인 1868년 12월, 일본은 대마도주 소 요시아키라를 통해 차사를 조선 동래에 보내 외훈학도 안동준에게 서계와 국서를 전했다. 그런데 이 문서에 '황실', '봉칙' 등의 용어가 있다는 이유로 조선에서 접수를 거부한 것이 갈등의 시작이었다. 1870년 7월 일본 외무대승 야나기하라는 "북쪽은 만주에 연하고, 서쪽은 청과 접해 있는 조선을 우리 영역으로 만들면 황국보전의 기초로서 장차 만국경략진취의 기본이 되지만 만약 다른 나라에 선수를 빼앗기면 국사는 끝난다"면서 조선 강점을 주장했다. 이것이 바로 '정한론'의 시작이었다.
메이지 정부의 정한론 토론 모습
일본 대외 전략의 기본 이념인 '주권선'과 '이익선' 개념이 이때 벌써 등장하였다. 주권선인 국경선을 지키려면 그 바깥족에 설정한 이익선을 지켜야 한다는 전략인데, 이때 조선은 이익선이었다. 1870년 12월 외무대승인 마루야마는 "조선국은 황국을 위해 중요한 지역으로 지금 손쓰지 않으면 반드시 다른 나라가 정복할 것이고 조선이 문명개화한 뒤에는 도저히 정벌할 수 없다"라면서 조선 침공을 위한 결사대를 모집한 적도 있었다. 이처럼 일본은 역사 이래 미개한 민족이었고 항상 식량이 부족한 지역이라 조선반도를 자신들의 중요한 이익 근거지로 생각하고 집요한 문화문물을 수입하였고, 무역을 통하여 근근히 생계를 연명하거나 왜구들이 해안 지역 약탈을 자행하여 왔고 백제, 가야, 신라와 연합하여 지원군을 보내면서 한반도에 근거지를 마련하려 한 점과, 임진왜란을 일으켜 침략전쟁을 감행하는 등 지속적인 침탈을 시도하여 왔고 점령고과 지배 야욕을 갖고 있었다.
조선측 사료에는 나타나지 않는데, 1873년 일본이 조선과 아무런 협의 없이 부산 왜관을 일본공사관으로 바꾸면서 쓰시마, 본토의 도쿄 상인들까지 무역행위에 나서자 조선이 단속하겠다고 통보했다. 이때 동래부에서 왜관에 게시한 문서에 일본을 '무법지국'으로 표현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일본 내에서는 정한론이 더욱 불거졌고 사이고 다카모리, 이타가키 다이스케 등은 즉각 조선 정별을 강력하게 주장하기도 했다.
메이지 정부에 대한 사족과 농민들의 반발을 외부로 돌릴 필요가 있었던 점도 정한론의 한 배경이었다. 정한론은 이와쿠라 사절단이 귀국한 후에 결정하기로 미뤄놓았는데, 1873년 8월 사절단이 1년 10개월 만에 귀국했다. 그러나 귀국한 이와쿠라와 오쿠보는 일본이 지금 외정에 나설 때가 아니라 국력을 더 기를 때라며 조선 정벌을 반대했다. 이와쿠라 등은 10월 23일 메이지 천황의 동의를 얻어 정한론을 폐기시키고 사이고와 이타카기 등 정한론자들은 일제히 사직했다.
이때 이토도 '내치우선론'에 동조해 정한론을 반대하면서 오쿠보 등의 신임을 획득했다. 어쨌든 이토와 조선의 첯 관계는 그리 나쁘지 않게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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