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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78 : 조선의 역사 420 (일제의 조선 병탄 과정 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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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78 : 조선의 역사 420 (일제의 조선 병탄 과정 2)

두바퀴인생 2013. 3. 4. 01:50

 

 

한국의 역사 878 : 조선의 역사 420 (일제의 조선 병탄 과정 2)     

 

                  

                                                                          한일합방의 주역들

                

  

 

일제의 조선 병탄 과정 2

 

2. 평민 이토, 일본 수상이 되다

 

"조선이 군란을 겪던 임오년, 이토는 유럽에서 헌법을 배우다"

 

조선이 일본과 '한일수호조규'라는 새 조약을 체결한 1876년까지만 해도 조선 역시 많은 기회가 있었다. 일본은 평민 출신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내각 수상에 오를 정도로 일관되게 근대화의 길로 매진한 반면, 조선은 근대적인 정치.사회체제 수립에 실패한 채 극도의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하급무사인 아시가루보다 낮은 신분이었던 이토 히로부미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필적할 만한 입지적인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요인이 몇 가지 있다. 그 몇 가지 요인이 일본 근대사의 특징을 압축적으로 설명해준다. 첯째는 요시다 쇼인의 송하촌숙 출신에다 영국 유학 경험이란 교육과정이었다. 둘재는 조슈번 출신이란 점이었다.

 

요시다 쇼인의 제자였던 것이 이토 인생의 전기가 되었지만 막상 요시다 쇼인이 구마모토의 도도로키 부베에게 써준 소개장에서 이토를 "제 수하에 있는 사람 중 가장 낮은 자...... 다른 이보다 재능이 떨어지며 학문도 미흡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토는 송하촌숙 출신이라는 점이 자기 인생의 전기가 되었지만 훗날 요시다를 칭송하는 말은 거의 하지 않았다.

 

신분이 낮았던 이토로선 무사 중심의 봉건 지배질서가 유지되는 한 미래가 없었다. 이토가 요시다 쇼인의 존왕사상은 받아들였지만 양이사상을 저버리고 영국 유학 후 적극적인 개화론자로 변모한 이유다. 이토 같은 평민 출신에게는 무사 중심의 봉건체제가 무너져야 미래가 있었고 국가 제사장에 지나지 않던 천황 역시 존왕사상을 가진 이들이 정권을 장악해야 실질적으로 전국적인 지배자가 될 수 있었다.

 

메이지 정부는 존왕을 내세운 조슈번과 사쓰미번 연합 세력이 천황을 명분 삼아 전국적인 복종을 강요한 정치체제였다. 조슈번 출신인 데다 영국 유학 경험이 있는  이토는 출세가도를 달려 1875년에는 내무경의 지위까지 오른다. 이때 이토는 오쿠보 도시미치와 상의해 조선과 새 조약을 맺기로 하고 그 적임자로 구로다 기요타카를 점찍었다.

 

일본은 3년 전인 1873년 이미 '정한론'을 둘러싸고 한바탕 소동을 벌렸지만, 아직 조선을 상대로 전면적인 침략전쟁을 감행할 상황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일본 내에서도 새 조약의 체결 가능성을 그리 높게 보지 않았다. 일본도 제 코가 석 자인 상황이었다. 이토와 함께 영국 유학을 갔던 이노우에는 이토의 설득을 받고서야 구로다와 함께 조선으로 향했다.

 

1876년 고종 13년 1월 대원군의 섭정이 끝나고 물러난 다음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어 민씨 척족들이 조정을 장악하고 부패의 늪에서 즐기며 고요에 잠든채 국제정세는 까막눈인 상태로 있을 때 일제의 운요호가 강화도에 도착하여 개항을 요구하였다. 격렬한 반발에 부딪힐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고종은 개방에 적극적이었다. 이때 구로다는 조선 대표 신헌에게 "재작년에 정한론이 일어 수만 명이 출병하려 했다"고 위협하면서 미리 준비해간 13개 조의 조약안을 내놓았다. 이때 고종이나 핵심 관료 누구도 이 신조약의 의미를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대응하는 바람에 조선의 역사는 벼랑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이때 조선이 일제의 속셈을 알고 제대로만 대응했더라면 이후 역사는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종은 흥선대원군이 10여 년 가까운 기간동안의 섭정을 그만두고 물러나자 그동안 추진해왔던 대원군의 모든 개혁정책을 뒤집는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이 13개 조의 조약문에 대한 세밀한 검토 없이 무관출신인 신헌에게 전권을 위임하였다. 신헌은 전권을 사양하면서 고종에게 세부 지침을 요구하였으나 고종은 "나는 경을 장성(長城)처럼 믿고 있다"며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그래서 신조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숙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1876년 2월 12개 조관으로 이루어진 '한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가 체결되었다. 대부분 일본이 작성한 원안 그대로였다. 이것이 바로 당시 권력 투쟁으로 근대화를 추진하려던 개혁파를 모두 몰아내고 인일에 빠져있던 조선 조정과 고종의 무능과 까막눈 외교 수준이었다.

 

"조선국은 자주국으로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는 1관은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을 부인하려는 일본의 속셈에 지나지 않았다. "백성들이 각자 임의로 무역할 때 양국 관리들은 간섭.제한.금지할 수 없다"는 9관은 자주관세권을 포기한 것이고, 개항장에서 일본인들의 치외법권을 인정한 것도 불평등조약이었다. 500여 년간 왜관을 통해 시종 우월적인 위치에서 일본과 통상했던 조선이 이때 굳이 불평등조약을 새로 맺을 이유는 없었다. 미국의 공격을 물리친 신미양요가 발생한 지 불과 5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개방이란 방향은 옳았지만 그 방식은 첯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것이었다.

 

조선과 조약 체결 후 일본은 페리의 흑선에 의해 강제 개항된 지 20년 만에 거둔 뜻밖의 성과에 고무되어 구로다에게 2,000엔, 이노우에에게 1,500엔의 상금을 주었다. 조선은 개국 초부터 전국적인 호적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일본은 1872년에야 전국 규모의 호적을 작성할 수 있었다. 이때 황족 (28명).화족(2,900명).사족(무사, 154만 명). 평민(3,100만 명)으로 나누어지는데, 지배층의 신분적 특권은 어느 정도 잔존시켰지만 사농공상의 구분이 없어지고 직업 선택과 신분 간 혼인이 허용되면서 지배층은 크게 반발하였다. 한일수호조규를 체결한 1876년 칼 착용을 금지하는 '폐도령'이 내려지자 '케이신토의 난', '하기의 난', '아키즈키의 난' 등이 잇따랐다. 다음해에는 정한론을 주장하던 메이지 정부의 참의 출신 사이고 다카모리가 '서남전쟁(세이난 전쟁)'을 일으켜 서해도 전체가 전란에 휩싸였다. 오쿠보 도시미치 계열의 야마카타 아리모토가 이끄는 정부군 6만 명과 사이고군 4만 명이 맞붙은 커다란 내전이었다. 그해 9월 시로야마에서 사이고가 전사하면서 내전은 종식되었지만 사이고군 6,200여 명, 메이지 정부군4,600여 명이 각각 전사했다.

 

 

                            

                                                                                        메이지 천황

 

암살 기도 사건도 잇따랐다. 서남전쟁 때 정부군을 지휘했던 오쿠보는 1878년 5월 시마다 이치로 등 6명의 자객에게 암살당했다. 그들은 참간장 즉 간신 명단을 작성해 메이지 정부 실세들을 성토했는데, 이토와 구로다도 간신으로 규정지었다. 6명의 무사는 처형되었지만 사이고를 비롯한 6명이 영웅으로 추대되는 분위기가 강했다. 그해 8월에는 이와모투 도라키, 이듬해 5월에는 고바야시 마키타 등이 이토 암살을 시도하는 등 암살 시도가 끓이지 않았다.

 

이러한 내우외환 속에서도 메이지 정부는 근대국가 수립이라는 방향만은 잃지 않았다. 그 요체는 헌법 제정과 의회 설립이었는데, 의회를 설립하려면 선거를 실시해야 했다. 국민 참정권이란 개념조차 미미했던 시절이었지만 1876년 9월 메이지 천황은 원로원에 헌법 초안 작성을 명령하였고, 1890년에는 의회를 개설한다는 방침이 정해졌다. 그러자 민권사상이 확산되면서 정한론자였던 이타가키가 사농공상 평등을 주창하는 자유민권론자로 부각돼 큰 인기를 끌게 된다.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난 1882년 고종 19년, 이토는 훗날 총리가 되는 사이온지 긴모치 등을 대동하고 다시 유럽으로 가서 헌법을 연구했다. 이토가 독일 황제 빌헬름 1세를 예방하고 "프러시아 헌법이 일본에 모범이 될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일본은 의회 권한이 강한 영국식보다 황제 권한이 강한 독일식 헌법을 모델로 삼았다. 독일의 비스마르크는 독일 헙법학계의 권위자인 베를린대학의 루돌프 폰 그나이스트 교수를 이토에게 소개해 주었고 이토는 그에게 헌법을 배웠다. 또 오스트리아 빈대학의 로렌츠 폰 슈타인 교수에게도 헌법에 대해서 배우게 된다.

 

1883년 8월 귀국한 이토는 헌법 제정에 박차를 가하던 1884년 12월, 조선에서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주한 공사 다케조에 신치로의 예상과 달리 원세개가 이끄는 청군이 진압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일본 측에선 이소바야시 신조 등 30여 명이 전사했다. 이에 이토는 천진으로 가서 1885년 3월 청의 이홍장과 갑신정변 매듭을 위한 '천진조약'을 체결했다. 그중 제3항 "한 나라가 조선에 파병할 때는 서로 문서로 알려야 한다"는 상호파병 통지 조항이다. 바로 이 조항으로 인해 고종이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군의 출병을 요청하였을 때 일본군이 자동으로 출병하는 근거로 악용된다. 일본으로 귀국한 이토는 그해 12월 관제 개혁으로 신설된 초대 총리대신 자리에 올랐다.

 

평민 출신에서 당대에 내각 총리대신 자리에 올랐다는 사실 자체가 일본의 근대화 과정을 압축해서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정벌에 나섰다가 몰락한 것처럼 이토도 조선 침략에 나섰다가 대한국인 안중근을 만나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