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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79 : 조선의 역사 421 (일제의 조선 병탄 과정 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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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79 : 조선의 역사 421 (일제의 조선 병탄 과정 3)

두바퀴인생 2013. 3. 5. 05:09

 

 

 

한국의 역사 879 : 조선의 역사 421 (일제의 조선 병탄 과정 3)     

 

                  

                                                                          한일합방의 주역들

                

  

 

일제의 조선 병탄 과정 3

 

3. 이토의 이중성

 

"이토가 일본의 헌법을 완성하는 순간, 아시아의 고통은 시작되다"

 

이토는 명분과 실리를 다 가지려 한 정치가였다. 근대헌법을 만들면서 의회 중심이 아니라 천황 중심의 헌법을 만들었고, 대한제국 즉각 합병에는 반대한다면서도 일본의 한반도 강점 논리를 만들었다. 그런 모순된 정치 행위의 종말은 대한제국 안중근을 만나는 것이었다.

 

일본은 1873년 명치 6년 2월 11일 초대 신무천황의 즉위일이라고 선포했다. 현재 신무천황은 실재하지 않았던 허구의 천황으로 인정하고 있지만, 당시로서는 메이지 천황의 권위를 위해 초대 천황에게서 찿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8세기에 편찬된 <일본서기>의 즉위 날짜를 양력으로 환산해 이른바 기원절로 삼은 것이다.

 

그리고 1889년 2월 11일 헌법 발포식을 했다. 메이지 천황은 궁중 삼전에서 하늘과 역대 천황들에게 헌법을 고하는 것으로 의식을 시작해 이세 신궁과 야스쿠니 신사 등으로 사신을 보내고,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인 이와쿠라 도모미,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의 무덤에도 이 사실을 고했다.

 

헌법 발포식의 하일라이트는 메이지가 새 정전에서 전통 복장을 벗고 군복으로 갈아입은 후 내각 총리대신에게 헌법을 하사하는 의식이었다. 헌법이 천황이 국민에게 하사하는 선물이란 의미였다.

 

이 행사로 메이지는 허수아비 국가 제사장에서 명실상부한 국가원수로 발돋움했다. 이날 메이지 헌법을 하사받은 총리대신은 1876년 한일수호조규를 체결했던 구로다 기요타카였다. 그러나 시실상의 주역은 이토였다. 이토는 1889년 1월 헌법 제정에 관한 공으로 최고훈장인 욱일동화대수장을 받았는데, 이에서 알 수 있듯이 헌법도 이토가 만들었고 헌법 발포식도 이토가 주도한 것이었다. 이토는 헌법 연구에 전념할 시간을 갖기 위해 총리대신보다 한가한 추밀원 의장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었다.

 

이토는 자신이 평민 출신이었지만 의회의 권한이 강한 영국식 헌법을 구상했던 민권론자 이타가키 다이스케를 일축하고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 천홍이 통치한다(제1조)"고 규정한 전제 군주헌법을 만들었다. 메이지 헌법 제 3조는 "천황은 신성하여 침범할 수 없다"이고, 제4조는 "천황은 국가원수로서 통치권을 총괄한다"는 조항이다. 훗날 아시아의 많은 민중은 물론 일본 민중에게도 큰 고통을 안겨주는 단초가 된 제12조 "천황은 육.해군의 편제 및 상비군의 숫자를 결정한다"는 조항이다. 원래 제12조는 "천황은 육.해군을 통수한다. 육.해군의 편제는 칙령으로 정한다"고 돼 있었다. 이 경우 칙령을 심의하는 추밀원에서 군부 통제권이 있게 되지만 이토가 천황에게 육.해군의 편제와 상비군 숫자 결정권까지 넘기면서 군은 의회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됐다. 이것이 쇼와 시대(1926~1989)에 군부가 내각의 통제권을 벗어나 천황에게 소속된다는 통수권 개념으로 각종 침략전쟁을 일으키는 빌미가 되었다.

 

역으로 일본군이 벌인 모든 침략전쟁은 천황이 무한책임을 져야 한다는 논리가 자동적으로 성립된다. 1890년 7월 1일 총선거가 실시되면서 만스물다섯 살 이상으로 국세 15엔 이상을 납부한 남자에게 선거권이 주어졌는데, 전체 인구의 약1%에 불과했다. 그해 11월 천황이 참석한 가운데 첯 의회가 열렸다. 귀족원 의장은 평민 출신의 백작 이토였고, 중의원 의장은 향사(지바토착 무사) 출신의 나카지마 노부유키였다. 이처럼 일본은 헌법 공포와 총선거를 통해 근대국가에 한발 더 다가갔는데, 이토가 이 모든 작업을 총괄했다.

 

 

                                                   

                                                                     이토 히로부미

 

 

이토는 평민 출신이면서도 전제 군주헌법을 제정하고 귀족원 의장이 된 것처럼 상호 모순된 정치행보를 보였다. 러시아에 대해서도 야마가타 아리토모.가스라 다로 등의 개전론에 맞서 외교협상론을 주장해 '공러병(러시아 공포병)에 걸렸다는 비난까지 받았다. 그러나 이토의 대러시아 협상의 요체는 만주와 한반도를 교환하자는 '만한교환론'이었다. 만주는 러시아가, 한반도는 일본이 차지하는 것으로서 야마가타의 군사 해결 노선과 방법만 달랐을 뿐이다.

 

전쟁이든 외교든 수단이 문제일 뿐 대한제국 문제의 근본적 해결은 일본의 강점이란 것이므로 이토는 끝끝내 한국과 악연일 수밖에 없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내각은 1905년 10월 27일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다"고 결정했다. 그러나 하야시 주한 공사만으로 외교권을 뺏는 대과제를 수행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칙사를 파견하기로 하였다. '만한교환'의 구상자 이토가 칙사가 되면서 한국과의 악연은 본격화된다.

 

이토는 1905년 11월 고종을 알현하고 외교권 박탈을 통보했는데, 이토가 귀국해 천황에게 보고한 <대한제국봉사기사적요>는 '위장된 온건론자' 이토의 진면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을사늑약에 고종 황제가 불만을 표시하자 이토는 "폐하는 불만을 말씀하시지만 제가 한번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대한제국은 어떻게 오늘날까지 생존할 수 있었습니까? 또 대한제국의 독립은 어떻게 보장되었습니까? 폐하는 그러한 사정을 알면서도 불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라고 윽박질렀다.

 

고종은 "대외관계 위임을 전면적으로 거부하지는 않지만 일본이 그 내용의 실제를 취하는 대신 한국에도 형식적인 명목은 남겨달라"며 예를 들면 "사신의 왕래"라고 말했다. 형식상의 외교권만이라도 달라는 고종에게 이토는 "외교란 형식과 내용을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거절했디 이토는 이 조약을 거부할 경우 "한층 불리한 결과를 각오해야 할 것"이라고 협박해 을사늑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이토는 초대 통감으로 부임했다. 그리고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자 사방에서 의병이 일어났고 이토는 한국민의 국적(國敵)이 되었다.

 

이토의 통감정치는 모순의 극치였다. 이토는 야마가타 아리모토와 조선 초대 총독이 되는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게 등이 주장하는 '즉각병합론'에 반대하고 '점진병합론'을 주장했다. 한국을 강점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한국 병합을 원치 않는 것처럼 위장했다. 이토는 1907년 10월 16일 황태자 요시히토 친왕(훗날 다이쇼 천황)을 방한시켰다. 이때 순종은 황태자 영친왕과 같이 인천까지 가서 영접하고 함께 서울로 올라오는데, 이런 행사를 통해 이토는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지 읺을 것처럼 위장했다.

 

그러나 하세가와 요시미치(훗날 제2대 조선 총독) 조선 주차군사령관에게 전국 각지의 의병을 잔혹하게 진압하게 한 데서 그 본질이 드러난다. 이토는 풍류통감이라고 부를 정도로 주색에도 심취했는데, "취해서 미인의 무릎을 베고 눕고, 깨어서 천하의 권력을 잡는다"는 그의 한시가 이런 성향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 통감부 시절 서울 묵정동 일대에 신마치 유곽, 일본군이 주둔한 용산 일대에 모모야마 유곽 같은 기생촌이 번성하면서 일종의 예인(藝人)문화였던 조선의 밤문화가 창녀문화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이토의 점진병합론은 일본과 한국의 매국 친일파들의 비판을 받았다. 1909년 1월 순종이 남쪽의 대구.부산.마산과 북쪽의 개성.평양.신의주 등을 순행할 때 이토는 직접 호종하기도 하였다. 도야마 미쓰루.우치다 료헤이 등의 흑룡회와 송병준, 이용구 등 일진회는 한국인들의 존황심만 높였다면서 이토를 비난하고 나섰다. 그러나 한편 이토는 1909년 4월 총리대신, 외무대신과 3자 회담에서 조선병합에 이의가 없다고 동의했다.

 

이토는 1909녀 6월 14일 부통감 소네 아라스케에게 통감 자리를 물려주었고, 일본 각의는 7월 6일 '한국 병합에 관한 건'을 통과시켰다. 이토는 그해 10월 러시아 방문길에 올라 러일전쟁 격전지였던 여순의 203고지를 둘러보고 '1만 8,000명의 뼈를 묻고 있는 산' 운운하는 시로서 일본 근대사의 감회를 토로했다. 그리고 장춘을 거쳐 하얼빈으로 향했다.

 

이토에 의해 주도된 일제의 침탈야욕으로 수많은 인명의 목숨과 이웃 나라를 병탄하던 그의 대일본제국의 망상대업은 이제 막을 내릴 시간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알빈 역사의 한 찻집에서 대한국의용군참모중장 겸 독립특파대장 안중근이 이웃 국가에는 크나큰 고통을 안겨주었던 일본 근대사의 성취와 이토의 모순된 정치행각을 끝장내기 위해 저승사자처럼 초초하게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