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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74 : 조선의 역사 416 (제26대 고종실록 39)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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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74 : 조선의 역사 416 (제26대 고종실록 39)

두바퀴인생 2013. 2. 28. 09:41

 

 

 

한국의 역사 874 : 조선의 역사 416 (제26대 고종실록 39)                 

              
 

                                          고종 황제 가족 사진

 

제26대 고종실록 ( 1852~1919년, 재위 : 1863년 12월~1907년 7월, 43년 7개월) 

 

 

망국의 몇 가지 풍경들

 

5. 고종 퇴위

 

"이완용 칼을 배들고 고종을 협박하다"

 

고종의 44년 치세는 강제 양위로 막을 내렸다. 고종 치세의 가장 큰 문제는 명확한 노선이 없었던 점과 개화파와 농민세력을 모두 제거해 버렸다는 점이다. 그 결과 친일 매국파들만 남아 고종을 둘러싸고 일본의 국익을 위해 일본과 손을 잡고 고종을 끌어내렸다.

 

통감 이토는 침정대신 이완용을 불러 헤이그 밀사 사건은 조약 위반으로 일본은 한국에 선전포고할 권리가 있다" 고 협박했다. 주인의 질책을 들은 이완용과 내각 대신들은 곧바로 고종에게 달려가 따졌다. 

 

<일본외교문서> 1907년 7월 7일자 등에 따르면 고종은 "짐은 이 사건과 아무런 관계가 없고 모두 헤이그에 있는 자들이 밀서를 위조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대신들이 사태 수습책을 강구해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고종 특유의 이중 처신이 통할 때는 이미 지났다. 

 

일진회의 송병준은 혹시라도 친일 경쟁에서 이완용에게 밀릴세라 적극적으로 나섰다. 흑룡회에서 편찬한 자료에 의하면 송병준이 일진회 고문 우치다, 일진회 회장 이용구와 입을 맞추고 어전회의에 나갔다고 전한다. 송병준은 고종의 면전에다 "일본으로 건너가 일황에게 사과하든지 대한문에 나가 주차군사령관에게 항복하든지 선택하라"고 윽박질렀다. 고종을 도울 열강은 어느 한 나라도 존재하지 않았다. 44년 왕 노릇을 끝내는 7월 18일, 고종은 우왕좌왕했다. 그는 중추원 고문 박제순을 임시 궁내부대신 서리로 삼았다가 곧바로 해임하고 총리 이완용을 겸임시켰다.

 

<일본 외교문서>, <매천야록>, <대한계년사>, <고종실록>, <대한매일신보> 등을 토대로 재구성해본 7월 18일 오후는 급박했다.

 

이날 오후 3시경 이완용 등 내각 대신들은 회의를 하고, 오후 4시에 입궐해 고종에게 일본측의 협박을 전하면서 사태 수습책을 건의했다. 수습책이란 다름 아닌 황위에서 물러나라는 통보였다. 다급해진 고종은 통감의 의견을 듣겠다며 시간을 끌었다. 5시에 이토를 만나 밀사 사건을 변명하면서 양위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이토는 "한국 황실의 중대 문제에 간섭할 수 없으며, 내각 대신들과 상의한 일도 없다"고 천연덕스레 답하고 떠났다.  7시에는 당시 서울에 와 있던 외무대신 하야시에게 매달렸으나 소용없었다.

 

내각 대신들은 8시즘 다시 고종을 찿아가 양위를 요구했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이완용이 칼을 배들고 고함을 지르며, '폐하게서 지금이 어떤 세상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협박하자, 고종을 모시는 무감, 액례들이 흥분해 고종의 말 한마디만 있으면 갈기갈기 찢어 버리려 하고 있었으나 고종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이 묵묵히 앉아 있었다"고 전한다.

 

밤 11시 고종은 원로 대신들의 의견을 들어보겠다면서 신기선, 민영휘, 민영소르 불렀다. 이듬해 사망하는 신기선은 논외로 치더라도 민영휘, 민영소는 1910년 일제로부터 자작의 작위와 막대한 은사금을 받은 인물들이니 이완용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사면초가에 몰린 고종은 새벽 1시 "짐은 군국의 대사를 황태자로 하여금 대리하게 한다"며 한 걸음 물러섰다. 양위가 아니라 홍태자 대리청정을 시킨 다음 기회를 봐서 복귀하려는 의도였다. 황태자는 두 번이나 대리청정을 사양하는 상소를 올리고, 고종은 "부모의 뜻을 다르는 것이 효도"라고 타일렀지만 대리청정은 이토나 이완용 내각이 바라는 답이 아니었다.

 

<순종실록> 즉위년 1907년 7월 19일자는 "순종이 명을 받아 대리청정하고 이어서 선위받았다"고 모호하게 기술하고 있다. <통감부문서> 7월 19일자는 이완용이 이토에게 보낸 '황태자 집무대리 조칙 통고 건'인데, 19일에도 고종의 뜻이 양위가 아니라 대리청정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같은 날 오후 7시 15분의 <통감부문서>'황제 양위 건'은 다르다. 법무대신 조중응이 통감 이토에게 와서 "양위 건은 짐의 충심에서 나온 것으로 결코 남의 권고 또는 협박에 의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고종이 "본뜻을 오해하여 함부로 분개하거나 폭동을 일삼는 자는 통감부에 의뢰하여 제지하고 적절히 진압할 것을 위임한다"라는 칙명가지 내렸다고 전한다. 고종이 자발적으로 양위를 결심했으며, 반대 봉기가 일어나면 이토에게 진압할 것을 요청했다는 것인데, 물론 조중응의 조작일 것이다.

 

<일본외교문서> 명치 40년 1907년 7월 20일조는 "오전 8시에 황태자 대리식을 거행했다"고 적고 있어서 고종은 여전히 황태자 대리청정을 고집했음을 알 수 있다. 고종과 호아태자가 불참한 가운데 이완용, 임선준, 고영희, 이병무, 이재곤, 조중응, 송병준 등 이른바 '정미칠적'과 여타 친일파 등이 참석한 가눙운 식을 열고 고종 44년 치세가 강제로 막을 내렸다. 일제와 친일 내각이 억지로 양위식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영국인 베텔이 발행하던 <대한매일신보>는 내각 대신들이 고종에게 "직접 일본에 가서 일본 황제에게 사과하라"고 요구했지만 고종이 거부했다는 궁중 소식을 전하면서 밀사 이준이 "흥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해 만국 사신들 앞에서 피를 뿌려 만국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헤이그에서 병사한 이준이 국내에서는 자결한 것으로 전해지게 된 유래다.

 

황태자 대리청정 소식이 전해지자 종로에는 각지 시민들이 모여들어 통곡하거나 친일 내각을 성토하고 친일파들에게 훈장을 준 표훈원에 투석했으며, 한국군 일부가 경무청에 발포하고 시민들이 밤 11시쯤 일진회 기관지인 국민신보사를 습격했다고 각종 기록들은 전한다. 법부대신 조중응이 항의하는 군중에 대한 진압권을 이토에게 넘긴 것처럼 총리대신 이완용도 이토에게 "각 조약국에도 일체를 성명하라"면서 열강들에게 황태자 대리청정 사실을 통보하라고 권유했다.

통감부는 각국 공사관에 이러한 사실을 알리면서 한국인 폭도들이 난입하면 보호해주겠다고 통보했다.

 

이런 여세를 몰아 7월 24일 통감 이토, 하세가와 주차군사령관, 하야시 외무대신은 총리대신 이왕용과 이른바 '제3차 한일협약'을 체결했다. "한국 정부는 시정 개선에 관한 통감의 지도를 받는다"고 규정하고 "한국 정부는 법령의 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은 미리 통감의 승인을 거친다"고 규정해 통감을 사실상의 총독으로 격상시켰다. 또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한국 관리로 임명한다"고 규정했다.

 

이완용은 이토와 '협약 실행에 관한 각서'도 작성했는데 크게 재판권과 군대 해산에 관한 두 가지 사항이었다. "최고법원인 대심원 원장 및 검사총장과 전옥(형무소장) 은 일본인으로 한다"고 규정했다. 또한 "육군 1대대를 존치시켜 황궁 수비를 맡게 하고 기타는 해산한다"라고 경호대대를 제외한 군대 해산을 명문화했다. 이완용과 군부대신 이병무가 군대 해산을 주도했다. 을사늑약은 외부대신이 체결하고 군대 해산은 군부대신이 주도하는 형국이었다.

 

군대 해산 시행일은 8월 1일이었다. 하세가와 지시를 받은 이병무는 아침 8시까지 일본군 사령관 관저인 대관정으로 시위대 각 대장들을 불러 10시에 훈련원에서 해산식을 한다고 통보했다. 서소문에 주둔했던 시위대 제1연대 1대대를 교관인 구리하라 대위가 인솔해 해산식을 인솔하려 하자 대대장 박성환이 항의해 자결했다. 격분한 병사들은 영외로 뛰어나가 일본군을 향해 사격했다. 남대문 안에 있던 제2연대 1대대도 이 소식을 듣고 동조 사격을 가했다. 그러자 일본군은 기관총 등 중화기로 진압에 나섰고 결국 시위대 병사들은 진압당하고 말았다. 해산식에 참여한 병사들에게는 군모와 견장을 회수하고 계급에 따라 25~80원의 소위 은사금을 지급했다.

 

군대가지 해산당한 대한제국은 저항할 마지막 수단을 모두 상실하고 조선 개국 이후 500년이나 된 제국은 그렇게 허망하게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