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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72 : 조선의 역사 414 (제26대 고종실록 37) 본문
한국의 역사 872 : 조선의 역사 414 (제26대 고종실록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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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황제 가족 사진
제26대 고종실록 ( 1852~1919년, 재위 : 1863년 12월~1907년 7월, 43년 7개월)
망국의 몇 가지 풍경들
2. 친일내각의 갈등
"김옥균.김홍집을 제거한 고종 곁에 친일 매국노만 득실대다"
을사늑약을 기점으로 친일파는 애국적 친일파와 매국적 친일파로 나눌 수 있다. 급진개화파 김옥균이나 온건개화파 김홍집 등은 일본을 역활모델로 삼아 부국강병을 도모하려던 애국적 친일파였다. 반면 을사늑약을 체결한 을사오적과 일진회를 이끈 이용구.송병준 등은 매국적 친일파였다. 김옥균.김홍집을 모두 제거한 고종에게 남은 것은 매국적 친일파뿐이었다.
을사오적
고종은 을사늑약 체결 닷새 후인 1905년 11월 22일 조약 체결 당사자인 외부대신 박제순을 의정대신으로 승진시키고, 12월 13일에는 학부대신 이완용을 임시 외부대신으로 삼았다. 처단 요구가 드높은 외부대신을 되레 승진시키고 이완용에게 외교권을 준 이해할 수 없는 인사였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의하면 '박제순은 글도 있고 교활한 사람으로 오랫동안 국민들의 질타를 견디어 왔으나 날로 외부의 압력이 심해지는 것을 우려하여 지위는 높고 녹봉은 후하지만 밤마다 방황했다고 했다.' 그가 방황했다는 것은 그만큼 조약 체결에 대한 비난이 거셌음을 뜻한다. 1906년 2월 16일에는 군부대신 이근택의 집에 자객이 침입해 자상을 입힌 사건까지 발생했다.
고종의 이중적 정치 행보도 두려운 대상이었다. 10년 전인 1896년 2월 11월 전격적으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한 고종은 갑오개혁을 주도하던 총리대신 김홍집을 역적으로 규정해 경무청 문 앞에서 군중들에게 참살당하게 방치했다. 황현은 고종이 '헌정에 속박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제는 망명할 외국 공사관도 없지만 의병 진영에라도 합류하여 자신을 비롯한 을사오적을 역적으로 규정하고 포살령을 내리면 일본이 보호한다고 해도 안전을 확신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군중의 분노는 갑오개혁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강한 상대에게는 일단 굴복했다가 나중에 뒤집기를 시도하는 고종의 성격은 일제가 외교권을 빼앗는 데는 도움이 되었지만 통감 통치에는 오히려 장애요소였다.
일제는 1906년 2월 1일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했다. 3월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했다. 그사이 고종은 일본 유력층에게 훈장을 주는 등 환심을 사려 노력했다. 그러면서도 이토가 자리를 비운 사이 인사를 단행하여 내각의 친일파들을 당혹하게 만들었다.
이토는 1906년 4월부터 6월까지 업무 협의차 일본에 가 있었다. 그사이 고종은 의정대신에 민영규를 임명했다.그는 한일합방 후 일제로부터 은사금과 작위를 받을 정도로 친일파였지만 고종은 자신이 정승 인사를 단행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반면 학부대신 이완용에게는 훈2등을 서훈하는 등 매국적 친일파 달래기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완용은 고종을 믿지 않았다. 이완용은 1906년 12월 박제순에게 "고종을 그대로 두면 정부대신을 빈번하게 갈아치우면 친일 내각이 붕괴할 수 있다"면서 "앞으로는 내각이 일치 협력하여 황제에게 대항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완용은 하세가와 요세미치 주한 일본주차군사령관에게 "황제의 성격을 고칠 수 없으니 마지막 수단으로 고종을 폐위시켜야 한다"고 할 정도로 과격하게 주장했다. 그러니 일본은 뒤에서 동의만 해 달라고 요구할 정도였다. 그러나 일본측은 오히려 세계 여론의 악화를 우려해 고종 폐위에 소극적으로 나올 정도였다.그러나 박제순은 이완용처럼 대놓고 고종에게 적대적이지 않았다.
왼쪽부터 송병준, 이완용
그러자 일진회의 송변준이 박제순 내각을 강하게 성토하고 나섰다. 송병준의 배후에는 일본 낭인 집단 '흑룡회'가 있었다. 흑룡회는 만주 흑룡강 유역을 일본 영토로 사겠다는 취지의 이름만으로도 그 성격을 충분히 알 수 있는 집단이다. 이 집단은 대 러시아 개전론을 적극 주창하고 한국은 물론 만주.몽골.시베리아 지역까지 일본이 차지해야 한다는 이른바 '대아시아주의'를 제창한 군국주의 '첨병'이었다. 흑룡회 주간 우치다가 일본 정계의 실력자 스기야마 추천으로 통감부 촉탁이 되면서 한국 점령 계획을 실천에 옮기는데, 혹룡회의 손발이 바로 송병준과 일진회였다. 흑룡회는 1930년 편찬한 <한일합방비사>에서 일진회 회장 이용구와 송병준을 '불세출의 영웅'이라고 격찬했다.
원래 송병준은 일본에서 인삼 재배, 직물 염색 등을 하다가 1904년 러일전쟁 때 오타니 소장을 따라 일본군 통역으로 귀국하면서 직업적 친일분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당시 송병준은 이미 창씨 개명하여 '노다 헤이지로'라는 일본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다고 한다. 송병준은 러일전쟁 와중인 1904년 8월, 전 독립협회 회원 윤시병 등 300여 명과 '유신회'를 조직했다. 그러다가 전국적인 조직이 필요해지자 그해 12월 이용구 등이 동학의 잔여 세력을 규합하여 만든 '진보회'와 통합해 '일진회'를 만들었다. 일진회는 러일전쟁 때 군수물자를 수송하고 만주를 오가며 정보를 수집하는 등 일본군을 도왔고, 1906년 2월 28일에는 통감으로 부임하는 이토를 위해 '歡迎(환영)'이라고 쓴 큰 현수막을 남대문에 내걸기도 하였다.
송병준은 1906년 10월 이일직의 옥쇄 도용 사건과 관련해 투옥된다. 외교권을 빼앗긴 고종이 이일직에게 밀칙을 내려 국내 이권을 외국인들에게 양도하는 대가로 상납을 받아 비자금을 조성하려 한 사건이었다. 사건이 발각되자 고종은 이일직이 사적으로 옥새를 도용한 단독 소행으로 만들었는데, 뜻밖에도 송병준이 이일직을 숨겨주었다가 체포된 것이다. 상납금 일부를 가로채려는 속셈이었을 것이다. 이때 흑룡회의 우치다가 이토 통감을 만나 송병준을 석방시켜주고 일진회 고문으로 추대하였다고 전하는데, 이를 계기로 송병준의 친일 행각은 도를 더하게 된다.
급기야 1907년 5월 2일 일진회는 박제순 내각 탄핵문을 제출하고 총사직을 권고했다. 박제순 내각이 덜 친일적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 무렵 박제순도 참정대신 자리에 목매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매천야록>은 "이때 나인영.오기호의 옥사가 일어나자 박제순은 크게 두려워하기 시작해서 사람들에게 '언제 죽을지 모르니 차라리 피하는 것이 현명한 길'이라며, 약간의 공분을 토하면서 사직했다"고 적고 있다. 나인영은 훗날 항일독립운동의 총본산 격인 대종교를 중창하는 나철이다. 나인영 등이 폭약 2궤를 "미국인이 보냈다"면서 박제순.이지용에게 보냈는데, 박제순의 집안사람이 열려고 하는 것을 박제순이 막아 겨우 목숨을 건졌던 것이다.
참정대신 자리에 계속 있다가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한 박제순은 1907년 5월 22일 사임했고 그 자리는 이완용이 차지했다. 내부대신은 임선준, 군부대신은 이병무, 학부대신은 이제곤으로 바뀌었는데, 사흘 후인 25일에는 조중응이 법부대신이 되고, 송병준이 삼품대신이란 조롱 속에 농상공부대신으로 발탁되었다. 박제순 내각이나 이완용 내각이나 같은 친일내각이지만 이번 내각은 이완용.조중응.송병준의 삼각 친일편대가 전면에 등장한 매국내각이었다. 조중응은 영조 때의 소론 영수 조태억의 후손으로 노론 가문 일색인 친일 관료 집단에 드물게 소론 출신으로 합류했다.
이완용 내각은 고종 축출 내각이나 다름없었다. 고종은 이완용이 궁중에 들어와도 만나주지 않거나 박제순 사직 이후 매일 비탄의 눈물을 흘렸다고 전한다. 늑약 체결의 주역으로 규탄받던 박제순 내각이 그나마 차악(次惡) 내각이었던 셈이다. 급진개화파 김옥균은 물론 온건개화파 김홍집까지 모두 죽여버린 고종의 업보였다.
궁지에 몰린 고종의 승부수가 바로 헤이그 밀사 파견이었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제안으로 1906년 6월부터 10월까지 네들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해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통감부문서>는 1907년 5월 129일자를 보면, 통감 이토는 외무대신 하야시 다다스에게 "한국 황제가 외국에서 운동한다는 음모는 작년 이후 항상 계속되고 있는데, 전적으로 러시아와 프랑스에 의지하여 독립을 회복하려는 계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당시 고종의 속셈을 정확하게 일본은 읽고 있었다. 그나마 아토가 추측한 헐버트가 아니라 이상설이 밀사였던 정도가 허를 찌른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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