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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70 : 조선의 역사 412 (제26대 고종실록 35)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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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70 : 조선의 역사 412 (제26대 고종실록 35)

두바퀴인생 2013. 2. 24. 04:34

 

 

한국의 역사 870 : 조선의 역사 412 (제26대 고종실록 35)                 

              
 

                                          고종 황제 가족 사진

 

제26대 고종실록 ( 1852~1919년, 재위 : 1863년 12월~1907년 7월, 43년 7개월) 

고종시대의 세계 정세는 우선 동아시아는 일본의 세력 팽창이 뚜렷해져 조선에 대한 침략을 강화하는 한편, 중국과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감행하여 청일전쟁과 노일전쟁에서 승리하고 동아시아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 시기에 중국 내부에서는 만주족이 세운 청을 무너뜨리기 위해 한족의 독립운동이 전재된다.

 

한편 영국, 독일, 프랑스 등의 유럽 제국들은 아시아, 아프리카에 대한 침략을 가속화하여 아프리카 분할을 위한 회담을 개최하는 한편, 인도, 미얀마,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의 동남아 국가에 대한 식민정책을 수립한다.

 

아메리카에서는 미국이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러시아로부터 알레스카를 매수하고, 내부적으로 남북전쟁을 종식시키면서 본격적인 대외팽창을 감행하던 시대였다. 이러한 열강의 식민정책이 가속화되면서 조선은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고 우물안 개구리처럼 유교, 성리학, 사대주의, 허례허식, 신분차별, 허약한 왕권, 사색당파, 세도정권과 부패, 허약한 국방력, 삼정의 문란, 매관매직, 탐관의 수탈, 민중의 봉기, 쇄국정책, 권력쟁탈을 위한 외세의지 등으로 인해 망국의 길로 가고 있었다.

 

그래서 조선이 멸망당하기까지 조선 조정의 지도층과 임금 고종이 어떻게 국제정세를 이해하고 대처하였는지, 그리고 어떻게 망국의 길을 가게 되었는지 좀 더 상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직도 동북아정세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위기감이 상존하고 있고 한강의 기적과 무역 강국으로 올라선 지금 내부적으로는 도덕과 정의, 공정이 사라진 사회, 민주주의를 빙자한 정치지도층의 부패, 공정경쟁이 사리진 사회, 부의 전환이 경직된 사회로 사회적 역동성이 사라진 사회이기도 하다.

 

심각한 권력형 비리와 사회 전반에 만연한 심각한 부패 현상, 부의 편중화로 인한 경제적인 양극화, 날로 심각하게 확산되는 빈곤층, 초고령/저출산 사회, 이혼율/실업율 증가 등 사회적 공존과 균형이 상실되어 가고 있지만 그 치유 방책이 전무한 실정이다. 또 정치적으로는 보수와 진보 간에 갈등이 상존하고 있고 친북.종북.죄경 세력들이 정부 전복을 꿈꾸고 있기 때문이며 이런 가운데 한편 주변 4대강국의 위협과 김씨 세습왕조인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 언제 나라가 멸망의 길로 갈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기도 하다.

 

이제부터 이덕일씨가 쓴 역사평설 '근대를 말하다'에서 몇가지를 요약하여 싣는다. 실록에 언급되지 않은 이야기들이라 고종 시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역사적 교훈을 알려주고 있고 미래를 열어갈 후학들에게 역사의 오류를 반복하게 하지 않기 위함이기도 하다.

 

 

 

망국의 몇 가지 풍경들

 

1. 고종의 오판

 

"러시아 200만 대군을 맹신한 고종, 일본 패배에 '베팅'하다"

 

<황성신문> 1904년 1월 25일자는 "근일 각국의 보호병이 서울에 들어오고 일본과 러시아 개전론이 유포되면서......곡식값이 뒤고 있다"고 보도했다.러일전쟁이 벌어질 것이라는 이야기가 퍼지면서 한양의 곡식값이 뒤었다는 내용이다. 전운이 감돌자 대한제국은 1904년 1월 23일 국외중립을 선언했고, 육군 참령 현상건이 고종의 명을 받아 각국으로부터 중립국임을 인정받으려고 노력했다. 조선이 러일전쟁터가 될 운명이 었고 승전국의 전리품이 될 운명에 놓이게 된 것이다.

 

당시 급박한 국제 정세 속에서 고종은 국외중립을 선언하고 자신의 웅대한 지략과 불세출의 자질을 가진 사람으로 생각하였고 외교적 수완으로 전제왕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일본군 선발대 2,500명이 인천 외항에 도착하면서 일본 해군은 요동반도 남단의 여순항을 기습 공격하는 것으로 러일전쟁의 포문을 열었다. 다음 날 일본 해군은 다시 인천 앞바다의 러시아 함대를 공격해 순양함 바랴크함과 코리에츠함을 가라앉혔고, 같은 날 고종의 국외중립을 무시하고 서울에 입성했다. 정식 선전포고는 다음 날에야 발표되었다.

 

일본의 선제공격으로 전쟁이 시작되었지만 고종은 러시아의 승리를 굳게 믿고 있었다. 청일전쟁 직후 삼국간섭으로 일본이 점령한 요동반도를 되돌려주는 것을 보고 러시아의 막강한 힘을 실감한 고종이었고, 김홍집의 온건개화파 내각이 주도하는 갑오개혁을 무너뜨리기 위해 자국 주둔 외국 공사관으로 망명한 '아관파천'이란 희한한 사건도 러시아의 힘을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이 서울에 입성하자 2월 12일 주한 러시아 공사관 파블로프는 러시아 공사관 병사 80여 명의 호위를 받으면서 서울을 빠져 나갔고,다음 날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는 대원군의 형 이최응의 손자이며 한일합방 후 백장 작위 수여된 당시 외부대신 임시서리 겸 육군참장이던 이지용과 고종을 협박하며 '한일의정서'체결을 강요받았다.

 

한일의정사는 제3조에 "대일본제국 정부는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보전을 확실히 보증한다"고 명기하고 제4조에는 "대일본제국 정부는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정황에 따라 차지하여 이용할 수 있다"며 한국 영토의 무제한 징발권을 명시했다. 속으로는 러시아의 승리를 바라면서도 겉으로는 일본의 강압에 굴목해 무제한 국토사용권을 주는 의정서를 체결한 데서 고종의 이중성은 다시 드러난다.

 

당시 고종이 러일전쟁에 대해 중립을 선언한 데는 함경북도 명천의 서민 출신 이용익 등 친러파의 주청이 큰 영향을 끼쳤다. 같은 친러파였던 육군참장 이학균은 현상건과 모의하여 전 러시아 주재 함국참서관 곽광의를 여순에 보내 러시아 당국에 조선을 보호령으로 해달라고 요청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이학균과 현상건은 일본의 납치를 피해 프랑스 공사관으로 피신했다가 미국 군함 신시내티호를 타고 상해로 망영했다.

 

객관적인 전력은 러시아가 우세했기 때문에 고종이 러시아의 승리를 점친 것은 결코 무리한 것은 아니었다.그러나 일본은 러시아가 없는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전국민적인 단결과 군부의 뛰어나 전략전술이다. 러시아군은 총병력이 200만에 달하고 전함의 배수량은 약51만 톤이었으나 일본은 상비군이 20만 명에 불과하였고 배수량은 26만 톤뿐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 전쟁에서 총 108만 명을 동원할 정도로 총력전을 펼쳤다.

 

러시아는 일본군이 한반도 남부에 상륙하여 북상할 것으로 판단하고 압록강 부근에 군대를 집결시켜 맞서 싸울 계획이었다. 이에 맞선 일본은 해군 제1함대와 제2함대로 여순의 러시아 태평양 함대를 섬멸하고, 제3함대로 대한해협을 장악해 재해권을 확보한다는 더 큰 전략을 세웠다. 또 육군 제1군을 한밤도에 상륙시켜 한국에 주둔한 러시아군을 구축하고, 제2군을 요동반도에 상륙시켜 여순을 고립시킨다는 전략이었다.

 

 

                                      

                                                                                러일전쟁 요도

 

일본은 전쟁을 단기간에 끝내기 위해 치밀하게 외교전도 전개했다. 전비는 약 15억 엔에 달하였는데, 이는 2억 3,000만 엔 정도에 달하던 1년 예산의 7배에 달하는 거액이었다. 또 이토 히로부미는 1902년 2월 미 대통령 루스벨트와 하바드대학교 동창생이자 귀족 의원인 가네코 겐타로를 특사로 보내 미국의 중재를 요청했으며 훗날 조선 주차헌병대 초대 사령관이 될 아카시 모토지로 대좌가 주도한 일본군의 기막힌 첩보공작이 보내졌다.

 

1901년 1월 주 프랑스 공사관 무관을 거쳐, 1902년 8우러 러시아 공사관으로 간 아카시는 러시아 내부를 분열시키는 것이 불리한 전세를 승리로 전환시키는 첩경이라고 믿었다. 이때 아카시가 참모본부에 요구한 공작금 100만 엔은 현재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약 400억 엔(한화 약 5,400억 원)이나 되는 거액이었다.참모본부에서도 난색을 표했으나 일본 군부의 실력자마가타 아리토모와 참모부차장 나카오카 가이시의 결단으로 러시아 내부 분열 공작금으로 지급이 결정되었다.

 

아카시는 이 공작금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스틀이크, 사보타주, 무장봉기 등을 획책했는데 그 결과 러시아는 전쟁을 혐오하는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또 아카시는 당시 스위스에 망명생활을 하고 있던 레닌에게 접근하여로마노프 왕조 전복을 제안하였으나 처음에는 "조국을 배신하는 행위"라고 완강히 거절하다가, "타타르 사람인 그대가 타타르를 지배하는 러시아 왕조를 무너뜨리는 데 일본의 힘을 빌리는 것이 무슨 배신인가?"라며 집요하게 설득하자 러닌에게는 조국보다 혁명이 상위 개념이었기 대문에 받아들였다고 한다.

 

러시아 혁명의 도화선이 된 1905년 1월 9일 '피의 일요일 사건'에도 아카시가 제공한 공작금이 한몫을 했다. 상트페테부르크의 겨울 궁전 앞 광장에서 평화행진을 하던 군중에게 무차별 발포해 수백 명이 사상자가 발생한 이 사건은 러시아를 혁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물고 갔다. 혁명이 때로는 적과의 동침도 서슴치 않는 비정한 정치의 한 과정임을 보야주는 사례들이다.

 

러시아가 내부적인 혼란과 국력의 크기만 믿고 방심하는 동안 일본은 전세를 뒤엎기 위해 모든 수단.방법을 동원했다. 1905년 1월, 일본은 여순항을 함락시키기고 3월 봉천회전에서도 러시아군에 승리했다. 해군은 더 극적이었는데, 그해 5월 26일, 일본연합함대 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는 군신 이순신에게 승전을 비는 제사를 올리고 "황국의 부흥과 몰락이 이 한 번의 전투에 있다"는 휘호를 내걸고 임전 의지를 다졌다.

 

일본 해군은 다음 날 대한해협과 동해에서 모두 예상을 뒤엎고 러시아 발틱함대를 궤멸시켰다. 설상가상으로 러시아는 6월 흑해함대의 전함 포템킨 수병들의 봉기까지 일러나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하기가 곤란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훗날 독일 황제 카이저의 "아카시 대좌가 혼자 봉천 파견 일본군 3개군단 25만 명에 맞먹는 일을 해냈다"는 말이 전해지지만, 러시아도 적진 분열책을 사용핧 카드는 있었다. 제국 러시아가 사회당이라는 취약 요소가 있었다면 일본에는 조선 의병이라는 취약 요소가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는 그 카드를 활용하지 못했다. 만약 청국이 동학교도에게, 러시아가 조선 의병들에게 자금과 무기를 제공했다면 일본은 쉽게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장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당시 동학교도들이 최대로 봉기한 수는 약 20만이었고 조선 의병도 그 수에 버금가는 상황이었다. 그랬다면 일본은 동학교도와 조선의병에 발목이 잡혀 쉽사리 전승을 이끌어 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청국이나 러시아의 대일본전쟁은 전략.전술에서 이미 일본에 패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굳어가자 고종은 큰 충격을 받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또 다른 외교전을 준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