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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67 : 조선의 역사 409 (제26대 고종실록 3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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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67 : 조선의 역사 409 (제26대 고종실록 32)

두바퀴인생 2013. 2. 21. 04:16

 

한국의 역사 867 : 조선의 역사 409 (제26대 고종실록 32)                 

              
 

                                          고종 황제 가족 사진

 

제26대 고종실록 ( 1852~1919년, 재위 : 1863년 12월~1907년 7월, 43년 7개월) 

 

서재필, 그는 누구인가? (계속)

 

 

 

출국

 

1890년대의 서재필

 

 

 

서재필은 미국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하고 조선정부에 계약 위반과 해촉에 대한 배상금을 요구했다. 계약위반에 따른 보상으로 10년 계약으로 조선 정부의 고문으로 왔으나 아직 7년 10개월이 남았으니 그에 해당하는 월급 2만 8200원과 미국으로 돌아갈 여비 600원을 포함해 총 2만 4400원을 조선조정에서 지불하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조선 조정에서는 비용의 부담에도 불구하고 이를 모두 수용했다. 그는 윤치호에게 독립신문이상재, 양기탁, 이승만, 이동녕 등에게는 독립협회만민공동회를 맡아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였다. 최소한 1년 이상은 유지시킨다면 변화가 있을 것이라며 유지가 어렵더라도 1년 이상만 지켜줄 것을 부탁했다.

 

조선 체류 중 서재필은 죽은 부인의 묘를 한번도 찾아 돌보지 않았는데 1898년 1월 15일, 갑신정변으로 고신을 박탈당하고 거지가 된 서재필의 전 부인 김씨의 친정아버지가 그를 찾아왔다. 그러나 서재필은 그에게 2달러의 돈을 주고 쫓아냈다. 윤치호는 이를 보고 고상하지 못한 행동이라며 한탄했다.

 

1898년(고종 35년) 5월 14일 그는 독자와 동포들에게 올리는 인사말을 남기고 독립협회 간부들의 환송 속에 서울서 낳은 조선에서 출산한 큰 딸 스테파니와 부인을 대동한 채 용산에서 인천행 배에 올랐다. 5월 27일 인천 제물포항을 출발해 일본을 경유해 미국으로 향했다. 자신을 박해하고 생명을 노린 대한제국 조정에 대해 분노한 서재필은 주변 지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귀국(貴國) 정부가 나를 필요없다고 하여 가는 것입니다'라는 말 한마디만 남기고 인천항을 통해 한국을 떠난다. 한편 그가 조선 조정을 "귀국 정부"라고 지칭하자 예상 외의 발언에 그를 전송하러 나왔던 윤치호, 이승만, 박영효, 박정양, 이상재, 김규식 등은 충격을 받고 말문을 잇지 못하기도 했다.

 

한편 1896년, 97년 자신이 운영하는 독립신문에 찾아와 입사한 이승만, 김규식 등 청년들에게 미국으로 유학할 것을 설득, 권고하여 이승만, 김규식 등을 미국으로 유학보내는데 성공한다. 이승만, 김규식 등이 미국으로 유학한 뒤 이들의 학비를 일부 송금해주기도 하였다. 그가 출국하고 그해 12월 26일 독립협회도 결국 해산되고 만다.

 

 

 

 

2차 미국 망명

 

망명과 상점 경영

 

미국-스페인 전쟁

 

 

1898년 4월 귀국, 4월부터 1899년 8월까지 미국-스페인 전쟁미국군의관으로 잠시 참전하였다. 이때 그는 미군 병원선 하지 호(號)에서 미국 육군 군의관으로 부상병의 진료와 수술을 담당했다. 미국-스페인 전쟁이 끝난 뒤 노동과 상점의 아르바이트로 활동했으나 곧 그만두었다. 바로 필라델피아 대학교 의학부로 돌아가 해부학 강사가 되어 해부학 강좌를 담당했다. 필라델피아 대학의 해부학 강사직은 1914년까지 출강하였다. 1899년말부터는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위스터연구소에서 병리학 연구원으로도 근무하였다. 필라델피아 대학의 해부학 강사와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연구원으로 오가며 바쁜 나날을 보내던 중 1899년 조선에 있던 윤치호, 이상재, 이승만 등으로부터 독립협회가 실패했다는 전보와 연락을 접하였다. 당시 조선의 백성들은 독립협회만민공동회, 참정권 요구 활동 등을 백성들은 사갈시하며, 갑신정변을 일으키려 한 역적 정도로 취급하였다. 그는 독립협회 운동의 좌절에 크게 좌절, 민중에 대한 실망감과 증오심을 더욱 증폭시켰다.

 

서재필은 1904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던 해, 나중에 큰일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재정적 능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해리힐먼 고등학교를 하숙하며 다녔던 윌크스베리에서, 힐맨 아카데미 고등학교 시절의 일 년 후배 해롤드 디머와 함께 문구 및 인쇄 사업을 하는 '디머 앤 제이손' 상회를 설립하였고, 1905년에는 해롤드 디머는 '디머 앤 제이손 상회' 윌크스 베리 본점을, 서재필은 '디머 앤 제이손 상회' 필라델피아 분점을 맡아 경영하였다.

 

1913년까지 해롤드 디머와 동업을 계속하였고, 1915년 부터는 필라델피아에서 독립적으로 필립 제이슨상회(Philip Jaisohn & Co.)를 운영했다. 그 후 서재필은 필라델피아에서 1924년까지 인쇄업과 각종 장부를 취급하면서 사무실용 가구 등을 파는 필립 제이슨 상회를 경영했다. 그의 회사는 필라델피아의 상업 중심지인 1537 Chestnut street에 소재하였다. 이후 필립 제이슨 상회는 본점 외에 필라델피아 시내 두 곳에 분점을 둔 종업원 50명의 큰 사업체로 성장하였다. 자신이 기존에 경영하던 문구점과 가구점의 장사가 잘 되어 어렵지 않은 나날을 보낸다.

 

1909년 1월초, 신문 보도와 전화 연락을 통해 신돌석1908년 11월 잡혀서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그러나 신돌석의 은신처를 신고, 제보한 사람이 조선인들이라는 것과, 신돌석이 평민 출신이란 점을 불쾌하게 여긴 양반 출신 의병들이 일본헌병에 자수했다는 점과, 현상금에 눈이 먼 지역 주민들이 신돌석의 은신처를 알려준 점, 신돌석의 외척 등도 제보에 가담한 점을 알게 되면서 절망한다. 이후 한동안 조선 독립에 대한 관심을 접고 병리학해부학의학과 연구 활동, 문구점 영업에 전념하였다.

 

 

 

한일 합방과 독립운동 준비

 

1919년의 한인자유대회, 오른편에서 Korean Independence League 깃발을 든 이가 서재필

 

 

1910년 8월 미국 체류 중 한일 합방의 소식을 접하였다. 서재필은 안타깝게 생각했지만 개혁 인사들을 제거하고 척신들로 정부를 채웠으며, 내부부터 부패한 이상 어쩔수 없다고 봤다. 더구나 왕족들이 일본이 주는 작위를 받고 합방 은사금을 받는 것을 보고 실망, 한심하게 생각했다. 그는 친구 윤치호유길준이 남작 작위를 거절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였다. 그는 윤치호, 유길준과 서신을 주고 받으며 미국으로 건너올 것을 종용했지만 윤치호는 가족을 책임져야 됨을 들어 거절하였고, 유길준은 병으로 가지 못했다. 1914년 9월 유길준의 부음 소식을 듣고 일제 치하 조선에 입국했다가 문상후 바로 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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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이승만, 서재필 등과 함께 독립운동 방략을 의논하기 위해 노백린이 미국 본토로 건너왔다. 그러나 무장 독립론을 주장하던 노백린의 견해에 그는 회의적이었다. 노백린은 캘리포니아에서 재미동포 최초 백만장자 김종림 등의 전폭적인 지지와 지원을 받아 비행학교를 설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서재필은 약간의 경비와 무기상 등을 소개하면서도, 비용 부담과 장비 구매, 위험한 일을 기피하려는 조선인들의 소극성 때문에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그러나 조선의 독립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그는 한일 합방을 자신을 황제에 불충하는 역적으로 보던 조선 민중들에게 당연한 대가로 받아들였다. 서재필은 3·1 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조선의 독립이 어려울 것으로 내다봤다. 이는 그가 제1차 세계 대전 종결 직후인 1918년 12월대한인국민회 중앙회장으로 있던 안창호(安昌浩)에게 보낸 서신에도 드러난다.

 

오늘날 조선의 백성은 승전국 일본의 노예가 되어 구차한 명을 보전하고 있소. 그럼에도 아직 누구 하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일본의 학대에 저항하며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하는 자가 없소. 그러니 바깥세계에서 조선인을 위해 불쌍하다며 동정을 표하는 자가 없는 것이오
 
1918년 12월 안창호에게 보낸 서신


그 뒤 그는 상점 경영과 조선인 교민 사회 활동에 전념하였다. 1918년 12월 19일에는 미국에 체류중이던 이승만, 대한인 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 등에게 연락하여 영문잡지 발간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파리강화회의 파견 문제로 잡지 발행은 뒷날로 연기하고 만다.

 

1918년 11월 독일이 일단 항복함으로써 세계 제1차 대전이 끝나고 다음해 1월 18일 파리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다. 서재필 역시 이 회의에 참석하였다. 미주의 대한인 국민회 중앙총회에서는 평화회의에 서재필과 이승만 박사, 민찬호 목사, 정한경을 파견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들은 미국 시민이 아니므로 여권을 얻을 수 없었다. 이들은 일본 국민인 까닭에 마땅히 일본 대사관에서 여권을 받아야 한다는 게 국무부의 해명이었다.

 

 

 

독립운동 참여

 

3.1 운동 직후

 

4월 16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렸던 '한인자유대회'. 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정한경, 여섯 번째가 서재필, 일곱 번째가 이승만

 

 

'한인자유대회'
앞줄 왼쪽 끝 여자 오른편 선 이가 서재필, 여자 왼편에 선 이는 정한경

 

 

 

재미한인들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그는 미국내 한인 지도자의 한사람으로 활동하였으며, 1919년 3·1 운동 소식을 듣고 미국내 한인 교포들에게 만세 운동 소식을 전하였다. 2월 말 필라델피아에 방문했다가 라디오신문, 뉴스 등으로 3·1 만세 운동 소식을 접하게 된다. 3·1 만세 운동 당시 자신이 체포되거나 죽을 것을 알고 만세 시위에 뛰어든 학생들, 기밀을 누설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손목에 칼을 그은 학생들의 의거 소식을 접한 그는 깊이 감동한다.

 

3월 1일의 대한독립 만세소리는 한라산을 넘고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까지 들렸다. 나는 필라델피아에서 이 소식을 접했다. 조선의 독립운동이 이같이 급속도로 진전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나는 메스를 버리고 시험관을 내던진 채 밖으로 뛰쳐나왔다.


3·1 운동에 호응하기 위해 서재필은 4월 초에 공지하여 4월 13일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연합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를 소집하였다. 필라델피아 한인연합대회를 개최하고 의장이 되었으며, 1919년 4월 13일에서 15일까지 3일 동안 열린 이 행사에는 이승만, 정한경, 유일한, 조병옥, 장택상, 허정, 노디 김, 안창호가 설립한 국민회 간부 등 150여명의 한인들이 참여하였으며, 서재필과 개인적 친분이 있던 미국인 인사들도 참석하였다. 그러나 그는 열강들이 한국 문제에는 무관심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3일간의 제1차 한인연합회의가 끝난 뒤, 바로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세계에 선언하고자 4월 16일에는 필라델피아에서 열렸던 '한인자유대회'를 열었다.

 

제1차 한인연합회의 대회 소집 이후 8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구미외교위원회가 설치되자 구미위원회 산하에 한인통신부를 설치하고, 서재필은 영문 기관지〈한국평론〉 (Korea Review)을 월간으로 발간했으며 '어린이', '순난자', '대한정신' 등 영문 소책자를 발간하여 배포하였다. 이 책들은 서재필의 자비와 여러 한인 지사들의 후원비로 발행되었으며, 미국에 일본의 만행을 소개하고 독립의지를 표현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이는 무료 배부 및 지방순회강연의 홍보책자로 활용되었다.

 

 

 

한국통신부, 구미위원부, 한국친우회 활동

 

한인위원회가 발행한 코리안 리뷰

 

 

구미외교위원부 시절 김규식이승만. 서재필은 이들의 독립운동을 후원하였고, 이들의 자금 모금에 협조해 줄 것을 재미 한인 교포사회에 설득하였다.

 

 

 

1919년 8월 한국위원부(임정 구미위원부의 전신)의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3.1 운동 후, 서재필은 자신의 상점을 보살피지 못했다. 드디어 상점은 파산하고 말았다. 상점의 파산으로 생계에 곤란을 겪었지만 아내 뮤리엘은 그를 원망하지 않았고, 그는 아내의 배려에 깊이 고마움을 느끼며 독립운동에 종사하였다. 생계는 아내인 뮤리엘의 몫이 되었다. 이어 임정 구미위원부에서는 미국내 정치인과 사회단체 인사들을 초청하여 제1차 한인의회를 개최하였다.

 

8월 서재필은 제1차 한인의회에 대표 기도자로 참석한 플로워드 톰킨스(Floyd Tomkins) 목사기독교인사들을 설득, 한국친우회(The League of Friends of Korea)를 조직하고 미국이 한국의 독립을 지지할 것을 요구하는 운동을 벌였다. 구미외교위원부의 한국통신부에 한인연합대회에 연사로 초빙되었던 미국인들을 중심으로 하여 한국의 자유독립 원조 및 한일기독교도의 선교자유 보장과, 한인이 당하는 일본인의 악형을 영구히 방지하며 미국의 일반 국민에게 한국의 진상을 전파할 것을 목적으로 한 한국친우회는 당시 미국내 정계 및 학계에 포진한 친일세력에 대항하여 조직된 기독교 네트워크로 미국 내 20여개 도시에 지부를 두었으며, 영국 런던과 프랑스 파리에도 각각 하나의 지부를 두었다. 한국친우회에서는 조선인에 대한 일본의 박해에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였고, 미국의 정치인사들이 이를 시정하기 위해 일본에 압력을 행사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해 9월 한국위원회임정 구미위원부로 개편되었으나 생계 문제로 부위원장직을 사퇴하였다. 9월 구미위원부 고문에 위촉되었다. 그러나 생계에 종사하면서 구미위원부의 외곽 단체인 한국통신부와 한국친우회 활동을 병행하였다. 한국친우회(The League of the Friends of Korea)의 활동은 이승만구미외교위원회의 활동에 많은 기여를 했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서재필은 독립운동을 지원하며 자신의 전재산을 다 써버리는 바람에, 예순이 넘은 고령으로 생계를 위해 다시 본업인 의사로 돌아가 일해야 했다. 그러나 1919년 9월 구미위원부 고문이 되면서 1920년 무렵 그는 다시 한인단체 활동에 다시 참여한다.

 

 

 

 

한인단체 활동과 독립운동

 

 

 

미국에서의 독립운동

 

1921년 워싱턴 D.C에서 이승만과 함께

 

 

 

3·1 운동 직전까지만 해도 그는 독립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3·1 운동 이후 조선의 독립을 확신하게 되었고, 자제단을 조직해서 이를 진압하려 한 박중양 등과는 절교한다. 1920년 2월 이승만에 의해 구미위원부 위원이 되었다. 그러나 구미위원부 위원장 직무대리를 맡고 있던 현순과 사이가 좋지 않아서 갈등하기도 했다.

 

1920년 2월 26일 구미위원부가 재무부 산하의 미주 지역 재무관서 기능을 갖게 하고, 그 위원인 서재필을 재무관에 임명했다. 1920년 3·1 운동 기념식을 뉴욕에서 준비, 1920년 3월 1일에는 한국친우회 뉴욕지부 행사에 약 1000여명의 회원이 참석하여 한국의 3.1 만세운동과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집회를 열었다. 1921년에도 뉴욕에서 3·1운동 기념식을 여는데 기여하였다.

 

미국에서 일본이 벌이고 있던 조직적 선전활동에 대항하고, 미국인들에게 조선의 사정을 알리기 위해, 자신이 사용하던 사무실에 한국통신부‘Korea Information Bureau’를 설립한 후 《Korea Review》를 발간하였다. 서재필은 《Korea Review》 통해 미국 대통령에게 공개 편지를 보내 1882년 맺어진 조미수호조약을 준수하라고 요구하였다.

1921년 4월 18일 이승만상하이에서의 문제로 바빠짐에 따라 구미위원부 임시위원장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6월 29일 이승만상하이 문제를 정리하고 미국으로 되돌아올 때까지 임정 구미위원부 사무실을 돌보며 업무를 계속해 나갔다.

 

서재필이 가장 기대했던 것은 1921년 11월부터 1922년 2월까지 개최된 워싱턴 군축회의였다. 1921년 8월 일본해군력 팽창을 억제하고 중국침략을 견제하려는 취지에서 미국이 주최한 태평양회의가 열리자 이승만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단 대표로 워싱턴에서 열린 평화군축회(1921년~1922년)에 파견되었다. 이때의 태평양회의 주제는 태평양을 사이에 둔 미국과 일본의 해군력 강화 경쟁을 완화하기 위해 소집된 것이라는 것을 지인을 통해 알아냈고, 그는 이 기회에 일본군의 철수와 조선의 독립을 설득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곧 군축회의의 '조선인특파단'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으며, 단장은 이승만(李承晩)이 맡고 서재필은 부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워싱턴 군축회의와 좌절

 

임정 구미위원부 발행 50달러권 대한독립공채표

 

 

 

평화군축회의 직전 회의장에서 조선 독립의 정당성, 당위성을 설명한 홍보물들을 태평양 연안 국가 대표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회의 개최 후 그는 조선독립문제를 국제회의 석상에서 공식적으로 다루어줄 것을 요구하는 《한국독립청원서 (Korea's Appeal)》을 각국 대표들에게 제출하였지만, 일본의 방해와 미국의 반대로 끝내 무산되었다. 파리평화회의에서 서재필은 370여 단체의 서명을 받은 연판장을 일본측 대표 도쿠가와(徳川家達)에게 전달하고, 한국의 독립을 승인해줄 것을 각국 대표와 세계여론에 호소했다. 그러나 이 회의에서 한국의 독립문제가 논의는 커녕 전혀 언급조차 되지 않자 실망하여 경제난으로 한인통신부와 한국친우동맹에 관한 사업을 정지한다는 보고를 구미위원회로 보냈다.

 

독립운동 지원에 많은 돈을 지원하는 바람에 이내 파산을 맞고 말았다. 그러나 워싱턴의 군축회의에서는 조선 문제를 상정조차 하지 않았고, 강대국 위주의 약육강식 논리가 적용되었다. 서재필은 이후 깊은 좌절에 빠져 이후 별다른 독립운동과 항일 언론활동을 펼치지 않았다.

 

1922년 조병옥뉴욕 주에 한인교포들의 모임인 한인회를 조직하자 이승만과 함께 이를 지원하였다. 한편 한인회의 총무로 활동하면서 시간적 여유를 얻은 조병옥은 서재필을 정치적으로 보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인 독립운동가들 중에서도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국민회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국민회이탈파 및 동지회 계열이 갈등하면서 일부 한국인 청년들은 서재필을 찾아 중재를 요청하였으나 서재필은 호응하지 않았다.

 

결국 재미 한국인들 간의 갈등은 조절하지 못했고, 생계 문제까지 겹치면서 활동의 어려움을 겪었다. 1922년 2월 9일 구미위원부 위원직을 그만두고, 필라델피아 한국통신부와 한국친우회의 활동에서 손떼고 사업에 전념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계속 활동을 전개하다가 결국 그해 7월 코리안 리뷰(Korea Review) 7월호 발간을 끝으로 한국통신부의 활동은 중단되고 만다. 한국통신부는 문을 닫게 되었으나 대신 한국친우회만큼은 살리려는 그의 노력으로 조병옥, 허정국민회 계열에서 인수하여 친목단체로 계속 활동하게 된다. 1905년부터 잡화상을 경영하며 재산을 모았던 그는 독립운동 자금과 인쇄및 홍보활동, 한국인 대표단 파견 등의 경비로 재산을 쓰다가 파산을 맞이하게 됐다. 이때 일제 강점기 치하의 한국에서 동지인 윤치호가 보내오는 약간의 생활비와 동포들이 기부하는 기탁금으로 겨우 연명해나갈 수 있었다. 상점을 문닫은 그는 다시 일자리를 알아보며 취직을 준비한다.

 

 

 

사업 실패와 생계 곤란

 

1925년 로스앤젤레스 안창호의 집을 방문했을 때

 

 

1925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열린 범태평양 회의에 참석 중

 

 

 

가정 형편이 어려워졌던 서재필은 1922년 이후 양탄자를 취급하는 이탄뉴상회에 입사, 이탄뉴상회 사장으로 재직하기도 했다. 그러나 간간히 한인단체 활동에 관여하였고 수시로 자문을 청하는 이승만, 안창호, 조병옥, 허정 등에게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1925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범태평양회의가 개최되자 한국에서 온 송진우, 윤치호, 김활란, 김성수, 백관수, 신흥우 등과 함께 한국인 대표자의 한사람으로 참석하여 일본의 식민통치의 잔혹함을 규탄하고 독립에 대한 지원을 호소하였다.

 

1925년 6월, 7월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개최되는 태평양 회의에 한국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하기 위해 필라델피아에서 하와이로 건너갔다. 7월 1일부터 7월 14일까지 그는 윤치영, 김활란 등을 데리고 태평양 회의 한국측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한국의 독립의 정당성을 역설하였다. 이에 일본측 대표가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이므로 국제사회가 조선 문제에 개입하는 것은 내정간섭이라고 비난하자, 그는 미국이 필리핀을 속국으로 하고 영국캐나다를 속국으로 하고 있으나 캐나다필리핀의 발언권을 차단하지 않고 태평양 회의에 참석하게 한 점을 들어 일본측 대표의 주장을 논파했다. 이는 논란이 되었고 캐나다, 필리핀 등 각국의 대표들이 한국측 대표단의 손을 들어줌으로서 회의는 결렬되고 만다. 다시 배편으로 출발, 되돌아오는 길에 샌프란시스코, 스탁톤, 다뉴바, 리들리, 로스앤젤레스 등지에 있는 한인 교민 사회를 방문하여 재미 한국인 교포들을 면담하고 위로, 격려하였다.

 

 

 

펜실베이니아 대학 재학과 연구 활동

그러나 서재필은 독립운동을 위해 몇 년동안 사업을 돌보지 못했고, 개인 재산을 많이 지출함으로써, 1924년 법적인 파산을 맞게 된다. 파산으로 극도로 생계가 곤란해진 서재필은 1925년 4월부터 유일한과 장사를 시작했으나 이것도 실패하고 말았다. 1926년 유일한과 동업한 사업이 실패하고 곧 유일한이 귀국하게 되면서 사업을 접게 된다. 1926년 9월 62세의 나이에 다시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의과대학에 특별학생으로 입학하고 동시에 의업을 재개하였다. 또한 미국내에서 벌어지는 안창호파, 이승만파, 박용만파 간의 파벌다툼은 독립운동에 대한 회의감을 품게 했다. 그는 계속된 파벌 다툼과 자기 이익에 골몰하는 행위로는 독립을 하더라도 그 독립을 유지하지 못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펜실베이니아대학 캠퍼스 (Upper Quad Gate)

 

 

 

그는 생계 조달을 위해 막노동을 하기도 했고, 상점의 점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24년에는 파산한 가정 경제력을 복구하기 위하여 서재필은 다시 펜실베이니아 대학으로 돌아가 연구를 다시 계속하기로 결심하였다. 그 뒤 서재필은 펜실베이니아 주 대학병원에서 연구 생활을 계속하였으며, 작은 딸과 함께 지내고 있었다. 생활비와 빚에 쪼들렸고 전기 요금과 수도 요금을 겨우 납부하는 수준에 이르자 그는 생계에 뛰어들게 된다. 후일 작은 딸 뮤리엘 제이슨은 아버지 서재필의 비서와 보좌역을 수행한다.

 

서재필은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친구로부터 2천 달러를 빌려 차임하였다. 그는 이 것으로 2년간의 연구비와 가족의 생활비에 충당할 것을 생각했다. 이후 2년간은 그에게 있어서 격심한 생활난의 연속이었다. 아내와 두 딸을 포함한 네 식구가 끼니를 거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당시 독립운동을 빙자하여 사욕을 채우고 재산을 축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아니하였으나, 서재필에게 그런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1926년 암 치료 전문 병원인 잔느 병원(Geanes Hospital)에 취직하였다.

 

1926년 미국에서 병리학 전문의 면허제도가 시행되자 그는 병리학 의사 면허에 응시하였고, 1927년 4월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의과대학을 수료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계속 삼일신보미국의 언론에 일본의 탄압과 만행을 알리는 칼럼과 기고문을 지속적으로 게재하며 조선독립을 위한 청원을 계속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 공보부와 외무성, 조선총독부 공보국은 조선에서의 통치가 무력 통치에서 문화정치로 바뀌었다고 주장하고, 일선 동조론을 내세우며 이를 일축했다. 일본조선총독부미국에 암살자를 보내지 못하는 대신 하와이필라델피아에 첩자를 밀파하여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의료 활동과 1930년대 활동

1926년부터 그는 병리학 의사 면허에 응시하였고 1929년 전문의 시험에 합격한다. 이로써 서재필은 한국 사람으로서는 최초로 미국의 병리학자이자 한국인 최초의 미국 의사가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병원을 개업하기도 했다.

 

1927년 3월 29일 서재필은 월남 이상재의 부음을 듣고 조선일보에 한 기고에서 "그는 거인이었고, 그의 비범한 탁론과 강직한 기백에 나는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며 추모하였다. 이상재의 장례식 때 잠시 조선에 입국하여 장례식과 노제를 지켜본 뒤 출국했다.

 

1928년 박용만이 텐진에서 의열단이해명, 박인식 등에게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박용만 애도 성명서와 암살자 규탄 성명을 발표했다. 곧이어 이승만 등과 함께 박용만의 공적을 치하하며 암살단을 성토하는 글을 3.1신보와 국민보 등에 발표하였다.

 

독립운동으로 재산을 탕진하고 생계에 치명타를 입게 된 그는 1930년대 초에는 병원에 의사로 다니면서 생업에 종사해야 했다. 1928년무렵부터 한국 인사들이 방문할 때면 그에게 자치론을 설명했고 처음에는 자치론을 반대하다가 나중에는 그것이라도 우선 해 보고 실력을 키워서 독립하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피력하였다. 1932년 안창호가 체포되어 고국으로 송환되면서 다시 병원 업무를 보는 동시에 한인 교민사회의 행사에 참석하게 되었다.

 

당시 국내에 있던 인사로는 윤치호, 김성수, 송진우, 이광수, 조병옥 등과 서신을 주고 받았고 이들을 통해 국내 정세를 접하였다. 1930년부터는 미의학학회지에 5편의 병리학 연구논문을 발표하였다. 1935년 미디아 시내에 개인병원을 개업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후반

 

1930년대 초, 부인 뮤리엘 암스트롱과 함께

 

 

그러나 병원 활동이 어려워지자 그는 여러 병원의 고용의사로 취직하여 활동하였고, 의사로 활약하며 몇 편의 병리학 관계논문을 썼다. 1936년부터 다시 필라델피아에서 병원을 개업, 개업의로 생활하였다. 그동안 국내의 잡지에 대개 민족성 개조와 실력 양성을 주장하는 몇 편의 글을 기고했으며 동아일보 등 국내 언론에 '회고갑신정변', '미국체류 오십년' 등의 글을 영문으로 적어 보내어 번역, 연재물로 수록되기도 했다. 1939년에는 한민족의 위대성을 찬양하는 편지를 한국의 언론에 보내오기도 했다.

 

"한국 민족은 훌륭한 민족이다. 그들은 영리하고 건강하며 생산적이다. 수세기 동안 시련과 고난에 시달려 왔지만 여전히 고유한 민족 문화를 갖고 있으며, 세계 속에서 더 높고 고귀한 지위를 획득하기를 열망하고 있다. 한국 민족에게 필요한 것은 그러한 삶의 조건을 향상시키기 위한 열망을 결집하는 것이며, 정치적·경제적·개인적 자유를 위한 열정을 키우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이루어진다면 더 많은 나라들이 한국 민족의 장점을 인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서재필, 1939년 12월 7일-

 

그 뒤 존스 홉킨스 대학병원, 성 요셉병원, 요옥 병원 등 여러 병원에서 병리학자로 근무하였으며, 종두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있기도 했다. 또한 찰스턴 종합병원 병리과장이 되었다가 1936년 펜실베이니아 주 펜실베이니아 체스터 병원(Chester Hospital) 피부과장을 지내기도 했다. 1938년 3월 10일 안창호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간장병과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자 그는 안창호의 장례식에 참석차 일제 강점기 한국에 입국, 경성의 안창호 장례식에 참석하고 되돌아갔다. 조선총독부일본 정부는 그의 귀국을 내심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당시 그는 미국 국적이었으므로 조선총독부일본 정부는 그를 체포할 수 없었다.

 

태평양 전쟁 초기 자신의 병원을 개소하였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이 격화되면서 징병검사관으로 자원봉사하며 병원일과 징병검사일을 동시에 한다. 태평양 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동안 서재필은 빚을 얻어 자기의 병원을 경영하였다. 병원은 필라델피아에서 8마일 정도 떨어진 메디아에 있었다. 서재필에게는 고된 하루 하루의 일과였으나, 그는 원래 튼튼하고 장대한 신체에 스스로의 길을 스스로 개척해나가야 된다는 강한 정신력으로 고된 격무를 치뤄나갔다.

 

1941년 12월 일본진주만 폭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의 승리가 조선의 해방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77세에 미군 징병검사관으로 자원봉사하기도 했다.

 

 

 

광복 직전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의 진주만 공습

 

 

1940년대 중반의 서재필

 

 

 

그 뒤 1942년부터 1945년 4월까지 미군 징병검사 의무관으로 자원봉사활동을 하여 1945년 1월에는 미국 국회로부터 공로훈장이 수여되었다. 1945년 다시 성 요셉병원에서 근무하였다.

 

1944년 아내 뮤리엘 암스트롱이 병으로 사망했다. 그는 아내의 장례를 치르면서 크나큰 슬픔을 되새겼다.[47] 두 딸 스테파니와 뮤리엘의 슬퍼하는 모습은 그에게 견딜 수 없는 아픔을 주었다.

 

"두 딸을 위해서라도 나는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들에게 피해를 입혀서는 안된다."

 

그는 아내를 잃은 고통을 잊기 위해서도 열심히 일에 전념하였다. 큰 딸 스테파니는 미국인에게 시집가서 잘 살고 있었으나, 둘째딸 뮤리엘은 미혼으로 서재필과 함께 기거하고 있었다.

 

그는 집에 오면 여가를 이용하여 가족들과 함께 테니스를 즐기기도 하였으며, 때때로 야구 같은 것으로 가족과 함께 즐겁게 지내기도 했다. 주말에도 놀거나 나태하지 않았다. 그는 부지런한 생활을 즐겨 채소밭 가꾸는 일에 열중하였고 신문을 읽는 것으로 낙을 삼았다. 더욱이 1945년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난 후 서재필은 신문을 읽거나 채소밭 가꾸기에 더욱 열중했고, 때로는 둘째 딸 뮤리엘과 함께 테니스를 즐기는 등 주로 가정생활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특히 그는 신문 읽기에 열심이었는데 그것은 국제 정세의 움직임에 많은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