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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68 : 조선의 역사 410 (제26대 고종실록 3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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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68 : 조선의 역사 410 (제26대 고종실록 33)

두바퀴인생 2013. 2. 22. 04:32

 

 

 

한국의 역사 868 : 조선의 역사 410 (제26대 고종실록 33)                 

              
 

                                          고종 황제 가족 사진

 

제26대 고종실록 ( 1852~1919년, 재위 : 1863년 12월~1907년 7월, 43년 7개월) 

 

서재필, 그는 누구인가? (계속)

 

 

해방과 죽음

 

광복과 귀국

 

 

이승만, 구한 말에 그의 제자였던 이승만은 해방 직후 정적으로 변신했다.

1

 

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그는 미국에서 한국의 광복과 일본의 패전 소식을 접하였다. 9월부터 미군정이 실시되고 10월 미국에 체류하던 이승만은 비행기편으로 필리핀 마닐라일본 도쿄를 경유하여 귀국했다. 서재필은 출국하는 이승만을 배웅하러 필라델피아 공항까지 직접 마중나와 이승만 내외를 전송하였다.

 

 

1947년 7월, 서재필 박사와 김규식과 여운형.

 

 

미군정에서는 이승만을 견제할 만한 인물을 찾고 있던 미군정의 하지 중장은 서재필을 하지의 고문 겸 남조선 과도정부의 특별의정관으로 초빙하였다. 김규식도 서재필의 귀국을 원하고 있었다. 과도입법의회 의장 김규식의 추천을 받고 서재필에게 여러 차례 귀국 요청을 하였다. 그는 미군정으로부터귀국 교섭을 받았으나 그는 가고 싶지 않다며 조용히 사양하였다.

나는 연로했고, 원래 지위와 권세에는 아무런뜻이 없으며 오로지 동포들의 교육과 계몽에 힘쓰고 싶다.

1946년, 이승만을 견제할 목적으로 미군정청 사령관 존 하지미국에 있던 서재필을 군정 고문관으로 초빙하려 하자 김규식 역시 서재필의 귀국을 원하였다. 그는 서재필 귀국 환영 성명서를 발표하였고, 서재필이 귀국하자 김규식, 여운형, 이승만, 김구 등은 친히 공항에 나가 서재필을 환영하기도 했다.

 

1946년 1월 한국에 일시 방문했다가 되돌아간다. 그러나 미군정에서는 그의 한국 입국을 추진했고, 몇 차례 요청을 고사했던 서재필은 미군정청 사령장관 하지의 요청을 받아들여 미군정청 최고정무관 겸 남조선과도입법의원 특별의정관으로 초빙받아 1947년 6월 1일, 미국을 출발 한국으로 귀국하였다.

 

47년 6월 1일 오후 4시에 경기도 인천부에 상륙했다. 부두에는 이승만, 김규식, 안재홍, 여운형 등이 마중을 나왔다. 그의 귀국 환영을 위해 3·1운동 33인의 한 사람인 오세창을 환영회 위원장으로 해 5만명 정도의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히 개최되었다. 그러나 서재필은 정부수립을 원하는 한국인 지도자들을 겨냥, 인터뷰에서 “한국인들은 비누 한 장도 만들 줄 모르면서 어떻게 독립 정부를 갖기를 기대할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

 

이승만은 처음에 개화파 선배이자 스승인 서재필을 극진히 대접하였으나, 미군정청 사령장관 하지가 자신을 견제할 목적으로 서재필을 활용하려 하자 서재필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귀국 직후 충청남도 아산윤치호 묘소를 참배한 뒤 김규식, 여운형, 김성수, 김구 등을 찾아 면담하기도 했다. 이후 서울 소공동의 조선호텔에서 잠시 숙박하다가 미 군정청에서 내준 군정청 직원 숙소로 이주하였다.

 

 

해방 정국의 정치활동

 

서재필과 둘째 딸 뮤리엘, 김규식(1946년)

 

 

 

 

귀국 직후 하지 사령관 및 이승만 내외와 함께

 

 

이승만은 처음에는 친히 환영사를 발표하여 서재필의 귀국을 환영하였으나 뒤에 미 군정청이 자신을 견제할 목적으로 서재필을 귀국시켰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서재필을 적대시하였다. 김규식은 그의 귀국으로 이승만, 김구의 독주가 견제되기를 희망하였다.

 

귀국 인사로 서재필은 '자신이 한국말을 잊어버렸으며 한국 사정을 잘 알지 못한다'는 점을 솔직하게 시인하였다. 그러나 '힘을 다하여 한국 인민들을 도와주려고 한다'고 다짐했다. 그러면서도'나는 권한이 없는 사람이며 다만 하지 사령관에게 진언할 따름이다'고 덧붙였다. 그를 환영하러 나왔던 한국인 지도자들은 그의 발언에 수긍하였다. 한편 그는 윤치호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그의 묘소를 방문하였다. 기자회견장에서 의친왕 등이 존재하니 그들을 찾아가 볼 것을 권유하는 기자들의 요청을 그는 거절하였다. 귀국 직후 김성수, 이광수, 조병옥 등을 만나 그들로부터 국내 정세를 접했으나, 파벌 다툼이 여전한 것을 보고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파벌 다툼은 여전하다며 한탄하였다.

 

이후 하지 육군 중장에게 자문을 하고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여하였으며 미 군정청 최고고문이 되었다. 서재필의 집무실은 중앙청의 207호실이었다. 그는 숙소인 조선 호텔로부터 매일 출근해 성실하게 근무하였다. 그리고 라디오 연설을 통해 민주주의, 교육, 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방송에도 출연하여 매주 금요일 서울중앙방송국을 통해 주로 자유 민주주의의 이념과 제도를 설명하고 우리국민이 걸어야 할 길을 강의했다. 서재필의 방송과 라디오 그의 연설은 영어로 이뤄졌기 때문에 손금성 박사가 꼭 한국어로 통역을 하거나 다른 번역가들에 의해 번역되어 보도되었다. 7월 3일 그는 미군정청 최고 의정관이 되었다.

 

 

과도입법의원 의원

 

1947년 1월 과도입법위원회 신년사(맨 왼쪽이 서재필, 가운데 털모자에 지팡이를 쥔 이가 의장 김규식)

 

 

둘째 딸 뮤리엘 제이슨과 조카 서호석(徐灝錫, 서재춘의 아들)

 

1946년 10월 미군정에 의해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원(관선)으로 선출, 그해 12월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원에 취임하였다.

 

군정은 김규식과 서재필의 제휴, 협력을 은근히 바랐다. 서재필이 일부 깨인 민중들 사이에 인기가 높고 존경을 받고 있음을 확인한 미군정은 두 사람의 제휴가 성립되면, 그 무렵 미군정이 뒷받침하던 김규식 노선이 현실적으로 큰 지지를 얻게 되리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서재필은 기본적으로 김규식의 노선에 동의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나이가 많음을 내세우며 정치활동에 참여하기를 사양했다. 서재필은 1948년 3월 14일자 인터뷰에서 이승만을 겨냥해 극우적인 운동, 거짓말, 거짓 선전 등과 같은 언어들을 구사하며 격렬하게 비난하였다.

 

귀국 직후부터 그는 김규식을 찾았고 그와 긴밀하게 협력하였다. 그는 김규식이승만을 찾아 서로 협력할 것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이승만과 김규식 모두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그의 협력 요청은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오히려 이승만은 서재필의 귀국이 김규식을 지원하기 위한 계획 또는 자신을 견제하기 위한 견제책임을 간파하면서 그를 냉대하게 된다.

 

한편 고국의 그의 문중에서는 그에게 아들이 없음을 한탄하여 양자(養子)를 들일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두 딸이 있으니 아들보다 낫다며 문중의 양자 들이려는 노력을 사양하였다. 그는 당시 충청남도 논산군 연무대 근처에 있다가 이장된 어머니 성주이씨의 묘소의 위치를 알고 있었지만 한번도 모친의 묘소에 참배가지 않았다. 이 일로 그의 조카들은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1947년 3월 남조선 과도정부 최고정무관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좌우합작운동에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이후 그에게 대통령이 되어 달라는 지지 성명, 청원 운동이 있었다.

 

1948년 5월 대한민국 국회 개원 직전 과도입법의원이 해산됨에 따라 과도입법의원 의원직에서 면직되었다.

 

 

 

출국과 최후

 

대통령 추대운동과 사양

 

대통령 출마 요청서

 

 

연설 중인 서재필 (1947년경)

 

 

그의 정치 참여 요청, 대통령 출마 요청은 제헌국회 총선거를 치른뒤 1948년 6월 1일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5·10 총선이 끝나고 제헌국회가 개원한 그 다음날인 이날, 정일형, 백인제, 이용설 등을 비롯한 지도층 인사들이 서재필을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하려는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1948년 7월 남한 단독 정부 수립 결정이 나고 대통령 선거 일정이 잡히자 1948년 6월 10일 60여 명의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참가하여 무소속구락부를 결성했는데 이들 중 일부는 서재필을 대통령으로 옹립하는 데 가담하였고 서재필이 고국에 남으라는 국회 결의의 통과를 주도하기도 했다.

 

6월 11일 서재필에게 보내는 연명의 간원문이 전달되었다. '지금 조국이 요구하는 사람은 명령하는 사람이 아니라 인민의 뜻을 알아서 이에 충실히 순종하는 정직한 민주주의적 지도자입니다.이 나라에는 그러한 인격자가 한분 계시니 그는 서박사입니다'라는 문구로 시작되는 이 편지는 서재필이 '정계 최고지도자로 출마하시기를'간청했다. 정인과, 백인제 외에도 흥사단 계열 중 최능진과 최능진 계열 인사들이 서재필의 대통령 후보자 출마 운동을 주도했다.

 

6월 29일에는 서박사 추대 연합준비위원회까지 만들어졌다. 백인제, 최능진, 김대중을 비롯한 1,929명이 서재필에게 '한국 초대 정부 대통령으로 추대하고자 하니 대통령 출마를 승낙해 달라'는 내용의 요청서를 보냈으나, 서재필은 '미국 시민으로 남겠노라'며 불출마를 선언하였다. 서재필 추대 운동은 이승만대통령으로 추대하려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에 의해 공개적으로 견제됐다. 이에 서재필은 7월 4일 공식 불출마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1948년 7월 17일 대한민국 국회에서 행해진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자로 추천되었으나 1표를 얻었다. 그러나 1표도 서재필이 미국 국적을 가졌기 때문에 윤치영 의원 등의 반대에 의해 무효로 처리되었다.

 

 

출국과 만년

 

만년의 서재필

 

 

서재필은 미국으로 떠나기 수일 전 기자 김을한에게 '우리 한국 사람은 단결할 줄을 모르고 당파싸움만 하다가 일을 그르치는 수가 많은데, 갑신정변 때나 지금이나 50년이 지났지만 그 점만은 똑같으니 한심한 일이오'라고 하였다. 또한 과도입법의원 선거와 시도지사 선거로 선출된 입법의원과 시도지사를 상관처럼 깎듯이 대하는 시민들에게 선거로 뽑은 것은 국민의 대리인이지 윗 사람이 아닌데, 윗 사람처럼 깎듯이 존대한다며 잘못을 지적했지만 시민들은 그를 이상하게 바라봤다.

 

내가 할 일은 다 했다.

1948년 9월 14일


2008년 5월 워싱턴시 주 미국 대사관 영사부 앞에 세워진 서재필의 동상

 

 

9월 10일 미군정청 최고의정관 직을 사직하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에도 1949년까지 미군정은 한국 정부의 고문 임무를 띠고 주재하고 있었다.

 

그는 이념 대립을 딛고 통일된 조국을 건설해달라는 당부를 남기고 1948년 9월 11일 둘째 딸 뮤리엘 제이슨을 대동하고 미군정을 따라 인천항을 떠났다. 서재필은 미국으로 떠나는 날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인민들은 정부에 맹종만 하지 말것이며 정부는 인민의 종복이고 인민이 곧 주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남기고 배에 올랐다. 그는 아직도 국민들이 조선시대에 살고 있으며, 선거는 인민의 대리인을 선출하는 제도인데 마치 선거로 왕을 선출하는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며 안타까워했다.

 

우리 역사상 처음 얻은 인민의 권리를 남에게 약탈당하지 말라. 정부에게 맹종하지 말고, 인민이 정부의 주인이며 정부는 인민의 종복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이 권리를 외국인이나 타인이 빼앗으려거든 생명을 바쳐 싸워라. 이것만이 평생의 소원이다.
 
— 승선 직전에 한 한마디


승선한 이후에도 창밖으로 인천 제물포 부둣가를 한참 쳐다봤다 한다. 당시 이 선박에는 대한민국 건국 이후 최초로 미국에 유학가는, 건국후 최초의 미국 유학생 32명이 동승하였다. 배편으로 미국에 갔는데 멀미 한번 하지 않았다 한다. 배 안에서 음력 8월 중순이 되자 그는 음력 8월 15일 밤 서재필은 선장에게 한국 음식을 특별히 마련하게 하고 갑판 위에서 남녀 학생들과 파티를 열었다.

 

미국에 가거든 쓸데없는 자들과 어울리지 말고, 군인들이 쓰는 비속어를 쓰거나 어깨를 으쓱하는 몸짓 같은 것들을 하지 말고, 독립국 국민으로서의 긍지를 살려 서투르더라도 점잖고 올바른 영어를 쓰도록 하시오.


1948년 10월 9일 일시 귀국, 서울 운동장에서 열린 민족청년단 창단 2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낭독하였다.

 

 

입원과 최후

1949년 8월 주미한국대사 장면(張勉)으로부터 초청장을 받고 대한민국 정부수립 1주년 기념행사에 초대되었다. 이후 그는 주미한국대사로 부임해온 장면의 방문을 받았다.

 

49년 9월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의료활동에 전념했다. 그러나 후두암에 걸린 서재필은 곧 노환과 과로로 쓰러졌고 결국 병원에 실려가게 된다.

 

1950년 6월 미국에서 한국 전쟁 소식을 접하였고, 6월 병세가 악화되면서 필라델피아 노리스타운 몽고메리 병원에 입원하였다. 장면은 수시로 문병하는 한편 서신을 보내, 입원 중인 서재필의 빠른 완쾌를 비는 한편, 당시 전쟁 상황을 전하며 '지금 상황이 좋지 않더라도 반드시 승리 할 것이다.'는 것과 '자유로운 분위기 내에서 제2대 총선거가 진행되었음'을 전하였다. 그러나 서재필은 휴전을 못보고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월 5일 필라델피아 노리스타운 몽고메리 병원 병실에서 후두암과로의 합병증으로 일생을 마쳤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향년 87세였다.

 

 

사망 이후

1962년 3월 한국 독립 운동에 기여한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공로훈장 수훈 대상자로 지정되었으나 외국 국적자라는 이유로 취소되었다. 1970년 12월 13일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훈 1등)을 수여받았고, 1991년 외가인 전라남도 보성군에 서재필 기념공원이 설립되었다. 그 해 고향인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에 송재 서재필선생 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다.

 

사망 직후 미국 필라델피아에 묻혔다가, 1994년 대한민국의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1969년 천리구 김동성, 유홍(柳鴻) 등이 서재필박사 유해환국 봉안회를 조직하여 펜실베이니아 주에 있다는 서재필의 묘소를 수소문하기 시작하였다. 그 뒤 서재필의 시신은 화장되어 필라델피아 교외 메디아의 비브 교회 공동묘지의 납골당에 안징되었다.

 

1969년부터 서재필의 묘소를 찾고 환국 운동을 추진한다. 두 딸 스테파니와 뮤리엘은 자신들이 살아있을 때만이라도 아버지의 유골을 직접 돌보게 해달라며 유골 송환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뒤 1990년대 다시 서재필 유골 봉환문제가 재논의되었다.

 

서재필 유해의 국내 봉환문제가 논의되었을 때 그의 외손자 필립 하디칸은 반대하였다. 서박사의 유일한 외손자(첫째딸 스테파니 제이슨의 아들) 필립 하디칸은 유언을 통해 서재필 유해의 국내봉환을 반대했다. 딸 뮤리엘 제이슨 역시 "내가 사망하기 전에는 안된다"고 주장해왔고, 이후 몇차례의 추진에서도 국내 안장지 문제 등을 놓고 논의단계에 맴돌다 수포로 돌아가기도 했다.

 

 

유골 송환 이후

필립 하디칸1993년 3월에 사망하였으나 그의 유언도 큰 걸림돌이 됐었다. 필립 하디칸은 그동안 한국 정부의 성격을 문제삼아 국내봉환을 반대해 왔었다. 또한 대한제국 정부에서 그의 가족을 연좌제를 적용해 처형한 점 역시 서재필에게 개인적인 상처가 되었고, 한국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은 그가 미국에서 재혼해서 얻은 자손들에게도 부분적으로 이어졌다. 이때문에 묘지 측에서는 서재필의 유해를 내주는 것을 반대했고, 우여곡절 끝에 유해는 국내로 봉환되어 1994년 대한민국의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1996년 3월에는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서재필의 생부 서광효가 살던 곳, 그의 본가는 충청남도 논산군이었으나 출생지는 그의 외가가 있던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이라서 2008년 7월 8일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에는 ‘서재필 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기념공원은 넓이 4만 5700제곱미터이며, 그 안에는 당시의 외가를 복원한 ‘서재필 기념관’이 세워져 있고, 그밖에도 독립문, 사당, 조각공원, 동상, 야외공연장 등이 들어서 있다. 2001년 8월부터 준공한 서재필기념관은 7년만에 완공되어 개관하였다.

 

1975년 미국 필라델피아서재필 기념재단이 만들어져 의료, 봉사, 장학 및 교육, 지역사회 활동을 하고 있으며, 필라델피아 근교인 미디아에 서재필 박사가 살던 집을 서재필 기념관으로 만들어 개방하고 있다. 2008년 5월 미국 워싱턴에 동상이 세워졌고 워싱턴시는 5월 6일을 ‘서재필의 날’로 지정했다. 전라남도청에는 신설 강당 중 서재필실을 개관하기도 했다. 2004년에는 서재필기념회에서 '서재필의학상'을 제정하였다

 

 

 

 사상과 신념

 

독립에 대한 희망과 좌절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당에 몸을 담았던 그는 당시 급진적이었다. 미국 망명에서 돌아온 서재필은 밑으로부터의 개혁을 추진하여 언론과 교육을 중요시하였다. 또한 개혁을 추진함에 있어 그는 일본의 후원을 얻어 친일적인 성격을 띄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민족주의자이기도 하였는데 1896년 고국에 돌아와 처음 발표한 글에서 조선이 동양의 강대국 중의 하나가 될 것이라고 확신하는데 조선 사람들이 과학이나 예술의 어느 분야라고 해도 배울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사고방식은 매우 논리적이라고 평하였는데, 불운했던 10년 미국 망명 후에도 조선의 민족성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1904년 4월 한성 감옥에 수감중이던 청년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러일전쟁을 치르고 있는 일본은 옳은 쪽에서 모든 개명된 나라들이 지지하고 옹호하여야 할 원칙을 위해서 전쟁을 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정의와 문명을 위해 싸우는 나라와 같이 하기를 진정으로 기도한다고 하며 일본의 의도를 선의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1918년 11월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한국일본의 밥이 되었고 그 모든 권리가 박멸되고 백성들이 승전국의 노예가 되어 구차한 명을 보전하였다고 적었으며 자신이 이 원통한 사정을 알리고자 한다고 하였는데 그 사이에 일본의 침략주의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 있음을 알 수 있다. [64] 이후 그는 삼일운동에 적극 호응했으며 1919년 4월 한인연합대회(제1차 한국의회)를 필라델피아에서 개최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민중 계몽 운동

서재필은 자유주의민주주의를 바탕 삼아 민중을 지도, ‘자주독립의 완전한 국가’를 만든다는 뜻으로 독립협회를 1896년 7월 2일 창립했다. 독립협회는 초기에는 개혁 인사와 고급 관료들의 사교모임 수준이었으나, 점차 개혁을 추구하는 관료와 지식인층이 모이는 사회단체로 변화했다. 협회가 만민공동회 개최를 시작으로 민권을 지키기 위한 사회운동을 벌이자, 보수세력은 이상재, 남궁억독립협회 요인 17명을 체포했다.

 

그는 개혁 이전에 민중들의 의식 수준이 개화되고, 합리적으로 변해야 된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배재학당협성회를 통해 토론을 보급하려 했다. 토론은 성공적이었고 서재필은 1년간 자신의 강연을 수강한 학생들 가운데 우등 1명, 이등 1명, 삼등 2명의 학생을 뽑아 각각 5원, 3원, 2원씩의 상금을 수여하였다. 그는 토론하는 문화가 백성들 사이에 정착되기를 바랬고, 자신의 토론회에 참석하는 젊은이들을 통해 토론문화가 확산되기를 기대하였다. 또한 그는 유길준의 민중계몽 주장에 적극 공감하였다.

 

한편 일본 외상은 일본 제국 의회에서의 연설을 통해 조선이 '언제든지 타국에 의지하여 지내온 버릇이 있어 국가 간의 평화를 얻는 데 있어서도 타국에만 의지하고 외교를 하는 데도 일관성이 없다'는 식으로 당시 조선 왕조의 주체성 결여와 무능력을 비웃었다. 이에 서재필은 감정적인 대응보다는 그 뜻을 해석하는 것이 우선이라며 감정적인 대응을 비판했다. 오히려 서재필은 독립신문 사설을 통해 “우리나라에서 벼슬하고 백성 된 이들은 눈을 뜨고도 눈먼 판수(盲人)요, 귀가 있고도 귀먹은 사람들”이라고 개탄하면서 갑오경장 이후의 조선의 모습이 ‘외면은 개화, 내면은 미몽’임을 신랄하게 지적하였다.

 

그는 청년들에게 각지를 여행하고 외국 여행도 다녀올 것을 권고했다. 보다 많은 곳을 돌아다니고, 넓은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여러 사람을 만나봐야 사람의 시야와 눈이 트이게 된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이에 따라 이승만김규식에게 해외 유학을 권고하고 그들의 학비와 경비를 대주기도 했다.

 

한편 독립협회를 통해 의회 설립 및 입헌군주제로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정부를 전복하려는 반역자로 취급당하자 그는 상당히 실망하게 된다. 그러나 갑신정변독립협회의 실패 이후 그는 민중에 대해 냉소적으로 보게 된다. 그는 사고방식의 개선과 합리성 없이는 개혁도, 독립도 달성할수 없다고 규정했다.

 

 

공산주의,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

해방후의 서재필의 사상의 핵심은 한국이 통일 독립되고 번영하려면 자유민주주의를 착실하게 운영해야 한다는데 있었다. 그 때 온 겨레가 열망하던 민족통일의 비결도 자유 민주주의의 실현에 있다고 그는 외쳤다.

 

서재필은 공산주의사회주의를 혐오하였다. 그는 공산주의사회주의히틀러나치와 같은 유해한 집단이라고 반복해서 언급, 지적하였다. 공산주의사회주의와 같은 당 독재체제 아래서 인간은 자유로울 수 없으며 독립된 인격을 가질 수 없는 만큼 국민의 힘이 모아지지 않음에 반해, 자유민주주의 아래서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게 됨으로써 국민의 힘이 저절로 모아져 통일의 원동력으로 작용하게된다는 뜻이었다. 공산주의파시즘은 인간의 영혼을 갉아먹는 사상이라며 반대 의사를 여러번 반복하였다

 

 

정부 맹신에 대한 비판

 

1947년 귀국 직후 사진
(앞줄 왼쪽 두 번째는 춘원 이광수, 세 번째는 딸 뮤리엘, 가운데는 서재필, 뒷줄 가운데는 주요한(뮤리엘 뒷편에 선 남자)

 

 

서재필은 한국이 봉건 왕조체제였던 1894년 무렵부터 강연과 글을 통해 인간의 평등, 자유의 필요성, 신분 차별 철폐, 국민의 참정권을 요구하였다. 갑신정변으로 그는 민중들을 대상으로 한 개혁 설득을 일시적으로 중단하였으나, 1895년 12월 귀국하면서 다시 평등, 자유, 차별철폐, 참정권 요구를 강연과 글을 통해 발표하였다. 그러나 1946년 10월과도입법위원회 의원 선거와, 각 지역민의 시도지사 선거 때에도 국민들은 선거를 자신을 다스려 줄 지도자를 선출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서재필은 선거를 통해서 지도자를 선출하는 것은 자신을 다스릴 지도자를 뽑는 것이 아니라고 설득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도리어 그가 이상한 사람인 것처럼 인식되기도 했다.

 

정부를 맹신하고 관리들을 지나치게 어려워하는 것 역시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1948년 9월 11일 다시 출국하면서 서재필은 '인민들은 정부에 맹종만 하지 말것이며 정부는 인민의 종복이고 인민이 곧 주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된다.'고 거듭 당부하였다.

 

그가 가장 싫어했던 것은 관존민비(官尊民卑) 사상과 고루한 봉건적 유습이었으며, 스스로 개척하려는 의지가 없는 것과 게으름과 의뢰심이었다.

 

 

합리주의적 사고관

그는 일한 만큼 댓가를 받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동시에 그는 온정주의를 심히 불쾌하게 여겼다. 그는 '길을 스스로 개척해나가야 된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자신의 가족이 타인에게 피해를 입혔을 때는 반드시 스스로 잘못을 시인하도록 요구했다. 그는 독립운동 참여로 생계에 곤란을 겪으면서도 "두 딸을 위해서라도 나는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들에게 피해를 입혀서는 안된다."며 스스로 생업 전선에 열심히 뛰어들었다. 독립운동에 종사하며 자금은 주변의 애국 지사들이나 뜻있는 시민, 익명의 독지가들에게 기대도 된다는 다른 독립운동가들의 발언에 그는 심한 불쾌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는 자녀 교육에도 적용되었다. 그는 둘째 딸 뮤리엘이 학급에서 1등을 할 때에는 그 때마다 1달러의 특별 상금을 주곤 하였다.

  • 서재필 : 뮤리엘. 더욱 열심히 공부해야 해요. 내 귀여운 뮤리엘!
  • 뮤리엘 : 네, 파파! 더욱 열심히 공부하겠어요. 1달러의 상금을 또 타기 위해서라도 말이에요.

서재필은 두 딸을 지극히 사랑하였으며, 딸들도 아버지 서재필을 하늘과 같이 생각하고 있었다. 뮤리엘은 그때 받은 1달러들을 오래도록 추억하였다. 그 때 받은 1달러는 영원히 잊을수 없는 추억이 된다고 후일 술회하였다. 한편 딸들이 잘못을 하였을 때는 사소한 잘못이라고 해도 눈감아주거나 넘어가지 않고 잘못을 스스로 인정하고 사과, 반성할 것을 요구했다. 가정에서의 서재필은 평소 자애스러운 아버지이면서도 반면에 엄격한 가장이기도 했다. 자녀들의 일도 스스로 하게끔 유도했고, 어려서부터 두 딸들이 집안 일을 하거나 어머니를 도우면 상으로 1센트에서 1달러씩 용돈을 주기도 했다. 그는 1947년 귀국해서도 민생을 시찰하면서 조선인들에게 부모들이 자녀들의 빨래와 일을 대신 해주는 것을 보고 자녀들의 빨래와 살림살이는 자녀들에게 시키는게 당연하지 않느냐며 나무라기도 했다.

 

그는 늘 '오직 충실과 근면만이 인생의 올바른 생활태도'라고 항상 이야기했다. 사람을 상대할 때도 편견이나 차별대우를 하지 않고 똑같이 객관적으로 대하였다. 한편 그는 민족주의에는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맹목적인 민족주의는 인간을 비이성적이고 불의(不義)하게 만든다는 게 그 이유였다. 민족과 정의,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권리나 자유를 침해하는 것에는 반대하였다.

 

 

독립운동에 대한 관점

그는 독립운동을 한다는 명분으로 다른 사람의 재산을 함부로 약탈하거나, 다른 사람을 사살하는 인사들에 대한 노골적인 경멸과 혐오를 감추지 않았다. 1928년 박용만의열단박인식이해명 등에게 암살당하자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동료에게 누명을 씌워서 살인을 한다며 의열단을 성토하기도 했다.

 

서재필은 독립운동이니 무슨 사업이니 한다면서 자기는 자기 힘으로 아무것도 생활의 길에 힘쓰지 않고, 순전히 남의 재산, 남이 벌어놓은 것을 빼앗아 먹고 지내는 것을 보고 심한 구토를 느꼈던 것이다. 아무리 국가나 민족을 위한다고 떠들고 있으나, 실은 비양심적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서재필은 독립운동에 헌신하면서 그 경비 조달을 위해서 자신의 집까지도 저당잡혔던 것이다. 그러나 소모만 되는 독립운동 비용을 전혀 보충할 길이 없었다.

 

그의 집은 3.1운동 이후 사업이 파산하면서 가난에 허덕여야 했고, 생계는 그가 의사로 활동하거나 취직하거나 아내 뮤리엘이 회사에 다니면서 조달했다.

 

서재필이 안창호를 만난 1925년은 그가 60대의 노인이었을 때였다. 안창호가 서재필을 남달리 존경하게 된 것은 3.1 운동 당시 갸륵한 봉사자로서 그의 재산과 몸을 다 바쳐 패가망신하다시피 한 헌신자였기 때문이었다.

 

서재필은 안창호는 독립된 문명국가를 건설하되 서두르지 말고 국민을 계몽시켜 가며 민주주의 방식으로 하자는 입장이었다. 또한 안창호는 서재필을 끝까지 스승으로 섬겼다.

 

 

자유주의

그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하늘이 내려준 것이며 아무도 상대방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할 자격은 없다고 역설했다. 이는 1896년 귀국 직후부터 1898년 5월까지 각지의 강연과 연설을 통해 천부인권설을 주장하며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역설하였다.

 

1897년 7월 30일의 한 강연에서는 "인간의 자신의 권리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임금이나 아버지를 죽일 수도 있다"는 발언을 하였다. 그의 발언은 사회적으로 충격을 주기도 했다. 윤치호는 그의 이 발언을 일면 수긍하면서도 너무 나갔다고 평하기도 했다.

 

 

이완용에 대한 경멸

서재필은 평생 이완용을 경멸하였다. 서재필은 한때 이완용을 애국자라고 생각하였으나 그가 친러파와 친일파로 변신하자 그를 혐오하였다. 그는 한 때 독립협회장을 지내고 만민공동회를 이끌었던 인물이다. 서재필이 발행한 '독립신문' 1897년 11월 11일자 논설은 “이완용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라를 위해 외국에 이권을 넘겨주는 것에 반대했다”면서 그를 “대한의 몇 째 아니 가는 재상”으로 극찬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친러파가 되어 독립협회를 공격하고, 나중에는 한일 합방에도 참여하자 그에 대한 증오와 경멸을 한층 강화하였다.

 

 

고학생 지원

허정 등에 의하면 그는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러 오는 유학생들의 나약함을 지적하며 상당히 싫어했다고 회고하였다. 허정은 '서재필이 자기에게 도움을 청하러 오는 사람들을 제일 싫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유학생들의 생계와 학비를 지원해주기도 한다.

 

서재필은 힘이 닿는 대로 조국의 유학생들에게 경제적인 원조를 아끼지 않았다. 가끔 그를 찾아오는 한국인 유학생들에게 그는 언제나 다정한 보호자의 역할을 하였다.

조국의 내일을 위해서 여러분은 오늘 열심히 연구하고 실력을 기르는 데 열심하여야 하오. 훗날 조국이 다시 빛을 찾는 날 여러분은 선진 민주주의 생활 방식과 그동안 기른 실력을 조국을 위해 발휘하여야 할게요. 아무쪼록 열심히 연구하시오.


서재필은 이렇게 유학생들을 격려하는 한편, 멀리 이국 땅에서 배움에 열중하는 이들의 곤란을 이해하고 경제적인 보조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오천석(吳天錫), 조병옥, 김활란한국인 유학생들에게 경제적인 보조를 많이 하였으며, 이들을 적극 격려하였던 것이다. 후일 오천석은 서재필의 종손인 서명원에게 유학 당시를 회고하며 서재필에게 경제적인 보조를 받았다고 술회하였다.

 

 

논란과 의혹

 

 

친일 지원 논란

2005년 언론인 박선협은 친일 의혹을 제기하였다. 2005년 2월 박선협은 청와대에 ’신문의 날’을 혁파해야 한다는 민원을 제출했다. 독립신문이 친일 논조를 펼쳤고 창간을 주도한 서재필이 친일 행각을 벌였으므로 이 신문의 창간을 기념해 제정된 신문의 날은 다른 날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박선협은 3월 15일 연합뉴스에 '광복 60주년의 해를 맞아 광복의 의미를 새롭게 일깨우기 위해 청와대에 민원을 냈다'면서 '매국노 이완용도 독립협회에 참여했을 정도로 당시 서재필과 독립신문은 일본의 힘을 빌려 청나라로부터 독립하려고 했다'고 밝혔다.

 

이에 청와대는 "관련단체에 넘겨 검토하겠다"는 회신을 보내는 한편 문화관광부에 이관했으며 문화부는 신문협회ㆍ편집인협회ㆍ기자협회에 검토 의견 제출을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다. 당시 문화관광부의 김정화 사무관은 “신문의 날은 정부가 제정한 국경일이 아니라 민간단체가 제정해 기념하는 날이어서 언론계의 뜻을 존중하겠다”고 밝혔다.

 

박씨의 주장에 대해 언론단체들은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편집인협회의 최문기 사무총장은 “이사회에 보고해 논의는 하겠지만 신문의 날이 큰 문제가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고 말했으며, 이천구 기자협회 사무국장도 “전문가에게 자문해 입장을 정리할 계획”이라고 답변했다.

 

관련학계에서도 신문의 날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에는 부정적인 반응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정진석 한국외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신문의 날은 서재필 개인이 아니라 독립신문 창간을 기념하는 날이며, 독립신문은 최초의 민간지로서 개화사상과 독립운동의 정신적 원류가 되고 있다"고 밝혔다.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김민철은 "서재필과 독립신문이 친일적 논조를 펼친 것은 러시아의 침략을 경계하는 분위기 속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본질을 꿰뚫지 못한 시대적 한계 때문"이라며 "독립신문의 의미가 과도하게 평가된 측면이 없지 않으나 신문의 날을 바꿀 정도로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저서

  • 《한수의 여행》(1922년): N.H.Osia라는 필명으로 쓴 영문소설 단행본, 최초의 한국계 미국 소설
  • 회고록 (미간행)

 

 

가족 관계

 

양아버지 서광하는 생부 서광효의 6촌 형제였다. 큰딸 스테파니 제이슨미국인과 결혼했다. 화가인 둘째 딸 뮤리엘 제이슨은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아버지를 곁에서

도왔다.

 

형 서재춘의 손자 서태원(전 감신대 교수)은 6·25 전쟁북조선으로 납북되어 갔고  생존 자손으로는 현재 종손자인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서희원, 서태원의 아들이며 서재필의 종증손자인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변호사로 있는 서동성이 생존해 있다. 서동성은 변호사업 외에 이민100주년남가주기념사업회 공동회장과 서재필기념사업을 하고 있다.

 

종손 서명원은 생부를 잃고 백부의 손에 자랐다 하며 서재필이 귀국할 무렵에 살아남은 친 조카는 서찬석, 동생 서재우의 아들 서호석 등이 있었다.

  • 6대조 : 서명형(徐命珩)
  • 5대조 : 서유승(徐有承)
  • 고조 할아버지 : 서정보(徐庭輔)
  • 증조 할아버지 : 서범순(徐范淳)
  • 할아버지 : 서상요(徐相堯)
  • 양 아버지 : 서광하(徐光夏, 아버지 서광효의 6촌이었다.)
  • 양 어머니 : 안동 김씨(安東金氏, ? - 1884년)
  • 아버지 : 서광효(徐光孝, 1836년 ~ 1884년 12월)
  • 어머니 : 성주 이씨(星州李氏, 1837년 ~ 1884년 12월)
    • 친누나 : 서씨, 갑신정변 이전에 이미 결혼하였으므로 연좌제를 면할수 있었다.
    • 친형 : 서재춘(徐載春, ? ~ 1884년 12월, 음독자살)
      • 조카 : ?
        • 종손 : 서태원, 신학자, 6·25 전쟁북조선으로 갔다.
        • 종증손 : 서동성(1935년 ~ , 미국에서 변호사로 활동)
      • 조카 : ?
        • 종손 : 서명원
        • 종손 : 서희원
      • 조카 : 서찬석(徐灒錫, 1882년 - ?)
      • 조카 : 서호석(徐灝錫)
    • 친형 : ?(, 1851년 ~ 1884년, 처형되었다.)
    • 친동생 : 서재창(徐載昌, 1866년 ~ 1884년 12월 13일, 조선의 군인, 참형되었다.), 일설에는 그가 1865년생이라는 설도 있다.
    • 친동생 : 서재우(徐載雨, 1868년 ~ 1884년 12월)
      • 조카 : 서호석(徐昊錫)
    • 여동생 : 서기석
    • 매제 : 이OO
  • 처 : 광산김씨(光山金氏, ? ~ 1884년 12월, 음독자살)
    • 아들 : 요절(1882년 ~ 1884년)
  • 후처 : 뮤리엘 암스트롱(Muriel Armstrong, 1877년 ~ 1944년)
    • 딸 : 스테페니 제이슨(Stephanie Jaisohn, 1896년 ~ 1991년 4월 5일)
      • 외손자 : 필립 하디칸(? - 1993년 3월 사망
    • 딸 : 뮤리엘 제이슨(Muriel Jaisohn, 1898년 - 1987년 6월 16일, 미국의 화가), 독신
  • 13촌숙 : 서광범(徐光範
  • 양 외삼촌 : 김성근(金聲根)
  • 외척 : 김균
  • 외증조부 : 이유원, 조선에서 이조참판 역임
  • 외조부 : 이기대(李箕大, 다른 이름은 이영석, 1792년 ~ 1858년, 참판 역임)
  • 외조모 : 장흥 임씨, 1남 5녀, 5녀가 그의 어머니이다.
  • 외조모 : 경주 김씨, 1남
    • 친 외삼촌 : 이지용(李志容, 1825년 ~ 1891년)
      • 친 외사촌 : 이교문 (李敎文, [1846년]] ~ 1914년, 항일의병장)
        • 외종질 : 이일(李鎰, 1868년 - 1927년)
          • 외종손 : 이용순(李龍淳), 독립운동가
    • 친 외삼촌 : ?
      • 외사촌 : ?
        • 외종질 : ?
          • 외종손 : 이학순(李鶴淳, 1896년 - ?)
  • 종손 : 서희원, 전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평가와 비판

 

1940년대의 평가

1945년 10월 10일부터 11월 9일까지 선구회(先毆會)라는 단체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를 지목하는 설문조사 결과에 5%가 서재필을 지목하였다. 그 뒤 11월 선구회에서 다시 대통령에 적합한 인물을 설문조사했을때는 지목되지 않았고, 1948년 6월 23일 조선여론협회에서 다시 조사한 결과(누가 초대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가?)에서는 118표로 3위를 하였다.

 

조병옥은 그가 우리 한민족의 한 사람으로서 제일 먼저 미국민주주의독립정신을 배우고 나가서는 그 현실에서 생활할 수 있었던 최초의 선각자라고 평가하였다.

 

 

 

평가

서재필은 개화사상가, 혁명가, 독립운동가, 군인, 의사, 정치가 등 실로 다양한 직업을 가진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생계를 돌보지 못하면서까지 한인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을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송건호는 "그는 이 땅에서 다시 견줄 바 없는 개혁, 구국, 자유, 독립의 애국투사였으며 조국의 장래와 동포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헌신적인 봉사를 아끼지 않은 사랑의 봉사자였다."라고 하였다.

 

백학순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초당파적 정치가'를 염원하는 중도파에 의해 1년2개월 동안 귀국했던 서재필(徐載弼)은 조국의 통일 민주국가 수립을 위한 최후의 봉사를 한 셈이었다고 평가하였다.

 

서재필이 청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로 힘이 넘치고 주장이 명확한 연설로 유명하다면, 윤치호는 특유의 온화함과 차분함으로 상대방을 논리적으로 설득시켜 감화시키는 연설이 특징이 있다는 평가도 있다.

 

 

비판

대한민국대통령 권한대행국무총리를 지낸 허정(許政)은 "그에게서도 강렬한 양반의식(양반으로서의 우월의식)을 느낄수 있었다." 고 평가했다. 허정에 의하면 그의 사고 방식이나 생활 태도는 이미 상당히 미국화되어 있었다고 평가했다. 한국국적을 버리고 미국 국적을 취득한 것 역시 부정적인 평가가 되고 있다.

 

친일파의 거두 이완용, 박영효 등과 친분관계가 있었던 점이 부정적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역사 재해석이 유행이 된 최근에 와서는 서재필이 친일파 이완용과 친밀해 독립문 현판을 이완용이 썼을 정도였다는 점과 독립신문의 시국관, 친미적 시각 등 부정적인 평가문제들도 역사학계에서 제기되고 있다.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건립한, '독립문의 건립자'로도 알려져 있다.

 

 

기타 시각

사학자 최태영은 "일부에서는 서재필선생이 미국 국적을 가졌고 이름도 미국식으로 바꿨다고 비판하지만 그분은 모든 것을 근대화와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생각했지 다른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분의 진심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며 그를 옹호하기도 했다.

 

 

성격

차갑고 냉정했다는 평가가 있다. 대통령 권한대행 겸 내각수반을 지낸 허정(許政)은 후일 그가 매우 정열적이라는 인상을 주었다고 회고하였다.  그의 독립심과 투지는 대단하였다. 박영효서광범갑신정변 이후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다시 귀국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이 양반의 자제라는 자존심과 함께 노동이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하였다. 그러나 서재필은 같은 양반집 도련님인데도 철도 노동자로 일하면서 학업을 마쳐 의사가 되었다.고 하였다. 또한 개인주의적이라는 시각도 있다. 허정은 서재필이 자기에게 도움을 청하러 오는 사람들을 제일 싫어했다고 회고하였다.

 

 

 

윤치호와 서재필의 비교

서재필이 배재학당의 젊은 학생들과 애국적인 시민을 독립협회로 모으는 데 기여했다면 윤치호는 자신의 인맥을 활용하여 양심적인 중견 관료들과 개혁적인 젊은 관료들을 하나로 묶어 독립협회의 내적 통합에 기여했다.

 

급진적이라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윤치호1884년 갑신정변의 정국에서 서재필과 달리 점진 노선을 택해 살아남을 수 있었고, 가족 또한 안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잠재적인 신변의 위협 때문에 결국 유학이란 명분으로 망명객이 되어 십년 이상 외국을 떠돌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서재필과 크게 차이는 없었다.

 

서재필이 미국에서 혈혈단신으로 고투하였던데 반해, 윤치호상하이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후 미국에서도 교회기독교청년회를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쳐왔기 때문에 연설의 경험을 풍부하게 축적할 수 있었다. 작은 일까지 매일 기록하는 꼼꼼한 성격과 겸손하며 성찰적인 태도 덕분에 남의 장점을 수용하여 늘 나아가고자 노력한 윤치호의 연설에는 깊이가 있었다. 서재필은 미국 망명 후 기독교인이 되었지만, 기독교 신앙 자체와 그 세속화된 형태의 미국의 시민종교(공화주의민주주의)를 구분할 수 있었다. 자신의 은인 홀렌백이 '선교사가 된다면 대학교 학비를 대겠다'는 요청을 뿌리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스스로 기독교인임을 잊지는 않았지만 기독교 그 자체가 사회운동을 대체할 수 있다고는 믿지 않았기에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때로는 과하다고 할 정도로) 미국식 사유와 생활 방식을 조선에 이식하여 그 근본적인 급진성을 통해 사회운동을 일으키려고 한 것이다.

 

반면에 윤치호기독교 개종 이후 삶의 중심을 언제나 신앙에 두었다. 개종의 동기는 개인적 차원이었지만 개종과 동시에 민족적 차원에서 기독교와 조선을 언제나 결부시켰다. 조선 문화에 깊게 뿌리박은 가족주의적 습속을 돌파하지 않고는 개혁이 불가능하고, 그 낡은 구질서를 깨뜨리기 위해 조선의 사회에 예수의 가르침을 설파할 책무를 수행하고자 했다. 그러나 종교와 민족을 하나로 놓고 사유하는 윤치호의 선지자적 태도는 독립협회 회원 및 참여 민중 대부분에 파고들 여지가 없었다.

 

 

추모 활동

1975년부터 서재필 기념재단이 건립되어 학생들의 장학금 지급, 장학 사업, 의료 지원 사업 등을 추진하였다.

 

1996년 4월 1일에는 한국 프레스센터 서울갤러리에서 한국프레스센터 등의 주최로 <서재필과 독립신문> 특별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2004년부터는 서재필 기념재단에 의해 서재필의학상이 제정되어 매년 수여되고 있다. 그가 만년에 거주한 저택인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제이슨 하우스는 딸 뮤리엘 제이슨이 계속 거주하였고, 남편 사별후 혼자된 장녀 스테파니 제이슨이 함께 살았다. 두 딸이 죽자 서재필 저택 제이슨 하우스는 한인사회에 의해 기념물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2004년 서재필 기념관이 그의 저택 제이슨 하우스에 개관되었다.

 

2002년 4월 4일에는 독립기념관에 그의 어록비가 제막되었다. 어록비 전면에는 “합하면 조선이 살테고 만일 나뉘면 조선이 없어질 것이요…”로 시작되는 76자의 글이 새겨졌다. 이 글은 서 박사가 미국에서 육성 녹음해 1949년 3.1 운동 30주년을 맞아 국내에서 공개된 연설문 ‘조선동포에게 고함’의 일부이다. 서재필의 조선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육성 연설문 내용의 일부가 녹음되어 현재 전하고 있다.

 

2008년 5월 6일 워싱턴 DC 소재 주미 한국대사관 총영사관 앞에 서재필의 동상이 제막되었다. 서재필 동상 초석 정면에는 '최초 한국계 미국인―한국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한 개척자'라고 씌어 있다. 전신 청동상은 이재길 전남대 미대 교수가 조각했다. 좌측 면에는 이은상 시인이 서 박사 생애를 압축한 한글 헌사를 담았고, 우측 면에는 서 박사 전기를 저술한 이정식 펜실베이니아 대학 교수의 영문 헌사가 있다. 2011년에는 서재필 언론문화상이 제정되었다.

 

 

기타

1948년 7월 21일의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선거는 10시 25분에 개표되어 11시 5분에 개표가 종료된다. 이때 서재필의 표가 나오자 윤치영 의원은 외국 사람에 투표할 수 없다며 무효 선언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어 서우석 의원이 외국인에 대한 투표는 마땅히 무효를 선언해야 된다며 발언을 이어가게 되고, 다른 의원들도 가세하면서 장내소란이 이어졌다.

 

당시 국회에서 사회를 보던 김동원 부의장은 서재필 박사가 외국인인지 한국인인지 분명하지 않으니 오후에 결정하겠다고 하자, 서우석 의원은 서재필 박사가 군정의 최고의정관으로 미국인 신분으로 입국했다며 또한 그가 입법의원에 와서 정당에 관한 강연을 하면서 한 발언 중 '나는 미국 사람인 까닭에 조선에 와 대통령 될 수 없다고…… 다만 된다면 외국 사절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발언한 기록이 남아 있다며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2000년에는 독립기념관 연구원 홍선표가 엮은 'My Days in Korea'가 발간되었다. 이는 서재필이 1896년부터 1948년 사이에 국내외 신문과 잡지 등에 영문으로 발표한 수필 강연문 방송원고 등을 모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