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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69 : 조선의 역사 411 (제26대 고종실록 34) 본문
한국의 역사 869 : 조선의 역사 411 (제26대 고종실록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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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황제 가족 사진
제26대 고종실록 ( 1852~1919년, 재위 : 1863년 12월~1907년 7월, 43년 7개월)
서재필에 대한 평가와 비판
평가와 비판
1940년대의 평가
1945년 10월 10일부터 11월 9일까지 선구회(先毆會)라는 단체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를 지목하는 설문조사 결과에 5%가 서재필을 지목하였다. 그 뒤 11월 선구회에서 다시 대통령에 적합한 인물을 설문조사했을때는 지목되지 않았고, 1948년 6월 23일 조선여론협회에서 다시 조사한 결과(누가 초대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가?)에서는 118표로 3위를 하였다.
조병옥은 그가 우리 한민족의 한 사람으로서 제일 먼저 미국식 민주주의와 독립정신을 배우고 나가서는 그 현실에서 생활할 수 있었던 최초의 선각자라고 평가하였다.
평가
서재필은 개화사상가, 혁명가, 독립운동가, 군인, 의사, 정치가 등 실로 다양한 직업을 가진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생계를 돌보지 못하면서까지 한인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을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송건호는 "그는 이 땅에서 다시 견줄 바 없는 개혁, 구국, 자유, 독립의 애국투사였으며 조국의 장래와 동포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헌신적인 봉사를 아끼지 않은 사랑의 봉사자였다."라고 하였다.
백학순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초당파적 정치가'를 염원하는 중도파에 의해 1년2개월 동안 귀국했던 서재필(徐載弼)은 조국의 통일 민주국가 수립을 위한 최후의 봉사를 한 셈이었다고 평가하였다.
서재필이 청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로 힘이 넘치고 주장이 명확한 연설로 유명하다면, 윤치호는 특유의 온화함과 차분함으로 상대방을 논리적으로 설득시켜 감화시키는 연설이 특징이 있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최근 서재필에 대한 평가가 여러 학자들에 의해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그에 대한 평가는 독립투사와 친일파라는 극과 극의 평가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만큼 그는 격동기에 나라가 가울어져 가는 순간에 수구세력을 제거하고 갑신혁명을 시도하는 등 불꽃처럼 피오르다가 정변이 3일 만에 실패하자 미국으로 망명하여 갖은 고초 끝에 스스로 일어선 오뚜기 같은 인생을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지금 우리들이 보기에 그의 생각이 짧았고 행동이 경솔한 면도 없지 않으나 그가 지속적으로 추구한 것은 민족의 자립과 독립이었음은 틀림없는 것 같다.
그는 부패하고 무능한 왕조를 미국과 일본처럼 개혁 시키기 위해 노력하다 반대 세력의 견제를 받고 세 차례나 망명하면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한 것은 사실이다. 그의 행적이 직접적인 친일이 아닌 이상 그를 친일로 매도하기에는 그의 삶이 너무나 굴곡진 극과 극의 삶이라 감히 범인들이 따를 수 없는 삶을 살아갔다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누구를 실랄하게 비판한다는 것은 책임을 지지 않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하는 행동이다. 또 자신의 생각이 무조건 옳고 상대를 인정하지 못하는 편협한 사고에 빠진 사람이 대부분이며 자신만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우물안 개구리같은 사고에 빠진 사람들이다. 인간은 누구나 곤경에 처하면 감추어진 본성이 드러나는 법이다. 억울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 기회가 생기면 반역자가 되고 앞잡이가 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평가는 긍정과 부정을 공히 알고 겸손하게 평가할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자신의 머리 속에 들어 있는 모든 지식은 태평양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낙엽 조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비판
대한민국의 대통령 권한대행 겸 국무총리를 지낸 허정(許政)은 "그에게서도 강렬한 양반의식(양반으로서의 우월의식)을 느낄수 있었다." 고 평가했다. 허정에 의하면 그의 사고 방식이나 생활 태도는 이미 상당히 미국화되어 있었다고 평가했다. 한국국적을 버리고 미국 국적을 취득한 것 역시 부정적인 평가가 되고 있다.
친일파의 거두 이완용, 박영효 등과 친분관계가 있었던 점이 부정적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역사 재해석이 유행이 된 최근에 와서는 서재필이 친일파 이완용과 친밀해 독립문 현판을 이완용이 썼을 정도였다는 점과 독립신문의 시국관, 친미적 시각 등 부정적인 평가문제들도 역사학계에서 제기되고 있다.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건립한, '독립문의 건립자'로도 알려져 있다.
오마이 뉴스에서는 '서재필의 만행'이란 글을 실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독립협회의 위선
김영세씨는 나라가 망한 원인을 다산 정약용에서부터 갑신정변에 이르는 친일 개화파에서 찾아, 조카 김문수에게 설명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독립협회를 믿을 수 없다는 말을 정화에게 보낸 편지에 쓴 적이 있었다.
그의 연구에 의하면 갑신정변의 뒤를 잇는 것은 독립협회의 활동이었다. 그는 독립협회의 간부라는 사람들의 행적을 조사해 보았다. 독립협회는 고문 서재필, 회장 안경수, 부회장 윤치호(나중에 회장됨), 위원장에 이완용 등이 주도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매국노에 가까운 행적을 보이고 있었다.
회장단 중에서 이완용과 윤치호에 대해서는 이미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안경수(일본에서 김옥균에게 이토의 밀정 배정자를 맡긴 이)는 1898년 일본의 사주를 받아 고종 양위 음모를 꾸민 사람이었다. 그 밖의 위원으로는 고리대금업을 하면서 친일 단체 정우회의 총재를 지냈던 김종한, 미국 유학 출신으로 총독부 남작 겸 중추원 참의를 지내는 민상호, 을사오적 이근택의 동생이면서 총독부 남작인 이근호 등이 더 있었다. 그러고 보면 간부와 위원 중에서 살아남을 사람은 이상재, 주시경밖에는 없었다.
1898년 독립신문의 논설에는, '이토 히로부미 씨는 당금 세계의 유명한 정치가요, 또 우리 독립 사업에 대공이 있는 사람이라. 이번 유람차로 오니 정부와 인민은 각별히 후대하기를 바라노라'라고 되어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독립은 대한의 자주독립이 아니었다.
그들은 일본의 지원을 받아 청나라의 종주권을 없애는 음모를 독립이라고 포장하여 말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부수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운 것이었다. 당시 모든 일본인들은 일본이 조선에 독립문을 세워 주었다고 자랑하고 다녔다.
독립협회 회장 윤치호는 서울을 방문했다가 돌아가는 이토 히로부미를 위해 요릿집 국취루에서 환송 잔치를 열어 주었다. 이토는 그 날 윤치호에게서 받은 선물에 대단히 흡족해 했다. 그는 답례로 자신의 사진을 윤치호에게 주었다. 그가 윤치호로부터 받은 선물은 대형 은찻잔이었는데, 거기에는 새로 지은 독립문이 부조되어 있었다.
김영세는 독립신문의 논설들을 검토해 보았다. 독립신문 논설들은 나라를 위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일방적으로 일본 편을 들고 있었다.
- 1896년 독립신문 제6호 논설 : 일국이 두 해 전에 청국과 싸워 이긴 후에 조선이 분명한 독립국이 되었으니 그것 또한 조선 인민이 일본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이 있을 터이나, 조선 인민 중에 일본을 감사히 생각하는 사람이 지금 없는 것은 다름 아니라...
- 1896년 독립신문 제44호 논설 : 일본 정부와 일본 인민들이 조선이 진보하는 것만 즐거워하지, 어떤 나라이든지 도와주는 것은 상관 아니 하노라.... 조선 사람들이 일본이 조선을 위한다는 것을 자세히 모르는 것이다.
- 1897년 독립신문 제144호 논설 : 하나님이 조선 백성을 불쌍히 여기사, 일본과 청국 사이에 싸움이 생겨 못된 일하던 청인 놈들이 조선서 쫓겨 본국으로 가게 되었다. 이것은 조선에 천만 번이나 다행한 일이다.
- 1898년 독립신문 별호 논설 : 조선은 계속해서 일본 돈을 써야 한다. 일본 은전을 여전히 일용한 일로 고시를 하였다 하니 우리는 전국 재정을 위하여 크게 치하하노라.
서재필의 만행
서재필, 필립 제이슨이라는 미국인인인 그는 극동에서 다 꺼져가고 있는 약소국 조선에 가면 할 일이 많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약소국의 황제에게 독립신문을 만들어 나라의 독립 의지를 천명하자고 제의했다. 그래야 열강의 침략 의지를 꺾을 수 있는 것이라고 회유했다. 황제는 그가 강대국인 미국인이란 점을 감안했다. 그래서 약소국의 황제는 그를 중추원 고문으로 초빙하기에 이른다.
황제는 그에게 신문사 건물을 장만해 주고 창업자금 4400 원을 따로 주었다. 그리고 미국인의 연봉으로 3500원 정도를 약속해 주었다. 소 한 마리가 20원에서 40원 정도였으니 그 돈은 엄청난 금액이었다. 그는 신문사 창업 자금 중 1400원으로 자기 저택을 구입했다. 갑신정변이라는 이름의 친일 쿠데타에 실패한 후, 목숨을 부지하려고 군함을 얻어 타 일본에 갔고, 일본에서도 겨우 뱃삯을 장만하여 미국에 갔던 기억이 격세지감으로 느껴졌다. 그는 미국에서 접시 닦으며 워싱턴 대학에 다닐 때의 일도 떠올려 보았다.
마침내 그는 독립신문을 발간했다. 일약 그는 약소국의 지도급 인사로 부상했다. 그의 주변 사람들은 그가 약소국의 말과 글을 전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약소국에 와서 단 한 번도 약소국의 말이나 글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만약 그가 18년 동안 성장한 그 나라의 언어를 정말로 잊은 것이라면 그는 기억 상실증 환자라고 할 수 있었다.
약소국의 황제는 화가 치밀었다. 그 미국인이 독립이라는 위장을 쓰고 교묘히 일본의 편을 들면서 군중을 선동하여 조정을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가 주관하는 독립협회는 친일파들이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황제는 그에게 추방령을 내렸다. 미국인은 갑신정변 때 하마터면 죽을 뻔했던 기억이 떠올라 몸서리가 쳐졌다. 하지만 그의 하수인들이 그의 출국을 만류했다. 그는 영어로 단호하게 말했다.
"귀국 정부가 나를 필요 없다고 하여 가는 것입니다."
그는 약소국의 조정을 협박해 보기로 했다. 그래서 그는 한국 조정에 아직 계약 기간이 7년 10개월이 남았으니 그에 해당하는 임금 2만 8800원과 미국행 여비 600원을 일시불로 달라고 요구한다. 아니면 미국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는 언질을 주었다. 가련하게도 약소국의 조정은 그의 요구를 전부 들어 주었다.
한편으로 그는 일본인들을 따로 만났다, 그는 그동안 독립신문이 일본을 많이 도왔으니 도의상 일본 측에서 신문을 매입해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독립신문의 매각 교섭은 귀국 시일이 촉박하여 성사되지 못했다.
그는 훗날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연합대회를 개최하면서 스스로 의장이 되었다. 그는 회의가 시작될 때에 미국 국가를 부르게 했으며, 의장 취임사에서, "만일 대회 중에 미국을 비방하는 언동이 있게 되면 의장직을 사임할 것입니다"고 말하기도 했다.
1945년 그 약소국이 독립을 얻게 되자, 80세가 넘은 그는 노구를 이끌고 다시 약소국에 들어와 기웃거린다. 그는 미국 군정청 고문 자격으로 와서 그 나라의 국사를 좌지우지하려 들었다. 하지만 이미 그 약소국에는 그의 똥 속을 알고 있는 이승만이라는 노회한 사람이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이승만과 불화를 겪는다. 그는 친미 인사인 장덕수가 총에 맞아 죽는 것을 보고 소름이 돋았다. 어느 날 그는 어지러운 시국을 개탄하는 성명을 내고 다시 자기 나라 미국에 돌아가 버렸다.
지금도 한국인들은 서울 서대문 공원에 가면 서재필의 동상을 보게 된다. 1992년에 세워진 동상이다. 서재필은 오른 손에 독립신문을 들고 있었다. 동상 아래에는 서재필을 기리는 명문이 대리석에 새겨져 있다.
- 조국의 자주 독립과 민주 개화운동의 위대한 용장이며 우리 민간 신문의 신조인 독립신문의 창간 은인에 관한 공적을 간추려 명문에 대신한다.
서재필의 동상은 2008년 워싱턴에도 세워진다. 독립신문 창간일인 4월 7일을 신문의 날이라 하여 하루 쉬는 대한민국의 최대 일간지 조선일보는 1996년 서재필 일대기를 다룬 특집 기사를 대대적으로 게재했다. 그리고 조선일보는 전시회까지 열어 서재필 붐을 조성하려고 했다.
신화의 왜곡된 진실
주진오 교수는 90년대 서재필의 유해가 송환되던 해 '신화의 왜곡된 진실들'이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업적을 재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서재필 업적 재평가 되어야......
서재필은 구한말의 대표적 개화사상가이며 <독립신문>을 창간한 언론인으로서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평가되어 왔다. 작년 7월 한국신문협회와 국가보훈처가 서재필 유해 봉환 사업을 확정한 후 그의 유해는 4월4일 마침내 고국으로 돌아와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이와 더불어 역사학계와 언론학회에서는 서재필 재조명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특히 4월2일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한국언론학회 언론사연구회 세미나에서는 서재필과 <독립신문>에 관한 쟁점들이 쏟아져 나와 눈길을 끌었다. 정진석 교수 (한국외국어대)는 이 날 ‘서재필과 <독립신문>에 관한 논쟁점들’이라는 발제논문을 통해 서재필에 대한 긍정적 시각과 비판적 시각을 대비하여 정리한 바 있다.
그는 서재필을 한국의 볼테르라고 한 대전대 이광린 총장(《한국의 개화사상 연구》일조각, 1979), 서재필의 독립형회 창설과 독립문 건립, 배재학당 강의를 강조한 오세응 의원(《서재필의 개혁운동과 오늘의 과제》고려원. 1993), 서재필의 주권재민의식 계몽과 언론 발달에의 획기적 기여, 과감한 한글 전용을 조명한 서울대 신용하 교수 (《독립협회 연구》일조각. 1976)등의 연구서를 각주로 달아 긍정적인 평가 내용을 정리했다. 또 서재필의 친일적인 행적과 미국인 행세를 비판한 경상대 여증동 교수 (《고종시대 독립신문》형설출판사, 1992), 서재필이 중추원 고문으로 매월 3백원의 급료를 조선 정부에서 받았으므로 <독립신문>은 순수한 민간지가 아니라고 평가한 부산대 채 백 교수(《독립신문의 성격에 관한 일연구》한울. 1992) 등의 연구서를 각주로 달아 비판적 논제를 뒷받침했다.
“서재필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갈린다”는 정교수이 말처럼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작업은 학계의 쟁점 가운데 하나로 떠오르고 있다.
《시사저널》이 서재필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인 역사학자 주진오 교수 (상명여대 · 한국 근대사)의 글을 싣는 까닭은 오직 적극적이고 공개적인 사실 검증을 통해 서재필에 관한 논의가 발전적으로 전개되기를 바라는 데 있다. 아울러 주진오 교수의 글에 대해 반론할 지면은 언제나 열려 있음을 밝힌자. <편집자>
역사를 쓰는 것은 누구인가. 이것은 최근 필자가 심각하게 생각해 보는 주제이다. 그동안 서재필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필자를 비롯하여 학계 일부에서 제기된 바 있었다(필자의 ‘유명인사 회고록 왜곡 심하다-서재필 박사 자서전’ 《역사비평》1991년 가을호, ‘순국선열 유해 원칙 따라 송환토록’ <한겨레신문>1993. 7. 30 참조).
그러나 이러한 문제 제기에 대해서 정부나 대부분의 언론은 전혀 검증해 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동안 필자가 제기해온 것은 단지 시각차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평가’차원만이 아니라 ‘사실’의 차원에서였다. 왜 엄연히 존재하는 사실을 거부하거나 묵살하는가.
서재필 신화의 한 원인은 서재필 자신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에 대한 1차 사료를 많이 수집한 방선주 박사(한림대 교수)도 ‘서재필은 과거를 회상할 때 무책임할 정도로 시일을 혼동하였고, 냉엄한 이국 사회에서의 처신상 그때그때 적당히 호도하는 습성이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따라서 그의 회고는 학계의 철저한 검증을 거쳐야만 역사적 사실로 인정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선배 학자들 가운데는 이러한 노력 없이 그의 회고에 전적으로 의존하거나, 어떤 경우 그 자신조차 한 적이 없는 말까지 만들어서 신화 만들기에 앞장서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제 그를 둘러싼 신화를 사실에 입각하여 차례차례 벗겨 보기로 한다.
서재필은 1863년 논산 출신이다.
서재필이 1864년 11월생이라고 한 최근의 보도는 잘못이다. 그는 음력 1863년 11월 28일생, 양력으로는 1864년 1월7일생이다. 그의 고향은 충남 논산이다. 최근 그의 생가라고 해서 각광을 받고 있는 전남 보성은 그의 외가가 있던 곳이다. 물론 그의 어머니인 성주 이씨가 친정에 가서 그를 낳았으므로 보성이 그의 생가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가 일곱살 때까지 성장했다고 하는 보도는 사실과 다르다. 그가 서울로 가기까지 성장한 곳은 논산이었고, 그의 아버지와 첫 부인 광산 김씨의 묘소가 있는 곳도 논산이다.
서재필은 1890년 이후 자신을 서재필이라 부르지 않았다.
서재필이 서재필로 산 기간은 그의 생애에서 3분의 1도 안 되는 26년 간에 불과하다. 그가 미국 시민권을 얻어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이 된 것은 1890년 6월이었으며, 그후 그는 자기를 서재필이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그가 시민권을 얻을 때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서광범이 미국 시민권을 취득할 때 법원에서 행한 선서에서 ‘이후 조선국왕에 대한 충성을 완전히 그리고 절대적으로 포기한다’고 하였던 것과 같았을 것이다.
그가 의사 면허를 취득한 것은 1893년 가을이었으며, 1894년 6월에 미국인 뮤리엘 암스트롱과 재혼하였다. 1893년 8월14일 워싱턴으로 서재필을 방문했던 윤치호는, 그가 우리말을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다고 일기에 적었다. 일본이 조선 정부에 권고하여 추진하였던 갑신정변 망명자 귀환 사업에 호응하지 않았던 이는 서재필 한 사람뿐이었다. 그러다가 정부의 집요한 요청에 따라 1895년 12월 25일에 귀국하였다. 물론 그의 여권은 미국 정부가 발행한 것이었고 이름 역시 필립 제이슨이었다.
서재필은 귀국후 철저하게 미국인 제이슨으로 행세하였다. 또한 미국인이기 때문에 조선 정부의 정식 관리가 아닌, 고문관이 되어 최고의 봉급을 받을 수 있었다. 당시 그는 자기 이름을 한글로 표기하는 경우에도 제손박사 또는 피제선이라고 하였다. 이는 그가 죽을 때까지 마찬가지였다. 이번에 텔레비전을 유심히 본 독자들은 알겠지만 그의 묘비명에도 역시 필립 제이슨으로 적혀 있다.
서재필은 박사가 아니다
그가 다닌 대학은 워싱턴의 컬럼비안 대학교(현 조지 워싱턴 대학교의 전신) 부설 코크란 대학이다. 이 대학은 워싱턴의 고졸 공무원들을 위해 세운 야간 대학으로 컬럼비안 대학교와는 독립적으로 운영되었다. 그는 1888년 코크란 대학에 입학하여 자연과학을 주로 공부한 후, 다음해에 역시 야간 3년제 외과대학에 등록하였다.
그는 3년 후인 1892년 의학사 학위를 받았으며, 1년 간의 인턴 생활을 거쳐 1893년 의사 면허를 취득하였다. 따라서 그는 이 때부터 닥터 필립 제이슨이 되었다. 그러나 이 때의 닥터는 박사가 아니라 의사라는 뜻이다.
<독립신문> 창간과 독립문 건립은 서재필의 개인 업적이 아니다
실제로 먼저 신문 발간 구상을 한 것은 유길준을 비롯한 김홍집 정권이었다. 아관파천으로 김홍집 · 유길준 정권은 무너졌으나 새로 등장한 박정양 · 이완용 정권은 친미파 관료들이 주도하였다.
따라서 미국인인 서재필은 신문 발간 작업을 오히려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었다. 조선 정부는 <독립신문>에 필요한 모든 비용과 편의를 아낌없이 배려하였다. 따라서 <독립신문> 발간은 개혁파 관료들의 개혁 이념을 국민에게 계몽하기 위한 수단으로 조선 정부가 추진한 것이었고, 서재필은 이를 맡은 실무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독립신문> 소유권을 일본에 팔아 넘길 계획을 추진하였다. 이 때 일본 공사측은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하였고 구두 계약까지 맺기에 이르렀다. 서재필은 출국 직전 일본 공사관에 구두 계약을 이행하라고 요구했으나 무산되고 말았다(‘독립신문 매수의 건’ 주한 일본공사관 기록. 1898년 1월 15일). 만일 일본측이 약속을 지켰다면 <독립신문>은 일본 정부 소유가 되었을 것이다.
독립문 건립과 관련한 사실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이를 주도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영은문은 그가 헌 것이 아니라 이미 청일전쟁 당시 헐려 있었던 상태였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고 하여야 정확하다. 서재필은 자서전 등을 통해 여기에 들어간 비용을 모두 자기가 출자하였다고 회고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당시 왕실은 물론이고 각계 각층의 모금을 통해 충당하였다는 것이 당시 자료를 통해서 확인된다.
서재필은 추방된 것이 아니었다
1897년에 들어와서 러시아의 적극적인 간섭정책과 대한제국 수립을 통한 황제권 강화는 서재필과의 대립을 야기하였다. 이때부터 정부는 그를 중추원 고문에서 해고하려는 노력을 전개하였다. 그러자 서재필은 남은 계약기간의 봉급을 모두 지불하면 해약하고 출국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결국 1898년 4월 남은 7년 10개월분 봉급에다가 두달치 봉급에 해당하는 여비까지 보태어 받아냈다. 이 때 <독립신문> 창간 비용은 공제되었다. 빈약한 재정에 시달리고 있는 조국에 그렇게 막대한 돈을 강요하였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중추원 고문에서 해고됐을 뿐이라는 점이다. 즉 서재필이 고국에서 강제로 추방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더욱이 당시 대한제국 정부는 미국인을 추방할 힘을 갖고 있지 못했다. 이 점은 그가 ‘나를 추방할 수 있는 것은 미국 정부뿐이며 미국정부가 그런 일을 할 리 없다’(《The Independent》1898. 1. 22)고 분명히 밝힌 바 있다.
따라서 그가 미국으로 돌아간 것은 추방이 아니라 자진 귀환일 뿐이다. 이는 그가 돈을 받고 난 다음 ‘만일 봉급을 2배로 올려준다면 남아 있을 생각도 있다’(《윤치호 일기》1898. 4. 22)고 말한 기록에도 확인된다.
서재필이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느라 무일푼이 된 것은 아니다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 의사가 아닌 문방구상인, 인쇄업자로 변신하였다. 1904년부터 사업을 시작해 그 이듬해 필라델피아로 자리를 옮겼으며 1914년부터는 단독으로 필립 제이슨 상회(Phllip Jaisohn & Company)를 세워 1924년까지 운영하였다. 물론 이 사업에 들어간 자금은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받아낸 돈이었다. 한때 필라델피아 중심가에 본점을 두고 두 곳에 분점을 운영할 만큼 번창하였다고 한다.
서재필은 조국에 다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18년 월신 미국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한 뒤부터였다. 더욱이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재미 한인들의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서재필도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필라델피아 동북부 유학생을 중심으로 한인연합대회를 주도하고 의장직을 수행하였다.
그 후 서재필은 1921년까지 조선의 식민지 현실을 미국인들에게 알리는 일에 몰두하였다. 미국이 일본에게 압력을 가하여 조선의 독립을 이룩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그의 활동이 얼마나 의미를 갖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어쨌든 이 때의 공로는 인정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 차원을 벗어나 서재필이 전 재산을 이 활동에 쏟아 부어 무일푼이 되었다는 신화가 만들어졌다는 데 문제가 있다. 물론 이런 신화는 서재필 자신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었다. 당시 활동에 필요한 홍보책자들은 모두 그의 사업체에서 인쇄하였으나 그는 꼬박꼬박 인쇄비를 받았다. 오히려 당시의 기록을 통해 재미 동포들이 어려운 생활 속에서 헌신적인 모금 운동을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서재필이 주도하는 홍보사업에 만도 모금액 중 1만2천9백69달러가 지출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따라서 이 시기 활동 자금을 전적으로 자기가 댔다는 서재필의 회고는 과장이다.
더욱이 이해가 안가는 것은 그가 활동을 포기한 것은 1922년 2월인데 그의 필립 제이슨 상회는 1924년까지 영업을 계속하고 있었던 점이다. 전재산을 날렸다는 사람이 몇년후까지 사업체를 소유할 수 있는 것인지 잘 납득이 되지 않는다. 최근의 한 연구는 1921년부터 미국을 강타한 대공황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추측하고 있다(‘서재필의 독립운동연구’ 홍선표, 《한국독립운동사연구》7집. 1993).
그는 자기가 미국인임을 늘 강조하였다
그는 미국인으로서 <독립신문>을 통해 미국의 이미지를 절대적으로 미화하였다. 심지어 미국의 경인철도 부설권, 운산금광 채굴권 침탈을 환영하였다. ‘속마음을 의심할 필요가 없는 나라와 맺은 것이며 지금까지 어느 열강과 맺은 조약보다 유리한 계약’ (《The Independent》1896. 4. 16)이라는 것이다. 그는 또 미국의 필리핀 · 하와이 · 쿠바 점령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지지를 표시하였다. 1898년 당시 그의 출국을 만류하는 독립협회 회원들에게 보낸 답장에는 조선 정부를 ‘貴 政府’라 부르고 있다. (<독립신문> 1898. 5. 5).
그가 조선인들에게 ‘계몽’한 내용 가운데에는 완전히 미국식 풍습을 모범으로 하고 있는 경우도 많았다. 예를 들면, ‘남의 집에 갈 때 파 · 마늘을 먹고 가는 것이 아니고, 남 앞으로 지나갈 때는 용서해 달라고 해야 한다’ (<독립신문> 1896. 11. 14). ‘조선 사람들은 김치와 밥을 먹지 않고 소고기와 브레드를 먹게 되어야 한다’ (<독립신문> 1896. 10. 10)는 것이 있다.
1919년 한인연합대회 의사록에서도 그의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여전히 강조되고 있었다. 회의 벽두에 애국가가 아닌 미국 국가를 부르게 하고, 영어로 회의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의장 취임사에서도 ‘만일 대회 진행중에 미국을 비방하는 언동이 있게 되면 사임하겠다’는 것을 못박고 있었다.
서재필은 스스로 미국에 묻히기 원했다
광복 이후 미군정은 김규식의 건의를 받아 들여 83세의 고령인 그를 고문으로 임명하였다. 1947년 7월에 도착한 그는 이때에도 자기를 필립 제이슨이라 하였고 모든 발언은 영어로 했다. 그리고 자신의 부모 묘소를 한번도 참배하지 않는 등 한국인으로서 동질성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헌국회를 그를 대통령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그의 미국 국적이 문제였다. 그는 대통령 추대 운동자들로부터 미국 국적 포기를 요청받았으나 끝내 거절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1951년 1월 필라델피아에서 사망하였다.
그가 미국 땅에 묻혀 있는 것은 그 스스로가 선택한 일이다. 그에게는 여러 차례 한국 국적을 회복하고 여생을 고국에서 보낼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번번이 거부하였고, 자기가 선택한 미국 시민으로 살다가 죽었다. 누구나 자기가 죽어서 묻힐 자리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 후대 사람들이 마음대로 옮겨서는 안되며 이는 사실상 고인의 뜻에도 위배되는 일임이 분명하다.
그밖에 사소하지만 틀린 사실들
첫째, 그는 18세 때 장원급제한 것이 아니다. 그는 20세인 1882년 과거에 합격하였으며, 최연소 합격자이기는 하지만 丙科 3등으로 급제하였다. 장원급제는 甲科 1등을 말하는 것이다.
둘째, 그가 다녔다는 도야마(?山) 육군학교는 일본 육사의 전신이 아니다. 이 학교는 하사관학교로서 사관학교와는 관계가 없다.
셋째, 이와 아울러 신문 대담에서는 서재필이 의대생 시절 암스트롱양의 가정교사를 하다가 결혼했다고 하면서, 장인은 미국 연방 정부의 초대 체신부 장관이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가정교사를 했다는 근거는 제시된 바 없었다. 그리고 아내의 아버지인 조지 암스트롱은 미국 철도우편국 창설자이자 초대 국장이었을 뿐이며 서재필이 암스트롱양과 결혼하기 전인 1871년에 죽었다. 결혼 당시에는 신부의 어머니가 화이트라는 사람과 재혼한 상태였다.
그러니 장인인 문방구를 처분하겠다는 서재필에게 반발하여 서재필이 이혼하겠다고 하자 암스트롱 가문에 이혼이란 없다고 꾸짖었다는 것도 성립될 수 없다. 이혼 요구설 뿐 아니라 죽을 때까지 한 집에서 살았지만 별거상태였다는 것도 어떤 근거를 가지고 한 말인지 궁금하다.
넷째, 서재필이 의대에서 수석을 했으나 황인종이라는 이유로 백인에게 밀려 차석 졸업을 했다는 주장은 어떤 자료에 근거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그가 병리학 강사로 발령을 받았으나 학생들에게 보이콧 당했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다섯째, 그가 다시 들어간 의대는 존스 홉킨스 대학이 아니라 펜실베니아 대학이며 특별 연구생이었다.
여섯째, 서재필이 6·25가 일어나자 자진해서 김일성에 반대하는 방송을 했으며, 그때부터 북한 역사책에서 그의 이름이 사라졌다는 것도 근거가 없는 말이다.
서재필은 우리와 같은 핏줄을 나누었을지 언정 한국인이 아니라 한국계 미국인 필립 제이슨이었다. 그가 미국 정부에 충성을 맹세한 후 고국 땅을 밟은 것은 다 합해서 5년을 넘지 못한다. 그것도 두번 다 미국에서보다 훨씬 넉넉한 봉급과 지위를 주었을 때에 한해서였다. 그때마다 우리 국민들은 그를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 여기고 환영하였으며 이 땅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그는 두 번 다 이를 뿌리치고 자기가 선택한 나라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안전지대였던 미국에서 미국 시민으로 살 수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경력에 커다란 오점을 남기지 않을 수 있었다. 반면에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은 가난에 시달리고 체포와 고문의 위협에 시달리면서 고통스럽게 투쟁하였다. 그 가운데에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안타깝게도 자신의 오랜 투쟁 경력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든 경우도 많았다. 우리는 그들을 쉽게 매도하고 만다. 우리는 이러한 역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사실 서재필은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상황 판단력과 현실 적응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뛰어나다. 그 결과 미국으로 건너간 다른 초기 이주민들이 미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주변인으로 살아간 반면에 그만은 중심부로 살아간 반면에 그만은 중심부로 진입할 수 있었다. 이 점에서는 그는 아메리칸 드림의 표상이며 ‘세계인’의 선구였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재미동포 사회나 의사 · 언론인 · 동창회 · 문중 등이 그를 기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거기에 필자가 개입하여 논란을 벌이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국가적인 사업으로 유해 송환 사업을 벌이고 신화를 만들어 그를 찬양하는 것은 전적으로 별개 문제이다. 서재필은 결코 우리가 후손들에게 귀감이라고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타 시각
사학자 최태영은 "일부에서는 서재필선생이 미국 국적을 가졌고 이름도 미국식으로 바꿨다고 비판하지만 그분은 모든 것을 근대화와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생각했지 다른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분의 진심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며 그를 옹호하기도 했다.
성격
차갑고 냉정했다는 평가가 있다. 대통령 권한대행 겸 내각수반을 지낸 허정(許政)은 후일 그가 매우 정열적이라는 인상을 주었다고 회고하였다. 그의 독립심과 투지는 대단하였다. 박영효나 서광범은 갑신정변 이후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다시 귀국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이 양반의 자제라는 자존심과 함께 노동이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하였다. 그러나 서재필은 같은 양반집 도련님인데도 철도 노동자로 일하면서 학업을 마쳐 의사가 되었다.고 하였다. 또한 개인주의적이라는 시각도 있다. 허정은 서재필이 자기에게 도움을 청하러 오는 사람들을 제일 싫어했다고 회고하였다.
윤치호와 서재필의 비교
서재필이 배재학당의 젊은 학생들과 애국적인 시민을 독립협회로 모으는 데 기여했다면 윤치호는 자신의 인맥을 활용하여 양심적인 중견 관료들과 개혁적인 젊은 관료들을 하나로 묶어 독립협회의 내적 통합에 기여했다.
급진적이라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윤치호는 1884년 갑신정변의 정국에서 서재필과 달리 점진 노선을 택해 살아남을 수 있었고, 가족 또한 안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잠재적인 신변의 위협 때문에 결국 유학이란 명분으로 망명객이 되어 십년 이상 외국을 떠돌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서재필과 크게 차이는 없었다.
서재필이 미국에서 혈혈단신으로 고투하였던데 반해, 윤치호는 상하이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후 미국에서도 교회와 기독교청년회를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쳐왔기 때문에 연설의 경험을 풍부하게 축적할 수 있었다. 작은 일까지 매일 기록하는 꼼꼼한 성격과 겸손하며 성찰적인 태도 덕분에 남의 장점을 수용하여 늘 나아가고자 노력한 윤치호의 연설에는 깊이가 있었다. 서재필은 미국 망명 후 기독교인이 되었지만, 기독교 신앙 자체와 그 세속화된 형태의 미국의 시민종교(공화주의와 민주주의)를 구분할 수 있었다. 자신의 은인 홀렌백이 '선교사가 된다면 대학교 학비를 대겠다'는 요청을 뿌리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스스로 기독교인임을 잊지는 않았지만 기독교 그 자체가 사회운동을 대체할 수 있다고는 믿지 않았기에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때로는 과하다고 할 정도로) 미국식 사유와 생활 방식을 조선에 이식하여 그 근본적인 급진성을 통해 사회운동을 일으키려고 한 것이다.
반면에 윤치호는 기독교 개종 이후 삶의 중심을 언제나 신앙에 두었다. 개종의 동기는 개인적 차원이었지만 개종과 동시에 민족적 차원에서 기독교와 조선을 언제나 결부시켰다. 조선 문화에 깊게 뿌리박은 가족주의적 습속을 돌파하지 않고는 개혁이 불가능하고, 그 낡은 구질서를 깨뜨리기 위해 조선의 사회에 예수의 가르침을 설파할 책무를 수행하고자 했다. 그러나 종교와 민족을 하나로 놓고 사유하는 윤치호의 선지자적 태도는 독립협회 회원 및 참여 민중 대부분에 파고들 여지가 없었다.
아래는 주진오 교수의 '서재필과 윤치호' 비교에 관한 글이다.
서재필과 윤치호
서재필(1863~1951)와 윤치호(1865~1945) 두 사람은 개화파의 막내들로서 10대 후반부터 일본 유학을 거쳤고, 1884년 갑신정변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다. 당시에 거의 유일하게 미국에서 정식 대학교에 진학해 근대 서구문명의 영향을 직접 받았다. 근대적 지식인의 대표적 인물들인 두 사람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 크게 엇갈린다. 서재필은 독립유공자로서 국립묘지에 안장된 반면 윤치호는 친일파의 대표로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무엇이 두 사람을 극단적으로 다르게 만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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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 행동대장 vs 美 공사관 통역관
서재필은 19세였던 1882년 별시 문과에 합격했으나 무관으로 과감히 변신해 일본의 도야마(戶山) 육군학교를 나온 후 갑신정변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정변 과정에서 고위 대신들을 살해하는 행동대장이었다. 따라서 정변이 실패하자 일본 망명 길에 올랐다.
한편 윤치호는 16세였던 1881년 일본에 파견된 조사시찰단의 수행원으로 파견되었다가 남아서 도진샤(同人社)에서 수학하였다. 이때 그는 영어 공부를 시작한 지 4개월 만에 미국공사 푸트의 통역관으로 발탁돼 귀국하였다. 윤치호는 갑신정변 주도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정변에 반대했고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윤치호는 당시 김옥균 일파로 인식되고 있었기에 중국으로 도피성 유학을 떠났다.
정변 실패 후 일본에서 냉대를 받고 미국으로 떠난 서재필은 홀로 서기를 감행하였다. 그는 워싱턴 DC에서 야간 의과 대학을 나와 마침내 1893년에 의사 면허를 받았다. 1890년에는 미국인으로 귀화해 이름을 필립 제이슨으로 바꾸고, 4년 뒤에는 미국인 여성과 결혼하였다. 그는 미국 주류사회에 완전히 편입되어 살아가는 아메리칸 드림의 원조였다.
한편 윤치호는 1885년 초 중국 상하이 중서학원에서 유학을 시작했으며 1887년 세례를 받았다. 그는 1888년 미국 남감리교의 후원으로 밴더빌트와 에모리 대학에서 신학과 인문학을 공부했다. 그는 미국 생활에 잘 적응하였지만, 시민권 취득이나 국제결혼을 생각하지는 않았고 유학을 마친 후 중국 중서학원으로 돌아가 교사가 됐다.
●서재필, 의사 되며 ‘원조’ 아메리칸드림 이뤄
서재필은 1894년 갑오개혁 정권의 귀국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다가 마침내 1895년 12월 귀국했다. 그는 미국인으로서 중추원 고문관에 취임하였고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또한 그해 7월에는 독립협회를 조직하는 데 고문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서재필은 1897년 후반 러시아의 만주 침략과 조선 진출 정책이 강화되자 반러적 입장을 드러내다가 중추원 고문에서 해고됐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당시 철저하게 미국인으로 행세해 이름을 서재필이 아닌 필립 제이슨으로 사용했다. 굳이 한글로 표현할 때는 제손 박사 또는 피제선(皮堤仙)이라고 하였다.
한편 윤치호는 갑오개혁 이후 귀국하여 학부협판이 되었다. 그는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려고 노력했으나 ‘정동파’로 분류됐고 을미사변으로 미국 선교사와 공사관에서 피신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던 중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그는 고종의 특사로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다녀왔다. 따라서 독립협회 창립에 참가할 수 없었지만, 귀국 후 부회장에 취임하면서 독립협회를 계몽단체로 개조했다.
그는 서재필이 떠난 후 독립신문을 운영했고, 이완용에 이어 1898년 8월부터 독립협회 회장을 맡아 이후 전개되었던 정치개혁 운동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다. 하지만 자신의 의도와 달리 만민공동회가 폭력화되어 결국 강제 해산되자 지방관으로 떠남으로써 독립협회 회원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다.
서재필은 미국으로 돌아간 후 대한제국으로부터 받은 자금을 바탕으로 필라델피아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그 후 20년 동안 조선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서재필은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연합대회를 개최하고 의장직을 수행하였다. 그 후 일본의 만행을 폭로하며 독립 의지를 표현하는 잡지, 책자를 발행했다. 1921년 11월 워싱턴에서 열리는 태평양 군축회의에서 조선 문제를 상정하려고 노력하였다가 실패하자 항일활동을 마감하였다.
윤치호는 대한제국이 보호국으로 전락한 후 다시는 관직에 나가지 않고 계몽운동에 나섰다. 그는 대한자강회의 회장이었고 개성에 한영서원을 설립했으며 안창호와 협력해 대성학교 교장과 청년학우회 회장을 맡았고 YMCA 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1912년에 105인 사건으로 투옥되어 3년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당시 윤치호에 대한 조선인들의 기대는 매우 컸다. 그러나 그는 3·1 운동을 전후하여 파리 강화회의 대표, 임정 참여, 워싱턴 군축회의 참가, 미국 망명 등 모든 요청을 거부했다. 그는 열강이 조선을 도와 일본과 싸울 의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이를 반대하기까지 하였다. 그는 일본의 통치정책에 대해서는 반감을 품었지만 조선인들이 독립을 쟁취할 능력이 없다고 보았다. 설령 독립되었다 하더라도 이를 유지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이 없는 민족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는 모든 형태의 독립운동을 부정하고 민족성 개조를 통한 민족역량을 기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미국인으로 산 서재필 vs 일본인 된 윤치호
서재필은 1922~1927년 갑자기 국내 일간지와 잡지 등에 다시 등장하여 식민지배에 순응할 것을 권유했다.
그는 식민지화의 책임을 전적으로 대한제국 지배층의 무능과 민중의 무지에서 찾았고, 독립운동과 같은 정치적 활동보다는 경제적 활동에 주력할 것을 권고했다. 아울러 그가 1937~1938년에 미주 한인 2세를 위해 ‘신한민보’에 영문으로 기고했던 ‘MY DAYS IN KOREA’(나의 조선 시절)를 보면 대부분 조선왕조의 무능과 부패를 비판하고 개화파를 정당화하면서 오히려 일본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그러던 그는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과 맞서 싸우는 미국 시민으로서 반일로 돌아섰다.
●윤치호, 日전쟁 승리를 백인인종차별 극복 간주
한편 윤치호는 일본의 대륙 침략이 시작되고 내선일체 정책이 강화되는 시기에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자신이 ‘일본 국민’이라는 전제하에서 한국 기독교의 ‘일본화’를 주도했으며 대표적 친일단체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1945년에는 마침내 일본 귀족원 칙선의원에까지 선임되었다.
그의 친일은 일제의 탄압에 의한 강요라기보다는 당시의 조건 속에서 조선 민족의 현명한 선택이라는 확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일본이 구미 열강에게 승리하는 것을 황인종이 백인의 인종차별주의를 이긴 것으로 열광하였다. 그는 철저한 반공주의자로서 일본이 소련에 승리하기를 기원하였다. 나아가 내선일체를 통해 민족차별 정책이 철폐될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1945년 해방이 되었을 때, 서재필은 점령국 미국의 시민으로서 미군정 고문으로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대한민국이 수립되는 과정에서 그를 대통령으로 추대하는 세력도 있었다. 그는 이승만의 단정 노선에 대해 반대하면서 통일국가 수립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결국 고국에 머무르기보다는 미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택했다.
하지만 윤치호는 더는 공적 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죽기 몇 달 전에 미군정과 이승만에게 ‘한 노인의 명상록’이라는 편지를 보냈다. 거기서 그는 한국에는 민주주의가 불가능하며 공산주의에 대해 반대한다는 것, 그리고 조선의 해방은 항일민족운동의 결과가 아니라 연합국의 승리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며 친일파를 사면하여 민족단결을 이루자고 호소하고 있다.
윤치호가 1945년 12월 사망하여 1947년 7월 미군정 고문으로 귀국한 서재필과의 재회는 영원히 이루어지지 못했다.
●말년 볼 것인가 vs 인생 전체 평가할 것인가
서재필은 전 생애에 걸쳐 새로운 도전에 대해서 열정적으로 대응하였다. 그는 어느 누구도 따라 하기 힘들 만큼 도전과 성취를 이루어낸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항상 자신은 안전지대에 머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투쟁과 희생을 요구하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에게서 민족의 지도자가 지녀야 할 희생적 자세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사실 서재필이 서재필로 산 것은 불과 27세까지였고 나머지는 필립 제이슨으로 살았다. 그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스스로 버린 사람이었다. 심지어 그는 해방 후 부모의 묘소조차 참배하지 않았다. 그의 묘지명에는 분명히 필립 제이슨이라고 적혀 있다. 따라서 그가 스스로 택한 필립 제이슨의 유해를 억지로 국내로 모셔와 국립 현충원에 안장하는 것은 분명히 그가 원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반면에 윤치호는 모든 판단을 함에 지나치게 신중했고 근대 시민윤리를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국내에서 교육과 종교 활동을 통해 조선인들의 민족성을 개조하여 근대 국민으로 발전할 것을 희망했다.
그는 안창호를 누구보다 아끼고 후원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당시 조선인들이 필요로 한 민족 저항의 지도자가 되는 길을 거부하고 본격적인 친일 활동을 통해 결과적으로 친일파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두 사람은 함께 활동했던 기간이 합해서 5년이 안 되지만 대체로 비슷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같은 입장에서 행동하였다. 서로 다른 공간에서 살았지만, 두 사람이 식민지 조선을 바라보는 시각과 일본에 대한 선망과 동경도 비슷했다. 그러나 서재필은 긴 세월을 자의에 의해 미국인으로서, 윤치호는 타의에 의해 일본인으로 살았다. 그 결과 오늘날 서재필은 과분한 대우를 받고 있으며 반면에 윤치호에 대해서는 매도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윤치호의 친일을 옹호할 마음은 없지만, 그것만으로 그의 인생을 단죄하기에는 안타까운 연민의 심정이 든다. 하지만 그의 친일을 ‘협력’ 또는 ‘친일 민족주의’라고 정당화하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 한 인물의 굴곡에 찬 긴 인생을 한마디로 규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역사학자로 살아가면서 점점 마음속으로 느끼게 된다.
주진오(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추모 활동
1975년부터 서재필 기념재단이 건립되어 학생들의 장학금 지급, 장학 사업, 의료 지원 사업 등을 추진하였다.
1996년 4월 1일에는 한국 프레스센터 서울갤러리에서 한국프레스센터 등의 주최로 <서재필과 독립신문> 특별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2004년부터는 서재필 기념재단에 의해 서재필의학상이 제정되어 매년 수여되고 있다. 그가 만년에 거주한 저택인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제이슨 하우스는 딸 뮤리엘 제이슨이 계속 거주하였고, 남편 사별후 혼자된 장녀 스테파니 제이슨이 함께 살았다. 두 딸이 죽자 서재필 저택 제이슨 하우스는 한인사회에 의해 기념물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2004년 서재필 기념관이 그의 저택 제이슨 하우스에 개관되었다.
2002년 4월 4일에는 독립기념관에 그의 어록비가 제막되었다. 어록비 전면에는 “합하면 조선이 살테고 만일 나뉘면 조선이 없어질 것이요…”로 시작되는 76자의 글이 새겨졌다. 이 글은 서 박사가 미국에서 육성 녹음해 1949년 3.1 운동 30주년을 맞아 국내에서 공개된 연설문 ‘조선동포에게 고함’의 일부이다. 서재필의 조선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육성 연설문 내용의 일부가 녹음되어 현재 전하고 있다.
2008년 5월 6일 워싱턴 DC 소재 주미 한국대사관 총영사관 앞에 서재필의 동상이 제막되었다. 서재필 동상 초석 정면에는 '최초 한국계 미국인―한국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한 개척자'라고 씌어 있다. 전신 청동상은 이재길 전남대 미대 교수가 조각했다. 좌측 면에는 이은상 시인이 서 박사 생애를 압축한 한글 헌사를 담았고, 우측 면에는 서 박사 전기를 저술한 이정식 펜실베이니아 대학 교수의 영문 헌사가 있다. 2011년에는 서재필 언론문화상이 제정되었다.
기타
1948년 7월 21일의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선거는 10시 25분에 개표되어 11시 5분에 개표가 종료된다. 이때 서재필의 표가 나오자 윤치영 의원은 외국 사람에 투표할 수 없다며 무효 선언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어 서우석 의원이 외국인에 대한 투표는 마땅히 무효를 선언해야 된다며 발언을 이어가게 되고, 다른 의원들도 가세하면서 장내소란이 이어졌다.
당시 국회에서 사회를 보던 김동원 부의장은 서재필 박사가 외국인인지 한국인인지 분명하지 않으니 오후에 결정하겠다고 하자, 서우석 의원은 서재필 박사가 군정의 최고의정관으로 미국인 신분으로 입국했다며 또한 그가 입법의원에 와서 정당에 관한 강연을 하면서 한 발언 중 '나는 미국 사람인 까닭에 조선에 와 대통령 될 수 없다고…… 다만 된다면 외국 사절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발언한 기록이 남아 있다며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2000년에는 독립기념관 연구원 홍선표가 엮은 'My Days in Korea'가 발간되었다. 이는 서재필이 1896년부터 1948년 사이에 국내외 신문과 잡지 등에 영문으로 발표한 수필 강연문 방송원고 등을 모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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