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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66 : 조선의 역사 408 (제26대 고종실록 3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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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66 : 조선의 역사 408 (제26대 고종실록 31)

두바퀴인생 2013. 2. 20. 03:57

 

 

 

한국의 역사 866 : 조선의 역사 408 (제26대 고종실록 31)                 

              
 

                                          고종 황제 가족 사진

 

제26대 고종실록 ( 1852~1919년, 재위 : 1863년 12월~1907년 7월, 43년 7개월) 

 

서재필, 그는 누구인가? (계속)

 

 

아관파천 전후

 

독립협회에 모인 민중들

 

 

한편 귀국 직후 그는 부패한 외척 출신을 관리로 중용하고 무속인을 신봉했던 고종명성황후를 경멸했다. 또한 수구파 대신들의 탐욕과 비리를 거침없이 질타, 지적하는 한편 참정권을 그릇된 것으로만 이해하고, 갑신정변에 부정적이었던 민중들에 대한 혐오와 경멸감을 감추지 않았다. 윤치호에 의하면 서재필은 3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을 어린애나 미개인 다루듯이 하여 분노를 느끼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가 미국인이어서 다들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윤치호, 유길준은 그에게 시정과 자제를 요구했지만 오히려 서재필의 말을 듣고 깊이 공감하는 점을 느끼면서 훈계를 그만둔다. 미국공사관 공사 알렌은 그에게 분노하더라도 겉으로는 웃으며 좀 외교적인 태도를 가지라고 충고하기도 한다.

 

고국에 체류하는 동안 그는 이상재, 윤치호, 이승만, 남궁억 등과 함께 한국 최초의 근대적 시민단체인 독립협회를 만들고 그 첫 사업으로는 독립문 건립 계획을 수립한다. 그는 또 고종에게 청나라로부터의 독립, 자주권을 주장할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독립협회의 동지들에게도 조선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민족이며 청나라로부터 독립하여 자주국가를 이루자고 주장하였다. '어서 빨리 청나라와 결별해야 된다. 그게 이 나라가 사는 길이다. 그리고 고루한 중국 서적과 유교 서적은 쓰지 말아야 된다'고 역설하였다.

 

1896년 3월 14일, 그는 중추원 고문으로 재직 중이면서 신문 담당 부서인 농상공부 임시 고문을 겸하게 되었다. 아관파천 전후 고종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러 있던 상황에서 조선에 대한 경제적·문화적 침투에 한계를 느끼던 러시아조선에 군사적·정치적 압력을 확대하면서 만주와 조선에 대한 침략정책을 폈다. 이에 서재필은 러시아의 대한정책과 동아시아 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논조의 기사를 쓰는 한편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러시아 고문단의 철수를 요구했다.

 

1896년 2월 11일 고종은 아관파천을 단행한다. 일본은 조선의 유길준, 윤치호가 국민들을 개화한다는 취지로 신문을 제작하는 것으로 보았으나, 반외세, 교육 계몽, 자립, 실력 양성 등을 논설로 내보내는 것을 내심 경계하였다. 아관파천을 단행하는 고종을 보고 그는 조선에 가능성이 없음을 간파하고 단념하게 된다. 민중들은 개화파를 왕실에 저항하는 역적 정도로 취급하였고, 계몽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것과 민중의 냉대에 좌절한다.

 

 

 

독립신문 발간

 

1890년대의 서재필

 

 

1896년 4월 7일 한국 최초의 신문인 《독립신문 (獨立新問)》을 순한글영어로 인쇄, 발간하였다. 서재필은 정부로부터 창립 자금 4400원을 지원 받아 시작하였다.

 

"우리는 첫째 편벽되지 아니한고로 무슨 당에도 상관이 없고, 상하귀천을 달리 대접하지 아니하고, 모두 조선 사람으로만 알고 조선만을 위하여 공평히 백성에게 말할 터인데, 우리가 한성 백성만을 위할 게 아니라 조선 전국 백성들을 위하여 무슨 일이든지 대언하려 주려 함.

우리가 이 신문을 출판하는 것은 취리(이익을 취함)하려는 것이 아닌고로 값을 매우 헐하도록 하였고 모두 언문으로 쓰기는 남녀, 상하귀천이 모두 보게 하려 함이요, 또 귀절을 떼어 쓰기는 알아보기 쉽게 하도록 함이라. 우리는 바른대로만 신문을 할 터인고로 정부 관원이라고 해도 잘못하는 것이 있으면 세상에 그 사람의 행적을 펼 터이요, 사사백성이라도 무법한 짓을 하는 사람은 우리가 찾아내 신문에 설명할 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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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이 직접 지은 1896년 4월 7일자 독립신문 창간호 논설

독립신문은 주 3회 발행되었다. 한편 그는 독립신문의 필진으로 박영효, 윤치호, 이승만, 유길준, 이상재, 박정양, 이완용, 주시경, 박중양 등을 영입했다. 또한 언더우드 학당에서 언더우드 목사와 관계가 다소 소원해졌으며 직업이 없어 고민하던 김규식을 영입하여 취재기자로 고용하기도 했다. 독립신문을 편집할 때 그는 띄어쓰기를 반영하였다. 후일 1896년 4월 7일의 그의 독립신문 창건을 기념해 후일 한국신문편집인협회는 1957년 4월 7일을 신문의 날로 지정하였다.

 

그는 신문을 발행하면서 전문 용어보다는 쉽게 한글로 풀이하도록 했는데, 처음에 300부를 찍었던 ‘독립신문’은 이내 발행부수 3000부가 넘는 신문으로 발전했고, 10여명으로 시작된 독립협회는 이내 4000명이 넘는 회원을 가진 큰 단체로 발전하면서 국민적 개혁 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독립협회 활동과 독립신문 집필

 

한글영문으로 된 독립신문

 

 

서재필은 독립신문 창간호에서 신분이 낮은 사람들과 여성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언문'을 공식적인 인쇄 언어로 채택하며 띄어쓰기를 도입한다고 밝혔다. 독립신문을 통해 서재필은 독립된 나라를 만들기 위하여 내부적으로는 교육 확대 및 산업 발전을 강조하였고, 그를 위해 의무 교육 도입, 서양 과학 기술의 도입, 식생활과 위생의 개선에 대한 여러 가지 안들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러시아일본한반도를 둘러싸고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느 한 쪽에 의존하면 조선이 위험에 처할 수 있으니, 외부적으로는 중립 외교를 펼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일반 민초들이 쉽게 알아보게 하려면 한글 단어 사용을 신중히 고려하였고, 국문학자인 주시경을 영입하려 했고, 주시경의 노력에 힘입어 순한글로 간행할 수 있었다. 주시경한글 표준어와 방언, 발음 등에 정통하였으며 독립신문 발간 중에도 쉬운 단어 선정을 위해 직접 연구를 거듭하기도 했다.

 

'독립신문'은 근대적 여론 형성의 기틀을 마련했다. 독립신문 창간은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정동구락부, 정동파, 친미파 등으로 불린 영어파 세력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이뤄졌다. 4면 가운데 3면은 한글 전용 '독립신문'으로 편집하고, 마지막 1면은 영문판 'The Independent'로 편집하였다. 1898년 7월 4일독립신문에는 영어 교습 광고도 실려 있었다. "대한 사람들이 영어를 배우고자 하나 학교에는 다닐 수 없고, 또 선생이 없어서 못 배우는 이가 많다 하기로, 영국 선비 하나가 특별히 밤이면 몇 시간씩 가르치려 하니, 이 기회를 타서 종용히 영어를 공부하려는 사람들은 독립신문사로 와서 물으면 자세한 말을 알지어다."라고 발표했다.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를 결성하였다. 독립협회의 지도자는 윤치호, 이상재, 박정양, 양기탁, 이승만, 이동녕 등이었다. 그 중에서도 서재필은 윤치호와 함께 협회의 제반사무를 총괄하였다.

 

 

 

토론 문화 보급 활동

계몽강연 활동과 독립신문을 발행하는 일 이외에도, 서재필은 목요일마다 매주 배재학당에 출강해 젊은이들에게 자유민주주의를 가르치기도 했는데, 이 때 이승만도 그의 강의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 밖에 만민공동회의 연사로 조선 팔도를 순행하기도 했다. 조선을 순행할 때 그는 항상 미국인 경호원을 대동하고 돌아다녔다. 동시에 그는 배재학당에 나가 강사로 활동하며 이승만, 주시경, 신흥우, 김규식 등이 학생들에게 세계사를 가르쳤고, 1896년 11월 학생들은 13명의 회원으로 협성회(協成會)라는 학생토론회를 조직했는데 1년 만에 회원이 약 200명으로 증가했다. 협성회에도 이승만(李承晩), 김규식 등의 학생지사(志士)들이 모여들었고, 서재필은 학생 토론 모임인 협성회를 지도하였다.

 

서재필은 조선인의 의식부터 개조되어야 진정한 독립국으로 발돋움할수 있고, 민권이 존중되는 민주주의 체제가 들어설 수 있다고 보았다. 다만 당대에는 민주주의 체제의 등장이 어렵다고 내다봤다. 서재필을 비롯한 개화주의자들은 '독립신문'에서 “조선인의 타고난 체형은 동양 인종 가운데 가장 우수하다”고 자랑하거나 한때 ’상것’이라고 금기시했던 상민들의 석전(돌 싸움)을 긍정적으로 재조명했다.

 

또한 그는 독립신문에 칼럼을 기고하면서 서구식의 개선된 생활도 보급되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1896년 11월 14일자의 독립신문 칼럼에서 그는 조선사람들의 매너없는 행동을 지적, '남의 집에 갈 때 파, 마늘을 먹고 가는 것은 아니며(실례이며), 남 앞으로 지나갈 때는 용서해 달라고 하고 지나가야 한다'고 했고, 1896년 10월 10일자에서는 '조선 사람들은 김치와 밥만 먹지 말고 소고기와 브레드도 먹게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외부 문명과 외부인에 대해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자세를 버려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한편 일본에서는 독립신문이 반일 사상을 고취한다며 조선 정부에 압력을 놓았다. 러시아는 러시아대로 독립신문을 일본이 서재필과 필진들을 앞세워서 운영하는 것으로 판단, 조선 정부에 압력을 넣어 독립신문 후원금은 점차 감소, 끊어지게 된다.

 

 

 

교육, 청년 계몽 활동

 

배재학당 앞에 세워진 독립신문사터 표지석

 

 

그는 독립신문을 통해 국내외의 사정, 고종과 대신들, 조정에서 결정한 사항, 국외의 정세를 한글로 번역하여 보도하고 그 옆면은 영어로 된 기사를 보도했다. 그는 조선 사회의 혼란의 원인을 무능한 탐관오리들과 인맥, 문벌, 연줄로 사람을 선발하는 것을 원인으로 지적했다. 또한 지방관이나 아전 등이 뇌물수수를 한 것이 적발되면 바로 신문에 보도하거나 특별 호외를 내서 사건의 전말을 보도하기도 했다. 그는 매관매직과 인맥, 문벌로 채용된 인사들, 탐관오리들이야 말로 민중의 고혈을 짜는 자들이라며 '매관매직을 하는 탐관오리들은 (이유를 막론하고) 모조리 죽여야 하고, 그 시체를 실은 배도 바다 한 가운데서 침몰시켜야 한다.'며 신랄하게 지적하기도 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수업 이외에도 별도로 논리적 설득의 필요성과 토론하는 방법을 틈틈이 가르치기도 했다. 1897년 7월 8일 정동에 새로 지은 감리교회 예배당에서 배재학당 졸업식이 있었고 600명의 청중이 모였다. 1부는 문학 시강으로 한문영어의 공개 강독이 시행되었다. 2부는 갈고 닦은 협성회 토론 시범을 보이는 차례였다. 토론은 성공적이었고 서재필은 1년간 자신의 강연을 수강한 학생들 가운데 우등 1명, 이등 1명, 삼등 2명의 학생을 뽑아 각각 5원, 3원, 2원씩의 상금을 수여하였다. 그 순간 서재필은 해리 힐맨 고등학교에서 영어로 연설하여 우등상을 받았을 때의 감격을 다시금 느꼈다 한다.

 

'이제 이 학생들로 크게 변하여 조선을 위한 큰 인재가 될 것이다.'

 

 

배재학당

 

 

행사를 마친 학생들은 인근 배재학당으로 가서 다과로 연회를 열었다. 서재필은 귀국하며 세웠던 목표를 거의 달성했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학생들에게 연설했다.

오늘 여러분은 1년간의 공부를 마쳤습니다. 여러분은 나에게서 크게 배웠다고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나는 여러분에게서 크게 배웠습니다. 배움의 자세는 진지했고, 배움의 목표는 웅대했습니다. 그 기상과 성실을 토대로 여러분은 이제 조선을 크게 변화시키는 길로 나아가리라 굳게 믿습니다. 비록 오늘로 배재학당에서의 수업은 끝나지만 제 마음은 영원히 여러분 곁에서 함께할 것입니다.

학생들은 서재필의 연설이 끝나자 사은의 예로 준비한 선물(영어사전)을 정중히 올렸다. 협성회 공개 토론회의 성공은 그날 하객으로 참석했던 독립협회 회원들에게도 큰 자극이 되었다. 러시아에 다녀온 뒤 의기소침했던 윤치호에게 남다른 감격이었다. 이후에도 서재필은 협성회 활동과 계몽강연을 지도하며 전국을 순회하였다. 그는 학생들에게 토론하는 방법과 절차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했고 초기에는 억지로 참석하였으나 나중에는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토론하는 문화가 조성되었다. 이런 성공적인 토의 활동은 윤치호, 박정양, 유길준 등을 고무시키게 된다.

 

 

독립문 건립 추진

 

새로 건립된 독립문과, 헐린 영은문 기초

 

 

그는 조선신라, 고려, 조선의 1200년간 중국의 속국이자 종으로 살아왔다며 중국의 속국이 아니라 자주국가임을 천명해야 된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사대사상의 증거인 한성부 서대문방 현저동(峴底洞) 모화관과 영은문을 헐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모화관은 조선 말기인 1897년 서재필 같은 독립협회 인사들에 의해 '독립관'(獨立館)으로 개축돼 독립협회 회관으로 쓰였다.

 

1896년 초부터 그는 청나라 사신을 영접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울 것을 건의하였고, 이 일을 집행하기 위해 이완용을 비롯한 정부 관료 중심의 독립협회를 조직했다. 1896년 7월 2일 이상재·이승만·남궁억·박영효·윤치호·이완용·김가진·안경수 등과 함께 독립협회 창설에 참여하고 서재필은 독립협회 고문에 선출되었다. 윤치호미국에서 서재필을 만났을때 혹시나 조선의 정국이 변한다고 해도 서재필이 아픈 기억을 되살리고 싶지 않아 귀국하지는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그런데 뜻밖에도 2년 후 한성 정동에서 재회하게 되자 윤치호는 놀라워했다. 그리고 윤치호와 서재필은 독립협회에서 의기투합하여 활동했다.

 

서재필은 서울 영천에 있는 영은문이 치욕스러운 존재라고 하여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자고 하였다. 또한 독립협회보를 발간, 자유 민권활동과 참정권, 독립 사상을 고취시켰다.

 

청나라 사신을 맞아들이던 영은문(迎恩門) 자리에는 '독립문'이 들어섰다. 그는 미국에 있을 때 입수한 프랑스 파리개선문을 그린 그림을 소지하고 있었다. 독립협회가 기금을 모아 완공한 독립문은 서재필이 가지고 있던 화첩 중에서 파리의 개선문을 모델로, 그 규모를 축소하되 모양만은 똑같이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독립문영은문 맞은편에 건립되었으며, 1896년 11월 20일 독립문이 건립되었다. 독립문은 서재필이 특별히 초빙한 건축사 세레진 사바친이 설계하였다. 후일 사적 32호로 지정된 독립문은 서재필이 독립문의 윤곽을 스케치한 것을 바탕으로 독일 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가 설계를 담당했다. 토목·건축공사는 한국인 건축 기사 심의석이 담당하고 중국인 노무자들이 노역을 맡았다. 공사비는 기부금으로 해결했다.

 

후일 세레진 사바친의 출신과 관련, 서재필은 그의 자서전에서 독립문 설계자를 스위스인 기사라고 언급했다. 후일 스위스인이 아니라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국제한국사학회 공동 연구자의 한사람인 러시아 국립인문과학대학 타치아나 심비르체바 박사는 사바친이 출신은 우크라이나이지만 폴란드, 독일, 이탈리아, 스위스 등 여러 국가의 혈통을 물려받은 국제인이라는 사실을 밝혀내고, “따라서 서재필 박사가 독립문 설계자를 스위스 기사라고 언급한 대목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만민공동회 개최

초기 관료 중심의 독립협회를 탈바꿈시켜 대중 토론회를 조직하였고, 이 토론회는 만민공동회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독립협회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의회 설립 및 입헌군주제로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정부 관료들은 그가 황제에 불충하는 선동을 한다고 비난했다. 대한제국 조정의 수구파는 서재필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으나, 그가 미국 시민권자이므로 해코지하였다가 외교문제로 비화될 것을 우려하여 중단하게 되었다. 한편 서재필은 자신을 찾아오는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영어를 배우고 유학을 가서 신문물을 보고 보는 시야를 넓혀야 된다고 하였다. 이승만김규식에게 미국 유학을 적극 권고한 것도 서재필이었다.

 

1897년 7월 30일의 한 강연에서 서재필은 "인간의 자신의 권리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임금이나 아버지를 죽일 수도 있다"는 발언을 하였다. 서재필은 인간의 권리는 하늘이 내린 것(천부인권)이며 아무런 잘못 없이 누구도 다른 인간의 권리를 함부로 침해해서는 안된다고 역설하였다. 윤치호는 이를 두고 인간의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된다는 점에는 공감하면서도, 발언이 너무 지나치다며 염려하였다.

 

1898년 3월 8일 김홍륙 등이 독립협회 지도자들을 독살하려 하자, 정교(鄭喬)와 최정식(崔廷植) 등은 그에게 시골로의 피신을 권고하기도 했다. 이후 은신해있던 그는 윤치호와 함께 3월 10일의 만민공동회를 주관한다. 1898년 3월 16일 독립협회 회장 안경수가 수원부유수로 임명되면서 공직과 협회직을 겸할수 없으므로 서재필이 회장이 되었다. 결국 그해 5월 14일 서재필이 추방령에 의해 용산을 출발, 미국으로 추방되자 그는 윤치호에게 독립협회의 권한일 일임하게 된다.

 

 

 

정부의 탄압과 외세의 공격

 

1896년 3월 14일자 서재필의 농상공부 고문 임명장

 

 

당시 주조선러시아공사 스페이어는 독립협회가 러시아의 절영도(絶影島) 할양 요구를 반대하는 구국선언 상소를 올리고 언론에 공표한 것을 두고 주조선미국공사 알렌을 방문해 항의하고 서재필의 소환을 강력히 요청했다. 러시아 공사관의 계속된 항의에 결국 알렌은 서재필이 봉급을 받는 즉시 출국시키겠다고 구두로 약속했다. 주미러시아 대사 캐시니 백작은 윌리엄 매킨리 미국 대통령에게 이를 전하고 서재필의 소환을 요청했다. 일본 역시 일본의 정부고문으로 와 있는 미국인 윌리엄스를 설득, 미국 정부에 서재필의 소환을 강력히 요청하게 했다.

 

친러정권과의 대립 외에도 보수파가 다시 정권을 잡자 서재필을 사형에 처하거나 살해할 모의가 진행되었으나 미국시민권자라는 외교문제 비화에 엮일수 있다는 외교에 밝은 일부 보수파 인사들의 설득으로 살해위기는 모면되었다. 고종 황제에게 그는 자신을 "외신"이라 칭했고, 고종 앞에서도 담배를 피우는 등, 완전히 미국인 행세를 한 점 역시 눈밖에 나는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1898년 러시아청나라, 일본 등의 서재필 추방 압력과 고종을 비롯한 대한제국 정부의 권유로 중추원 고문직에서 해고되고 1898년 5월 독립신문윤치호에게 인계하고 미국으로 돌아간다.

 

미국정부는 서재필이 지도하는 독립협회가 열강의 이권침탈을 비판하는 것을 보고 그가 미국시민권자임에도 그와 같은 행위를 함을 그를 불온시하기 시작했다.

 

훗날 서재필은 '어느 날 미국공사 알렌이 나를 찾아와 황제정부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이니 신변에 위해가 미치기 전에 속히 가족과 함께 귀국할 것을 권했다. 나는 내가 떠난 뒤라도 성과를 거둘 사람이 있을 것으로 생각해 할 수 없이 다시 미국으로 가기로 결심했다'고 회고하였다. 서재필은 거절했고, 주조선미국공사 알렌은 서재필을 귀국시키기 위해 그의 부인 뮤리엘 암스트롱의 친정어머니를 설득하여 위독하다는 거짓 전보를 보내게 했다. 뮤리엘이 조속한 귀국을 재촉하는 한편 대한제국 정부는 그를 중추원 고문에서 해촉하면서 그의 출국을 요청했다. 그는 이 사실을 알렸고, 독립협회는 조정에 항의공문을 발송했으며, 남대문 앞에서 대규모 만민공동회를 열고 정부의 행위를 강력 규탄했다. 서재필은 다시 고문직으로 초빙된다면 체류하겠다는 뜻을 내비쳤으나 정부의 입장은 단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