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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64 : 조선의 역사 406 (제26대 고종실록 29)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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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64 : 조선의 역사 406 (제26대 고종실록 29)

두바퀴인생 2013. 2. 18. 06:23

 

 

 

한국의 역사 864 : 조선의 역사 406 (제26대 고종실록 29)                 

              
 

                                         고종 황제 가족 사진

제26대 고종실록 ( 1852~1919년, 재위 : 1863년 12월~1907년 7월, 43년 7개월)

 

4. 시민계급 성장과 독립협회의 활동(계속) 

이처럼 독립협회의 힘이 막강해지자 위기의식을 느낀 보수세력은 고종을 움직여 독립협회에 의해 형성된 박정양 내각을 붕괴시키고 보수파인 조병식 내각을 조직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 보수세력은 익명서를 붙여 독립협회가 왕정을 폐지하고 박정양을 대통령에, 윤치호를 부통령으로 하는 공화제를 추진하려 한다는 수문을 퍼뜨린다. 이 때문에 독립협회를 비롯한 모든 민회가 혁파되고 이상재, 남궁억, 정교 등 독립협회 주요 간부 17명이 체포되었다.

 

독립협회가 혁파되자 만민공동회는 단체를 상설화하여 격렬한 정치변혁 운동을 전개하였다. 또 만민공동회는 먼저 구속 인사들의 석방을 위하여 민중집회를 열고 밤낮으로 농성하여 독립협회 17인의 요인을 석방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경복궁 앞의 민중대회를 통하여 익명서 사건의 진상 규명과 관련자의 처벌, 독립협회의 복구와 어용단체이자 부상(등짐장수) 조직인 황국협회의 혁파를 요구하였다.

 

하지만 정부 대신들은 만민공동회의 이 같은 요구를 거부하고 부상단체인 황국협회를 동원하여 만민집회장을 습격토록 한다. 이 때문에 유혈 충돌이 일어나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사태는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급박하게 돌아갔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정부는 고종이 직접 참석하고, 정부 관원과 각국 외교사절이 참관한 가운데 만민 대표 2백 명과 부상 대표 2백 명을 불러 화해의 자리를 마련하였다. 이 자리에 고종은 독립협회의 복설, 익명서 사건의 관련자 처벌, 부상 혁파 등 만민공동회의 모든 요구 조건을 들어주겠다는 칙어를 내리게 된다.

 

그러나 고종은 이 약속을 지키지 않게 된다. 이 때문에 다시 만민공동회는 요구 사항을 관철하기 위하여 실력 행사에 돌입하였다. 이에 고종과 보수 내각은 민회금압령을 내리고 무력으로 민회 활동을 탄압, 금지함으로서 독립협회의 활동은 사실상 종막을 고하게 된다.

 

하지만 독립협회가 19세기 말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세력 균형이 이뤄졌던 시기에 자주국권, 자유민권, 자강개혁 사상을 가지고 추진한 민권운동은 국민들의 시민의식을 성장시키는 촉매제가 되었으며, 일제 강점기 항일운동의 정신적 모태가 되었다. 

 

 

 

5. <고종실록> 편찬 경위

 

<고종실록>은 본문 48권 48책과 목록 4권 4책을 포함하여 총 52권 52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1863년 12월부터 1907년 7월까지 고종 재위 43년 7개월간의 역사적 사실을 일본의 조선총독부가 중심이 되어 기록하고 있다.

 

편찬 작업은 망국 이후인 1927년 4월에 시작하여 1935년 3월에 완료하였다. 이 책이 편찬된 것은 일제 통치기간으로 1927년 이왕직을 설치한 뒤 임시 고용원 10명과 집필생 26명을 배치하고, 실록 편찬에 필요한 자료인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 각종 기록 2,455책을 경성제국대학에서 빌려 자료를 추출하였다.

 

그리고 편찬 작업에 필요한 자료가 확보되자 1930년 4월에 편찬위원을 임명하여 역대 실록 편찬의 예에 따라 실록 찬술 작업에 착수하였다.

 

편찬 초대 위원장은 일본인 이왕직 차관 시노다였으나, 그가 1932년 7월에 이왕직 장관에 임명됨에 따라 이왕직의 예식과장이던 이항구를 차관으로 승격시켜 부위원장에 임명하고 실록 찬술의 책임을 맡겼다. 그리나 실제 편수의 총책임은 감수위원으로 임명된 경성제국대학 교수 오다가 맡았다.

 

편찬실에는 위원장, 부위원장 밑에 편찬에 필요한 공, 사의 문서를 수집하며 사적의 조사 및 관계자로부터 사실 청취의 일을 맡은 사료수집부, 각 사료에 기초하고 역대 실록에 준하여 정확성을 기하고 문자 장구를 정리하여 실록 원고를 작성하고 간행할 때 교정하는 일을 맡은 감수부의 3부서를 두었다.

 

그리고 편집부만은 다시 1, 2, 3반으로 분리하고 각 부에는 위원, 보조위원, 서기를 두었다. 한편 위원장 직할로 서무위원, 회계위원을 배치하고 편찬실 서무는 보조위원서기가 담당하였다.

 

편찬위원들은 기술, 체제, 편찬을 역대 실록, 특히 <철종실록>의 예에 따른다는 작업 원칙을 세우고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을 편찬하였다.

 

이 실록은 민족 항일기에 일본인들의 간여하에 이루어진 것이기 대문에 사실이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편찬 각 위원회에서 편찬된 원고가 편찬 총 책임자인 경성제국대학 오다 교수에 의해 감색, 감증 등의 손질이 가해졌고, 또한 실록 원고는 일본인인 이왕직 장관의 결재를 얻어 간행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실록은 <승정원일기>나 <일성록>, 그 밖의 관찬 기록들에서 중요 내용을 채록하였기 때문에 고시대사를 연구하는 데 주요한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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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 그는 누구인가?

 

서재필(徐載弼, 1864년 1월 7일 ~ 1951년 1월 5일) 또는 미국 귀화명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은 대한제국의 정치인, 언론인이자 미국 국적의 한국 독립운동가, 언론인, 군의관, 정치인, 의학자였다. 미국에서 의사로 활동했다.

 

1882년(고종 20년) 과거에 급제, 교서관부정자(校書館副正字)로 관직에 올랐다. 그 뒤 김옥균, 홍영식, 윤치호, 박영효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일본을 경유하여 미국으로 가 망명 생활을 했다. 후에 귀국하여 독립 협회를 조직했다. 이후 독립협회를 통해 토론회와 강연회, 상소 활동, 집회 및 시위 등을 주도했고, 민주주의참정권(參政權)을 소개하고, 신문물 견학을 위한 외국 유학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1896년 4월 7일 한국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을 발간하였는데, 후일 이 신문의 창간을 기념해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4월 7일신문의 날로 지정하였다.

 

그의 개화 계몽사상을 견제하던 고종에 의해 강제 출국된 뒤 미국에 체류, 대학을 다니며 의사로 활약했다. 이후 문구점과 상점을 운영하기도 했다. 1910년 한일 합방 이후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하기도 했으며, 이승만, 박용만, 안창호 등과 함께 재미한국인 교민 지도자로도 활동했다.

 

1919년 3.1 운동 전후, 자신이 운영하던 문구점과 가구점이 파산하면서 생계에 곤란을 겪던 그는 독립운동과 동시에 병원에 의사로 취직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1941년 태평양 전쟁 중에는 징병검사관으로 봉사하여 1945년 1월 미 의회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광복 직후 미군정 사령장관 존 하지 등의 주선으로 귀국하여 미군정과도정부의 고문역을 역임하다가 1948년 출국 후 미국에서 병사하였다. 한때 그를 대통령 후보자로 추대하려는 운동이 있었으나 사양하였다. 1890년 6월 10일 한국인 최초의 미국 시민권자가 되기도 했다.

 

갑신정변의 주동자라 하여 그의 두 형과 부모는 자결했고, 옥에 갇힌 그의 본처 역시 자결했다. 당시 군대에 있던 그의 동생 서재창과 동생 서재우 역시 처형되었다. 그때 그의 맏형 서재춘의 아들 중 살아남은 조카들이 혈통을 이어 그 후손이 현존하고 있다. 또한 시집간 큰누나와 누군가에 의해 구출된 여동생 서기석만이 겨우 살아남았다. 본관은 대구, 는 송재(松齋)·쌍경(雙慶)이며, 영문명은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으로 일명 “피제손”이라고도 자칭했다. 이는 그의 이름 서재필의 글자 순서를 거꾸로 한 필재서를 음역한 것이다. 필명은 오시아(N. H. Osia) 전라남도 보성군에서 태어났고 본가는 충청남도에 있었으므로 충남 출신으로도 간주된다. 그는 한국인 출신 최초의 의학박사이기도 했다. 김성근(金聲根), 박규수, 유대치, 오경석의 문인이다.

 

 

서재필
徐載弼

젊은 시절의 서재필
출생 1864년 1월 7일(1864-01-07)
조선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 가내마을
사망 1951년 1월 5일 (86세)
미국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 노리스타운 몽고메리 병원
사인 병사(후두암과 과로)
거주지 대한제국 조선 (대한제국)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
충청남도 대덕군
한성부
미국 미국
샌프란시스코
펜실베이니아 주 윌크스베리
워싱턴 DC.
필라델피아 노리스타운
국적 조선 조선대한제국 대한제국미국 미국대한민국 한민국→미국
별칭 호는 송재(松齋), 쌍경(雙慶).
영문명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
필명 피제손, 오시아
직업 언론인, 교육인, 정치가, 의사, 작가, 상인, 독립운동가
종교 개신교
배우자 광산김씨, 뮤리엘 암스트롱(Muriel Amstrong)
자녀 아들 요절, 딸 스테파니, 뮤리엘
부모 서광효(생부), 성주 이씨(생모)
서광하(양부), 안동 김씨(양모)
친척 친형 서재춘, 친형 이름 미상, 친동생 서재창, 친동생 서재우, 여동생 서기석, 외손자 필립 하디칸, 외사촌 형 이교문, 13촌 서광범, 양 외삼촌 김성근, 조카 서호석, 조카 서찬석, 종손 서명원, 서희원, 외종손 이용순

 

 

 

 

생애

 

송재 서재필은 1864년 1월 4일 외가가 있는 전라남도 동복군(현재의 보성) 문덕면 용암리 가내마을에서 진사 달성 서씨 서광효(徐光孝)와 부인 성주 이씨의 5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서재필의 출생 연도는 정확하지 않아 1864년생 설 외에도 출생연도가 1866년 10월 28일이란 설도 있다. 또한 1863년생 설도 있다. 어머니 성주 이씨이기대의 다섯째 딸로, 그가 태어나기 전 생모 성주 이씨는 초당 후원의 뽕나무를 큰 용이 감고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한다. 그 뒤 아버지 서광효의 고향인 충청남도 은진군 구자곡면 화석리로 온 가족이 옮겨가 그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조선 영조의 국구인 서종제(徐宗悌)의 8대손으로, 6대조 서덕수경종세제인 연잉군(뒷날의 영조)을 추대하려다가 처형당하기도 했다. 그의 선조들 중에는 정조의정부 영의정을 지낸 서용보가 있었다. 그러나 가세는 몰락했고 할아버지 서상기는 유복자로 가난한 삶을 보냈다. 할아버지 서상기의 둘째 아들인 아버지 서광효는 처갓집인 보성군의 재력가였던 장인 이기대(李箕大)의 집에서 10여년 간 생활하다가 집을 마련하여 다시 고향 근처로 돌아왔다. 그가 태어날 무렵 누나 1명과 형 서재춘과 둘째 형이 있었고, 그가 태어난 뒤로도 동생 서재창, 서재우와 여동생 서기석이 태어났다.

 

개화 선각자 서재필은 자서전에서 자신이 태어난 해를 1866년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가 태어난 해는 그보다 2~3년 빨랐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서재필이 자신의 '최연소 장원급제'를 내세우려는 강박에서 이런 잘못을 저지른 것으로 보고 있다.

 

그의 가계는 명문 거족이었으나 아버지 서광효진사시에 합격했을 뿐 관직에 나가지는 않았다. 서재필이 태어나던 해, 아버지 서광효진사 시험에 합격하자, 경사가 겹쳤다 하여 유년기에 서재필의 아호를 ‘쌍경(雙慶)’이라 정하였다. 하지만, 서재필은 생부모와 그리 오래 지내지 못하였다. 서광효의 6촌 형제 중 서광하가 아들이 없자, 서광효는 7살의 서재필을 6촌 서광하의 양자로 보낸 것이다. 서재필은 어린 나이에 7촌 아저씨인 서광하의 양자가 되어 근처 충청남도 은진군 진잠으로 갔다가, 관직에 오른 양부 서광하를 따라 한성부로 올라갔다.

 

나중에 그가 후일 자신을 일부 모델로 삼아 작성한 자전적 소설인 '한수의 여행'의 한 부분에 이당시의 모습을 생생히 그려 놓았다. 이 소설에는 양부(養父)를 찾아 상경하는 시골 소년 박한수가 느꼈던 생이별의 아픔과 미래에 대한 기대와 설레임, 야망, 후에 기독교를 접하고 독실한 믿음이 생겨난 것 등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유년기

서재필은 어려서부터 키가 남보다 크고 기운이 세어 동네 아이들을 잘 때리기도 하였으나, 남달리 패기와 기상이 흘러 넘쳤다.[7] 그 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그의 가문에서는 어린이들이 나약하거나 잘못했을 때는 "미국 할아버지는 그렇지 않았다"고 훈계하여, 그의 어린 시절이 그의 가문에 영향력 있는 귀감이 되기도 했다.

 

어느 여름날 외가인 보성군 문덕면에 내려갔다가 어느 원님이 부임하러 행차하던 중 어느 정자나무 그늘에서 잠시 쉬게 되었다. 동리 어른들도 감히 원님 근처에 가지 못했는데 소년이던 서재필은 두려움없이 다가가더니 호기심에 찬 눈으로 수령을 바라보았다. 수령은 비굴한 기색이 없고 당당해보이는 소년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아가 너 노래 한번 불러 보렴'하니 서재필은 바로 받아 '네 그러겠습니다. 그런데...' 말을 더듬은 사유를 원이 묻자 '원님이 갖고 계신 부채를 빌려 주시면 그것으로 장단을 맞추어 노래를 부르겠습니다.'라 하였다. 수령은 부채를 빌려달라는 소년의 엉뚱함에 내심 기특해 하면서 부채를 빌려주었더니, 소년은 그 부채를 가락에 맞추어 흔들면서 민요를 한바탕 불렀다.

 

소년의 비범함을 알아본 수령은 그의 이름을 물었고, 소년은 "서재필입니다. 호는 쌍경이라 합니다."라며 당당히 밝혔다.

 

"제 아버지께서 진사에 급제한 해에 제가 태어나 경사가 두가지 겹쳤다 하여 제 이름을 쌍경이라 하였습니다."

 

원은 그가 장차 큰 인물이 되리라고 예견하고는 임지로 떠났다. 이는 그의 외가인 보성군 문덕면에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소년기

 

스승의 한 사람인 환재 박규수

 

 

서광하의 부인이자 서재필의 양어머니는 세도가문 안동 김씨 출신이었는데, 서광하 내외는 서재필을 입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성에서 이조참판 벼슬을 하고 있던 동생 김성근(金聲根)의 집에 서재필을 보낸다. 그리하여 서재필은 김성근의 집에 머물면서 수학하고, 과거 시험을 준비하였다. 또한 김성근의 집에 머물던 중 그의 집안에 출입하던 서광범과 김성근의 일족인 김옥균을 만나게 되었다

 

김옥균은 그를 각별히 대했다 한다. 이어 김옥균과 서광범을 통해 박규수, 오경석, 유대치 등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수학, 망원경, 지구본, 지도, 화약, 손목시계 등 새로운 문명을 접하게 되었다.

 

18세 되던 1882년 과거(증광시, 병과3)에 급제하였다. 18세의 어린 나이에 급제함으로써 주위의 촉망을 한 몸에 받게 된다. 그해 6월 서재필이 처음 받은 직책은 경서 인쇄 및 관인을 관리하는 '교서관 부정자(校書館 副正字)'였다. 이무렵 서광범, 김옥균 등을 다시 만나게 된다. 그는 김옥균 등이 만든 충의계(忠義契)에 가입했고 이는 그대로 개화당으로 발전하였다.

 

 

 

관직 진출

 

개화 사상 접촉

박영효

 

 

벼슬에 오르면서 서재필은 본격적으로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를 갖게 된다. 서재필은 13촌 아저씨뻘 되는 서광범을 통해서 개화파의 중심인물인 김옥균과 조우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옥균은 12살 연하의 서재필을 ‘동생’이라 불렀고, 서재필은 김옥균을 정신적 지주로 삼았다. 이후 박영효, 홍영식, 윤치호, 이상재, 박정양, 유길준 등을 만나게 된다. 당시 개화파한성부 서대문에 자리한 봉원사를 중심으로 결속하고 있었다. 봉원사에는 개화파 승려인 이동인이 주지로 있었는데, 부산 출신인 이동인은 어려서 일본말을 배워 일본 지식인들과 교류를 하고 있었고, 서양 문물에 관한 서적들을 일본에서 들여와 당시 개화파들에게 제공하였다.

 

 

일본 체류중 촬영한 사진
(맨 왼쪽이 박영효, 그 뒤는 서광범, 우측 두번째가 서재필, 우측 앞이 윤치호

 

 

어느해 봄철이지? 김옥균이 여러 사람을 데리고 서대문 너 머 새절(봉원사)에 놀러가자고 했지. 그래 그 절에 갔더니 중 한 사람이 있는데 사람이 매우 공손하고 공부도 많이 한 모양이었어. 한데 이 중이 말하길 세계 여러 나라 도회처며 군인의 모양 같은 것을 많이 가지고 있단 말이야. 그걸 글라스(유리 안경)로 보는데 그 이름이... 옳아! 요지경! 요지경으로 보는데 모두 처음 보는 것이라 너무 재미있었단 말이야. 그리고 이 중이 일본에서 나온 책 만국사기(萬國史記) 한 권을 가졌는데, 이 책으로 여러 나라 이름이며 내용을 대강 알 수가 있었거든. 그래 김옥균이 이런 책을 어디서 또 구할 수 있느냐 한즉 책뿐 아니라 무엇이든지 돈만 있으면 구할수 있다고 한단 말이야. 그래서 김옥균이가 돈을 주어가면서 책이며 여러 가지 물건을 사오라고 했지

귀국 직후 인터뷰에서


이동인을 처음 만난지 2개월 뒤, 이동인은 책, 사진, 성냥 같은 것을 일본에서 돈주고 사왔다. 역사책도 있고 지리, 물리, 화학 관련 서적도 있었다. 이것이 신기하다 여긴 그는 친구들과 이를 보려고 서너 달 동안 봉은사에 다니다가 동대문 밖 영도사(永導寺)로 자리를 옮겨 남몰래 탐독하였다.

 

모두 읽고 나니까 세계 대세를 대충 짐작할 것 같거든. 그래서 우리나라도 다른 나라처럼 국민의 권리를 세워야 되겠다는 생각이 났단 말이야. 이것이 우리가 개화파로 첫번째 나서게 된 근본이 된 것이야. 다시 말하면 이동인이란 중이 우리를 인도해주었고 우리는 그 책을 읽고 그 사상을 가지게 된 것이니 새절이 개화파의 온상이라 할 것이야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윤치호, 유길준, 이동인 등은 모두 한때,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의 문하생이었기 때문에 서로 잘 알고 있었다. 후일 갑신정변의 주역들이 봉원사에 비밀리 모여 서양 문물에 대한 책을 읽고 시국을 논하면서 자연스럽게 ‘개화당’을 형성하여 결속을 다지게 된 것이다. 서재필은 이 중 가장 어린 나이였다.

 

 

일본 유학과 신문물 수용

국방력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김옥균의 권유로 1883년 봄 서재필은 14명의 평민 출신 청년들을 이끌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몰락한 양반이었던 탓에 양반이라는 권위의식이 적었고 이는 평민 출신 인사들과도 폭넓게 교류하는 배경이 된다. 1883년 5월 일본에 당도한 서재필과 일행은 6개월간 게이오 의숙(慶應義塾)에 입학한다. 서재필은 게이오 의숙에서 일본어를 배우고 어학의 재능도 뛰어나 유학 몇 달 만에 일본어 통역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 일본어를 익히면서 일본에 체류중인 미국인들을 만나 기초 수준의 영어를 배웠다. 1884년 1월게이오 의숙을 수료하였다. 서재필은 게이오 의숙에서 일본어를 배우며 한편으로 선진국 일본의 제도와 문물을 눈여겨 보기도 했다.

 

1884년 1월부터 7개월간은 토야마 육군 유년학교(戶山陸軍學校)에서 신식 군사 훈련을 받았다. 훈련 중에도 그는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솔선수범하였고, 지지신보 1884년 2월 28일자 기사에는 이를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서씨는 조선의 귀족임에도 규칙을 잘 준수하고 있다. 여타 생도와 일과를 끝내고 귀숙(歸宿)한 후에도 흐트러짐 없이, 스스로 규칙을 정하고 다른 생도들을 책려(策勵)하며 병서 및 산술 등을 연구하고 있다.
 
— 지지신보 1884년 2월 28일자


약 7개월간 군사훈련을 받고 1884년 7월 수료하였다. 조선으로 돌아온 사관생도들은 고종에게 신식 사관학교를 설립할 것을 간청하였고, 서재필을 사관장으로 삼아 조련국(操鍊局)을 만들 것을 건의하였다. 고종의 승락을 얻어내, 서재필은 장교를 양성하는 조련국 사관장(士官長)이 되었으나, 그러나 이 계획은 나라와 명성황후 측의 반대로 결국 무산되었다. 민비의 조카인 민영익이 민씨 일족과 1884년말 군대의 통솔권을 장악하고 군대의 훈련을 위해 청나라 장교를 부르자 군에서 쫓겨났다. 서재필을 비롯한 사관생도들은 궁궐수비대로 편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