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우면산의 겨울 16 : 우리시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6 본문
우면산의 겨울 16 : 우리시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6
관악산 전경
지난 설날 연휴가 지나고 사위와 같이 우면산을 올랐다. 남태령 방향 끝단 산정상에서 관악산을 몇 캇 찍었다. 아직 잔설이 그대로 남아 있는 산행은 아이젠 없이는 미끄러워 다니기 힘든 상태였다. 멀리 눈덮힌 관악산의 웅장한 위용이 초연하다. 북쪽 한양을 바로보며 고난과 눈물의 역사를 목격하였을 것이다.
역사의 흐름에 바람같이 지나가는 인생, 혹시 나의 흔적이 남는다면 봄이오면 사라질 우면산 등산로 눈길에 난 발자국 뿐일 것이다. 산을 내려와서 같이 설렁탕 한 그릇씩 먹고 귀가하였다. 오늘 하루의 삶에 감사하며 다가올 봄을 기다려 본다......
'전통의 옹호자로서의 위정척사와 동학'
최재우와 경허
모더니티론은 기본적으로 진화론적 발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 전통에서 모더니티로의 변화가 그 기본 가정을 이룬다. 물론 최근 모더니티론에서는 진화론적 발상과 서구 중심주의적 발상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이뤄져왔지만, 그럼에도 이 이론이 진화론이나 서구 중심주의와 완전히 단절한 것은 아니다. 모더니티의 중핵을 이루는 자본주의라는 물질문명은 본디 서구 근대의 산물이며, 비서구사회에서는 이 물질문명을 수용해왔다.
모더니티가 이러한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수용과정은 전통과의 격렬한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전통이란 다름 아닌 모더니티의 대척점에 놓여 있는 것을 말한다. 나라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특히 동아시아 사회에서 전통이란 모더니티 이전의 민족문화 또는 민족사회를 지칭한다.
문제는 모더니티에 내제된 진화론적 발상이 전통을 모더니티보다는 열등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과연 전통은 모더니티에 비해 열등한, 다시 말해 낡고 덜 발전된 것일까.
모더니티를 향한 시대정신 탐구에서 전통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두 명의 지식인의 삶과 사상을 돌아보기 위해서다. 최제우와 경허가 바로 그들이다. 최제우는 토착의 사상이자 한국적 종교라 할 수 있는 동학을 창시했으며, 경허는 기존 선불교를 혁신하고 한국 선종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주목할 것은 두 사람이 걸어간 길이 당대 지식인들과 사뭇 다르다는 데 있다. 전통을 중시하는 당대의 지식인들로는 위정척사파를 꼽을 수 있다. 위정척사파는 전통의 주자학적 질서를 옹호하고 외세에 맞서서 이를 지커내고자 했다. 위정척사라는 말에는 바른 것을 지키고 사악한 것을 물리치자는 의미가 담겨 있는데, 여기서 바른 것은 성리학적 질서이며 사악한 것은 일본을 포함한 서양 문물이다. 이러한 위정척사파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먼저 위정척사운동은 제국주의 침략에 대항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16세기 이래로 전 지구로 확장되기 시작한 서구의 식민주의는 19세기에 그 마지막 지역인 동아시아에 진출했다. 서구의 압박 아래 중국과 일본의 문호를 개방했고, 조선사회 역시 1878년 개항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성리학을 숭상하던 당시 재야 지식사회는 이러한 흐름에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됐으며, 그것은 통상 수교 요구를 거부하고 서구의 침략에 적극적으로 대항하자는 위정척사파의 척화주전론으로 구체화됐다.
그러나 제국주의에 맞서는 민족주의적 저항으로서의 위정착사운동은 다른 한편에서 주자학적 질서와 전제적 정치체제를 지지한다는 점에서 그 한계 또한 뚜렷한 것이었다. 역사 발전이 전진과 후퇴로 특정지어지는 것이라 하더라도 근대적인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한 요구는 거역할 수 없는 흐름이며, 특히 민주주의는 규범적 시각에서 볼 때 정당한 것이다. 따라서 전통을 수호하려는 위정척사운동은 근본적인 한계를 내포한 흐름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전통을 보존하려 했다는 점에서 동학은 위정척사운동과 유사하다. 하지만 동학은 유교만을 배타적으로 지지한 사상이 아니다. 동학은 유교 이외에도 불교와 전래사상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으며, 이러한 사상들을 종합적이고 생산적으로 통합하고자 하였다. 무엇보다도 동학사상은 전통사상과 더불어 평등사상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서 모더니티를 향한 흐름을 거역하지 않았다. 시대정신 관점에서 보면, 동학은 모더니티를 지지하거나 거부하는 이분법을 넘어선 '제3의 위치'를, 모더니티에 대한 시대정신 탐색에서 매우 이채로운 거점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동학의 역사적 기원은 개항 이전의 세도정치 시대로 되돌아간다.
최제우는 1824년 순조 24년 경상북도 경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최옥이며, 어머니는 곡산 한씨다. 초명은 제선이고, 자는 성묵, 호는 수운이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우다 열여섯 살 때 아버지마저 세상을 더났다. 울산의 박씨 부인과 결혼했으며, 스무 살 무렵 화재로 집을 잃은 후 1844년 세상을 구도할 도를 찿고자 길을 나섰다.
1854년 10녀 만에 고향에 돌아온 그는 처가가 있는 울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곳에서 그는 이인(異人)으로부터 천서를 받는 신비체험을 하고 수행을 연마했으며, 1856년 경주 용담으로 돌아와 이름을 제선에서 제우로 고치고 수련을 이어갔다. 1860년 그는 종교체험을 통한 한울님으로부터 무극대도를 받았고, 가사 <용담가>와 <안심가>, 그리고 단가 <검결>등을 지었다.
최제우의 본격적인 포교 활동은 이 시기부터 시작됐다. 1861년 <포덕문>을 짓고 용담을 찿아오는 사람들에게 포덕 활동을 벌였으며, 11월에는 관의 눈을 피해 남원 은적암에서 은거 생활을 시작했다. 은적암에서 머물며 그는 <논학문>을 지어 동학사상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1862년 그는 경주로 돌아왔는데, 이 시기에 동학의 입도자가 크게 늘었다. 9월에 체포되었으나 이내 풀려났고, 이후 거처를 흥해로 옮겼다. 이해 12월에 동학의 조직으로 접을 구성하고 접주를 임명했다. 1863년에는 용담으로 다시 돌아와 더욱 왕성한 포덕 활동을 벌였으며, 8월에는 수제자 해월 최시형에게 도통을 전수했다. 바로 이해 12월 최제우는 제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 철종의 승하로 대구 감영으로 이송됐다. 1864년 1월부터 심문을 받았으며, 조정의 명에 의해 대구 관덕당에서 결국 참형을 받았다. 고종 1년 3월의 일이었다.
최제우의 삶과 사상이 우리 역사에서 주목받는 것은 그의 사상인 동학이 동학농민운동에 크게 기여하였기 때문이다. 개항 이전 쇠락해가는 조선 사회에서는 농민운동이 계속 이어졌는데, 1894년에 일어나 동학농민운동은 그 절정을 이뤘다. 동학농민운동은 호남을 중심으로 지역적 규모가 대단히 컸으며, 무엇보다도 왕조를 대상으로 한 전면적인 사회운동이라는 점에서 이전의 농민운동과 성격을 달리한다.
무릇 어떤 사회운동이라도 그 운동을 이끌어가는 이념적 토대와 조직적 기반을 필요로 한다. 동학농민운동의 이념적 기초는 다름 아닌 최제우가 펼친 민중지향적 평등사상이었으며, 그 조직적 기반은 동학의 교단 조직이었다. 동학농민운동이 내건 '제폭구민(除暴救民 : 폭정을 없애고 백성을 구한다)'과 '보국안민(保國安民 :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의 사상은 동학이 농민운동에 미친 영향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그렇다면 사상으로서의 동학의 핵심 내용은 무엇인가.
서세동점의 물결 속에서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고자 했던 정조 시대가 막을 내린 후 세도정치의 등장과 함께 조선사회는 그 변화의 기회를 상실해가고 있었다. 삼정의 문란으로 농민의 경제생활은 악화되었고, 관료들의 부정부패는 전국적으로 기승을 부렸다. 더욱이 이양선들이 출몰하면서 사회의 분위기는 혼돈이 가중되고 있었다. 모더니티의 도전 앞에 당시 조선사회는 '정권의 위기'를 넘어서 '국가의 위기'로 나아가고 있었다.
동학은 바로 이러한 사회적 상황 아래서 배태되었다. <동경대전>의 '논학문'을 보면 '동학은 동방의 도, 만유의 근원이 되는 천도, 그 천도에 이른 학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최제우가 참형을 당한 16년 후인 1880년 최시형을 포함한 제자들은 강원도 인제에서 한문으로 된 유저인 <동경대전>을, 1881년 충청도 단양에서 한글로 된유저인 <용담유사>를 간행하였다.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는 동학의 양대 경전이다. <용담유사>가 일반 대중을 위해 쓰인 것이라면, <동경대전>은 지식인을 위해 저술한 것으로 보인다.
<동경대전>은 '포덕문', '논학문', '수덕문', '불연기연'의 경전과 축문, 주문, 입춘시, 기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특히 앞의 네 경전은 사상으로서의 동학의 햑심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포덕문'이 동학의 창도 이유를 밝히고 있다면, '논학문'은 동학의 핵심 사상을 이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수덕문'은 수도 자세를 제시하고 있으며, '불연기연'은 동학의 인식론과 존재론을 다루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동학에 대한 연구는 제법 활발하게 이루어져 왔다. 한편에서는 유.불.선 사상과 전래사상을 통합하고 있다는 견해가 제시되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융합을 넘어선 독창적인 사상이자 종교라는 견해가 제시되기도 했다. 어떻게 평가하든 동학이 전통사상과 외래사상, 엘리트사상과 민중사상을 융합함으로서 위기에 빠진 세계를 구원하고자 했던 통섭의 사상임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시대정신의 관점에서 동학이 갖는 의미는 앞서 말해듯이 위정척사파와 개화파와는 다른 제3의 사상적 거점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시천주 사상'은 이러한 거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최제우는 동학의 도를 익히는 방법과 순서를 21자 주문으로 요약하는데,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천주를 모셔 조화가 정해지는 것을 영세토록 잊지 않으면 온갖 일을 알게 된다'라는 의미의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특히 '시천주'는 동학사상의 핵심을 이룬다.
<동경대전>의 '논학문'에 '모심(侍)'이란 "안으로 신령함이 있고 밖으로 기화가 있으며 온 세상 사람들이 각각 자신의 본성으로부터 옮기지 못할 것임을 안다는 뜻"이며, '주(主)'란 "한울님을 보모처럼 섬긴다는 뜻"이다. 자신의 마음 속에 한울님을 진심으로 모시고자 하는 이 '시천주' 사상은 최시형의 '사인여천(事人如天)' 사상과 의암 손병희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으로 발전했으며,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천도교 사상의 출발점을 이룬다.
동학사상에는 민족주의와 민중주의가 숨 쉬고 있다. 동방의 학을 자처하듯이 동학은 서학을 포함한 서양의 물질적.정신적 팽창에 맞서려는 민족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었다. 또한 시천주에서 인내천으로 이어지는 흐름에서 보여주듯이 동학은 평등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보여주는데, 이 평등주의는 토착적 민중사상의 한 전형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민족주의와 민중주의가 사회운동으로 외화된 것이 바로 1894년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이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은 이후 1919년 3.1운동, 1960년 4월 혁명으로 이어져 그 사상적 영향을 끼쳤다. <용담유사>에서 언급한 하늘은 '몽중노소문답가'에 나오는 '하원갑'의 시대가 가고 '상원갑'의 시대를 맞이하는 '후천개벽'의 그 하늘이다. 이렇듯 동학사상에는 인간해방에 대한 강렬한 메세지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현재적 관점에서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의 내용이 너무 소박하다고 볼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뛰어난 사회사상의 의미는 그 복합성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에 대한 통찰성에 있는데, 최제우가 추구한 민족주의.민중주의.생명주의는 모더니티 문명의 한 순환에 도달한 현재 신선한 울림을 안겨주고 있다. 최제우의 후천개벽 사상은 이후 강일순의 증산교, 박중빈의 원불교 사상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며, 20세기 전반에 이뤄진 이러한 일련의 사상운동은 서구적 모더니티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결코 작지 않은 성찰의 계기를 제공해온 것으로 보인다.
앞서 두 명의 지식인으로 신라시대의 원효와 고려시대의 일연에 대해서 다루었다. 이제 그 세 번째 승려로 경허를 다루고자 한다. 경허는 지난 200년간 우리 역사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탁월한 승려이자 문제적인 지식인에 속한다.
그는 쇠락해 있던 조선 선불교를 중흥시킨 승려였다. 원효, 지눌, 휴정의 반열에 당당히 오를 정도로 경허의 업적은 탁월했고, 그 영향은 심원했다. 또 경허는 시대정신 탐구에서 매우 이례적인 인물이었다. 그가 활동해온 곳은 역사적 지평을 초월한 영역이었는데, 초시간적 삶과 존재의 본질에 대한 질문에 주목할 만한 답변을 제시했다.
경허는 사건사.국면사.구조사를 벗어나 현명한 사람들의 시간의 지평 속에 놓여 있던 지식인이었다. 하지만 존재의 본질에 대한 경허의 탐구는 현실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관념의 영역에서 이뤄진 게 아니며, 언제나 현실 속에서 살아 움직였던 것으로 보인다.
경허는 1846는 헌종 12년 전라북도 전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송두옥, 어머니는 밀양 박씨이며, 초명은 동욱이다. 1854년 의왕시 청계사에서 계허신사를 은사로 출가했다. 1859년 계룡산 동학사로가서 당시 대강백이던 만화보선에게 소승.대승 경전을 배우고 유가 및 도가사상 또한 익혔으며, 이후 강사로 전국적인 명성을 덜쳤다.
경허의 삶에서 첯 번째 전환은 1879년에서 1881년 사이에 이뤄졌다. 1879년 여름 어느날 은사인 계허선사를 찿아가던 그는 천안 근처 콜레라가 창궐한 한 마을에서 비참한 현장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곧로 동학사로 돌아온 그는 강원을 폐쇄한 다음 백척간두의 수행에 들어갔다. 이해 11월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는 말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 이어 그는 서산 연암산에 있는 천암장으로 가서 수행을 계속 이어갔다.
이후 경허는 호서 지방에서 선풍을 일으키고, 1898년에는 부산 금정산에 있는 범어사로 가서 영남 최초의 선원을 열었다. 이후 가야산 해인사, 조계산 송광사 등을 포함해 영남과 호남의 선풍을 크게 진작함으로써 선불교의 중흥을 이끌었다.
경허의 삶에서 두 번째 전환은 1904년에 주어졌다. 이해에 해인사 인경불사를 매듭지은 다음 천장암으로 돌아와 앞서 말했듯이 만공에게 전법게를 주고 후래불법을 부촉했다. 그가 새롭게 향한 곳은 북녘 땅이었다. 안변 석왕사를 거쳐 평안도로 들어간 그는 박난주라고 이름을 바꾸고 머리를 기르며 선비의 옷차림으로 서당을 여는 등 중생교화의 세계로 들어갔다. 원효를 떠올리게 하는 이러한 무애행을 경허는 1912년 4월 평안도 갑산군 웅이방에서 입적하기 전까지 계속했다. 그는 중국 당나라의 선사 반산보적의 게송을 자신의 열반송으로 삼았다.
경허가 남긴 글들은 만공을 포함한 그의 제자들에 의해 1943년 <경허집>으로 간행되었는데, 당시 생존해 있던 만해 한용운이 서문을 썼다. 이 책은 1990년에 명정 스님에 의해 우리말로 옮겨졌으며, 이후 명정 스님은 경허의 글들을 편집해 출간하기도 했다. 인물 경허를 다룬 대표적인 글 또는 책은 1931년 제자 한암이 쓴 선사 <경허화상 행장>과 한중광이 저술한 <경허 : 길 위의 스님>, 소설가 최인호가 발표한 <길 없는 길> 등이 있다.
태진 스님의 <경허와 만공의 선사상>에 다르면, 경허의 선 수행은 '간화선(看話禪)'의 수행이며, 그 사상의 핵심은 자기 참된 본래심을 되찿는 '견성대오(見性大悟)'에 있다. 경허의 사상은 '오(悟)'와 '수(修)'로 요약되는데, '오'가 자기 자신에게 본래 구족돼 있는 본래면목을 깨닫는 것이라면, '수'는 치열한 공안참구 간화선이라고 볼 수 있다. 경허는 자신의 깨달음을 개인적인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대승적인 중생교화로 연결시켰다. 삶의 후반부에 그가 보여준 일련의 무애행은 그 구체적인 증거이다.
경허의 삶과 사상은 시대정신의 시각에서 볼 때 시간의 구속을 초월한다는 점에서 반시간적이다. 시간의 누적은 역사를 이루지만 동시에 속도를 강제하기도 한다. 오늘날 현대사회 문제 중 하나는 속도의 과잉경쟁에 있는데, 그것은 우리 삶의 의미를 결과적으로 황량하게 만들고 있다. 종교로서의 불교의 진정한 메세지는 속도의 과잉경쟁을 강제하는 삶의 무의미를 넘어서 진정한 자아와 존재의 의미를 찿아가는 '부정 속의 긍정'에 있으며, 경허의 삶과 사상은 이러한 삶과 존재의 본질적 의미를 성찰적으로 계몽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역사는 결코 단일한 지층으로 이루어져 있지는 않다. 앞서 다뤘던 이건창과 서재필이 살아간 공간과 경허가 살아간 공간은 사뭇 다른 지층들이다. 나라가 무너지고 패망해가는 과정 속에서, 전염병이 창궐하고 삶의 터전이 황패해지는 과정 속에서 지식인이 선택할 수 있고 또 선택하여야만 하는 길이 결코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유마경>에 겨자씨 속에 수미산이 들어 있다고 말하듯이 인간의 삶은 실로 복잡다단한 것이며, 이러한 삶에 대한 근원적인 해명을 모색하는 것은 지식인의 또 다른 사명일 것이다. 경허는 바로 이러한 해명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것이다.
경허의 제자로는 흔히 수월, 혜월, 월면(만공)의 세 '달'이 꼽힌다. 수월은 북녘 하늘(만주지방)에 뜬 상현달, 혜월은 남녘 하늘(영남지방)에 뜬 하현달, 만공은 그 가운대(호서지방)에 뜬 보름달이 됐다고 한다.
이들 중 만공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수월과 혜월의 삶 또한 주목할 만하다. 수월은 20여 년 동안 북간도에서 나라를 잃고 그곳을 찿은 우리 민중들에게 짚신을 만들어주고 주먹밥을 해 먹였다고 한다. 혜월은 영남지방에서 선풍을 일으켰는데, 가는 절마다 개간사업을 벌일 만큼 이론과 실천을 모두 중시했다고 한다. 특히 1937년 당시 땔감으로 쓰이던 솔방을이 가득한 자루를 어깨에 메고 선 채로 그대로 열반에 든 혜월의 마지막은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지상과의 이별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최제우와 경허의 사상을 돌아볼 때 시대정신 탐구에서 전통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자연스럼게 던지게 된다. 일반적으로 전통이란 앞선 시대로부터 계승되는 사상.관습.행동 등을 포괄한다. 사회학적으로 전통은 모더니티에 맞서는 말이다.
근대사회의 형성이라는 것은 이러한 전통에서 모더니티로 진행되는 일련의 사회변동을 지칭한다. 주목할 것은 전통에서 모더니티로의 변동 과정에서 전통과 모더니티가 공존하는 시기가 결코 짧지 않으며, 상황과 국면에 따라서는 전통이 강화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전통을 어떻게 이해하고 평가해야 하는가.사회학자에 따르면 전통에서 '전통문화'와 '문화전통'은 구별되어야 한다고 한다. 전통문화가 과거 전통사회의 문화라고 말한다면, 문화전통은 과거로부터 현대까지 축적된 문화양식으로서 현재의 사회환경 속에서도 유지되는 문화를 의미한다고 한다.
다시말해, 전통문화는 과거에 속하는 우리의 고유문화이며, 문화전통은 현재에 속하는 우리의 고유문화라 할 수 있다. 사회학적으로 이러한 구분은 한 나라에서 발생하는 문화정체성의 변동을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 문화정체성이 위협받는 것은 문화전통이 단절될 대 일어나는데, 한 민족이 다른 민족에게 식민지회 됐을 때 자신의 문화전통과의 단절과 외래문화에 동화가 초래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최제우와 경허의 사상이 주는 함의는 전통과 모더니티의 이분법에 대한 새로운 성찰에 있다. 일반적인 전통은 지나간 것, 낡은 것, 열등한 것으로 치부된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의 저류에는 서구 중심주의가 작동하고 있다. 우리 전통문화의 특징은 집단주의.권위주의.가부장주의가 외형적인 모습으로 비쳐지고 주류를 형성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 내면적인 면에서 보면 인본주의.공동체주의.생명주의가 문화전통에는 살아 있기도 하다.
성장주의.경쟁주의.물질주의가 모더니티의 그늘을 이루고 있다면, 우리 문화전통에 내재한 인본주의.공동체주의.생명주의는 이러한 그늘을 치유할 수 있는 사상적.실천적 단초를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오늘날 세계화 시대에 비사구사회에서 문화전통을 어떻게 서구 문명과 접목시켜 생산적으로 계승할 것인가는 매우 중대한 과제 가운데 하나이며, 이러한 과제는 특히 문화정체성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매우 중요할 것이다.
최제우와 경허의 사상은 전통을 그대로 답습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전통을 생산적으로 재구성하려 한 것이다. 전통을 단지 낡은 것으로 폐기한 게 아니라 그 속에서 인간주의.민주주의.평등주의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고 창조하려고 한 고투가 두 사람의 지적 모험을 이루었다고 생각된다. 전통의 창조를 통해 자기 사회에 걸맞는 새로운 모더니티의 전통을 만들어가는 게 오늘날 지식인에게 부여된 또 하나의 시대적 사명이라면, 최제우와 경허의 사상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여전히 중요한 함의를 안겨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만해 한용운은 최제우, 경허와 동시대를 살아갔던 사람으로 그들과 무관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출가하기 전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으며, 경허집의 서문을 쓰기도 한 승려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식민지 시대를 대표하는 민족시인이었다. 성북동 돈암동에 한용운이 살던 심우장 집에는 기념관이 만들어져 있는데, 그의 유명한 시 <'님의 침묵' 1926년> 맨 앞에 실린 '군말'을 옮긴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의 님이 봄이라면 마시니는 이태리의 님이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니라......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
만해가 말하는 님은 누구이고 무엇인가. 그것은 민족일 수도 있고, 해탈일 수도 있고, 아니면 특정한 개인일 수도 있다. 문학을 전공하지 않는 나로서는 뭐라 이야기하기 어렵지만, 님은 이 세계 속에 살아 있는, 아니 죽어 있는 것들가지 포함하여 삼라만상 그 자체다.
만해가 전달하려는 메세지는 그리운 모든 것이 님이고, 그 님이 바로 자기 자신(그림자)이며, 그리고 그것은 다시 삶이라는 우주 속을 헤매는 어린 양으로 의화되는, 다시 말해 타자에서 자아로, 그리고 다시 또 다른 타자오 전환되는 주체와 객체의 통일로서의 존재에 대한 새로운 발전에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만해의 정신은 마음 안에 한울님을 모시고자 하는 최제우의 사상과 마음 본래의 면목을 깨닫고자 하는 경허의 사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타자와 동일성을 모색하고 그 동일성을 바탕으로 민중과 중생의 세계로 나아가도자 했던 최제우와 경허의 사상은 우리 모더니티의 초창기에서 만날 수 있는 진정한 인간주의에 다름 아니며, 전통의 생산적인 창조라고 생각된다.
우리 사회의 님은 누구인가. 그것은 다름아닌 평범한 시민, 다시 말해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이 땅의 사람들, 이 땅의 뭇생명들이지 않는가. 경허와 한용운이 꿈꾼 자유, 최제우가 기다린 세상을 다시 한 번 곰곰히 생각해 보게 된다.
'시대의 흐름과 변화 > 생각의 쉼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의 역사 865 : 조선의 역사 407 (제26대 고종실록 30) (0) | 2013.02.19 |
---|---|
한국의 역사 864 : 조선의 역사 406 (제26대 고종실록 29) (0) | 2013.02.18 |
한국의 역사 863 : 조선의 역사 405 (제26대 고종실록 28) (0) | 2013.02.17 |
한국의 역사 862 : 조선의 역사 404 (제26대 고종실록 27) (0) | 2013.02.16 |
한국의 역사 861 : 조선의 역사 403 (제26대 고종실록 26) (0) | 2013.0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