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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63 : 조선의 역사 405 (제26대 고종실록 28) 본문
한국의 역사 863 : 조선의 역사 405 (제26대 고종실록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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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황제 가족 사진
제26대 고종실록 ( 1852~1919년, 재위 : 1863년 12월~1907년 7월, 43년 7개월)
4. 시민계급 성장과 독립협회의 활동(계속)
이같은 독립협회의 활동은 그 활동 내용에 따라 대략 4기로 구분될 수 있다.
제1기는 창립부터 첯 토론회를 개최하기 전인 1897년 8월 28일까지인데, 이 시기에는 서재필의 주도 아래 독립문, 독립공원, 독립관 등을 건립하여 주로 '창립 사업에 몰두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는 회원의 대부분이 영향력 있는 인사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고급관료의 사교모임 성격이 짙었다. 하지만 회원이 2천 명을 넘고 있어 당시 사회에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켰음으로 말해주고 있다.
제2기는 독립협회가 정기적인 토론회를 개최한 1897년 8월 29일부터 구국운동 선언 이전인 1898년 2월 20일까지로 '민중 계몽 운동기'라 할 수 있다.
이 기간 동안엔 서재필과 윤치호 등의 지도 아래 토론회와 강연회를 자주 열어 회원들로 하여금 민주적인 행동을 체득하게 하는 한편,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적극적인 계몽운동을 벌여 협회의 하부구조를 다졌다. 따라서 이 시기의 독립협회는 '사회계몽 단체의 성향'을 드러내며 활동한 '애국단체'라고 볼 수 있다.
제3기는 구국운동을 선언한 1898년 2월부터 김홍륙 독다사건 이전인 같은 해 9월까지로 '민중 주도기'라고 볼 수 있다.
독립협회는 이 시기에 구국운동을 선언하고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민중의 정치 활동을 행동화하여 민의를 국가정책에 반영토록 압력을 행사한다. 또한 외세의 이권 침탈과 내정 간섭을 배제하려는 국익, 국권, 국토 수호를 포괄하는 자주국권 운동과 신체와 재산권의 자유 및 인권 보장을 위한 자유민권 운동, 관민의 협력기구로서 의회 설립을 추구하는 국민참정 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이렇게 되자 전국 각지에서 독립협회를 모방하여 공주의 독립협회, 인천의 박문협회, 찬양회, 보민협회, 황국중앙총상회 등이 생겨났다. 하지만 독립협회의 팽창을 우려한 반대 수구세력은 '황국협회'를 만들어 독립협회를 와해시키려 한다.
제4기는 '김홍륙 독다사건'이 발생한 1898년 9월 11일부터 민회금압력이 내려진 같은 해 12월 25일까지 로 '민중 투쟁기' 또는 '민권 투쟁기'라 할 수 있다.
김홍륙 독다사건은 김홍륙 일당이 고종을 암살하기 위해 고종과 태자의 커피잔에 독을 타서 죽이려 한 '암살미수사건'을 일컫는다.
김홍륙은 원래 친러시아파로 고종의 총애를 받던 인물이었다. 그는 러시아의 힘을 믿고 권력을 남용하여 백성들의 규탄을 받기도 하였는데, 1898년 친러시아파가 몰락하자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유배된 후 그는 고종에게 앙심을 품고 있다가, 고종의 생일날에 자신의 측근이던 공홍식으로 하여금 고종과 태자가 마시는 커피에 아편을 타게 하였다. 이에 공홍식은 궐내에 근무하던 김종화를 매수하여 고종과 태자의 커피잔에 아편을 타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커피를 마시려던 고종은 냄새가 이상하다 하여 커피를 마시지 않았고, 태자는 모르고 그냥 마시다가 토하고 쓰러졌다. 이 바람에 암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범인을 색출한 결과 김홍륙, 공홍식, 김종화 등은 결국 죄상이 드러나 사형에 처해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독립협회, 황국중앙총상회, 만민공동회 등이 중심이 되어 민주주의 정치를 실현시킬 것을 주장하면서 고종과 정부에 정면으로 도전하게 된다. 지나치게 외세에 의존하는 고종의 정치 행태로 인해 김홍륙 사건과 같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발생했고, 이 같은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민주주의 정권을 일궤내는 것이 급선무라고 주장하였다.
독립협회는 이 같은 힘의 과시로 보수 내각을 붕괴시키고 진보 내각을 구성토록 하였으며, 언론.집회 자유를 위한 투쟁을 승리로 이끌고 관민공동회를 열어 인민헌의안을 수락하게 만들었다. 그 외에도 인민참정권을 공인하게 하는 등 민권 투쟁에 있어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이 시기 독립협회는 4천여 명의 회원과 전국적인 지회, 각종 민권단체와 수많은 민중의 열띤 지지와 호응을 받는 전 국민의 대표기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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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문
독립신문(獨立新聞)은 1896년 4월에 한국에서 최초로 발간된 민간 신문이자 한글, 영문판 신문이었다. 발간자는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이 중심이 되어, 독립협회(獨立協會)의 기관지로 발간되었다. 서재필은 당시 4,400원을 발급받고 또 조선정부의 지원을 받아 4월 7일에 처음 발간했다. 4면 중 3면은 순국문, 1면은 영문으로 문장을 썼다. 서재필을 중심으로 발간했으나 그가 미국으로 망명한 뒤에 헨리 아펜젤러를 발행인으로 하여 윤치호가 맡아 발행하다가 독립협회의 해산과 함께 폐간되었다.
일본은 이전에 '한성순보'와 '한성신보'를 통하여 반청친일을 도모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재차 언론을 통한 조선 내 반청친일을 시도한다.
1895년 12월 3일, 일본 외무대신 육오종광(陸奧宗光)은 주한일본공사 정상각오랑(井上角五郞)에게 전보를 보낸다. “신문 발간을 위해 말씀해 오신 그렇게 많은 돈을 지출하는 일은 도저히 불가능하므로 이에 다시 한 번 절약․검소한 방법을 고려해 주기 바람. 또 신문기자는 첫째로 그 신문을 지배할 만한 인물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바, 나는 직전일랑(織田一郞)에게 그 임무를 맡겼으면 한다. 의의가 없는지 알고 싶다.”
1895년 12월 4일, 주한일본공사는 일본 외무대신에게 신문기자로 활동할 인물은 선정해 두었다는 중요한 전보를 보낸다. "신문사 창립비는 최초의 설계는 조선의 기계류를 차용할 계획이었으나 그 가망이 없기 때문에 모두 다 새로 조달할 필요로 하기에 1200원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지금 물가가 4배나 올랐기 때문에 아무리 절검하여도 1천원은 필요하므로 꼭 1천원만은 지출해주기 바란다. 또 보조비는 전(前) 설계로는 160여 원을 요하겠지만 이것은 조선 정부 기타에 파는 것을 예상하여 130원으로 감액한 것이다. 이런 것까지의 전액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되지만 앞서 진술한 대로 물가가 매우 비싼 때인지라 만일의 부족을 염려하여 130원만은 꼭 청구해 주기 바란다. 또 신문기자의 건은 이쪽에서 이미 적당한 자를 선택해 놓았다. 이것은 제가 사용하는 자이므로 그 인선은 꼭 저에게 맡겨주시기 바람."
1895년 12월 5일, 일본 외무대신은 주한일본공사에게 한글 신문기자로 적합한 인물이 있는지 묻는 전보가 온다. "오전의인(奧田義人)을 출장시키기는 어려운 일인지라, 그 대신 내각의 화방직삼랑(花房直三郞)․시전가문(柴田家門) 중 1명을 출장시키는 쪽으로 하고 싶으며, 그 사무는 오로지 내각의 조직과 각 성의 장정을 정하는 일에 사용할 계획이다. 또 오늘의 경우 민간인을 넣는 일은 사실 곤란하다. 지금 조선 정부는 빈곤하기 짝이 없어서 군대의 급료조차 4개월간이나 지불하지 못하는 형편이다. 그러므로 민간에서 사람을 넣을 때는 즉시 급료 지불에 차질이 생길 것이다. 조선문(朝鮮文: 한글-필자 주)의 신문 발행의 일은 어떠한가? 기자로서 그 곳에 적당한 사람이 있으면 속히 답전하기 바란다."
1895년 12월 5일, 주한일본공사는 일본 외무대신에게 '한글 신문' 제작은 자신에게 맡겨 달라는 요청서를 전보로 보낸다. "안광(安廣) 비서관은 오늘 아침 9시 인천을 출발하였다. 동 관이 도착할 때까지 체재하시기 바란다. 또 한글 신문의 일은 지급(至急)을 요하므로 저에게 일임시켜 주기 바람."
1895년 12월 6일, 주한일본공사는 일본 외무대신에게 한글 신문 창립비로 기밀비를 지불하고 싶다는 전보를 보낸다. "화방(花房)․시전(柴田) 가운데서 출장을 전의(詮議)하기가 어려우면 전 농상무성 특허국장으로서 지금 제2군을 수행중인 유하장웅(有賀長雄)을 파견하도록 조치하시기 바란다. 특히 동인의 봉급 지출의 길이 없음에 있어서 조선 정부의 재정 형편이 조정될 때까지는 별도 기밀금 65,000원내에서 지불할 것을 승낙하여 주시기 바람. 또 조선 신문의 창립 보조도 지출할 길이 없음에 있어서는 위 별도 기밀금 안에서 지불하고 싶다. 여하튼 지급 답전을 기다리겠음."
1895년 12월 6일, 일본 외무대신은 주한일본공사에게 신문사 창립비를 보낸다는 전보를 보낸다. "신문 창립비 1200원은 지불하겠지만 그것은 돈으로 보내고, 기계 등은 그 곳에서 정비할 작정인지 답전하기 바람."
1895년 12월 7일, 주한일본공사는 일본 외무대신에게 신문 발행을 위한 기계를 구입하겠다는 전보를 보낸다. "신문 발행에 있어 기계 등은 새로 조달할 작정이지만 신호(神戶)에는 고물로서 상당한 것이 있을 것이므로 대금을 혹 실감할지도 모른다. 더욱이 이를 위하여 이곳에서 사람을 차출할 작정임."
1895년 12월 7일, 일본 외무대신은 주한일본공사에게 신문사 창립비와 신문 제작을 위해 관리를 파견한다는 전보를 보낸다. "신문 창립비 1200원을 전신환으로 보냈음. 화방․시전 가운데 한 사람을 광도(廣島)에 체재시킬 용무가 있다. 의회 개회 중 특히 분망할 것이므로 양인이 함께 귀하의 명에 응하기 어렵다. 따라서 종종 협의한 결과 법제국 참사관인 석총영장(石塚英藏)이라면 즉시 귀하의 명에 응할 것이다. 동인은 오랫동안 법제국에 있었다. 영문학에 능하고 일본 법률에도 정통하다. 그가 마땅하다면 전보하시는 대로 본인을 도한(渡韓)시키겠음."
일본공사는 본국의 훈령에 따라 조선 정부에 지시를 한다. 이에 내부대신 유길준은 미국인으로 귀화한 필립 제이슨(서재필)을 초빙하기에 이르렀고, 필립은 일본을 거쳐 그해 12월 말경 우리나라에 오게 된다. 그는 이미 그해 3월 1일자로 부왜내각으로부터 갑신왜란의 죄에 대하여 사면을 받았기 때문이었고, 신문 창립 비용으로 국고에서 3천원과 정착 자금으로 1400원 등 4400원을 받았고, 월 300원씩 10년간 중추원 고문직을 맡기로 한 것이었다.
그 계약에 따라 아관파천 후에도 신문을 발행하는 일은 계속되었는데, 1896년 3월 14일, 그가 중추원 고문과 당시 신문 당당 부서였던 농상공부 임시고문을 겸하게 됨으로써 또다시 일제 앞잡이로서 맹활약을 하게 되었다. 그는 일제의 사주를 받아 한글로 된 신문을 통하여 조선 정부를 흔들고, 나아가 정부 전복을 꾀했던 것이었다.
필립 제이슨은 미국에서 귀국한 지 4개월 만에 독립신문을 발간하였는데, 일본정부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1896년 4월 7일 창간 당시 국배판(218*303mm)면으로 구성되었고 3면은 한글, 1면은 영어로 표기했다. 본문은 순한글 세로쓰기로 되어 있고, 논설과 광고, 국내외 소식 보도면으로 구성되었다. 한글판은 필립 제이슨이 편집을 하였고, 영문판은 헐버트가 사실상의 편집자였다.
“ | 만일 백성이 정부 일을 자세히 알고, 정부에서 백성의 일을 자세히 아시면 피차에 유익한 일이 많이 있을 터이요. 우리가 이 신문 출판하기는 취리하려는 게 아닌고로, 값을 헐하도록 하였고, 모두 언문으로 쓰기는 남녀 상하 귀천이 모두 보게 함이요. 또 구절을 떼여 쓰기는 알아보기 쉽도록 함이라. | ” |
— 독립신문 창간호 사설 |
“ | 우리가 독립 신문을 오늘 처음으로 출판하는데, 조선 속에 잇는 내외국 인민에게 우리의 주의를 미리 말씀하여 아시게 하노라.
우리는 첫째, 편벽되지 아니한고로 무슨 당에도 상관이 없고, 상하 귀천을 달리 대접하지 아니하고, 모두 조선 사람으로만 알고, 조선만을 위하여 공평히 인민에게 말할 터인데, 우리가 서울 백성만 위할 것이 아니라 조선 전국 인민을 우히여 무슨 일이든지 대언하여 주려 함. 우리는 바른대로만 신문을 할 터인고로, 정부 관원이라도 잘못하는 이 있으면 우리가 말할 터이요, 탐관오리들을 알면 세상에 그 사람의 행정을 퍼일 터이요, 사사로운 백성이라도 무법한 일을 하는 사람은 우리가 찾아 신문에 설명할 터이옴. 또 한쪽에 영문으로 기록하기는 외국 인민이 조선 사정을 자세히 모른즉, 혹 편벽된 말만 듣고 조선을 잘못 생각할까 보아 실상 사정을 알게 하고자 하여 영문으로 조금 기록함. |
” |
— 독립신문 창간사, 1896년 4월 7일 |
1897년 1월 5일부터 영문판이 분리되어 4면으로 구성된 The Independent가 발행되었다. 헐버트의 동생 아처도 한국으로 건너와 1년간 독립신문의 발행을 돕다가 귀국하였다.
윤치호가 경영을 맡은 이후에 1898년 7월 1일 주3회에서 일간으로 바꿨다.
발간자인 서재필이 미국으로 돌아간 이후 윤치호가 독립신문의 발간자를 맡았다. 1899년에 윤치호가 물러나고, 선교사 아펜젤러가 맡았다. 1899년 6월 1일부터는 영국인 엠벌리가 맡았으나, 정부가 이 신문을 매수하여 1899년 12월 4일자로 폐간하였다.
독립신문의 창간자인 서재필의 일본 유학시절 접했던 후쿠자와 유키치의 시사신보와 미국체류당시 접했던 주간지 네이션(Nation)이 독립신문의 발행 취지 및 방법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 독립신문은 정치공동체의 인적 구성원리에 대해 기존 조선 시대의 방식과는 다른 이해방식을 보여주고 이를 본격적으로 대중화시킨 최초의 신문이었다. 또한 토론과 비판을 통해 입헌군주제 등의 근대 정치공동체 건설을 위한 대안을 제시하였다.
독립신문은 청으로부터 독립을 의미하기 때문에 친일과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았다. 1898년 8월 20일자 독립신문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서울에 올 예정인데, 그는 세계적 정치가이고, 대한제국의 독립 사업에 대공이 있는 사람이므로 정부와 인민은 각별히 후대하기를 바란다는 사설을 실었다.
한글은 창제 이후 한자와 마찬가지로 띄어쓰기를 하지 않고, 마침표를 찍지 않았는데, 독립신문의 발행으로 인하여 띄어쓰기가 정착되었다. 헐버트 선교사가 발행한 영문 월간지 '한국소식'의 1896년 1월호에는 한글의 점 찍기 또는 띄어쓰기라는 윤치호의 글이 실렸는데, '장비가 말을 타고'라는 예와 '장비 가말을 타고'라는 예를 들어 띄어쓰기가 필요하다고 설명을 하였다.
독립신문사가 있었다는 곳에 대한 몇 가지 설이 있는데, 서울특별시 문화재과 표석위원회에서 배재학당 대강당 앞쪽 계단(정동 34-5번지)에 '독립신문사터' 표석을 설치하고 있으며, 오인환 전 연세대 교수는 정동제일교회 바로 건너편에 있는 '신아빌딩'(서소문동 39-1번지)이 독립신문사 자리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추정을 한다. 또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 이순우는 서울시립미술관 안쪽(서소문동 38번지) 에 있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독립문
독립문(獨立門)은 독립협회가 중심이 되어 조선이 독립국임을 상징하기 위해 영은문을 무너뜨리고 그 터에 지은 문으로 서재필의 주도로 건립되었으며 세레딘사바틴(Середин-Cабатин, 士巴津, Sabatin, 흔히 사바틴)이 설계했고, 그 현판은 이완용의 작품이다.
대한민국의 사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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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 사적 제32호 (1963년 1월 21일 지정)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
제작시기 | 1897년 |
비고 | 서재필 제작, 세레딘사바틴(Середин-Cабатин) 설계, 이완용 현판 |
독립문의 건립은 1890년대 초 서재필 등 개화파에 의해 추진되었으며 영은문이 중국에 오랫 동안 사대해온 치욕의 상징이란 이유로 헐고,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의 상징을 건설하자고 고종에게 적극적으로 건의하기 시작하였다.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조선의 독립이 국제 법상 인정 된 후, 건설이 시작되었다. 1896년에 공사를 시작해 1897년에 완공되었다. 높이는 14.28미터, 폭 11.48미터이다. 약 1,850개의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모델로 삼아서 만들었다. 현판은 이완용이 썼고 , 현판 바로 아래에는 대한제국 황실의 문양인 오얏꽃이 장식되어 있다. 앞쪽의 기둥 두 개는 옛날 영은문의 기둥으로서, 철거 후 남아있는 것이라고 한다.
1979년에 성산대로 공사로 인해 본래의 위치에서 북서쪽로 70미터 정도 이전하였고, 2009년 10월 28일에 서대문 독립공원의 재조성 공사가 완료되면서 동시에 독립문은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
황국협회
황국협회(皇國協會)는 대한제국 정부가 보부상들을 내세워 조직한 정치·경제 단체이다.
황국협회의 창립은 독립협회의 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개화파가 조직한 독립협회의 혁신적인 요구에 맞서 수구파 관료들의 후원 하에 황국협회가 결성되었기 때문이다. 아관파천으로 러시아와 밀착한 정부를 친러 정권이라고 비판하고, 헌의6조 건의와 《독립신문》 발간, 만민공동회 개최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이는 독립협회에 대항하여 1898년 6월 30일 결성되었다.
황국협회의 지도부에는 을미사변 후 의병장이었던 허위 등이 참여하고 정부의 고관이 후원하였으나, 회원 대부분은 보부상이었다. 회장은 법부 민사국장 이기동이 맡고 대한제국 황실에서도 1000원을 하사했다. 황국협회 발족식은 훈련원에서 거행되어 정부 측의 전폭적인 지원을 보여주었다.
중심 인물은 이기동과 고영근, 홍종우, 길영수 등이었다. 이 가운데 이기동과 길영수는 광산 갑부인 이용익의 측근이었다. 황국협회는 정치적으로 독립협회 견제가 출범 목적인 만큼 독립협회와는 반대되는 정치적 견해를 내세웠다. 예를 들어 독립협회가 의회 설치를 주장하면서 엘리트 위주의 상원 우선 설치를 말하자 황국협회는 서민 대중이 참여하는 하원이 먼저 설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황권의 강화를 통한 부국강병이 지론(持論)이었다.
황국협회는 독립협회가 대한제국 고종을 폐위시키는 공화정을 추구한다는 내용의 벽서를 붙이고 반독립협회 여론을 일으켰다. 결국 1898년 11월 15일에 독립협회는 해체되고 간부들이 검거되었다. 독립협회 해산에 반발하는 만민공동회가 서울에서 열릴 때 황국협회 회원들이 습격하면서 양 집단의 물리적 충돌도 일어났다. 이 충돌에 고종이 직접 나서서 화해를 종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곧 군대를 동원한 강제 해체로 만민공동회마저 사라지자 존재 목적이 없어진 황국협회도 해산되었다.
일반적으로 황국협회는 보수적인 친정부성격의 정치단체로 인식되지만, 보부상 출신 상인으로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사업에 이바지한 이용익의 후손의 주장과 같이 “생업에 열중하고 국가경제에 이바지한 우리 땅의 백성이고 민초”들인 보부상이 조직한 집단으로서 참가자 중 일부는 후에 항일 운동에 나섰다는 평가도 있다. 또한 민간인 중심의 상업활동을 권장하여, 지주와 자본가의 입장에서 개화를 추진하던 독립협회와 마찰을 빚었다.
민민공동회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는 1898년(광무 2년) 10월 박정양을 비롯한 정부의 개혁적 관료들과 독립협회가 함께 주관했다. 독립협회 주최로 열린 민중대회이다.
처음에는 서울 종로 네거리에서 군중 집회를 열어 러시아인 고문과 군부의 교련사관의 해고를 요구하여 대중 여론을 일으켰다. 그 후 이 대회는 계속적으로 열려, 제국주의의 침략을 규탄하고 정부의 시책을 비판하였다. 만민공동회는 독립협회가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한 압력 수단으로 개최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점차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개최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만민공동회에 참여한 사람들도 처음에는 주로 지식인과 소상인이었으나, 점점 확대되어 학생,교원,종교인,하층민까지 참여하였다. 시민들은 점차 신분을 초월하여 나라의 일을 논의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자유로이 발표하였으며, 스스로 대표자를 뽑아 만민공동회를 민주주의적으로 운영하였다.
만민공동회 중에서 최대 규모로 열린 것은 1898년 10월 29일에 10여개의 각종 정치단체가 주최하고 군중의 요구에 의해 10여명의 정부 대신들까지 참여한 관민공동회였다. 이 회의에서 개막 연설을 한 사람은 당시 가장 천대받던 계층인 백정출신 박성춘이었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천대받는 사람이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지금 나라에 이롭고 백성이 평안할 길은 관민이 합심해야만 이룩될 수 있소. (중략) 존귀하신 관민 여러분, 합심하여 우리 황제폐하의 성덕에 보답하고 나라를 오래 부강하게 합시다.
백정 출신 박성춘의 연설에 군중들은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이 날 회의에서 정부의 외세의존적인 경향을 공격하고 시국에 대한 6개조의 개혁안을 결의하여 고종에게 주청하였다.
이 개혁안에 대해 국왕 고종도 처음에는 정당성을 인정하고 실시를 약속했으나, 수구파 관료들의 반대와 모함으로 실현을 보지 못했다. 독립협회의 해산 후에도 만민공동회는 얼마 동안 활약했으나, 정부의 탄압을 받은 후에는 계속 이어지지 못하였다.
만민공동회 운동은 시민들의 주장과 힘을 보여준 대중 운동이었다. 그러나, 이를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강화하는 데 이용하려 한 외세 의존적인 독립 협회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다. 또한, 당시 민중 운동의 주류였던 농민 운동과 결합하지 못한 부분도 한계점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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