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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61 : 조선의 역사 403 (제26대 고종실록 26)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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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61 : 조선의 역사 403 (제26대 고종실록 26)

두바퀴인생 2013. 2. 15. 10:01

 

 

 

한국의 역사 861 : 조선의 역사 403 (제26대 고종실록 26)                 

 
                                

제26대 고종실록 ( 1852~1919년, 재위 : 1863년 12월~1907년 7월, 43년 7개월)

 

3. 떨어지지 않는 녹두꽃 전봉준과 동학혁명(계속) 

그러나 동학의 자치 해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청군과 함께 조선에 진주한 일본군은 힘으로 내정개혁을 단행하려 했고, 이 때문에 청일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 조정을 장악하였다. 보국안민과 외세배격을 기치로 내걸었던 동학은 이러한 일본의 국권 침탈 행위에 분개하며 다시 봉기하게 되는 데 바로 2차 봉기이다.

 

동학군의 2차 봉기는 그해 9월에 일어났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남접은 교주 최시형의 북접에 도움을 청해 연합 전선을 폈다. 제2차 봉기에 동원된 농민군은 남접 10만과 북접 10만을 합쳐 20만 대병력이었다. 하지만 동학 농민군은 수적으로만 우세할 뿐 훈련을 받은 군인도 아니었고, 병기도 원시적이어서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10월 중순 10만 부대로 공주성을 포위하고 대공격전을 전개하였으나 패퇴하였고, 11월 다시 공주 부근 '우금치전투'에서 대패함으로서 동학군은 거의 괴멸되었고 전봉준은 일부 병력만 데리고 후퇴를 하게 된다. 그리고 나머지 농민군도 금구싸움을 마지막으로 일본군과 관군에 진압되어 전봉준은 좇기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동학군과 싸움에서 승리한 일본군과 관군은 전봉준을 생포하면 막대한 상금을 준다는 포고문을 내걸었다. 전봉준은 정읍과 순창 등지를 전전하며 몸을 피하다가 과거 자신의 부하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체포되어 12월 2일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1895년 3월 29일 손화중, 최경선,김덕명, 성두한 등의 동지들과 함께 사형에 처해졌다. 이로서 동학농민봉기는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된다. 이때 그의 나이 41세였다.

 

이렇게 일본군에 의해서 동학군의 봉기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전봉준은 영원히 민중의 영웅으로 남아 그 뒤에도 계속된 농민군과 의병의 항일 투쟁의 정신적 지주로 자리하게 된다. 그는 영원히 떨어지지 않는 민족의 녹두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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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계속)

 

 

 

기타 활동

 

대원군파와 연결

대원군파는 1894년 7월경부터 일본 세력을 퇴치하기 위해 청지방의 사회세력과 평양의 청나라군의 협력을 받으려 하였다. 이때 동학 농민군에게도 사람을 보내 협력을 요청했다.

 

구체적으로 대원군은 동학농민군, 지방의 토호세력, 양반유림, 공신의 자손들, 보부상 등에게 밀사를 파견하여 의병보익와 군수지원을 촉구하였다.

 

 

개화파 제거 기도에 참여

서울에서 대원군파는 은밀히 자객을 동원하여 개화파의 중진인물인 김홍집, 김학우, 김가진, 안경수, 조희연, 유길준, 김종한, 이윤용 등을 암살하려 하였다. 농민군은 이 계획에 협조한다.

 

이 암살계획은 동학농민군이 이준용 휘하의 통위영과 협력하여 서울을 공격하기로 하였던 1894년 8월 중순경에 실천에 옮겨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군국기무처 내에서 대원군과 이준용의 반란 모의를 조사하자고 주장했던 김학우를 암살하는데 그침으로서 제한적인 결실만을 거두었다.

 

 

 

평가

 

동학 농민 운동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농민 중심의 민중항쟁이라고 할 수 있다. 동학은 신분제의 타파를 외치고 있었기 때문에 혼란한 조선말 상황에 가난한 농민들이 의지할 수 있는 종교였기 때문이다. 동학농민운동의 성격은 간단하게 “반봉건적, 반외세적 농민항쟁”이다. 농민이 주축이 되는 운동으로 지배계층에 대한 조선 시대의 최대의 항쟁이다. 청나라와 일본의 개입으로 결국 실패했으나 후에 3.1운동으로 계승되었다.

 

동학농민전쟁은 동학이라는 종교 조직과 동학인의 지도하에 일어난 농민 항거라는 점에서 이전의 민란과 다르며, 외세 배척을 목표로 했다는 점도 처음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역사적 조건하에서 동학농민전쟁은 몇 가지 한계도 가지고 있었다.

 

첫째, 농민군은 조선 관군을 넘어선 외세의 개입에 대하여 맞서 싸울 만한 효과적인 무기와 병력이 부족하였다. 둘째, 농민들 중심의 동학군에 대항하여 기득권을 가진 향촌사회의 지주·부호·양반들의 민보단(民堡團)등을 통한 저항을 과소 평가하였다. 셋째, 사회 개혁을 위한 혁명을 수행 하면서도 대원군에 의지하려 한 것이 잘못이었다.

 

더구나 동학군 내 과격파는 조선왕조를 부정하고 새 정부를 구성하려는 시도를 보였고, 온건파 중 전봉준 등은 흥선대원군과 협력하는 등 동학군 내부에서도 의견이 일치되지도 않았다는 단점도 있었다.

 

전봉준이 백산에서 전라감사에게 내놓은 개혁요구서와 전주화약을 맺기 직전 관군 최고사령관 홍계훈에게 보낸 탄원서에는 대원군이 다시 권좌에 복귀하기를 바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오 동학 농민 운동은 애국적이고 애민적인 동기에서 일어난 구한말 최대의 농민 중심의 민중항쟁이었다. 한편, 농민군이 근대적 민주주의나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사회혁명이나 계급전쟁을 꿈꾸었다는 민중주의 역사가의 견해도 있다.

 

결국, 동학농민전쟁은 순박하고 애국적인 농민들의 자기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때의 실패경험을 바탕으로 농민층의 반일애국주의가 다음 시기의 의병운동에 양반유생과 더불어, 함께 참여하는 성숙성을 보여주게 되었으며, 농민들의 내정개혁요구는 갑오개혁에 부분적으로 반영되는 성과를 가져왔다. 반영된 내용으로는 과부의 재가 허용과 신분제 폐지 등이 있다. 그러나 이 개혁에는 농민들의 소망이었던 토지 개혁이 없었기 때문에 많은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 김개남 등 일부 과격파의 국왕 참칭이라던가, 전봉준 등 일부는 흥선대원군 등과 내통했던 점 역시 대중에게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하면서 많은 지지를 받을수 없는 하나의 요인이 됐다.

 

갑오농민봉기 이후 어처구니 없는 점은 일본군이 농민군을 학살한 것도 모자라, 조선의 양반 및 부호층들이 전쟁에 진 농민들의 재산을 모두 빼앗고 일본군과 마찬가지로 곳곳에서 농민들을 색출, 학살하였다는 점이다. (이 점은 농민군이 1차 봉기의 성공 이후에도 양반 및 부호층에 대해 특별한 처형이나 재산 몰수 등이 없이 그들을 인정해 주었다는 점과 너무나 대조적이다.)

 

이후로부터 일본군과 기득권을 가진 양반 부호들과의 연합이 시작되었고, 이것이 일본의 전략으로 채택되면서 훗날 <식민지 지주제>라는 민족분열정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관련 인물

 

대원군과 전봉준

1888년(고종 25) 무렵 전봉준은 손화중(孫和中)과 접촉했다. 그리고 그의 인도로 동학에 입도한다. 1890년 무렵 전봉준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 "그의 용무지지(用武之地)로서 동학 교문이 있음을 발견하고", 서장옥(徐璋玉)의 막료인 황하일(黃河一)의 소개로 동학에 입교했다. 뒷날 동학 농민 운동의 실패로 관군에 체포된 뒤 1895년 일본 영사관에서 있었던 제2차 재판에서 "동학은 수심(守心)하여 충효(忠孝)로써 근본을 삼고 보국안민(輔國安民)하려는 것이었다. 동학은 수심경천(守心敬天)의 도(道)였다. 때문에 나는 동학을 극히 좋아했다"고 하여 스스로 동학에 입교하게 된 경위를 밝혔다.

 

그러나 전봉준1890년 운현궁을 찾아갔다. 이후 1890년대 초반 전봉준은 운현궁에서 흥선대원군의 문객 생활을 하였다. 1892년 초 전봉준은 운현궁 문객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고향인 전라북도 고부군으로 내려와 농사를 지으며 동리 서당의 훈장으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1893년 2월 전봉준한성부로 올라가 흥선대원군을 방문하였다. 대원군은 잠시 식객으로 있었던 전봉준을 후하게 대접하였다. 이때 전봉준은 흥선대원군에게 "나의 뜻은 나라와 인민을 위하여 한번 죽고자 하는 바"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로부터 세간에는 전봉준과 대원군 사이에 무슨 밀약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

 

 

전봉준과 천우협

한편 세이토(清藤寺七郞)의 책 《천우협》(千佑俠)에서는 1894년 6월 27일에 부산을 통해 조선에 들어온 일본의 정치 폭력 조직 천우협 회원 일부가 전봉준을 만나 동학 동민 운동을 지원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천우협》에 나타난 만난 곳과 〈동도(東徒)의 죄인 전봉준 공초〉에 나타난 장소가 다르며, 〈동도(東徒)의 죄인 전봉준 공초〉에서는 당시 전봉준을 따른 군세는 고작 20여 명이었음에도 《천우협》에서는 5백여 명으로 기술하여 그 수치가 매우 차이가 크다. 결정적으로 《천우협》에 나타난 시기인 6월부터 8월 말까지는 전혀 전투가 없었음에도 《천우협》에서는 천우협 회원들과 전봉준 일동이 협조하여 관군을 격파했다고 하였다. 전봉준은 흥선대원군 계열 외에도 민씨 정권을 타도하고 청나라 세력을 몰아낼 목적으로 천우협의 회원들로부터도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일본의 폭력 조직 천우협은 팔굉일우를 바탕으로 아시아에 대한 침략을 바닥에 깔고 있는 조직으로 다른 나라의 독립이나 부국 강병을 도울 만한 조직이 아니라는 점에서도 《천우협》이 전봉준이나 동학군을 도우려 했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낮다는 시각도 있다.

 

한편 동학측 자료에서도 전봉준과 천우협(天佑俠)의 접촉을 확인해주고 있는데 『천도교 창건사』에 의하면 "일본인 다케다(武田範之) 등 15명이 금시계 1개와 마노(瑪瑙)하나를 보내어 믿음을 보이고 면회를 청한 즉 전봉준이 거리낌 없이 이들을 면담하고 시국을 서로 논하였다'하여 전봉준과 천우협 측의 면담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흥선대원군의 농민운동 사주

한편 흥선대원군이 동학 농민군에게 거병을 사주했다는 것은 러시아의 외교관의 비밀 편지에도 나타난다.

나는 나의 정보원을 통해 다음과 같은 첩보를 받았다. 임금의 아버지(대원군)가 주모자로 나서서 중대한 폭동을 조성하고 있으며, 이 폭동은 오는 여름 혹은 아무리 늦어도 가을 이전에 폭발할 것이며, 공모자와 대리인들이 일본과 중국에서 무기를 구입하고 있으며 이미 4천여정의 소총이 구매되었는바, 그 중 일부는 일본에서 나왔고 소수의 일본인이 이에 가담하여 일을 같이 꾸미고 있으며, 이 음모에 대해 일본 정부는 전혀 모르고 있다.
 
1894년 2월 21일, 주일본 러시아 공사 미하일 히트로포(Mikhail Hitrovo)가 주조선 러시아 공사 칼 베베르(Karl L. Weber)에게 보낸 비밀 정보

 

 

 

김구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김구는 동학군을 지휘했다. 지도자 최시형의 지시를 받고 황해도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습격하였으나 끝내는 관군에게 패퇴하고 몸을 숨겼다.

 

 

윤치소

동학농민운동 당시 사헌부감찰인 윤치소(尹致昭)는 아산 출신 조중양과 함께 300명 정도를 모아서 의병을 조직하고 창의통문을 천안, 아산, 온양 지역에 돌리고 천안 지역에서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윤치소는 후일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이 되는 윤보선의 아버지였다.

 

 

박성빈

동학농민군 고령, 성주 지역의 접주로 활동하다 체포, 사형을 모면한 박성빈은 5~9대 대통령 박정희의 아버지이자 총리 김종필의 처조부가 된다.

 

 

 

《전봉준공초》(全琫準供草)

 

전봉준공초》(全琫準供草)는 전봉준이 체포된 후 다섯 차례 진행된 전봉준에 대한 법정 심문 기록이다. 법부아문의 재판관과 일본 영사가 배석한 가운데 1894년 2월 9일부터 3월 10일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심문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부나 일본측에서 가장 중점을 두고 추궁한 것이 농민운동과 흥선대원군과의 관계였다. 그러나 전봉준은 대원군과 동학혁명과의 관련성을 부정하고 모든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는 등 혁명가로서의 의연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갑오동학혁명의 원인 및 경과, 농민군의 인적 구성, 전봉준과 동학의 관계, 동학의 교리 ·조직 ·교세 및 농민운동에 미친 영향 등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두 책 모두 원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돼 있다.

서광범: 네 이름이 무엇이냐?

전봉준: 전봉준(全琫準)이다.

서: 전명숙(全明淑)이라는 자는 누구냐?

전: 명숙은 나의 자(字)다.

서: 전녹두는 누구냐?

전: 사람들이 나를 그리 부른다.

서: 왜 난을 일으켰으냐?

전: 어찌하여 날보고 난을 일으켰다 하느냐? 작란(作亂)을 하는 것은 바로 왜놈에게 나라를 팔아먹고도 끄떡없는 부패한 너희 고관들이 아니냐?

서: 관아를 부수고 민병을 일으켜 죄없는 양민을 죽게한 것이 난이 아니고 무엇인가?

전: 일어난 것은 난이 아니라 백성의 원성이다. 민병을 일으킨 것은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구하고자 함이요 백성의 삶에서 폭력을 제거코자 했을 따름이다.

서: 그리하면 지방의 방백수령을 혼내주면 됐지 왜 서울에 입성코저 했는가?

전: 국체를 무시하고 궁궐을 침범한 왜놈들을 응징코저 한 것이다.

서: 그럼 서울에 살고 있는 외국인을 다 내쫓고자 했는가?

전: 아니다. 외국인은 통상만 하면 되는 것이다. 헌데 왜놈들은 군대를 주둔시켜 나라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다는 것을 그대들은 아직도 모르고 있단 말이냐? 어찌 뿌리가 썩었는데 가지를 친다함이 의미가 있을손가?

서: 너는 동학의 괴수(魁首)냐?

전: 나는 의를 펴고자 일어났을 뿐이다. 동학의 괴수라 함은 가당치 않다.

서: 동학엔 언제 입당하였느냐?

전: 삼년전이다.

서: 왜 입당하였는냐?

전: 사람의 마음을 지키고(守心) 하늘님을 공경하는 것(敬天)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서: 동학의 주의(主意)가 무엇이냐?

전: 보국안민(輔國安民)이다.

서: 그렇대면 그대는 하늘님을 공경하는 것 보다는 보국안민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동학이라는 조직을 이용한 것밖에 더 되느냐?

전: 동학은 본시 우리 해동 조선땅에서 일어난 것이며 그 도학(道學)에 종교와 정치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

서: 송희옥(宋喜玉)을 아는가?

전: 면식은 있을지 모르나 나는 그 자를 알지 못한다.

서: 송희옥이 전라일도 도집강(都執綱)이요 너의 가까운 친척이라는데도 알지 못한단 말이냐?

전: 그는 본시 부랑자로 홀왕홀래했을 뿐 나는 그를 알지 못한다.

서: 송희옥의 기서(奇書)에 의하면 너의 재차 기포는 국태공(國太公) 대원군과의 밀약에 의한 것이라는데 그것이 사실이냐?

전: 어찌 척양척왜가 대원군 한사람의 주장일까보냐? 그것은 만백성이 원하는 바이다. 내 창의문에 써있는 몇구절로써 그런 억측을 일삼는 것은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다 대원군은 우리의 의거가 해산되기만을 효유했을 뿐이다. 우리의 의거는 대원군과 하등의 관련도 없다.

서: 너는 대원군을 서울 운현궁에서 만난 적이 있다는데?

전: 유언비어일 뿐이다. 나는 대원군을 만난 적이 없다.

서: 동학에 남접 북접이 있다는데 그 구별은 무엇이뇨?

전: 그것은 호남과 호서의 지역적 구별일뿐 동학이 두개인 것은 아니다. 동학은 삼십년전 경주에 살던 최제우(崔濟愚)로부터 시작하였고 동학의 모든 접주는 최법헌(崔法軒)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최법헌이 팔도(八道)의 접주의 직책을 총괄한다.

서: 최법헌이 누구인가?

전: 해월 최시형이다. 이름은 최경상이다.

서: 그럼 너도 기포의 허락을 최법헌으로부터 받았는가?

전: 진리를 펴는데 무슨 허락이 필요한가? 충의(忠義)란 본심(本心)이다. 그대 발 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그대는 그것을 허락을 받고 치우겠는가?


《전봉준공초》(全琫準供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