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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58 : 조선의 역사 400 (제26대 고종실록 23) 본문
한국의 역사 858 : 조선의 역사 400 (제26대 고종실록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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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황제 가족 사진
제26대 고종실록 ( 1852~1919년, 재위 : 1863년 12월~1907년 7월, 43년 7개월)
3. 떨어지지 않는 녹두꽃 전봉준과 동학혁명
통상 우리 역사에서 동학이라고 하면 폐쇄적이고 고리타분한 단순한 민족종교 단체로 잘못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이 동학은 단순히 서학으로부터 민족의 문화와 국가를 지키겠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서학을 적극적으로 응용하여 새로운 세계를 구현하려 했다는 점에서 위대함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동학은 외세의 영향 없이 조선 사회의 봉건질서를 무너뜨림과 동시에 계급을 철폐하고 새로운 근대국가의 형성을 통해 민족의 부강을 꾀한 가장 자주적인 정치 조직이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어떤 단체보다도 가장 탄탄한 조직과 힘, 그리고 이념을 가지고 있었기에 대다수의 농민과, 선각적인 양반의 상당수를 참여시킬 수 있었던 거대한 민족 조직이었다. 따라서 동학은 그 어떤 이름보다도 민족적이며, 적극적인 민중 사회운동체였다고 단언할 수 있다.
만민이 평등하고, 인류애가 살아 살아 있는 이상적 사회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던 동학도들은 1894년 민란을 주도하면서 이른바 혁명적 농민 봉기를 주도한다. 이 농민들의 봉기는 제도적, 정치적으로 근대화를 목표로 하였던 한국 역사상 최초의 시민혁명이었다. 이 혁명을 주도적으로 수행한 사람이 바로 전봉준이다.
전봉준의 출생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1854년 전라도 고부군 궁동면 양교리(지금의 정읍시)에서 향교의 장의를 지낸 정창혁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그의 초명은 명숙, 호는 해봉이지만 체구가 작았기 때문에 흔히 녹두라 불리었다.
그는 젊은 시절 생업을 위해 약을 팔기도 했고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 무술을 배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하는 일과 상관없이 늘상 버릇처럼 "크게 되지 않으면 차라리 멸족하는 것이 낫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그만큼 그는 젊은 시절부터 사회를 개혁하기 위한 원대한 포부를 품고 있었다.
그는 약을 파는 것으로 생계를 잇지 못하자 태인 산와리 동곡 마을로 이사하여 세 마지기의 전답을 소유한 소농으로 지내면서, 스스로 선비를 자처하며 동네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훈장노릇을 겸하였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고 있던 그는 19세기 말로 접어들면서 사회가 급변하고 외세가 밀려드는 것을 보고 민족과 나라를 지켜야겠다는 신념으로 1890년 37세의 나이로 동학에 입교하였다. 그리고 이대부터 그는 사회개혁을 꿈꾸는 혁명가적인 기질을 발휘하게 된다.
입교한 직후 그는 동학 제2대 교주 최시형으로부터 고부지방의 동학 접주로 임명된다. 그의 인품과 지도력을 높이 평가한 주변 교도들의 추천에 힘입은 일이었다. 접주가 된 전봉준은 자신이 살던 곳에서 5리 정도 떨어진 말목장터에서 주로 포교 사업에 전념하였다. 그는 포교의 일환으로 병자들을 고치는 일도 함께 하였다. 일찍이 읽은 의서들과 함때 약초를 취급한 경험을 바탕으로 환자들에게 처방전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1892년 그가 접주로 있던 고부군에 조병갑이란 자가 군수로 영전하여 왔다. 조병갑은 농민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물론 무고한 사람의 재물을 배앗아 갈취하고 이에 대항하는 사람에게는 가차없는 형벌을 가하였다. 조병갑의 학정이 심해지자 고부 주민들을 대신하여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은 관청에 면세를 신청하는 탄원서를 제출하였고, 이로 인해 전창혁은 심한 매를 맞고는 귀가한 지 한 달 만에 장독으로 죽게 된다.
조병갑의 횡포는 비단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자신이 아버지 비각을 세우기 위해 농민들로부터 1천 냥이나 되는 돈을 거둬들이기도 했고, 또 주민들에게 갖가지 죄를 뒤집어씌워 2만 냥이라는 엄청난 돈을 벌금으로 긁어냈다. 게다가 대동미를 대신하여 돈을 거두고, 만석이라는 저수지를 만든답시고 쌀 7백석을 착복하기도 하였다.
학정에 시달리다 못한 고부 주민들은 1893년 11월과 12월 두 번에 걸쳐 군수에게 감세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하지만 조병갑은 진정서를 제출하려고 온 농민 대표들을 붙잡아 하옥시키고 고문을 가하는 것으로 탄원서에 대한 대답을 대신하였다.
탄원과 진정으로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한 농민들은 결국 힘으로 군수를 내쫓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고, 마침내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20명의 농민 지도부는 동학교도들에게 사발통문을 돌렸다. 사발통문의 내용은 고부군수 조병갑을 처단하는 것은 물론이고 전주영까지 함락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는 바로 농민과 관의 대대적인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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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동학혁명)
동학 농민 운동(東學農民運動)은 1893년~1895년 동학 지도자들과 동학 교도 및 농민들에 의해 일어난 민중의 무장 봉기를 가리키며, 크게 1894년 음력 3월의 고부 봉기(제 1차)와 음력 9월의 전주·광주 궐기(제 2차)로 나뉜다.
기존 조선 양반 관리들의 탐학과 부패에 대한 불만이 쌓이다가 전라도 고부군에 부임된 조병갑의 비리와 남형이 도화선이 되어 일어났다. 부패 척결과 내정 개혁, 그리고 동학 교조 신원 등의 기치로 일어선 동학 농민군 중 일부는 흥선대원군, 이준용 등과도 결탁했다. 전봉준은 대원군을 반신반의 하면서도 명성황후와 민씨 세력의 축출을 위해 대원군과 손을 잡았다. 대원군 역시 명성황후의 제거를 위한 무력 집단이 필요했고, 동학 농민군과 제휴하게 된다. 동학 농민군 중 일부는 탐관오리 처벌과 개혁 외에 대원군의 섭정까지도 거병의 명분으로 삼은 바 있었다.
초기에는 동학난으로 불리다가 대한제국 멸망 이후 농민운동, 농민혁명으로 격상되었다.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으로도 불리며, 갑오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갑오농민운동(甲午農民運動),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이라고도 한다. 청일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원인
전라도 고부군에 부임된 조병갑은 농민들을 괴롭혔다. 전라도 고부는 본디 비옥한 땅으로 저수지가 하나만 있으면 충분했다. 그러나 조병갑은 농민들에게 억지로 저수지를 짓게 한 다음 물값을 받았다. 그 뿐이 아니었다. 그는 음란한 죄, 화목하지 못한 죄 등 여러 죄명을 씌어 벌금을 받아 냈고, 부친의 비석을 만든다는 핑계로 돈을 걷기도 하였다.
이에 분격한 농민은 한문교사 전봉준을 선두로 1893년(고종 30) 음력 12월과 이듬해 음력 1월, 2회에 걸쳐 군수에게 시정을 진정하였으나 체포 또는 축출되었다. 이후 농민의 일부가 동학도들과 함께 한성으로 입경하여 탐관오리 처벌과 부패 정치인 파직, 민생 구휼을 청하는 상소를 올린다.
1864년 교조 최제우를 처형하여 군문 효수하였다. 이후 동학도들은 매년 교조의 무죄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는 등의 교조 신원 운동을 벌였다. 동학도들은 동학도들 대로 매년 한성으로 상경하여 교조 신원과 포교 허용을 청원하는 상소를 올렸다.
한편 1893년 초 흥선대원군은 동학도들이 상경하여 경복궁 앞에서 복합상소운동을 벌이는 기회를 이용하여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다. 정교는 1893년 2월 11일부터 2월 13일까지 3일간 박광호를 소두로 하는 약 50명의 동학교도들이 상경하여 궁궐 앞에서 교조 신원을 탄원하며 연좌시위를 벌인 사건을 대원군이 시킨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때 정교는 대원군이 은밀히 동학당 수만 명을 서울로 불러 모임을 갖고 장차 불궤를 도모하여 그의 손자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고 하였다.
동학농민운동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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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년 12월부터 94년 1월에 올린 동학도 및 농민군의 상소 중 최시형의 탄핵 상소에 의해 경상도 관찰사 조병식(趙秉式), 영장(營將) 윤영기(尹泳璣) 등이 파직되긴 했으나 이후 고관들은 농민들의 상소문을 검열하였고, 사태는 나아지진 않았다. 도리어 조병갑은 전봉준과 그의 일가를 잡아들이고, 전봉준의 부친에게 형문을 가해 죽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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