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한국의 역사 857 : 조선의 역사 399 (제26대 고종실록 22) 본문
한국의 역사 857 : 조선의 역사 399 (제26대 고종실록 22)
|
제26대 고종실록 ( 1852~1919년, 재위 : 1863년 12월~1907년 7월, 43년 7개월)
2. 고종의 가족들
가족 관계
- 부 : 문조익황제 효명세자
- 모 : 신정익황후 조씨
- 사친 부 : 헌의대원왕 이하응(獻懿大院王 李昰應)
- 사친 모 : 순목대원비 민씨(純穆大院妃 閔氏)
- 황후 : 명성태황후 민씨(明成太皇后 閔氏, 1851년~1895년)
- 왕자 (조졸) : 4일만에 사망(1871년)
- 공주 (조졸) : 222일만에 사망(1873년)
- 순종효황제 이척 (純宗孝皇帝 李拓)(1874년~1926년)
- 왕자 (조졸) : 14일만에 사망(1875년)
- 왕자 (조졸) : 105일만에 사망(1878년)
- 후비 : 순헌황귀비 엄씨 (純獻皇貴妃 嚴氏)(1854년~1911년)
- 의민황태자 은(懿愍皇太子 垠;1897년~1970년)
- 후궁 : 영보당귀인 이씨(永寶堂貴人 李氏):이순아(李順娥;1843년~1914년)
- 완친왕 선(完親王 墡)(1868년~1880년)
- 옹주 (조졸) : 1871년~1872년
- 후궁 : 귀인 장씨(貴人 張氏)
- 의친왕 강 (義親王 堈)(1877년~1955년)
- 후궁 : 광화당귀인 이씨(光華堂貴人 李氏):이완흥(李完興;1887년~1970년)
- 황자 육(皇子 堉)(1914년~1915년)
- 후궁 : 보현당귀인 정씨(寶賢堂貴人 鄭氏)(1882년~1943년)
- 황자 우(皇子 堣)(1915년~1916년)
- 후궁 : 복녕당귀인 양씨(福寧堂貴人 梁氏)(1882년~1929년)
- 덕혜옹주(德惠翁主)(1912년~1989년)
- 후궁 : 내안당귀인 이씨(內安堂貴人 李氏)(1847년~1914년)
- 옹주 (조졸) : 1879년~1880년
- 후궁 : 삼축당상궁 김씨(尚宮 三祝堂尚宮 金氏):김옥기(金玉基;1890년~1972년)
- 후궁 : 정화당상궁 김씨(貞和堂尚宮 金氏)
- 후궁 : 궁인 서씨(宮人 徐氏)
- 후궁 : 궁인 김씨(宮人 金氏)
- 후궁 : 궁인 장씨(宮人 張氏)
- 양숙부 : 철종장황제
- 양숙모 : 철인장황후
- 양형 : 헌종성황제
- 양형수 : 효현성황후 김씨
- 양형수 : 효정성황후 홍씨
의왕 이강(1877~1955년)
고종의 넷째 아들로 귀인 장씨 소생이며, 순종의 이복동생이고 영왕 이은의 이복형이다. 1877년에 태어났으며, 15세가 되던 1891년 의화군에 봉해지고, 1893년 9월 김사준의 딸을 맞아 가례를 올렸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전승을 축하하는 보빙대사로 임명되어 일본에 갔다가 그해 10월에 귀국하였다. 이듬해 5월에는 특파대사에 임명되었으며, 8월에는 특파대사 자격으로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을 차례로 방문하였다.
1900년에는 미국으로 유학하였고 같은 해 8월에 의왕에 봉해졌다. 1905년 4월 미국 유학을 마친 뒤 귀국하여 그해 6월에 적십자 총재가 되었다. 1910년 일제에게 나라가 병합되자 항일 독립투사들과 접촉하여 1919년 대동단의 전협, 최익환 등과 상해 임시정부로의 탈출을 모의하였으며, 계획을 실ㅇ행에 옮기던 중 그해 11월 만주 안동에서 일본 경찰에 붙잡혀 강제로 본국에 송환되었다.
그 뒤 여러 처례 일본으로부터 도일을 강요받았으나 거부하여 항일의 기개를 굽히지 않았고, 해방과 6.25를 경험한 뒤 서울 사가에서 곤궁한 생활을 하다가 1955년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연안 김씨에게서 우와 건 두 아들을 얻었으며, 다른 부인에게서 여러 자녀를 얻었다.
------------------------------------------------------------------------------------------------------------------------------------------------
의친왕 이강
의친왕(義親王, 1877년 3월 30일 - 1955년 8월 16일)은 대한제국의 황자로 고종의 다섯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귀인 장씨(貴人 張氏)이다. 본관은 전주, 휘는 강(堈), 초명은 평길(平吉), 호는 만오(晩悟)이다.
1891년 의화군에 봉해졌으며 1894년에 대사로 일본에 다녀오고, 이듬해 6개국 특파 대사로 영국, 프랑스, 도이칠란트,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를 방문했다. 1899년 미국으로 유학하고, 그 해 의친왕에 봉해졌으며, 1905년 귀국하여 육군 부장, 적십자사 총재 등을 지냈다. 한일 합방 이후 일제에 비타협하고 독립운동가들과 가까이하며, 1919년 대동단의 최익환 등과 연락, 상하이 임시 정부로 탈출하기 위하여 상복 차림으로 변복하고 만주 안동현에까지 갔으나, 일본군에 발각되어 강제 송환되었다. 1919년 11월 상하이 망명을 도모하면서 임시정부에 밀서를 보냈다는 내용이 ‘독립신문’ 에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 후 여러 차례 일본으로부터 건너올 것을 강요당하였으나 거절하고, 일본을 배척하는 정신을 지켰다. 이후 일제로부터 형식적인 공의 지위를 박탈당했다. 임종 직전 천주교에 귀의하였으며, 세례명은 비오이다.
의친왕 이강 義親王 李堈 | |
---|---|
1877년 3월 30일 - 1955년 8월 16일 | |
별명 | 이름은 이강 초명은 이평길(李平吉) 호는 만오(晩悟) 천주교 세례명은 비오 |
태어난 곳 | 조선 한성부 |
죽은 곳 | ![]() |
복무 | 대한제국 육군 |
최종 계급 | 대한제국 육군 부장 |
지휘 | ![]() |
기타 이력 | 대한적십자사 총재, 보빙대사, 의화군, 의친왕 |
생애
출생
고종의 다섯째 아들로 1877년에 태어났다. 이름은 이강(李堈)이며 초명 평길(平吉), 뒤에 강으로 개명하였다. 어머니 귀인 장씨는 명성황후의 미움을 받아 궐밖으로 축출되었다. 귀인 장씨는 의친왕을 낳고 명성황후의 박해를 피해 궁 밖에서 살다가, 1900년 숙원(淑媛)에 추증받고 다시 1906년 귀인(貴人)에 추증되었다. 귀인 장씨가 언제 죽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1911년 묘소를 이장했다는 기록이 있어, 1911년 이전인 것은 분명하다. 유년기에 윤치소, 이종훈, 권동진 등과 필운학당에서 수학하였다.
미국 유학
1892년 1월 28일 의화군(義和君)에 봉해졌고, 1893년 12월 6일 김사준의 딸 김수덕(金修德)을 아내로 맞았다. 1894년 7월 내의원제조 겸 사옹원제조에 임명되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보빙대사가 되어 일본을 방문하였다. 이듬해 6개국 특파대사(特派大使)로 영국,독일,프랑스,러시아,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을 차례로 방문하려다가 취소하고 중도에 되돌아왔다. 그 뒤 일본의 게이오 의숙을 거쳐 1899년(광무 3) 미국으로 건너가 1900년, 미국 내 각지를 순행하였다.
1901년 3월 버지니아 주 세일럼의 로노크 대학교(Roanoke College)에서 수학하였다. 이때 김규식 등을 만나 친분관계를 쌓기도 했다. 1901년 6월 매사추세츠 주 노스필드에서 열린 학생대회에 수행원 및 김규식 등과 함께 참석하였다.
로노크 대학교를 마치고 오하이오 주 델라웨어의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 및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 등지를 돌아다니며 학업을 계속하였으며 같은 해 8월, 1898년에 아버지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였으므로 전례에 따라 의친왕에 봉해졌다.
1905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대한제국 육군 부장이 되었다. 그 해 6월, 대한적십자사 총재에 취임하였으며 이듬해 대한제국 최고의 훈장인 금척대훈장(金尺大勳章)을 수여받았다. 이후 고종의 후궁으로 귀인이 된 엄귀비의 견제를 받았다. 황자 서열로는 순종의 다음 서열이었으나 엄귀비의 견제와 일본의 영향 등으로 황태자 자리에 오르지 못하였다.
1907년 부황 고종이 일제의 압력에 의해 강제로 순종에게 양위했다. 이때에도 그는 황태자 책봉의 기회를 박탈당하게 된다.
1907년 8월 17일 태황제 고종은 후사가 없는 순종의 황태자로 영친왕 이은을 결정하였다. 이는 자신의 왕위를 계속 위협했던 이준용과 이강을 견제하려는 고종의 의도와 이준용파와 이강파가 득세하면 자신의 실권이 잠식될 것을 우려한 이완용의 정략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이로써 장기간 해외 망명생활 중에 끊임없이 잠재적 왕위계승자로서 대우와 주목과 견제를 받아왔던 이준용과 이강은 졸지에 순종의 동생이자 황태자의 숙부라는 지위로 격하되었다.
국권 피탈 이후
일제 강점기 초기
1910년 한일합방 직후 그는 친왕(親王)에서 공(公)으로 강등당하여 이강 공이 된다. 국권 피탈 이후에는 주색에 빠진 폐인행세로 일본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던 의친왕은 항일 독립 투사들과 비밀리에 끊임없이 접촉, 교신하며 묵묵히 독립 운동을 지원하였다. 1911년 11월에는 33인의 민족지도자들과 함께 11월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기도 했다.
의친왕은 독립운동가 및 상해 임시정부의 지사들과 연락하며 망명 정부가 수립되면 황족으로서의 예우를 버리고 '일개 신민'(臣民)의 자격으로 정부를 받아들이겠다고 하였다. 또한 구 양반이었던 동농 김가진 등이 상하이로 망명, 이들은 임시정부와 의친왕 간의 연락선을 접선, 주선하였다. 그 해 상복을 입고 상하이로 가려다 일본 경찰에 잡혔다. 황실인사를 망명하게 하여 독립운동을 활성화하고자 한 대동단(大同團)의 전협(全協)등과 탈출을 모의하여 대내외적인 화제를 일으켰으나 도중 만주 안동에서 발각되어 강제로 본국에 송환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당시 대한제국 황족들에게 허용되었던 한반도내 여행의 자유를 박탈당하는 보복을 당했다.
망명 실패 이후
1919년 11월 20일자의 독립신문 기사에는 '의친왕의 친서', '의친왕 전하' 라는 말과 함께 "의친왕 전하께서 상해로 오시던 길에 안동에서 적에게 잡히셨도다. 전하 일생의 불우에 동정하고 전하의 애국적 용기를 칭송하던 국민은 전하를 적의 손에서 구하지 못함을 슬퍼하고 통분하리로다."라고 쓰여 있다. 그해의 11월 25일자 《독립신문》 2면의 기사에는 의친왕의 상해행 기사로 대부분 할애되었으며 이후 그 뒤에도 상당 지면 할애되었다 한다. 이후 조선총독부는 일본 정부에 보고하여 의친왕에게 형식적으로 부여되었던 이강 공이라는 공작 작위를 박탈했다.
1919년 재판에 회부됐으며, 그는 같은 해 대동단 총재명의로 독립선언서를 공포하기도 했다. 이후, 일본으로부터 계속해서 도일 강요를 받았던 그는 끝까지 거절·저항하여 배일 정신을 지켜내었으며 일제에 의해 형식적으로 부여되었던 공작위에서도 강제로 은퇴당하였고, 감시에 시달려야 했다. 의친왕은 이후 광인과 주색에 빠진 것을 가장하여 일제의 감시의 눈을 피해 살았다. 1940년 창씨개명령이 떨어졌을 때 그는 창씨개명을 거절하였다.
광복 이후
1945년 8월 광복 이후, 11월 3일 임정 요인들이 환국, 김구·김규식 등과 면담하였다. 그러나 해방 정국에서 그는 별다른 정치적 의사표현은 삼가하였다.
1948년 8월 15일 정부가 수립되자 황실을 배척하던 대통령 이승만의 정책에 의해 망국의 황자로서 고난의 세월을 보내다가 1950년 6월 6·25 전쟁으로 피난갔다가 휴전 후 다시 되돌아왔다. 그 후 사동궁 별궁에서 거주하다가 1955년 8월 16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의 별궁에서 79살의 나이로 타계하였다.
사후
황족들이 일제 강점기 당시 망국의 원흉으로 지탄받으면서 재조명의 기회가 없었다. 능은 부황인 고종황제의 능인 경기도 남양주군 미금읍(현 남양주시 금곡동)의 홍유릉 내에 위치한 의친왕묘(義親王墓)이다.
복권 노력
1975년 생모 김금덕의 위독소식을 듣고 귀국한 다섯째 딸 이해경은 30년 넘게 아버지 의친왕의 복권운동을 추진했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2000년대 들어 의친왕이 임시정부 요인, 대동단 등과 비밀리에 서신연락을 주고 받은 점 등이 발굴되어 연구진행중에 있다.
학위
- 게이오 의숙
- 로노크 대학교 학사
-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
상훈
- 1905년 대한제국 정부 금척대훈장(金尺大勳章)
가족 관계
정확히 그의 후궁이나 연인이 몇 명이었지는 알려져있지 않고 있다. 후궁 외에도 비공식적인 연인들도 있었으며, 이 중 일부는 그의 생전에 결별하고 재혼한 여성들도 일부 존재한다.
- 할아버지 : 흥선대원군
- 아버지 : 고종(高宗)
- 어머니(적모) : 명성황후
- 이복형 : 순종(純宗)
- 이복형 : 완친왕(完親王)
- 이복동생 : 영친왕(英親王)
- 이복여동생 : 덕혜옹주
- 어머니(생모) : 귀인 덕수장씨(貴人 德水張氏)
- 백부 : 흥친왕
- 사촌형 : 영선군
- 당질녀 : 이진완(李辰琬)
- 사촌형 : 영선군
- 숙부 : 완은군
- 비 : 덕인당 김수덕(金修德, 1880.1.21~1964.1.14, 지밀댁, 지밀어머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렸다 한다. 본관은 연안)
- 제1후실 : 수관당 정씨(修觀堂 鄭氏)
- 제2후실 : 수인당 김흥인(修仁堂 金興仁)
- 제3후실 : 수현당 정운석(修현堂 鄭雲石)
- 제4후실 : 조병숙(曺秉淑)
- 제5후실 : 수덕당 이희춘(修德堂 李喜春)
- 제6후실 : 수완당 김정완(修완堂 金貞完)
- 제7후실 : 수길당 박영희(修길堂 朴英喜)
- 제8후실 : 송씨(宋氏)
- 제9후실 : 수경당 김창희(修慶堂 金昌熙)
- 제10후실 : 김금덕(金今德, ? - 1975년)
- 제11후실 : 함개봉(咸開鳳)
- 제12후실 : 김혜수(金蕙洙)
- 제13후실 : 홍정순(洪貞順)
자녀들
정부인 덕인당 연안 김씨에게서는 슬하의 자녀가 없다. 정확한 자녀 수는 파악이 되지 않고 있으며 모두 측실이나 비공식적으로 얻은 자녀들이다. 공식으로 확인된 의친왕의 자녀는 12남 9녀이다.
순서 | 황실명 | 아명 | 호적명 | 출생 | 사망 | 생모 | 거주지 | 출계 |
---|---|---|---|---|---|---|---|---|
1남 | 이건(李鍵) | 용길 | X | 1909년 | 1991년 | 수관당 정씨 | X | - |
2남 | 이우(李鍝) | 성길 | X | 1912년 | 1945년 | 수인당 김흥인 | X | 운현궁의 이준용 |
3남 | 이방(李鎊) | 흥길 | 해진 | 1914년 | 1951년 | 수현당 정운석 | X | 소현세자파 이기손(李杞孫) |
4남 | 이창(李鎗) | 창길 | 해직 | 1915년 | 사망 | 조병숙 | X | 완평군 |
5남 | 이주(李鑄) | 수길 | 해일 | 1917년 | 1982년 | 수인당 김흥인 | X | 대궁의 이인용 |
6남 | 이곤 | 명길 | X | 1919년 | 1984년 | 수인당 김흥인 | X | - |
7남 | 이광(李鑛) | 형길 | 해청 | 1920년 | 1952년 | 송씨 | X | 계동궁의 이기용 |
8남 | 이현(李鉉) | 경길 | X | 1922년 | 1996년 | 수경당 김창희 | X | - |
9남 | 이갑(李鉀) | 충길 | 해룡 | 1938년 | 생존 | 함개봉 | 뉴욕 거주 | - |
10남 | 이석(李錫) | 영길 | 해석 | 1941년 | 생존 | 홍정순 | 전주 거주 | - |
11남 | 이환 | 문길 | 해선 | 1944년 | 생존 | 김혜수 | 산호세 거주 | - |
12남 | 이정 | 정길 | 해준 | 1947년 | 생존 | 홍정순 | LA 거주 | - |
1녀 | 이영 | 길순 | 해완 | 1918년 | 1981년 | 수덕당 이희춘 | X | 이기용 |
2녀 | 이진 | 길운 | 해원 | 1919년 | 생존 | 수덕당 이희춘 | 하남시 거주 | 이기용 |
3녀 | 이찬 | 길연 | 해춘 | 1920년 | 2009년 | 수완당 김정완 | X | 이기용 |
4녀 | 이숙 | 길영 | 해숙 | 1920년 | 사망 | 수길당 박영희 | X | 이기용 |
5녀 | 이공 | 길상 | 해경 | 1930년 | 생존 | 김금덕 | 뉴욕 거주 | 이기용 |
6녀 | 이장 | 희자 | 희자 | 1940년 | 생존 | 김혜수 | 순천 거주 | - |
7녀 | 이용 | 숙기 | 해란 | 1944년 | 생존 | 홍정순 | LA 거주 | - |
8녀 | 이현 | 숙향 | 해련 | 1950년 | 생존 | 홍정순 | 서울 거주 | - |
9녀 | 이민 | 창희 | 창희 | 1953년 | 생존 | 김혜수 | 산호세 거주 | - |
기타
- 의친왕은 본부인인 덕인당 김씨에게서 자녀가 없으며 후궁, 상궁들 외에 여성들에게서 얻은 자녀들이다. 이 중 일부는 아이를 의친왕에게 맡기고 재혼한 여성들도 있었으며, 덕인당 김씨는 남편의 자녀들을 친자녀처럼 양육하였다. 근처에 생모가 양육하는 자녀 몇 인을 제외하고는 서울 사동궁에 대가족 형태로 거주하였다.
- 사격술과 권총 사격술에 뛰어나 백발백중이었다 한다. 일제 강점기 당시 화가 나면 울분을 참을 길이 없어 사격과 권총술로 화풀이를 했다고 한다.
'시대의 흐름과 변화 > 생각의 쉼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의 역사 859 : 조선의 역사 401 (제26대 고종실록 24) (0) | 2013.02.13 |
---|---|
한국의 역사 858 : 조선의 역사 400 (제26대 고종실록 23) (0) | 2013.02.12 |
우면산의 겨울 15 : 우리시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5 (0) | 2013.02.10 |
한국의 역사 856 : 조선의 역사 398 (제26대 고종실록 21) (0) | 2013.02.10 |
한국의 역사 855 : 조선의 역사 397 (제26대 고종실록 20) (0) | 2013.0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