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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55 : 조선의 역사 397 (제26대 고종실록 20) 본문
한국의 역사 855 : 조선의 역사 397 (제26대 고종실록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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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황제 가족 사진
제26대 고종실록 ( 1852~1919년, 재위 : 1863년 12월~1907년 7월, 43년 7개월)
2. 고종의 가족들
가족 관계
- 부 : 문조익황제 효명세자
- 모 : 신정익황후 조씨
- 사친 부 : 헌의대원왕 이하응(獻懿大院王 李昰應)
- 사친 모 : 순목대원비 민씨(純穆大院妃 閔氏)
- 황후 : 명성태황후 민씨(明成太皇后 閔氏, 1851년~1895년)
- 왕자 (조졸) : 4일만에 사망(1871년)
- 공주 (조졸) : 222일만에 사망(1873년)
- 순종효황제 이척 (純宗孝皇帝 李拓)(1874년~1926년)
- 왕자 (조졸) : 14일만에 사망(1875년)
- 왕자 (조졸) : 105일만에 사망(1878년)
- 후비 : 순헌황귀비 엄씨 (純獻皇貴妃 嚴氏)(1854년~1911년)
- 의민황태자 은(懿愍皇太子 垠;1897년~1970년)
- 후궁 : 영보당귀인 이씨(永寶堂貴人 李氏):이순아(李順娥;1843년~1914년)
- 완친왕 선(完親王 墡)(1868년~1880년)
- 옹주 (조졸) : 1871년~1872년
- 후궁 : 귀인 장씨(貴人 張氏)
- 의친왕 강 (義親王 堈)(1877년~1955년)
- 후궁 : 광화당귀인 이씨(光華堂貴人 李氏):이완흥(李完興;1887년~1970년)
- 황자 육(皇子 堉)(1914년~1915년)
- 후궁 : 보현당귀인 정씨(寶賢堂貴人 鄭氏)(1882년~1943년)
- 황자 우(皇子 堣)(1915년~1916년)
- 후궁 : 복녕당귀인 양씨(福寧堂貴人 梁氏)(1882년~1929년)
- 덕혜옹주(德惠翁主)(1912년~1989년)
- 후궁 : 내안당귀인 이씨(內安堂貴人 李氏)(1847년~1914년)
- 옹주 (조졸) : 1879년~1880년
- 후궁 : 삼축당상궁 김씨(尚宮 三祝堂尚宮 金氏):김옥기(金玉基;1890년~1972년)
- 후궁 : 정화당상궁 김씨(貞和堂尚宮 金氏)
- 후궁 : 궁인 서씨(宮人 徐氏)
- 후궁 : 궁인 김씨(宮人 金氏)
- 후궁 : 궁인 장씨(宮人 張氏)
- 양숙부 : 철종장황제
- 양숙모 : 철인장황후
- 양형 : 헌종성황제
- 양형수 : 효현성황후 김씨
- 양형수 : 효정성황후 홍씨
명성황후 민씨(1851~1895년) : 계속
개화파와의 대립
임오군란 이후 민영익을 필두로 한 친청 세력이 공공연히 개화파를 탄압하자 신변에 위협을 느낀 김옥균과 박영효 등 급진 개혁파들은 1884년 10월 17일 우정국 개국 축하연을 이용해 거사를 일으켜, 민태호와 민영목 등을 죽이고 고종과 명성황후를 경우궁으로 옮겼으며, 1개 중대의 일본 병사들을 보초로 세워두었다.
정권을 잡은 급진 개화파들은 즉시 자신들의 정강과 개혁안을 공포하고, 각국 공사관에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었음을 알렸다. 이 때 명성황후는 민영익과 경기 감사 심상훈(沈相薰) 등으로 하여금 청군의 원조를 청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郎)에게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길 것을 요구하였고, 다케조에는 이 요구를 받아들여 고종과 명성황후가 거처를 창덕궁으로 바꾸도록 했다. 10월 18일 청나라 공사 원세개(袁世凱)가 6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와 고종을 면회하겠다고 요구했고, 김옥균이 이를 저지하려하자 그와 말씨름이 벌어지게 되었다. 오후 3시 경에는 청군이 1천 5백명으로 늘어났고, 성난 군중들은 궁을 지키던 일본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일본군 2백 명은 싸우지도 않고 후퇴하였으며, 신정부군 8백 명도 숫적 열세로 인해 패배했다. 이 틈을 타 명성황후는 고종과 함께 홍영식, 박영교, 몇 명의 사관생도의 호위를 받으며 탈출하여 청군의 진영으로 들어갔고, 김옥균은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변수, 유혁로와 함께 다케조에 공사의 뒤를 따라 일본군의 호위를 받으며 북문을 통해 삼각산과 양화나루, 인천을 거쳐 일본으로 도피했다. 이 갑신정변 이후 명성황후는 청나라에 의존하게 된 반면, 일본은 공사관의 화재와 성난 군중들에게 죽음을 당한 일본인들에 대한 배상을 조선에게 요구하였다. 결국 조선은 일본에게 갑신정변에 대한 배상을 해주기로 한 한성조약을 체결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이후 청나라와 일본, 그리고 남하 정책으로 얼지 않는 항구를 얻으려는 러시아의 조선 침투가 가속화되었다. 명성황후는 청나라의 주선으로 조선 정부의 고문으로 와 있던 독일의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를 매개로 러시아 공사와 접촉하여 밀약을 맺으려 했다. 그러나 이 밀약은 사전에 청나라에 발설되어, 청나라는 1885년 2월 묄렌도르프를 소환하고 임오군란 때 납치했던 대원군을 원세개를 대동하여 귀국시켰다.1885년 3월에는 영국 함대가 거문도를 점령하였는데, 1887년 청나라의 중재로 조선의 영토를 점령하지 않는다는 러시아의 약속을 받아낸 후 철수했다. 한편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르는 명성황후와 다시 밀약을 추진하려 했으나 원세개가 정보를 먼저 입수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1884년 10월의 갑신정변으로 조정의 실력자였던 민씨 척족 상당수가 김옥균, 박영효 등 급진 개화파의 살생부에 올라 죽음을 당하고 심지어 자신의 개인 비서인 내관 유재현까지 살해된다. 그때 부상당했던 양조카 민영익만 미국인 의사인 호러스 뉴턴 앨런(한국이름 안련)의 치료로 생명을 건진다. 이 일로 말미암아 명성황후는 일본과 급진 개화파를 경계하게 된다.
흥선대원군, 이준용 등과 갈등
1892년 봄, 운현궁에서 화약이 터지고 여러 건물에 장치된 화약이 발각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황현은 명성황후를 운현궁 배후로 지목하였다. 황현은 운현궁의 폭탄 테러 사건을 명성황후가 대원군 일가를 폭살하기 위해 벌인 짓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때 흥선대원군의 사랑채와 이재면, 이준용 부자의 거처에도 폭약이 장치되어 있었으나 다행히 점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각되었다. 이는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의 오빠인 민승호에게 폭약을 보내 일가를 폭사시켰던 전례에 대한 정치적 보복극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윤효정은 이 사건이 이준용이 통위사에 오른 것을 기념한 1894년 7월 중순 경에 일어났다고 기술하였다. 민승호일가 폭사 사건 이후 사건의 배후로 의심받던 대원군은 수시로 자객과 폭탄 테러 위협에 시달림당하였다. 그러나 그는 고종과 명성황후를 축출할 계획을 시도한다.
동학 농민군과의 대립
이처럼 조선을 둘러싸고 청나라, 러시아, 일본 간의 각축전이 벌어지는 속에서 명성황후는 권력의 유지에 모든 역량을 쏟았다. 가장 강력한 정적인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은 몰락했고, 정부 요직을 장악한 명성황후의 민씨 일가의 뒷받침으로 막강한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민씨 일가는 정부의 관직을 사고 파는 매관매직을 일삼았고, 특혜를 받은 지방관들의 착취로 농민들의 생활은 피폐해졌다. 이 와중에 동학은 비록 창시자 최제우가 혹세무민(惑世誣民) 죄목으로 처형되었으나 2대 교주 최시형을 중심으로 발전, 정부와 대등한 힘의 조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1893년 3월 충청도 보은 집회에서는 2만여 명의 동학 농민들이 집결하여 농민을 착취하는 지방관들의 척결과 민생고 타개, 일본과 서양의 배척 등을 요구하였고, 1894년 1월에는 전봉준을 중심으로 고부군수 조병갑의 착취를 규탄하는 농민 운동이 일어났다. 온건 개화파 및 척신들과 가까이 지내던 왕후로서는 동학 농민군을 동비(東匪)로 보고한 것을 그대로 신임하였다.
같은 해 4월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자 명성황후는 청나라에 원병을 청하였다. 청나라가 이에 응하여 출병하자 일본도 톈진 조약을 빌미로 파병하였다.
청군과 일본군이 조선에 당도하자 농민군과 관군은 전주화약을 맺고 전라도 53개 지역에 민정 기관인 집강소를 설치하여 치안과 행정을 처리키로 하고 싸움을 중지했다. 그러나 청나라와 일본은 철수를 거부하고 군대를 증파했다. 일본은 청나라에게 함께 조선의 내정 개혁을 실시하자고 제의했지만, 청나라는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일본어: 大鳥 圭介 오오토리 케이스케)는 휘하의 군대를 이끌고 입궐하여 민씨 일가를 축출하고 흥선대원군을 다시 궁으로 돌아오게 하였으며, 김홍집을 총리 대신에 앉히고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여 내정 개혁을 단행했다. 갑오경장을 통해 조선의 내정 개혁을 단행한 일본은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을 선제 공격한 후 정식으로 선전포고하였으며, 7월 ~ 9월 사이에 청나라와 전쟁을 벌여 승리했다.
명성황후 폐위 음모와 실패
갑오경장 초두에 대원군과 이준용은 고종 폐위의 전초작업으로서 명성황후 폐서에 착수하였다. 1894년 6월 22일부터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 폐서의 취지를 적은 문건을 일본 공사 오토리에게 제시하였다. 그러나 일본 측에서는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이준용도 6월 22일부터 24일까지 재조선 일본 공사 오토리 공사를 설득하기 위해 일본공사관을 두 차례 방문하였다. 그러나 스기무라 서기관 등 일본 공사관 직원들의 강력한 반대로 흥선대원군과 이준용의 의도는 실패하였다. 흥선대원군은 6월 24일 이준용을 별입직에 임명하여 고종과 명성황후에 대한 감시를 한층 강화하였다. 7월 초 고종은 갑오경장을 단행한다. 이때에도 이준용은 꾸준히 일본 공사관을 방문하여 명성황후 폐출의 정당성을 역설하며 협조해줄 것을 부탁했다. 갑오경장을 전후해서 대원군과 이준용은 명성황후를 공격, 폐서인하려는 음모를 꾸몄으나 일본 영사관에서 호응하지 않아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1894년 6월 21일 일본군 혼성여단이 경복궁을 강제로 점령하였다. 정권 회복과 왕조 중흥 방안 마련에 골몰하던 대원군은 “조선의 땅을 한 치도 요구하지 않겠다.”라는 스기무라 후카시 일본 공사관 서기관의 확약을 곧이곧대로 믿고 일본 상인의 호위를 받으며 입궐하였다. 이로써 민씨 세도는 무너졌다. 그러나 일본은 대원군 세력을 달포 만에 끌어내린다. 그 뒤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대신하여 김홍집 내각을 앞세워 경장사업(更張事業)을 추진한다. 이로 인해 민씨 세력은 좌찬성 민영준(뒤에 영휘(永徽)로 개명)을 필두로 한 민씨 일족은 모두 유배되었고, 폐출 위기를 가까스로 넘긴 명성황후도 경기도 감사 홍순형(洪淳馨)의 집에 피신한다.
동학 농민군 진압
청일 전쟁 이후 일본의 간섭이 본격화되자 동학군이 다시 소집되어 대일 농민 전쟁을 감행했다. 그러나 12월 우금치 전투에서 농민군이 대패하여 봉기는 실패로 끝나고, 전봉준도 부하의 밀고로 순창에서 체포되어 1895년 3월 처형되었다.
동학 농민 운동 초기에는 보고서에 기록된 것처럼 단순 비적 정도로 인식했으나 명성황후는 동학 농민군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보게 되었는데, 이는 동학 농민군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전봉준과 흥선대원군의 관계 때문이었다. 1890년 전봉준은 운현궁을 찾아갔다. 이후 1890년대 초반 전봉준은 운현궁에서 흥선대원군의 문객 생활을 하였다. 그 뒤 전봉준은 고향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흥선대원군을 찾아가 협력을 청하기도 했던 것이다. 1893년 2월 전봉준은 한성부로 올라가 흥선대원군을 방문하였다. 대원군은 잠시 식객으로 있었던 전봉준을 후하게 대접하였다. 이때 전봉준은 흥선대원군에게 "나의 뜻은 나라와 인민을 위하여 한번 죽고자 하는 바"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로부터 세간에는 전봉준과 흥선대원군 사이에 무슨 밀약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
1895년 일본 공사로 부임한 미우라 고로와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 등이 명성황후 제거를 모의했는데 이들은 대원군을 끌어들이려 하였으나 대원군은 처음에는 거절하였다. 대원군은 장손 이준용이 교동에 유폐된 이래 불만을 품고 공덕동 별장에 칩거하면서 외출도 하지 않고 있었다. 뒤에 오카모도가 운현궁을 찾아 대원군을 설득하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비밀리에 일본 공사관을 자주 출입했는데, 유길준은 그가 수시로 일본 영사관을 드나들었다고 지적했다.
죽음
1895년 4월 청나라와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어 요동 반도를 할양받고 조선에서의 우세를 확인한 일본은 대원군을 퇴진시키는 한편 사임했던 김홍집을 7월에 다시 총리대신으로 앞세워 연립 내각을 구성하는 한편, 의정부의 명칭도 내각으로 바꾸고 일본인 고문관을 두어 내정 간섭을 강화했다. 그러나 일본은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압박으로 요동 반도를 다시 청나라에게 돌려주었는데, 정세를 탐지한 명성황후는 러시아를 통해 일본을 몰아내려하였다. 명성황후는 김홍집 내각을 축출하고, 박정양을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하였다. 그러자 일본 공사 겸 예비역 육군 중장 미우라 고로(일본어: 三浦 梧楼)는 8월 15일 서기관 스기무라 후카시(衫村濬), 무관 구스노세 유키히코(楠瀬幸彦), 로닌 두목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 등과 함께 행동 계획을 수립하였는데, 일본군과 로닌들이 실질적인 암살 작전에 들어가고, 조선군을 표면적으로 앞세워 쿠데타로 가장,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대원군을 꼭두각시로 세운다는 내용이었다. 8월 16일 대원군의 공덕리 별장 사랑에서 일본인 궁내부 고문관 오카모토 류우노스케가 명성황후 제거와 관련한 4개항의 각서를 대원군에게 제시하고 대원군의 자필 서명을 받아냈다. 각서는 거사후 대원군이 국왕을 보필해 궁중을 감독하되 정사는 내각에 맡겨 일체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었다. 일본은 명성황후를 제거한 뒤 대원군이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미리 쐐기를 박아둔 것이다. 이날 대원군이 각서에 자필 서명하는 자리에는 대원군의 장남인 이재면과 장손자 이준용도 함께 있었다.
그들은 8월 20일(양력 10월 8일)에 명성황후 살해 결행에 들어갔다. 우선, 일본군은 당시 대원군이 은거하고 있던 공덕리의 아소정(我笑亭)에, 일본군이 미리 훈련시킨 조선군과 로닌 100여명을 대동하고 야간 훈련 명목으로 나타났다. 미우라는 여기서 대원군과 결탁하여 대원군을 사인교에 태우고 경복궁으로 나아갔다. 대원군은 출발에 앞서 자신의 거사 취지를 밝히는 '고유문'을 발표하고 이를 서울 시내에 게시하라고 지시했다. 고유문은 '민씨 척족이 권력을 잡고 갑오경장의 개혁을 무위로 돌려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있으니 이들을 척결해 버리겠다'는 내용이다. 이는 일본의 강요가 아닌 흥선대원군의 친필로 적은 성명서였다. 일본에서 명성황후 암살을 계획한다는 첩보가 입수되었으나, 흥선대원군의 거사 고유문이 발표되면서 첩보를 입수한 조선의 식자들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유길준에 의하면 1894년 가을 명성왕후가 개화당(개화파) 모두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꾸몄다가 흥선대원군의 첩보망에 발각되었고, 흥선대원군은 일본공사 오카모토와 협의 끝에 일본인들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얻어 그녀를 죽이기로 결정하였다.'고 한다. 인천에 도착한 일본 낭인들은 이두황, 이진호, 우범선, 이주회 등이 이끄는 조선인 병력의 길안내를 받고 반나절도 안돼 도성에 잠입했다.
암살
경복궁에서 수비 대장 홍계훈이 이들을 가로막았으나, 홍계훈과 수비대원들은 일본 낭인들, 낭인들에게 협력한 조선인 병사들이 쏜 총에 맞아 죽는다. 홍계훈을 죽인 무사들은 궁궐에 들어가 명성황후를 찾아다녔다. 명성황후는 궁녀복으로 갈아입고 건청궁 곤녕합 쪽에 있는 옥호루로 피신했는데, 무사들은 궁녀와 내관 40여명을 붙잡아 학살하고 있었다. 내부대신 이경직이 두 팔을 벌려 명성황후와 궁녀들 앞을 가로막자 무사들은 이경직의 양 팔목을 잘라 죽이고 명성황후를 찾아낸다.
조선인 안내자들은 궁녀들의 얼굴을 보고 누구라고 지목했고, 궁녀로 변장한 명성황후를 찾아낼 수 있었다. 이들은 명성황후의 발을 걸어 가슴을 수 차례 밟은 다음 칼로 난자 살해하여 그 시신을 궁궐 밖으로 옮겼다. 그리고 시신에 석유를 붓고 불태웠다. 당시 명성황후의 나이는 45세였다.
명성황후가 살해됐다는 것은 경복궁내 강령전에 머물며 휴식을 취하고 있던 대원군에게 즉각 보고됐다. 대원군은 겁에 질린 고종이 그를 부르는 형식을 빌려 이날 아침 경복궁내 건청궁에서 아들과 대면하게 된다. 대원군이 건청궁으로 향하던 바로 그 시각, 명성황후의 시신은 홑이불에 싸인 채 대궐 소나무 숲으로 옮겨져 석유가 뿌려진 가운데 초가을의 새벽 하늘로 한줄기 연기가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대원군은 고종과 대면한 자리에서 대원군은 고종의 형이자 자신의 장남 완흥군 이재면을 궁내부대신에 앉히고 다시 정권을 장악한다.
사후
명성황후의 암살은 바로 한성부에 체제하고 있던 프랑스와 청나라 공사관의 외교관 및 외교관 부인, 언론인들의 입을 통해 외국에 알려졌다. 주조선 러시아 공사 웨베르는 즉시 보고서를 작성하여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보고했다. 당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웨베르의 보고서를 직접 읽은 뒤 표지에 친필로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단 말인가. 정말 놀라운 일이다”라고 적은 뒤 즉각 한반도에 가까운 아무르 주 주둔군에 비상 대기령을 내렸다. 프랑스 공사관에서는 명성황후 암살의 배후로 흥선대원군을 의심했다.
1895년 10월 김해 사람 문석봉은 충청북도 보은 등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의병을 일으켜 적당들을 토벌하자고 소리쳤다. 그러자 이곳과 인접한 읍의 유생, 선비
들이 두건과 도포를 입고 나아갔지만 얼마 후 공주부에서 보낸 군사에 의해 모두 체포되었다.
일본은 고종에게 압력을 가하여 왕비 살해 이틀 후 명성황후의 직위를 폐서인으로 강등시켰지만, 고종은 바로 다음 날 "빈"(嬪)으로 다시 승격시켰다. 사건이 국제적으로 알려져 비난을 받게 된 일본은 10월에는 형식적인 조사를 하였으며, 명성황후의 신원도 살해 이전으로 완전히 복원되었다. 1896년 러시아 공사로 거처를 옮겼던 고종은 1897년 2월 환궁하여 8월에 연호를 광무로 고치고, 10월에는 황제에 올라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쳤다. 이와 함께 명성황후의 사후 지위도 올라가 1897년 음력 1월 6일 시호를 문성황후라 하고, 능호는 홍릉으로 고쳤다. 그러나 시호 문성(文成)이 정조의 시호와 같다 하여 음력 3월 2일 시호를 명성황후로 고쳤다. 같은 해 10월 고종의 황제 즉위에 따라 황후에 추존되었으며, 장례도 국장으로 다시 치러져 지금의 청량리동에 안치되었다가 지금의 위치로 개장했다.
1919년 고종이 붕어한 뒤, 고종에게 태황제(太皇帝)라는 시호가 올려지자 그 정후인 명성황후에게도 ‘태’(太) 자의 시호가 올려져 ‘명성태황후’(明成太皇后)라 불리기도 한다.
한편, 명성황후의 암살은 조선 백성들의 분노를 야기하였고, 암살에 관련된 조선인 군관들은 피신하거나 은신해 있었다. 당시 의병으로 만주에 가다가 1895년 초 귀국하던 김창수(金昌洙, 후에 김구로 개명)는 치하포에서 만난 일본인 상인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를 일본 낭인으로 오인하여 사살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한다. 김구는 후일 쓰치다가 일본 낭인이거나 왕비 암살에 가담한 자라고 주장하였으나, 후일 쓰치다는 일본 출신 상인으로 밝혀졌다.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배경식 교수는 "지금까지 확인 가능한 어떤 자료에도 쓰치다가 육군중위라는 기록은 없다"며 "일본 공사관의 보고서와 조선 관리의 보고서, 독립신문의 사건 보도는 한결같이 쓰치다를 '상인(商人)'으로 적고 있다"고 했다. 그뿐아니라 배 교수는 백범도 쓰치다가 육군 중위가 아니라는 걸 알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1997년 창원대학교 교수 도진순이 일본에서 찾아낸 자료에 의해 계림장업단의 상인이며 민간인 신분으로 밝혀졌다.
암살의 배후
일본 낭인
일본 낭인들은 치밀하게 계획을 짜고 한성으로 잠입, 명성황후의 암살을 주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선인 병사들을 훈련하여 표면적으로 앞세웠다. 또한 명성황후의 암살 배후로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 등이 지목되었다. 2006년에는 최문형 한양대 명예교수가 일본 헌정자료실에서 찾아낸 야마가타 아리토모 (山縣有朋) 육군대장과 무쓰 무네미쓰 (陸奧宗光) 외상 사이의 편지를 통해 일본 정부의 개입설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명성황후의 암살 과정에서 조선인 병사들이 길안내를 했고, 일본군이 양성한 훈련대의 제1대대장 이두황, 제2대대장 우범선, 제3대대장 이진호(李軫鎬) 등이 일본 낭인에 협력했다. 그 밖에 전 군부협판 이주회 등도 포섭하였다. 이 중 우범선이 1903년 고영근에게 죽음을 당했다.
조선인 협력자들
명성황후 암살의 국내 협력자로 유길준과 흥선대원군이 지목되었다. 윤치호는 그의 일기에서 그를 암살한 일본 낭인들의 지휘자 중 한사람으로 유길준을 지목하였다.
명성왕후가 암살당할 무렵 윤치호는 유길준과 일본인 이시즈카가 사건의 전말을 은폐하기 위해 자신을 그날의 저녁 식사에 자신을 초대했다는 것이다. 유길준은 대원군이 명성왕후 암살의 조선 측 주동자라고 지목하였다. 1894년 가을 명성왕후가 개화당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꾸몄다가 대원군의 첩보망에 발각되었고, '대원군은 일본 공사 오카모토와 협의 끝에 일본인들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얻어 그녀를 죽이기로 결정하였다.'는 것이다.
미국인 스승 모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유길준은 명성왕후 암살은 실행되었지만 대원군이 명성왕후 암살 문제를 일본공사와 협의하고 일본측에 약간의 도움을 요청한 것은 큰 실수였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유길준은 '도움을 얻기 위해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는 의견도 덧붙였다. 사학자이며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2대 대통령인 박은식도 흥선대원군을 명성황후 암살의 배후로 지목하였다. 박은식은 춘추전국시대에 조돈(趙盾)이 왕을 암살한 것을 비유하여 이와 다를바 없다고 평가하였으며 감정이 사람의 양심을 가린다며 비판하였다.
흥선대원군과 유길준 외에도 조선국 국군 1대대장 우범선(禹範善)·2대대장 이두황(李斗璜)·3대대장 이진호(李軫鎬) 등과, 전 군부협판 이주회(李周會), 국왕 친위대 부위(副尉) 윤석우(尹錫禹), 일본공사관 통역관 박선(朴銑), 문신 구연수(具然壽) 등이 협력했고, 궁궐수비대의 구식군대 출신 조선인 병사들도 자발적으로 협력했다.
평가
당대의 평가
그의 벗 윤치호가 명성황후를 살해한 범인이라고 지목했던 유길준은 명성왕후를 '세계에서 가장 나쁜 여성'이라고 혹평하였다. 암살 직후 유길준이 미국인 은사 모스에게 보낸 날짜미상의 편지에서 유길준은 명성왕후를 영국의 메리 여왕과 프랑스의 마리 앙투와네트보다도 더 악하다고 비판하였으며, 비판 사유로 당시 백성들 사이에서는 국왕은 일개 인형이고 왕비는 그 인형을 갖고 노는 사람이라는 시중의 소문을 근거로 제시하였다. 유길준은 명성왕후를 개화당 살해의 배후로 보았다. 모스에게 보내는 편지 본문에서 유길준은 명성왕후가 도움을 청하기 위해 러시아 공사와 비밀 접촉하고, 1894년 가을 개화당 모두를 살해하려는 계획을 꾸미다가 국왕의 아버지인 대원군에게 발각되었다고 하였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의하면 명성왕후의 사치와 민씨정권의 매관매직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후대의 평가
명성왕후에 대한 역사학계의 평가는 친일 급진개화파와 수구적 척사파, 일본 관변 측으로부터 모두 좋지 않은 평을 얻었다. 반면에 그러한 좋지 않은 평가는 명성왕후의 정책 노선이 그만큼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었다는 반증이라는 주장도 있다.
또한 명성왕후와 척족 세력은 중인 중심의 개화파와는 달리 전통과 서양 문명을 절충하려는 동도서기(東道西器)의 정책 노선을 띠었다. 이 때문에 급진개화파의 입장에서 사대당 또는 수구당으로 평가를 받기도 한다. 반면에 고종의 입장에서는 근왕파로서 고종이 시도한 광무개혁의 지지세력이었고, 을미사변 이후에는 반일의병운동을 배후에서 지원하였으며, 대한제국 성립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대원군에 의해 척결된 세도정치를 다시 불러들였다는 비판과 외세를 이용하려 하여 국내에 일본의 침입을 촉진시켰다는 부정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비판
국고 탕진에 대한 비판
유학자 황현은 고종과 명성황후가 국고를 탕진했다는 점을 지적, 비판했다. 그리고 황현 자신의 저서 매천야록의 곳곳에서도 이를 언급하였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원자가 태어나자 궁중에서는 원자가 잘 되길 빈다는 핑계로 제사를 8도 강산에 두루 돌아다니며 지냈다. 이렇게 탕진하는 하루 비용이 천금이나 되어 내수사가 소장한 것으로는 비용 지출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호조나 선혜청에서 소장한 공금을 빌려서 사용했지만 그것이 위반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전혀 없었다. 1년이 채 못돼 대원군이 비축해 놓은 재물을 모두 탕진했다. 그래서 매관이나 매과까지 기승을 부렸다고 한다.
외척으로 편중된 권력
1874년 11월 흥선대원군을 축출한 뒤 황후는 민씨 일족을 대거 등용하여 조정에 진출시켰다. 이 중 민겸호는 선혜청에 있으면서 군인들의 급료를 착복하고 모래를 섞어서 주어 임오군란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문정공 송준길은 우복 정경세의 사위이며 민유중은 송준길의 사위이다. 명성황후는 송준길 집안에 대해서는 가까운 외가의 의를 지켰고, 정씨 집안을 추대해서 역시 외척같이 각별히 생각해 왔다. 명성황후는 정경세를 부르기를 우복 할아버지라고 하였다. 그래서 송씨, 정씨 두 집안의 후손들은 크게 고종의 총애를 받아 과거에 급제해서 벼슬을 하는 사람이 부지기수로 많았다. 이때 고종과 흥선대원군은 친골육지간이지만 사이가 나빠져, 아버지 대원군을 혐오했던 것 같았다. 이때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며 비아냥거렸다. "내전(왕비)는 돈목을 감소시키고 대전(임금)은 돈목을 증가시키면 좋겠다."는 것이다.
외국의 평가
명성왕후에 대해 일본인을 제외한 외국인들은 좋게 평가했다. 이를테면 정치적 이해관계에 예민하지 않은 민간인의 기록이 그러하다. 그들은 한결같이 명성왕후가 영리한 판단력과 뛰어난 외교력을 지닌 교양 있는 여성임을 전해준다.
영국 왕립지리학회회원이기도 한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는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에서 명성왕후와 흥선 대원군과의 정치적 대립에 대해서 언급하면서도, 명성왕후를 '대화내용에 흥미를 가지게 되면 눈부신 지성미로 얼굴이 빛나는 지식인이자 우아한 자태를 가진 귀부인'으로 묘사하였다. 또한 어의였던 언더우드 여사의 기록에서도 명성왕후는 우아하고 근엄했다고 표현하였다. 이 두 사람은 공통적으로 왕비가 우아하고 근엄했으며, 체형은 수척했고, 얼굴은 창백했으며, 눈빛은 날카롭고 초롱초롱했다고 밝히고 있다. 게다가 순박하면서도, 즉 순수하면서도 뛰어난 기지와 매력을 지닌 분으로, 서양의 기준에서 볼 때도 완벽한 귀부인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윌리엄 프랭클린 샌드는 “뛰어난 학문과 지성적인 강한 개성과 굽힐 줄 모르는 의지력을 지녔으며, 시대를 추월한 정치가이자 외교가로 조선의 독립을 위해 애쓴 분이었다.”라고 썼다.
한편, 일본의 화가들이 그린 명성왕후의 삽화는 모두 그 모습이 뚱뚱하고 심술궂게 그려져 있다. 또한 일본 외교관들은 그녀를 “여우”라고 불렀다.
기타
- 명성황후의 정확한 사진은 현재 존재하지 않고 있다. 임오군란 이후 명성황후는 사진 촬영을 기피하였으리라 여겨진다. 따라서 현재 명성황후라고 알려진 사진은 명성황후와는 관련이 없다는 의견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심지어 어의조차 명성황후의 사진을 찍지 못하였다. 명성황후가 사진을 기피한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으며, 그 밖에 이승만이 자신의 저서 《독립정신》에 민비의 사진이라고 언급한 사진이 한 개 기록에 남겨져 있으나 명성황후인가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가족 관계
- 할아버지 : 민기현
- 아버지 : 민치록(閔致祿)
- 어머니(아버지의 본부인) : 해령부부인 해주오씨
- 어머니 : 한창부부인 한산이씨(일명 감고당 이씨)
- 남편 : 고종태황제
- 아들 : 순종효황제
- 며느리 : 순명효황후
- 양오라버니 : 민승호(閔升鎬)
- 양조카 : 민영익(閔泳翊)
- 시아버지 : 흥선대원군
- 시어머니 : 여흥부대부인 민씨, 친정 가계로는 12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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