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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52 : 조선의 역사 394 (제26대 고종실록 17)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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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52 : 조선의 역사 394 (제26대 고종실록 17)

두바퀴인생 2013. 2. 6. 07:20

 

 

한국의 역사 852 : 조선의 역사 394 (제26대 고종실록 17)  

                

 

              

 

                                                               고종 황제 가족 사진

 

 

제26대 고종실록 ( 1852~1919년, 재위 : 1863년 12월~1907년 7월, 43년 7개월)

 

 

2. 고종의 가족들(계속)

 

  

 

가족 관계

 

 

 

왼쪽부터 의친왕, 순종, 영친왕, 덕혜옹주와 함께한 가족사진
  • 부 : 문조익황제 효명세자
  • 모 : 신정익황후 조씨
  • 사친 부 : 헌의대원왕 이하응(獻懿大院王 李昰應)
  • 사친 모 : 순목대원비 민씨(純穆大院妃 閔氏)
  • 황후 : 명성태황후 민씨(明成太皇后 閔氏, 1851년~1895년)
    • 왕자 (조졸) : 4일만에 사망(1871년)
    • 공주 (조졸) : 222일만에 사망(1873년)
    • 순종효황제 이척 (純宗孝皇帝 李拓)(1874년~1926년)
    • 왕자 (조졸) : 14일만에 사망(1875년)
    • 왕자 (조졸) : 105일만에 사망(1878년)
  • 후비 : 순헌황귀비 엄씨 (純獻皇貴妃 嚴氏)(1854년~1911년)
    • 의민황태자 은(懿愍皇太子 垠;1897년~1970년)
  • 후궁 : 영보당귀인 이씨(永寶堂貴人 李氏):이순아(李順娥;1843년~1914년)
    • 완친왕 선(完親王 墡)(1868년~1880년)
    • 옹주 (조졸) : 1871년~1872년
  • 후궁 : 귀인 장씨(貴人 張氏)
    • 의친왕 강 (義親王 堈)(1877년~1955년)
  • 후궁 : 광화당귀인 이씨(光華堂貴人 李氏):이완흥(李完興;1887년~1970년)
    • 황자 육(皇子 堉)(1914년~1915년)
  • 후궁 : 보현당귀인 정씨(寶賢堂貴人 鄭氏)(1882년~1943년)
    • 황자 우(皇子 堣)(1915년~1916년)
  • 후궁 : 복녕당귀인 양씨(福寧堂貴人 梁氏)(1882년~1929년)
    • 덕혜옹주(德惠翁主)(1912년~1989년)
  • 후궁 : 내안당귀인 이씨(內安堂貴人 李氏)(1847년~1914년)
    • 옹주 (조졸) : 1879년~1880년
  • 후궁 : 삼축당상궁 김씨(尚宮 三祝堂尚宮 金氏):김옥기(金玉基;1890년~1972년)
  • 후궁 : 정화당상궁 김씨(貞和堂尚宮 金氏)
  • 후궁 : 궁인 서씨(宮人 徐氏)
  • 후궁 : 궁인 김씨(宮人 金氏)
  • 후궁 : 궁인 장씨(宮人 張氏)
  • 양숙부 : 철종장황제
  • 양숙모 : 철인장황후
  • 양형 : 헌종성황제
  • 양형수 : 효현성황후 김씨
  • 양형수 : 효정성황후 홍씨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년) : 계속

 

 

 

실각 이후

고종 축출 쿠테타 기도와 실패

흥선대원군의 초상화, 1870년대

 

1873년 11월 권좌에서 물러난 후부터 둘째아들 고종과 정치적으로 적대관계에 놓여 있었다. 이후 대원군은 기회만 오면 언제나 탐탁지 않은 고종명성황후를 폐위하고 이준용을 왕위로 앉히려 하였다. 여기에는 이준용을 앉히고 섭정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대원군의 깊은 의도가 담겨 있었다. 유순하고 나약한 성격의 고종과는 달리 이준용의 호탕한 성격도 대원군과 상통하는 면도 있었다.

 

이항로, 기정진, 유인석 등 유학자들의 지지 외에도 민씨 정권의 재정 탕진 역시 대원군의 재집권 명분을 쥐여주었다. 황현에 의하면 고종명성황후는 원자가 태어나자 궁중에서는 원자가 잘 되길 빈다는 핑계로 제사를 8도 강산에 두루 돌아다니며 지냈다. 이렇게 탕진하는 하루 비용이 천금이나 되어 내수사가 소장한 것으로는 비용 지출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호조선혜청에서 소장한 공금을 빌려서 사용했지만 그것이 위반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전혀 없었다. 1년이 채 못돼 대원군이 비축해 놓은 재물을 모두 탕진했다. 그래서 매관이나 매과까지 기승을 부렸다고 한다.

 

한편 1874년 민승호 폭사의 배후로 지목되었으며 1876년 이준용 추대 음모에서 그 배후로 여겨지게 되나 구체적으로 증명된 것은 없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매우 슬퍼하며 특히 명성황후가 이를 갈며 복수를 노린다는 소문도 돌았다.

 

 

개혁의 무효화

1874년부터 단계적으로 각지에 철폐된 서원들에 대한 복설과 부활조치가 감행되었다. 한편 흥선대원군의 측근들인 천하장안은 최익현을 제거하려 했지만 곧 명성황후가 그를 유배보내면서 실패한다.

 

사색당파를 가리지 않은 인사정책도 단계적으로 폐지되었다. 1874년운현궁에서 나온 대원군은 양주군 직동으로 내려갔으나 고종의 대우는 매우 인색했다. 이에 민승호가 집권하여 청반에 있던 남인들을 완전히 도태시켰다. 어사들을 파견하여 남인, 북인 및 대원군의 빈객으로 있다가 수령이 된 사람들의 파직을 거론하여 이들이 거의 다 사직했다. 이때부터 남인들도 더욱 쇠퇴하여 어머니를 잃은 듯이 실의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성균관 유생들과 팔도 유생들은 서로 줄을 이어 대궐문 앞에서 규탄과 원망을 하였지만 고종은 이들마저 모두 물리쳤다.

 

 

민승호 폭사 사건

1874년경복궁에 화재가 발생해 고종창덕궁으로 이주했다. 이때 민승호의 집에도 화재가 발생했다. 이 사건의 배후로 대원군이 지목되었지만 구체적인 증거는 없었다.

 

그런데 1874년 11월 민승호의 집에 폭발 사건이 벌어졌다. 대원군은 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었다. 민승호는 수재(조부모나 부모상을 당하면 그 자손된 사람 가운데 관리는 그 직을 사양하고, 선비는 과거 응시를 중단하고, 평민은 혼사를 중지하고 근신하면서 만 28개월 동안 복상하던 제도)하여 산승을 불러 아들을 위해 조용한 곳에서 기도를 드리게 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이날 외부로부터 함 한 개가 들어왔는데 기도를 드리던 중이라 나중에 열어본다며 미뤄두었다. 민승호 집에 함을 전달해준 사람은 이미 돌아가 버렸기 때문에 민승호는 의심했다. 그러나 기도가 끝나고 밀실로 함을 옮긴 뒤 민승호는 혼자 함을 살폈다. 함에 구멍이 있었고 자물쇠와 열쇠가 걸려 있었다. 그는 무심코 함을 열려고 하던 순간 요란한 폭음 소리와 함께 불이 일어났다. 당시 그의 아들은 10세였고 그 할아버지(민치구)와 함께 서있던 채로 죽고 말았다. 이때 민승호의 양어머니였던 감고당 한산이씨 역시 현장에 있다가 죽고 말았다.

 

민승호 역시 온몸이 시꺼멓게 타고 말 한마디 못하고 죽었다. 그런데 죽을 때 운현궁을 두, 세번 가리켰다고 한다. 그 후 살인청부를 내린 사람으로 대원군을 지목했지만 끝내 진상을 밝히지 못하고 말았다. 고종명성황후는 매우 슬퍼했으며 명성황후는 대원군을 원망했지만 복수하지 못했다. 때마침 흥인군의 저택에도 누군가 방화, 불이 났는데 명성황후는 대원군이 흥인군에 대하여 원한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얼마 뒤 민승호 암살이나 흥인군집 화재 사건은 모두 대원군의 음모에서 나온 것이라면서 비밀스럽게 조사를 했다. 얼마 뒤 장씨 성을 가진 남자를 붙잡았는데, 그는 신철균의 문객이었고, 신철균은 예전 대원군의 문하에서 나온 사람이라면서 죄를 씌웠다.

 

 

정적들과의 갈등과 이재선 추대 음모

1875년 11월 흥인군의 집에 원인을 알수 없는 방화가 일어났다. 의금부는 용의자로 지목된 장씨 성의 사나이를 체포했다. 그는 흥선대원군의 식객으로 드나들던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신철균 집의 문객이었다. 장씨를 체포해서 국문, 처형했고, 신철균 역시 잡아다가 공초를 했으나 별다른 혐의점을 찾지 못했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1876년 화적(火賊)의 주모자로 신철균을 다시 체포하여 국문했다.

 

1881년 9월 13일 대원군 계열의 인사였던 안기영 등의 주도로 흥선대원군의 서장자 이재선을 옹립하려는 이재선 추대 음모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재선 추대 음모는 내부의 고변으로 실패하고 안기영, 이재선 등은 처형당했다. 이재선의 모역 사건에는 흥선대원군이 배후로 관련되었으나, 국왕의 생부라는 이유로 언급하지 않고 불문율에 붙여졌다.

 

 

민씨세도 용인과 권력투쟁

 

흥선대원군의 초상화 (1880년)

 

흥선대원군의 초상화 (1881년)

 

 

세도정치를 거부했다는 주장과는 달리 대원군은 세도정치를 거부하지 않았다. 단지 세도가의 대상을 안동김씨풍양조씨에서 자신의 처가인 여흥민씨로 바꾸었을 뿐이고, 그 여흥민씨 세력이 유림과 손잡고 대원군을 축출(1874년)하기 시작하면서 민씨가와 대원군의 협력관계가 악화되었다는 것이다.

 

임용한에 의하면 대원군은 세도정치를 거부하지 않았다. 대상을 바꾸었을 뿐이라고 보았다. 대원군이 (집안에 재산이 있던 왕족)으로 가난한 파락호가 아니었듯이, 명성황후 민씨의 집안도 (아버지를 일찍 여의기는 했지만) 완전히 몰락한 양반가가 아니었다. 명성황후가 여덟 살 때 아버지 민치록(閔致祿)이 사망한 것은 사실이지만, 여흥 민씨가는 조선 시대에 왕비를 세 번이나 배출한 명문가였고, 명성황후는 그 중에서도 핵심 인물인 민유중의 직계 자손이다. 대원군의 부인인 여흥부대부인 민씨 또한 민유중의 5대손인 민치구의 딸이다. 민치록은 아들이 없어 민치구의 아들 민승호를 양자로 삼았다.

 

명성황후는 시어머니 부대부인 민씨와 언니 동생뻘의 같은 항렬이며. 민승호와의 인연도 남달랐다. 민씨와 명성황후는 가까운 사이였고, 고종도 어려서 명성황후를 알아서 안국동 이모 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즉 대원군은 철종의 처가인 안동 김씨를 몰아내고, 자신의 처가로 그 자리를 채운 것이다. 초창기에는 민씨 정권의 세도를 일부 용인했으나, 권력을 독식하려던 민씨 일족이 대원군을 축출하면서 다시 권력을 획득하려는 대원군과 독식하려는 민씨 가문 간의 권력쟁탈전이 발생하였다.

 

 

 

재집권과 청나라 유수

 

임오군란과 제2차 집권

1882년 임오군란 당시 봉기한 구식 군대의 추대로 재집권하였다. 대원군의 측근인 '허욱임오군란 때 병사 복장을 하고 대궐로 들어가 명성황후를 가리켜 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끝내 왕비를 찾아내지 못했다. 허욱 등이 경복궁에 들이닥치기 전에 명성황후는 변복을 하고 홍계훈의 등에 업혀 궁궐을 벗어나 여주로 내려가 은신하였다. 이때 명성황후는 홍계훈의 누이 행세를 하여 도성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6월 10일 난병들이 대궐을 침입했는데 명성황후는 밖으로 도망가고, 이최응, 민겸호, 김보현 등은 살해되었다. 난병이 궁전으로 올라가 민겸호를 만나 그를 잡아끌자 당황하면서 흥선대원군을 쳐다보며, "대감 나를 제발 살려주시오."라고 호소하였다. 그러자 흥선대원군은 쓴웃음을 지으며 "내 어찌 대감을 살릴 수 있겠소"라고 말하였다. 그는 계단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대원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난병들은 계단 밑에서 그를 죽이고 총칼로 시체를 난도질했다. 또 "중궁은 어디 있느냐"며 소리쳐 언사가 좋지 않았고, 처참한 광경은 계속되었다.

 

이때 대원군의 부대부인도 입궐했는데, 그녀는 명성황후를 본인이 타고 온 사인교에 숨겨놓고 나왔다는데 마침 이를 본 어떤 궁인이 난병들에게 밀고하였다. 이 말을 들은 난병은 사인교의 포장을 찢어 땅에 팽개쳤다. 그때 무예별감 홍재희(홍계훈의 오타이다.)가 '그 여인은 상궁으로 있는 내 누이다. 그대들은 오인하지 말라'고 소리친 뒤에 등에 업고 궁궐을 빠져나왔다.

 

봉기군의 추대로 입궐한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가 이미 죽었다고 거짓 보고한 뒤 황후가 입던 옷을 관에 넣고 장례를 치르기까지 하였다. 1882년 6월 고종에게 임오군란의 사태수습을 위한 전권을 위임받자, 이 기회에 정권을 회복하고자 했다. 궁궐에서 도망쳐나간 명성황후가 죽었다고 공식으로 선포한 후 무위영(武衛營)·장어영(壯禦營)·별기군(別技軍)을 폐지하고 5군영을 복설했으며, '통리기무아문'을 폐지하고 삼군부를 복설하였다. 그러나 민씨 세력과 내통한 청나라의 군사적 압력으로 임오군란은 진압되고 자신도 이홍장 일파에게 납치되어 인천항에서 배를 타고 청나라톈진으로 압송되어, 1개월 만에 실권하였다.

 

군란이 진압된 다음에 허욱 등은 죽임을 당하였다. 청나라에 끌려간 흥선대원군은 보정부(保定府)에 감금되었다. 흉선군(凶鮮君)이라는 멸시와 홀대를 감수하며 견뎌야 했다.

 

 

청나라 납치와 감금

1882년 7월 12일 한양에 입성한 청나라 장수 오장경·마건충(馬建忠) 등은 흥선대원군의 접대를 받았다. 그날 접대를 받고 돌아갔던 오장경마건충은 다시 군사문제로 초빙하여 회담하고 있던 흥선대원군에게 "오늘 밤 남양만에서 배를 타고 톈진(天津)에 가서 황제의 유지(諭旨)를 받아야 한다" 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이 거절하자 교서를 읽은 뒤 강제로 보교에 태워 경기도 화성군 남양만으로 납치해 갔다. 이후 배를 타고 텐진에 도착, 흥선대원군은 4년간 톈진의 보정부(保定府)에 억류되어 생활하였다. 보정부는 텐진 시 변두리에 위치한 관청으로 베이징에서 남쪽으로 150km 지점의 외진 지역에 있었다.

 

 

흥선대원군 (1883년, 텐진 보정부에서)

 

 

청나라 장수 이홍장 등과 국제정세에 대하여 격론을 벌였고 납치주동자 마건충에게는 "되놈!"이라고 호령하면서 그 기백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황달을 앓기도 했고, 대원군은 그곳에서 난초를 그리며 소일하였다. 난을 치며 분노와 한을 삭이고, 정치적 시련을 예술로 극복하려 하였다. 난을 잘 쳤던 흥선대원군이기에 중국에서도 그의 난초는 인기가 대단하였다 한다. 1882년 12월 장남 이재면이 방문하여 위로하고, 1883년 3월에 일시 귀국하였다. 다시 그해 5월에 다시 청나라에 가서 흥선대원군을 봉양하였다.

 

조선에 체류하고 있을 때, 반대파로부터 그의 작호를 풍자한 흉선군(兇宣君)이라는 별명도 붙여졌다. 청나라에서는 흉악한 조선폭군이라는 뜻의 흉선군(兇鮮君)이라는 칭호로 그를 비하, 조롱하였다. 며느리인 명성황후를 제거하려는 악랄한 시아버지라며 굴욕적인 대우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웃으면서 조롱과 모욕을 감수하였다.

 

청나라 군인과 문인들의 굴욕과 모욕을 감수하면서도 그는 비밀리에 국내에 편지 서신을 보내 자신을 구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한다. 이는 1973년 10월 4일 대한민국 월간 문학사상 자료 조사연구실에서 발굴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편지를 쓸때 그는 순 한글체로 썼는데, 이는 한자나 영어로 썼다가는 발각되었을 때 청나라의 군인들이 해석할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었다.

여기서부터 내일 아침에 떠나 출발하면 이틀만에 천진에 도착할수 있다. 왕복에 7~8일이 허비하리라 한다. 이 배에서 다 말하기를 오늘날 태공(흥선대원군을 지칭)이 천조에 들어가는 것이 크게 다행이라 한다. 총총이 겨우 써서 숨겨두고, 전편(傳便)을 기다려 부칠 생각이다. 동하지(충동당하지) 말고 안정하라

1884년 음력 7월 15일 청나라로 끌려가는 배 안에서 몰래 쓴 편지

텐진의 보정부에 감금된 뒤에도 몰래 비밀리에 편지를 써서 인편을 통해 고국으로 부쳤다.

다시 뵈옵도 못하고 세상이 올이지 않이하리신이 지필을 다해야 한심하오니다. 태평히지니시옵기 니니 발아옵니다. - 보정부 안치죄 이상서
(다시 뵙도 못하고 이승에서 내 목숨이 오래지 못하겠으니 종이와 붓을 마주 대하기 한심하옵니다. 내내 태평히 지내시기를 바라옵니다. - 보정부 안치죄 이상서

1884년 음력 10월 12일 보정부에서 몰래 쓴 편지

민승호의 양자 민영익은 흥선대원군이 민승호 일가를 폭탄테러로 죽였다고 단정하고 복수하겠다고 다짐했다 한다. 이 소식을 접한 대원군은 바로 비밀편지를 작성하여 아들 이재면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신문지의 경평이(경평군)는 내 편이고, 영익이(민영익)는 딴 편으로 말하고, 영익이가 머리 깎았다 하면서 일번 기별하여 원수를 갚는다 하였으니 우습다. 사신을 또 보내어야 되지, 안보내면 상감이 불효의 이름을 면치 못할 것이니 부디 주선하되 (올수 있으면) 너더러 들어가라

1884년 날짜 미상, 보정부에서 몰래 쓴 편지

나가고 안이 나가는 것은 고사하고 상감 쳬면이 쳔하의 빗치 나기시니 부디 잘 알외어니 일신을 살려다고....
(나 되돌아가고 못 돌아가는 것은 고사하고, 상감의 체면이 천하에 빛이 나겠으니, 부디 잘 아뢰어 내 한몸을 살려다오)

1884년 날짜 미상, 보정부에서 몰래 쓴 편지

대원군의 구조 요청을 비밀리에 접한 이재면은 배편으로 1884년 6월부터 텐진의 보정부로 왕래한다.

 

1885년 민씨 정권이 친러, 친일 등의 성향을 보이며 청나라를 견제하려 하자,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청나라 정부와 위안스카이 등의 정치적 계산으로 4년여 만에 귀국하게 되었다. 명성황후노서아 공사에게 대원군 귀국 반대에 후원해 줄 것을 청하는 밀서를 보내기도 했고, 민영익 등은 대원군의 귀국을 강하게 반대하며 반발하였다. 안동 김씨 출신으로 그해에 과거에 급제한 신진관료 김명규(金明圭)는 문의관(問議官)으로 톈진(天津)에 가서 대원군의 귀국에 강력하게 반대하고 되돌아왔다.

 

그러나 1885년원세개는 대원군의 귀국을 주선한다. 1885년 4월 이재면은 귀국하였고, 1885년 8월 이재면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같은 달 원세개의 주선으로 배를 타고 이재면의 시종을 받고 인천항에 도착하였다. 귀국 후 기생 출신 애첩인 추선의 죽음을 보았고, 이후 운현궁에 칩거하며 재기를 노렸다. 고종은 형식적으로 그의 얼굴을 보려 인천항까지 나왔으나 그는 오랜만에 보는 고종의 얼굴을 외면하였다. 그러나 추선의 죽음 소식을 접하자 노상에서 대성통곡하였다.

 

 

고종 폐위 기도

이후 그는 고종이 명성황후에게 휘둘린다고 단정하고 고종 폐위를 기도한다. 고종을 폐위시킨 뒤 아들 이재면이나 서자 이재선을 옹립하고, 다시 섭정으로 재집정하기 위한 계획이었다.

 

대원군은 1887년 청나라위안스카이와 결탁하여 고종을 폐위시키고 큰 아들 이재면을 옹립하여 재집권하려다가 실패하였다. 이재선이재면을 옹립하려던 추대기도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흥선대원군은 장손인 이준용을 추대하려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준용 추대 시도 역시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나 유순한 성격의 이재면이나 고종과는 달리 괄괄하고, 한번의 꾸지람에도 기죽지 아니하며 적극적인 손자 이준용의 성격과 태도에 기대를 걸게 된 대원군은 이후 이준용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정변을 계속 시도한다.

 

1890년 전봉준은 운현궁을 찾아왔다. 이후 1890년대 초반 전봉준운현궁에서 흥선대원군의 문객 생활을 하였다. 이런 인연으로 흥선대원군은 전봉준 등과 연락하며 동학 농민군과의 연결을 시도한다.

 

 

테러 위협

1892년 , 운현궁에서 화약이 터지고 여러 건물에 장치된 화약이 발각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황현명성황후를 배후로 지목하였다. 황현은 운현궁의 폭탄 테러 사건을 명성황후가 대원군 일가를 폭살하기 위해 벌인 짓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때 흥선대원군의 사랑채와 이재면, 이준용 부자의 거처에도 폭약이 장치되어 있었으나 다행히 점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각되었다. 이는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의 오빠인 민승호에게 폭약을 보내 일가를 폭사시켰던 전례에 대한 정치적 보복극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윤효정은 이 사건이 이준용이 통위사에 오른 것을 기념한 1894년 7월 중순 경에 일어났다고 기술하였다. 민승호일가 폭사 사건 이후 사건의 배후로 의심받던 대원군은 수시로 자객과 폭탄 테러 위협에 시달림당하였다. 그러나 그는 고종과 명성황후를 축출할 계획을 시도한다.

 

 

전봉준과의 비밀 연락

 

전봉준. 1890년부터 1892년 전봉준은 한때 흥선대원군의 식객으로 있었다.

 

1893년 2월 전봉준한성부로 올라가 흥선대원군을 방문하였다.대원군은 잠시 식객으로 있었던 전봉준을 후하게 대접하였다. 이때 전봉준은 흥선대원군에게 "나의 뜻은 나라와 인민을 위하여 한번 죽고자 하는 바"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로부터 세간에는 전봉준과 대원군 사이에 무슨 밀약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

 

흥선대원군과의 면담을 마친 뒤 전봉준은 다시 길을 떠나 전라북도 고부로 내려간다. 한성에서 고향으로 돌아간 전봉준은 동지를 규합했다. 전봉준은 강연을 다니며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과, 탐관오리를 처벌하고 새로운 세상이 일어설 것이라는 것과, 흥선대원군이 자신들을 일부 도와줄 것을 약속했다고 했다. 전봉준은 사람을 모았고, 그가 흥선대원군과도 연결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수많은 청년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1893년 3월 무렵 전라북도 옥구군 금구현 수류면 원평리에서 한 무리의 동학 농민세력을 형성·영도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자발적인 지원과 기부를 통해 이들의 숙식을 해결하였다. 동도문변(東徒問辨)에 기록된 것에 의하면 그 세력은 1만여 명으로 무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1893년 3월 11일부터 시작되었던 동학의 보은취회에 참가하여 그 집회를 반봉건·반부패·반침략의 정치적 운동으로 확대시키기 위해, 1893년 3월 말경에 충청북도 보은으로 향했으나, 보은 집회가 4월 3일 해산됨에 따라 뜻을 이루지 못했다. 보은군은 당시 동학의 교조인 최시형이 종종 머무르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동학도들의 일부는 그보다 앞선 2월한성부로 올라가 경복궁 앞에서 복합 상소를 올렸다. 2월 11일부터 2월 13일까지 계속된 상소의 내용은 폐정 개혁과 부패 관리 처벌 등이었다. 전봉준은 이들의 상소가 성공하면 호응하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이들과 호응하기로 한 보은집회가 취소되면서 한성부에 올라간 시위대도 해산되었다. 1만 여 명 이상의 많은 인파의 대규모 시위는 한성부의 백성과 조정의 관료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고, 전봉준이 떠난 직후 일어난 이 시위를 접한 흥선대원군은 1893년 2월의 동학도들과 농민들의 집회를 주목하게 된다.

 

1893년 3월 한 달 동안 1만여 명에 가까운 인파를 동원한 전봉준의 능력은 흥선대원군을 고무시키기에 충분했다.

 

 

 

정변 기도와 실패

 

동학군과 내통, 쿠테타 기도

1893년 그는 동학 농민군이 상경하여 경복궁 앞에서 복합상소운동을 벌이는 기회를 이용하여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다. 정교는 1893년 2월 11일부터 2월 13일까지 3일간 박광호를 소두로 하는 약 50명의 동학교도들이 상경하여 궁궐 앞에서 교조 신원을 탄원하며 연좌시위를 벌인 사건을 대원군이 시킨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때 정교는 대원군이 은밀히 동학당 수만 명을 서울로 불러 모임을 갖고 장차 불궤를 도모하여 그의 손자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고 하였다.

 

1894년동학 농민 운동 발생 당시 일부 동학군 지도자와 결탁하였다는 견해가 있다. 그에 의하면 동학군 중 온건파 지도자들이 그를 섭정으로 복위시킬 것을 약속했다는 것이다. 전봉준은 대원군을 반신반의 하면서도 명성황후와 민씨 세력의 축출을 위해 대원군과 손을 잡았다. 대원군 역시 명성황후의 제거를 위한 무력 집단이 필요했고, 동학 농민군과 제휴하게 된다.

 

 

명성황후 폐출 기도

갑오경장 초기에 대원군과 이준용명성황후 폐서에 착수하였다. 6월 22일 흥선대원군은 측근 이원긍을 오토리 일본 공사에게 보내 명성황후 폐서의 취지가 담긴 문건을 제시하고 동의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 측에서는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이준용도 24일까지 오토리 공사를 설득하기 위해 일본 공사관을 두 차례 방문하였다. 그러나 스기무라 서기관을 비롯한 일본 공사관 요원들이 강력히 반발했기 때문에 대원군과 이준용의 의도는 좌절당하였다. 그는 6월 24일 이준용을 별입직에 임명하여 고종명성황후에 대한 감시를 한층 강화하였다. 갑오경장을 전후해서 대원군과 이준용은 명성황후를 공격, 폐서인하려는 음모를 꾸몄으나 일본 영사관에서 호응하지 않아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동학 농민 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후 전봉준은 대원군과의 연관성을 추궁당하기도 했다. 1894년 6월 21일 일본군 혼성여단이 경복궁을 강제로 점령하였다. 정권 회복과 왕조 중흥 방안 마련에 골몰하던 대원군은 “조선의 땅을 한 치도 요구하지 않겠다.”라는 스기무라 후카시 일본 공사관 서기관의 확약을 곧이곧대로 믿고 일본 상인의 호위를 받으며 입궐하였다. 이로써 민씨 세도는 무너졌다. 이후 동학 농민군은 일본군에 의해 진압당했지만 대원군은 국왕의 생부라는 이유로 책임추궁을 당하지 않았다.

 

 

개화파 암살 시도

1894년 9월 상순 허엽, 이병휘에 의해 대원군과 이준용의 음모가 탄로나자, 위기를 느낀 대원군은 개화파인 경무사 이윤용의 관직을 박탈하고 이어 개화파 암살을 고종주, 김국선 등에게 담당시켰다. 흥선대원군은 고종 축출 및 이준용 추대 쿠테타가 실패한 것이 개화파들 때문이라고 단정하였다.

 

김국선은 서울 창의문 내 신당에 살고 점술이 직업인 심원채로 하여금 무리를 모으게 하여, 전동석 이하 여러 사람을 모았다. 전동석과 심원채는 사제간이었다. 조용승, 윤진구, 정조원 등은 이 일을 찬조하여 그 비용을 마련하였다.

 

거사와 관련하여 대원군으로부터 네 차례에 걸쳐 고종주에게 서간이 보내졌다. 1894년 9월 14일에 보낸 1차 서간에서는 김학우, 김가진, 김홍집 3인이 거명되지 않았고, 창의문 용사가 많이 모여 개화당을 진멸할 수 있다고만 하였다. 9월 20일에 보낸 2차 서간을 통하여 비로소 3인을 제거하라는 명령이 시달되었다. 그리고 9월 27일 보낸 3차 서간에서는 때를 놓치지 말라고 하였다. 4차 서간을 전달할 때 김국선이 구전으로 이완용, 이윤용, 안경수, 유길준, 박정양, 권모 등을 지목했다. 이 서간에서는 기회를 놓치면 성명을 보전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하였다. 4차 서간을 지시에 따라 전동석에게 전하여 돌려보게 하였다. 대원군의 4차 서간은 9월 30일에 보내졌다.

 

대원군의 지시에 따라 암살 대상이 된 개화파들의 동태를 살펴오던 이들은 김학우의 주변에 계엄이 없음을 탐지하고 심원채가 모은 장사, 검객을 동원하여 거사에 착수하였다. 자객들은 1894년 10월 3일김학우의 서울 전동 사저를 습격해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던 김학우를 죽이고 그의 친구 두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어 다른 개화파들을 죽이려 했지만 경무청의 기찰이 엄해 착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암살을 통한 개화파 제거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제3차 집권

1894년 7월 초 갑오개혁 당시 일본의 종용으로 제3차 집권하였다. 이때 그는 이준용을 추대할 계획을 추진하려 하였다. 흥선대원군이 7월부터 8월까지 달포에 걸쳐 섭정을 하였으나, 일본이 바라는 것과 달리 자신의 정치 소신을 피력하자, 일본은 그에게 은퇴를 강요한다. 그와 동시에 대원군은 고종을 폐위하고 이준용을 추대할 계획을 다시 수립한다.

 

대원군파가 농민군을 상경시키고, 청국군을 끌어들여 일본군을 격퇴하고 개화파를 제거하여 정권을 장악하려는 계획은 당초 이준용, 이태용, 박준양의 시국대처 논의 속에서 그 윤곽이 짜여졌다. 당시 박준양은 이준용에게 관직을 쉬고 외국으로 나가 10년 동안 견문을 넓혀 명망을 얻은 이후에 돌아올 것을 권하였다.

 

그 동안 고종은 노쇠하게 되고 왕세자(순종)도 그다지 큰 덕이 없으니 그때에 외국 명망과 국내의 관심은 자연히 이준용에게 쏠릴 것이고, 그러면 그다지 노력하지 않고도 권력을 쥘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태용은 큰일을 도모할 경우에는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하면서, 여러 사람의 기대가 모두 대원군을 향하고 있고, 더욱이 동학군이 대원군을 받들겠다는 주장을 펴면서 봉기하고 있는 지금, 그들로 하여금 수십만 대중을 동원하여 올라오게 한다면 진실로 사람들의 무리가 하늘을 이긴다고 하듯이 일본군대가 비록 움직인다고 하더라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어 이태용은 이준용에게 한편으로 일본군을 만류하여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 밤을 재촉하여 군중을 올라오게 한다면 손바닥을 뒤집듯이 일이 쉬워질 것이라고 제안하였다.

 

 

이준용 옹립 기도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 대원군은 흥친왕이재선, 고종보다는 활달하고 적극적인 성격의 손자 이준용을 총애하였다.

 

 

두 사람의 제안을 이준용은 대원군에게 알렸고, 대원군은 이태용의 안을 지지하여 박동진과 박세강에게 수십만 대중을 규합하여 속히 올라오게 하였다.

 

이에 따라 대원군과 함께 대원군파의 중심이었던 이준용은 관직을 내무협판에서 통위사로 옮겨 병권을 장악, 불시의 병력 사용에 대비하고 다수의 장정들을 모아 대궐 내에 은닉하여 일본군대가 북진하여 병력이 허약해진 틈을 노려 농민군과도 내외 상응하여 거사하려고 하였다. 농민군이 금강에 이르러 그 기세가 놀랄만하면 이준용은 이들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병력을 일으켜 한성을 점령한다는 계획이었다.

 

동학농민군과 사전에 계획을 짠 뒤, 이준용이 토벌을 명분으로 부대를 구성하면 동학농민군은 빠진다는 계획이었다. 이준용은 이들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출진명령을 얻어, 군병과 수백 명의 역사(力士)를 대동하고 과천, 수원 사이에 개부하여 오히려 일을 꾸며 합세 회군하여 서울로 들어와 사람들이 놀라고 왕이 피난할 때를 타서 한편으로는 그 부하인 통위영 병대를 동원하려 했다.

 

대원군과 이준용의 계획은 "농민군이 재기하면 그 토벌을 핑계로 군사를 일으켜서 개화정부를 전복하고 정권을 잡으려던 것으로 재기병을 촉구하는 밀사를 보냈던 것"이었으며, 또 만일 일본군이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러 내려가게 되면 즉각 해산하였다가 그 해 11월,12월 경에 강이 결빙하기를 기다려 청국병이 오게 될 형편이 되면 협력하여 일본군을 격퇴하고 정부를 갱신하고 새로운 왕을 세우려는 것이었다.

 

이준용이 이끄는 통위병 영대로서 왕실을 장악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수인들을 지휘하여 김홍집, 조희연, 김가진, 김학우, 안경수, 유길준, 이윤용 등을 죽이고 정부를 전복하여 정권을 장악한 뒤 고종을 상왕으로 추대하고, 왕비와 태자를 폐하여 이준용을 왕위에 올리기로 결정하였다.

 

이들은 올라온 대중을 한편으로는 서울 근방에 배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울로 들여보내 종로에 도회시켜 만인소청을 설치하고 서찰을 정부에 투여하여 각국 공관에 조회시킨다는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면 한두 사람의 일이 아니고 수십만 명의 일이고 또 외국에 어떠한 해를 끼치는 일도 아니기 때문에 외국에서도 아무 말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일이 이루어지면 사신을 밀파하여 청국군에게 알려 앞으로의 시비에 대비하게 하고, 만일 일본군이 먼저 움직이면 일단 사방으로 흩어졌다가 94년 10월 중에 청국군이 나오는 것을 기다려 힘을 합쳐 협공하면 일본군을 격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대원군파의 사람을 중심으로 신정부를 구성하여 박준양을 영의정에, 이태용과 김모를 각각 좌의정, 우의정에 앉히려고 하였으며, 고운정을 충청감사나 영남감사에, 그리고 고종주를 전라감사에 임명하려고 하였다.

 

8월 24일 청·일의 평양성 전투에서 기대했던 청나라의 패배소식이 알려진 후 대원군측의 일부 인사가 '정변계획'을 유보하자고 주장하자, 이준용은 머뭇거렸다. 이에 대원군의 측근인 박동진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대사는 시기를 잃지 말아야 하는데 오늘날의 물망이 모두 노대감(대원군)을 따르고 하물며 또 동학당은 상봉국태공(上奉國太公)의 설로 창의한 자들이다. 만약 몇십만 명을 이끌고 권토중래한다면 실로 소위 인중승천(人衆勝天)인바 일본군이 움직인다 한들 어쩌겠는가."

 

동학농민군의 주장 중 농민군이 폐정개혁을 요구하는 가운데 대원군의 감국도 요구하고 있었다. 전봉준과 대원군 사이에 사전모의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농민군이 폐정개혁을 요구하는 가운데 대원군의 감국도 요구하고 있었음을 주목한 대원군측이 농민군을 이용하여 일본군과 친일개화파를 축출하고 권력을 장악하려 했음을 시사해준다.

 

그러나 대원군과 이준용의 정변 음모는 일본 공사관의 첩보망에 걸려 실패로 돌아간다. 대원군은 일본 공사관에 소환되었고 청나라와 손잡고 일본군을 축출하려는 의도를 추궁당한다.

 

 

일본의 퇴진 압력

1894년 10월 중순 이후 일본 측은 흥선대원군과 이준용이 항일활동을 전개한 증거들을 가지고 추궁하며 양인에게 공직 사퇴를 종용하였다. 당시 조선 정부는 고종이 평양의 청장들에게 보낸 밀서를 일본 측이 문제삼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대원군의 축출에 동의했었다. 이에 대원군은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일본 공사에게 자신이 추진한 항일 운동에 대해 사과하고 손자 이준용의 장래 교육을 부탁하였다. 결국 이준용 추대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대신하여 김홍집 내각을 앞세워 경장사업(更張事業)을 추진했다.

 

1895년 3월 24일 이준용김학우 암살 혐의로 체포되었다. 박영효서광범 등은 이준용 역모사건을 이용하여 대원군파를 일소하려는 의도에서 이준용과 그 당여들을 사형에 처하려 하였다. 그러나 어떤 대가를 지불해서라도 이준용을 구하려는 흥선대원군의 절박한 부탁을 받은 이노우에 공사와 각국 영사들이 이준용에 대한 선처를 호소하고 나서서 결국 이준용은 사형을 면하고 종신 유배형을 받았다. 그리고 이준용일본영사관 영사로 임명되어 떠나게 됐다.

 

농민전쟁을 이용하여 정권을 장악하려 한 대원군파의 시도는 좌절되고 대원군은 정계은퇴를 강요당했을 뿐 아니라, 1895년 4월 29일 발표된 대원군존봉의절에 의해 사실상 연금상태에 들어갔다. 대원군존봉의절에는 '대문에 총순, 순검으로 입직케 한다', '대소신민이 칙명 외에는 감히 사적으로 알현치 못한다', '출입할 시에는 궁내부에 먼저 알려 궁내부관원으로 배종케 하고 입직하는 총순, 총검도 경위케 한다'고 하여 대원군과 외부 인사의 접촉을 사실상 차단했다.

 

 

급진 개화파와의 내통

1895년김홍집, 유길준 등의 급진적 개화파를 포섭, 내통하였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이후 고종과 명성황후 계열, 민씨 일족으로부터 박해를 받던 처지였다. 갑신정변 이후 고종과 명성황후는 민겸호, 민영목, 흥인군 등을 사살한 급진 개화파를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김옥균의 암살을 획책한다. 이전까지만 해도 대원군은 개화파를 제거하려 하였지만 고종, 명성황후와 개화파 간에 사이가 틀어지면서 대원군은 이들을 포섭할 계획을 세운다. 급진 개화파는 대원군에게 명성황후가 개혁가들을 일망타진하려 한다고 알려왔고, 대원군은 명성황후 및 온건 개화파, 근왕세력과 등을 돌리게 된 유길준 등의 급진 개화파를 포섭했다. 개화파와 손잡은 그는 명성황후 제거의 당위성을 설득하고 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