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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51 : 조선의 역사 393 (제26대 고종실록 16)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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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51 : 조선의 역사 393 (제26대 고종실록 16)

두바퀴인생 2013. 2. 5. 05:42

 

 

한국의 역사 851 : 조선의 역사 393 (제26대 고종실록 16)  

                

 

              

                                                               고종 황제 가족 사진

 

 

제26대 고종실록 ( 1852~1919년, 재위 : 1863년 12월~1907년 7월, 43년 7개월)

 

 

2. 고종의 가족들(계속)

 

  

 

가족 관계

 

 

 

왼쪽부터 의친왕, 순종, 영친왕, 덕혜옹주와 함께한 가족사진
  • 부 : 문조익황제 효명세자
  • 모 : 신정익황후 조씨
  • 사친 부 : 헌의대원왕 이하응(獻懿大院王 李昰應)
  • 사친 모 : 순목대원비 민씨(純穆大院妃 閔氏)
  • 황후 : 명성태황후 민씨(明成太皇后 閔氏, 1851년~1895년)
    • 왕자 (조졸) : 4일만에 사망(1871년)
    • 공주 (조졸) : 222일만에 사망(1873년)
    • 순종효황제 이척 (純宗孝皇帝 李拓)(1874년~1926년)
    • 왕자 (조졸) : 14일만에 사망(1875년)
    • 왕자 (조졸) : 105일만에 사망(1878년)
  • 후비 : 순헌황귀비 엄씨 (純獻皇貴妃 嚴氏)(1854년~1911년)
    • 의민황태자 은(懿愍皇太子 垠;1897년~1970년)
  • 후궁 : 영보당귀인 이씨(永寶堂貴人 李氏):이순아(李順娥;1843년~1914년)
    • 완친왕 선(完親王 墡)(1868년~1880년)
    • 옹주 (조졸) : 1871년~1872년
  • 후궁 : 귀인 장씨(貴人 張氏)
    • 의친왕 강 (義親王 堈)(1877년~1955년)
  • 후궁 : 광화당귀인 이씨(光華堂貴人 李氏):이완흥(李完興;1887년~1970년)
    • 황자 육(皇子 堉)(1914년~1915년)
  • 후궁 : 보현당귀인 정씨(寶賢堂貴人 鄭氏)(1882년~1943년)
    • 황자 우(皇子 堣)(1915년~1916년)
  • 후궁 : 복녕당귀인 양씨(福寧堂貴人 梁氏)(1882년~1929년)
    • 덕혜옹주(德惠翁主)(1912년~1989년)
  • 후궁 : 내안당귀인 이씨(內安堂貴人 李氏)(1847년~1914년)
    • 옹주 (조졸) : 1879년~1880년
  • 후궁 : 삼축당상궁 김씨(尚宮 三祝堂尚宮 金氏):김옥기(金玉基;1890년~1972년)
  • 후궁 : 정화당상궁 김씨(貞和堂尚宮 金氏)
  • 후궁 : 궁인 서씨(宮人 徐氏)
  • 후궁 : 궁인 김씨(宮人 金氏)
  • 후궁 : 궁인 장씨(宮人 張氏)
  • 양숙부 : 철종장황제
  • 양숙모 : 철인장황후
  • 양형 : 헌종성황제
  • 양형수 : 효현성황후 김씨
  • 양형수 : 효정성황후 홍씨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년) : 계속

 

 

집권 중기

 

중국과 일본의 문호를 개방케 한 구미 열강은 한국에 대한 개항 압력을 점점 노골화하였으나 대원군은 이에 응하지 않고 쇄국정책으로 맞섰다. 1866년 평양에서 통상을 요구하면서 횡포를 부리던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워 없앴고, 그 직후 프랑스(1866년 병인양요) 및 미국(1871년, 신미양요)과 강화도에서 각각 군사 분쟁이 일어났으나 대원군은 이들을 모두 물리치고 교섭은 중단되었다. 그리고, 대원군은 척화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한편 양요가 일어났을 때 한양에서 도주한 양반은 관리 임용에서 불이익을 주기도 하였다.

 

1869년 일본메이지 유신(1868년)과 대정봉환(1867년)를 알리는 국서를 보내왔으나 이 또한 거하였다.

 

한편 증기선이었던 제너럴셔먼호 사건으로 말미암아 대동강에 가라앉았다는 말을 들은 흥선대원군은 그것을 건져다가 한강에 옮겨 연구하도록 지시했다. 증기선 복제 계획은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김기두 등 기술자를 시켜 국가의 경비 수십만 냥을 들이고, 조선 정부에서 보유한 동과 철을 거의 다 들여 1876년 무렵에 제너럴셔먼호와 똑같은 형태의 선박을 만드는 데 성공했고, 증기기관의 연료로는 목탄을 썼다. 그러나 배는 움직이지 않았고, 고친 뒤에도 아주 느리게 움직였다. 그러자 증기선을 만들든지 구하든지 하라는 상소가 빗발쳤다.

 

 

 

개혁정책

 

집권 초기

고종이 즉위하자 그는 왕의 교서 대신 '대원위분부'(大院位分付)라고 시작하는 공문을 전국에 발송하기 시작했다. 흥선대원군은 이경하(李景夏)를 신뢰하여 집권 직후 이경하를 포도대장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자신의 측근이던 천희연, 하정일, 안필주, 장순규 등 세칭 천하장안으로 불리던 인사들을 배치하여 정보 탐지 업무를 수행하게 하였고, 안기영 등을 신임하였다. 화서학파를 이룬 노론계열 인사 이항로 역시 대원군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이항로는 대원군의 서원철폐를 반대하다가, 철폐령 이후 대원군에 비판적인 입장으로 돌아섰고, 이항로의 제자 최익현은 민씨 척족과 손잡고 대원군 타도를 자임하게 된다. 자신의 집권을 도왔던 조성하조영하 역시 초기에는 신임하였으나 섭정을 겸하면서 조씨 일족을 요직에서 배제하여 소원해졌다. 이들 역시 민씨 척족과 손잡고 대원군 타도에 힘을 기울이게 된다. 또한 실학에 관심이 있었고, 노론 외에 노론 실학자와 남인, 소론과 300년간 정권에서 배제당한 북인계 인사들도 중용하여 거국내각을 구성하였다.

 

1863년 12월 김좌근과 안동김씨 척신들은 흥선대원군에게 대군에 준하는 예로써 가마를 타고 보국숭록대부 이상은 시생을 이하는 소인으로 칭한다 하여 대원군을 우대하되 현실정치에는 나서지 못하도록 제약을 하려 하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특혜를 거부하고 일반 정승들이 타는 사인교를 타겠다고 고집하여, 정권불간섭을 전제로 한 우대를 거절하였다. 이후 그의 사저는 왕이 출생한 곳으로서 궁궐로 불리게 됨에 따라 운현궁으로 불리게 되었다.

 

 

남인, 북인 중용

사색 당파를 가리지 않고 인재를 중용하였다.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일색이던 조정에 다른 노론계 인사들과 소론계 인사들을 배치하기 시작했고, 뒤이어 한 연회에서는 태산을 깎아 평지를 만들고 궁궐의 기둥을 세워 산보다 더 높이 하겠다고 선언, 이 뒤로 남인계 인사인 류후조북인계 인사들을 중용하기 시작했다.

 

남인과 북인을 등용하자 그의 지지세력이었던 이항로 등은 반발하였다. 또한 정도전에 대한 복권여론을 주도하고, 유종공종이라는 사액 현판을 내리기도 했다. 정몽주를 종주로 여기고 그 학통의 계승자를 자처하던 각지의 노론, 소론계 인사들은 처음의 노론, 소론인사 중용에 찬성하였으나, 남인, 북인도 중용하고 정도전에 대한 복권 의사를 피력하자 즉각 반발한다.

 

 

관제 정비와 정군분리

고종의 즉위 교서에서 밝힌 바 ‘모두 더불어 유신(維新)을 단행’해야 한다는 요구와 조대비가 형식상의 수렴청정을 하며 흥선대원군에게 힘을 실어주자, 그는 곧바로 개혁에 착수한다. 우선 세도정치로 인해 약해진 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경복궁을 중건하고, 당쟁의 원인이며 국가 재정에 피해를 주던 서원도 47개소만 남겨 두고 대폭 정리하였다.

 

서원 정리는 착취로 고통 받던 민중의 지지를 받았다. 당파(黨派)를 가리지 않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였으며, 의정부의 기능을 부활시키고, 조선 후기의 상설 기관이던 비변사를 완전 폐지하고 삼군부를 두어 군사 업무를 맡게 하여 정권과 군권을 분리하는 등 군제를 개혁하였다. 대원군이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삼군부를 부활시키는 과정에서 안동 김씨 세력이 자연스럽게 퇴출당했다. 영의정 김좌근이 사직하고 판서를 역임한 김병기광주부유수로 좌천당했다. 김좌근의 후임으로는 풍양 조씨인 조두순이 취임하였다. 그러나 안동김씨 일가를 모두 퇴출시킨 것은 아니다. 대원군과 사돈 약속을 맺었다는 김병학, 김병국의 경우 안동 김씨들이 퇴출당하는 과정에서도 정승을 역임하는 등 그와의 밀월관계를 지속하였다.

 

의정부와 삼군부의 부활과 비변사의 유명무실화로 조선 중기 이후 군사와 행정기능이 한곳으로 집중된 것을 다시 분산시켰다.

 

 

제도 개혁

법치 질서의 재정비를 위해서도 노력하였고, 세도정치의 혁파와 탐관오리 일소에 노력하였으며, 지방 토호들의 백성에 대한 학대를 엄금하였다. 또한 《대전회통》, 《육전조례(六典條例)》 등과 《삼반예식(三班禮式)》, 《양전편고》, 《오례편고(五禮便攷)》 및 《종부조례(宗府條例)》 등의 법전을 편수하여 정치 기강을 확립하고 중앙 집권적인 국가 체제를 완비하려 했으며, 의복제도를 개량하는 등 사치를 엄금하였다. 1867년(고종 4년)에는 폐단이 많았던 환곡제도를 개혁하고 사창제를 실시하여 국가 재정 확보와 민심 안정을 꾀했다.

 

향리에 대한 통제도 강화하였고, 조세횡령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 근무연한에 따라 서리들을 입역(立役)하게 했다. 지방관직에 대한 매관매직을 금지하였고, 유명무실화된 암행어사를 다시 파견하여 지방관들의 비리행위를 조사하였고, 지방관의 근무성적을 평가하여 행정의 중앙집권화를 추진했다.

 

반대세력의 억제를 방지하기 위해 수령의 구임(久任)을 강조하였고, 수령에 대한 고과(考課)를 엄격히 하고 수령 재임시의 부정을 살피기 위해 해유문기(解由文記)의 작성도 직접 보고받는 등 철저하게 실시했다.

 

5척 단신인 흥선대원군은 기강을 확립한다고 길게 늘어진 양반들의 도포 자락을 짧게 자르게 하였는데, 그 주된 이유는 도포 자락에 뇌물을 숨겨서 왕래한다고 해서였다. 긴 담뱃대도 대를 짧게 잘라 피우게 하였으며 긴 갓도 줄이는 등 의식 개혁운동을 시행하였다. 신복룡의 견해에 따르면, 대원군의 개혁정책은 우선 중화사상의 탈피와 이를 통한 자주 의지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둘째로 척신의 세도정치로 말미암아 약해진 왕권의 강화이며, 셋째로 안민과 국제적 공존을 위한 쇄국 정책을 높이 평가하였다. 한편 이러한 개혁정책은 홍경래의 난1862년 진주민란으로 피폐해진 민심의 환영을 받기도 했다.

 

 

경복궁 중건

경복궁의 중건은 헌종 때 수리할 것을 계획했으나 재정이 모자라 그만두었다. 대원군은 선왕의 뜻을 계승한다는 구실을 내걸고 간언을 듣지 않고 공사를 서둘렀는데 필요한 기금을 마련하고자 원납전을 강제 징수하였고, 대장군 이경하에게 감독을 맡기고 세금을 인상하였으며 결두세라는 특별 세금을 부과하고 장정들을 징집하여 매일 수만 명을 작업에 동원했다. 또한 꾼과 기녀를 모집하여 인부들을 위한 위문공연을 열었다.

 

경복궁을 중건하던 3월에 방화로 추정 되는 불이 나 경복궁 중건에 쓸 재목이 모두 타버리자 사람들이 놀라 공사를 중지하자고 건의하였으나 대원군은 털끝만큼도 움직이지 않고 더욱더 재목을 채집할 것을 요구하여 공사를 독촉하였다. 그리고 원납전이라는 강제 기부금을 백성들에게 징수하고 도성 4대문을 통과할때 통행료인 문세를 받았다. 또한 다시 당백전, 원납전 등을 주조하여 공사비를 조달, 동원했다. 재목이 부족하자 또 각처의 무덤가에 있는 나무까지 벌채하고는 "이것은 국가의 성스러운 일이니 그대 집안 선대가 영험이 있다면 필시 즐겨하며 도움을 줄 것"이라고 말하였다. 공사비는 8천만 냥이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경복궁 중건 사업을 위대 대원군은 무리수를 둔다. 막대한 자금 조달을 위해 원납전 징수, 매관매직, 거기에 당백전이라는 악성화폐까지 유통했다. 매관매직도 어려워지자 거리에 병사를 풀어서 토끼몰이하듯 사람을 잡아 원납전을 받고 놓아주었다. 또한 도성 4대문과 4소문에는 통행세를 거두어 도성을 출입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거두었다.

 

당시 고종이 거주할 만한 궁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경복궁은 없어진 궁전을 새로 완전히 지은 것이 아니다. 후일 서울역사박물관부지에서 북쪽으로 사직터널 앞까지 뻗어있던 경운궁을 일부 헐어서 옮겼다. 새로 지은 건물과 옮긴 건물의 비율은 정확하지 않지만 상당수의 건물이 옮겨졌다.

 

 

양반 세금부과 및 국방력 정비

경복궁 중건으로 소모된 재정을 회복하기 위하여 호포제를 실시해 양반에게도 군포를 징수하였다. 종래는 상민들에게만 부과하였으나 양반에게까지 확대해서 징수한 것이다. 이로 인해 양반들의 불평불만이 대단하였다. 그러나 양반들의 반발에 꺾이지 않고, 계급 여하를 막론하고 1호당 2냥씩을 균일세로 부담케 하여 그 실시를 강행했다. 양반과 상민을 가릴 것 없이 군포를 징수하자는 주장은 흥선대원군 집권 이전 1600년대부터 노론 실학파나 일부 남인 계열이 주장하던 것이었다. 그러나 양반의 존엄을 해친다는 반대 때문에 묵살당하였고, 흥선대원군은 200여 년 만에 이를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대원군은 김기두(金箕斗)와 강윤(姜潤)에게 지시하여 군용품으로 포군(砲軍)용 철모·목탄증기갑함(木炭蒸汽甲艦)·수뢰포(水雷砲) 등의 군사무기를 개발, 제조하게 했다. 그리고 서양 군대의 총탄을 막기 위해 솜으로 제조한 배갑(背甲)을 제조하였다. 그러나 무겁고 두꺼운 배갑은 쉽게 벗을수 없어 조선병사에게 불리한 점으로 작용하였다.

 

1860년대 말 대원군은 학우조비선(鶴羽造飛船)이라는 이름으로 비행선을 개발하게 하였다. 서양의 열기구를 목격한 그는 배에 열기구 비슷한 것을 연결, 열기구에는 학과 기러기, 두루미의 깃털을 붙이기로 하고, 군기감에 명하여 학우조비선을 개발했다. 학우조비선두루미의 깃털을 모아 아교로 연결하여 배에 붙인 것으로, 배가 포탄에 맞더라도 물에 가라앉지 않게 할 목적으로 개발하였다. 그러나 배가 물에 닿으면서 아교가 모두 녹아 조비선 개발은 실패하고 말았다. 한강변에서 시연 도중 햇볕에 열기구와 깃털 사이를 붙인 아교가 녹으면서 실패하였다. 학우조비선을 개발하기 위해 , 두루미, 기러기들을 잡아들여 깃털을 강제로 잡아 뽑았다.

 

솜과 목면을 여러 겹으로 겹쳐서 만든 갑옷 역시 여름에 통풍이 되지 않아 문제가 되었다. 또한 신미, 병인 양요 때에는 총탄에 맞아 총탄이 투과하는 과정에서 발화되면서 갑옷을 미쳐 벗지 못하여 불에 타죽는 병사들이 나타나기도했다.

 

 

삼군부 육성

그는 삼군부를 부활시킴과 동시에 자신의 친위군으로 양성하였다. 삼군부의 무장을 발탁할 때는 척족 출신을 완전히 배제하고 무과 출신의 전문 군인과 종친, 대원군이 신뢰하는 무장 등이 임명되었다. 이때 그는 전문 무장을 양성했다. 무반을 차별하는 오랜 관행에 도전이라도 하듯 대원군은 무부(武夫), 진짜 군인들을 우대하고 중용했다. 이때 보인 군인들에 대한 각별한 예우는 후일 별기군 창설 후 멸시당하던 구식 군인들에게 대원군 향수를 불러일으키게 했다.

 

그는 정치와 군사를 분리시킨 뒤 군사력 육성에도 각별한 관심을 두었다. 소수의 권력 독점을 배제하고, 행정과 군사를 분리해 국가 행정 기구의 조직력과 기능성을 회복하고자 한 것이 대원군의 구상이었다. 그러는 한편으로 삼군부를 자신의 친위군대로 양성하여 대원군 자신과 왕실을 호위하게 했다.

 

 

토지 개혁

사상적으로 중농실학 사상의 영향을 받은 흥선대원군은 위민정치의 부흥을 위해서는 문란한 삼정을 바로잡으려 하였다. 위민정치의 구체적 실현으로써 그는 문란한 삼정을 바로잡고 안정을 꾀하는 획기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던 것이다. 토지대장에 올라 있지 않은 땅을 찾아내고 지역 토호와 유지들의 토지 겸병을 금지하였는가 하면, 토지조사를 통해 부분적으로 양전(量田)을 실시하여 전정을 바로잡고자 했다.

 

지방 수령과 토호의 농간이 가장 심했던 환곡제사창제로 개혁하여 환곡을 합리적으로 운영하도록 하였다. 또한 감찰의 목적에서 타락한 도장(導掌)·궁차(宮差) 등의 파견을 금지하고, 신설 궁방에 토지 지급을 폐지하여 궁방전을 억제하였다.

 

 

서원 정리와 서원 철폐령

흥선대원군은 유교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지만, 서원이 당쟁과 연계되고 백성들을 괴롭히는 등 병폐가 잇따르자 집권 직후 서원 철폐령을 내렸다. 서원 철폐령으로 도산서원소수서원 등 전국에서 47개의 서원을 제외한 8백여 개의 서원이 철폐되었다.

 

대원군은 서원을 헐고 신주를 묻으라며 위패 처리에 대한 지시까지 직접 내린다. 서원철폐령에 의해 서원에서 모시던 선현들의 위패는 모두 옹기 등에 의해 싸여져서 서원 근처에 매장되었다.

 

서원 철폐는 지방 유생들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왔으나 흥선대원군은 "공자가 다시 살아나서 나를 위협한다 해도 이 정책은 끝까지 밀고 나가겠으니 그리 알라."며 강행하였다. 서원 철폐령을 취소해 달라는 전국 유림들의 집단 상경집회가 있었으나 이때마다 대원군은 유림들의 집회를 강제 진압하고, 유림들을 강제로 노량진 밖으로 축출함으로써 유학자들의 반발을 초래하였다. 대원군을 지지하던 이항로 등도 이때부터 대원군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고, 이항로의 문인 최익현은 민씨 정권과 손잡고 대원군을 탄핵하기에 이른다.

 

 

병인박해

1864년(고종 1년) 2월 28일에 아라사에서 사람 몇 명이 두만강 얼음을 타고 함경도로 내려와 통상을 요구하는 서신을 보내오자 거절하고 관련자들을 처벌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권》 흥선대원군은 국경을 맞댄 아라사의 남하에 대비하기 위해 불란서 천주교 선교사들과 접촉해 아라사를 막아준다면 천주교 선교를 인정하겠다는 의사를 밝힌다. 그러나 일이 틀어졌는지 천주교 신자를 모두 잡아들여 사형에 처한다. 이 사건이 병인박해다.

 

이에 관해 김병학, 김병국 형제가 흥선대원군을 압박해 흥선대원군을 정치적으로 곤란하게 만들었다는 학설이 있다. 1866년 흥선대원군은 외세의 침략적 접근을 막기 위하여 강경한 통상거부 정책을 단행하였다. 그는 외국의 통상 요구에 불응하였고 양화 교역을 엄금하였다.

 

 

 

통상수교 거부 정책

 

오페르트 도굴 사건과 척화비

영국 상선과 독일 상인 오페르트 등이 충청도 연안에 와서 각기 통상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거절하였다. 오페르트는 그 뒤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덕산에 있는 남연군의 무덤을 도굴하여 부장품을 훔쳐가려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는 대원군을 더욱 분노케 하여 천주교 박해와 쇄국책을 강화하는 원인이 되었다.

 

대원군의 통상 거부 의지는 보다 강경해졌다. 그는 서양인을 오랑캐라 하고 배척하면서 각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척화비를 세웠다.

 

"서양 오랑캐가 침범함에 싸우지 않음은 곧 화의하는 것이요. 화의를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

병인양요가 발생하기 직전, 미국의 상선 제너럴 셔먼 호가 평양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서 통상을 요구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자 재물을 약탈하다가 평양 군민과 충돌을 일으켜서 배가 불타고 침몰하여 선원들의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1868년 3월에 미국 군함 셰년 도어 호는 셔먼호 사건을 문책하러 평양에 나타났다. 그러나 미군이 퇴각하지 않자 평안 감사는 기녀를 시켜 미군 사령관을 매수하여 되돌려보내고 승리를 거두었다고 보고했다. 기녀 최옥향 등을 시켜서 미군 병사들의 수청을 들게 하였으나, 미군이 되돌아간 후 이들은 양인에게 몸을 허락한 매춘부라는 이유로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옥향은 대동강 물에 투신 자살한다. 옥향의 시체는 다음날 아침에 강물 위에 떠올랐고, 낚싯배가 그의 시신을 건져서 대동강 강기슭에 올려놓았으나 아무도 수습해주지 않아 장기간 방치되었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고 흥선대원군 역시 이를 방관하였다. 아무도 옥향의 시신을 거두지 않다가 누군가 화장하였다.

 

미군이 물러가자 대원군은 조선 병사가 미군을 격퇴했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3년 뒤인 1871년 미국은 해당 문책사들을 해임하고 대원군을 굴복시키고 조선 통상을 강요하고자, 5척의 군함을 보내 강화도를 공격하는 신미양요를 일으킨다.

 

1871년 4월 미국 함대가 강화도에 쳐들어와 덕진진(德津鎭)과 광성보(廣城堡)를 점령하자, 흥선대원군은 항전을 주장하며 한성부의 종로 네거리를 비롯한 전국 주요도시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고 결사항전을 준비했다. 조선 조정에서 통상을 거부하고 외교교섭에 응하지 않고 전투가 장기화되자 미국 함대는 1871년 5월 철수했다.

 

척화비 건립

양요들을 물리친 흥선대원군은 서양 열강에 대한 경계심이 더욱 굳어졌을 뿐 아니라, 이를 격퇴하는데 자신감을 갖게 되었으며,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한층 강화하였다. 그러나 척화정책을 추진한다고 해도 척화비는 세울 필요는 없었다. 척화비의 내용은 "서양 오랑캐가 침범할 때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친을 하자는 것이요, 화친을 하자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간결한 문구가 전부였다. 조선은 이보다 훨씬 복잡한 포고령도 전국 방방 곳곳에 배포할 수 있는 수준의 행정망을 갖고 있었다. 또한 척화를 둘러싸고 국민의 여론이 아직 크게 잘라진 것도 아니었다.

 

서양과 통교하자는 사람은 당시 조선 전국을 뒤져도 얼마 되지 않았을 시대였다. 진짜 목적은 기왕이면 척화에 대한 국민 의식을 고양하고, 결의를 다지기 위함이었다. 임용환에 의하면 대원군은 척화라는 이슈를 국가적 이벤트로 만든 것이라는 것이다. 척화비는 전국 각지에 세워졌으나, 이때 세운 척화비는 흥선대원군 실각 (1873년) 직후와 한일 합방(1910년) 직후에 파괴·매장되었다. 양요들을 승리로 이끌었으나 자신감에도 불구하고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내정개혁 정치와 쇄국 정치는 결과적으로 많은 반발을 일으켜 며느리인 명성황후와 유림 세력의 담합을 유도하게 된다. 명성황후는 한편으로 대원군에 의해 숙청되었던 안동 김씨풍양 조씨 등의 세도가 및 노론 세력과 손잡고 실력을 비밀리에 키운다.

 

 

 

종교 탄 압

 

천주교 탄압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처음에는 천주교에 대하여 크게 반감이 있지 않았다. 그는 베르뇌 주교(천주교 조선교구장) 등의 선교사를 통해 남하 정책을 실시하는 제정 러시아를 견제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천주교에 대해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리하여 신자 남종삼과 수차 회동하여 조선에서 활동하던 프랑스 천주교 신부들의 힘을 빌리려 했으나, 불행히도 그 계획에 차질이 생겨 불신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때마침 청나라에서의 천주교 탄압 소식과 이전부터 싹텄던 위기의식에 자신의 정치적 안정을 꾀하려는 의도가 가미되어 정책을 바꾸게 된다.

 

그리하여 흥선대원군의 천주교에 대한 정책은 우호정책에서 강경 정책으로 바뀐다. 우선 선교사들은 조선의 정치에 개입하고 싶어하지 않아 이용가치가 없었고, 지배 계급에게 ‘천당과 지옥을 주장하며 혹세무민하는 종교’로 해석되던 천주교회가 이미 1831년 천주교 조선교구(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생길 정도로 성장하는 것에 대한 반발이 있었으며, 대외적으로 ‘종교를 앞세워 열강 세력이 침투하는’ 문제에 대한 경계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1866년 남종삼 등을 비롯, 8천여 명 가까운 천주교 신자들이 새남터, 절두산, 해미읍성 등 전국 각지에서 처형당했다.(→병인박해) 1866년부터 처형당한 천주교인의 수는 1~2만명을 넘는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에 들어와 포교하던 프랑스천주교 선교사 12명 중 9명이 처형되고, 화를 면한 프랑스 천주교회 사제 리델청나라로 탈출하여 베이징 주재 프랑스 함대사령관 로즈에게 박해 소식을 전했다. 박해는 1872년까지 이어졌다. 프랑스조선정부의 프랑스의 천주교 선교사 살해의 책임을 묻는다는 구실로 로즈(Roze) 제독이 이끄는 함대를 파견하였다.

 

보복 원정에 나선 로즈 제독은 함대 7척과 군사 600명을 이끌고 강화도를 침략한 뒤 서울근교 서강까지 진출했다. 그해 11월 프랑스 해군 160명은 정족산성을 공격하려다가 60여 명이 죽거나 다치는 손실을 입었는데, 양헌수가 이끄는 조선군은 피해규모가 사망 1명, 부상 4명에 불과했다. 조선 군대와의 교전에서 큰 패배를 경험한 프랑스군은 사기가 크게 떨어졌으며, 로즈 사령관은 조선 침공의 무모함을 깨닫고 철군했다.[34] 이후 흥선대원군은 국방을 더욱 굳게 하여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동학 탄압

널리 전파되던 동학에 대해서도 1864년 교조 최제우를 처형하여 군문 효수하였다. 이후 동학도들은 매년 교조의 무죄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는 등의 교조 신원 운동을 벌였으나 그는 이를 모두 거절했다. 그러나 동학농민운동 당시 동학의 일부 지도자들과도 연결을 취하기도 했다. 불교에 대해서는 별다른 탄압이 없었다. 

 

 

개혁 실패

 

인사 실패와 혼란

대원군은 깊고 신중하게 고민하는 사람보다 자신감을 표출하고 큰소리를 치는 사람을 좋아했다. 그리고 당색과 신분을 넘어 이런 인물들을 과감하게 등용해서 현장에 투입했다. 하지만 이들의 용기와 자신감은 현실에 대한 무지나 아부의 소산이었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무지해서 큰소리를 쳤던 사람들은 일을 엉망으로 만들고, 아첨으로 지방관 자리를 얻은 인물은 더 큰 탐욕과 부정을 저질렀다.

 

그는 민씨 척신가와 동맹을 맺었다. 가장 심각한 인사실패는 민씨가와의 동맹이었다. 대원군이 겉보기에는 당색과 신분을 초월한 혁명적 인사를 진행하는 동안, 관계의 한 쪽은 민씨가로 채워지고 있었다. 나중에 양쪽은 격렬하게 대립했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이 실수는 대원군 자신을 몰락시켰고, 조선을 사상 최악의 족벌 정치와 부정 부패로 몰아갔다.

 

 

독재화

모든 군사와 정무는 왕명으로 나갔지만 실제로는 대원군이 직접 처결하였다. 황현은 이를 두고 독단적이라고 지적했다. '종전의 세도는 비록 한 사람이 주관하고 있을지라도 옆으로 아들과 조카, 인척들이 종종 한몫을 하고 있었으므로, 서로 간섭하고 부족한 점을 보와하여 오직 실각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그러나 대원군 때는 혼자 집권했기 때문에, 비록 음관 한 명이나 변방의 장수 한 사람이라도 대원군을 거치지 않고는 발령할 수 없었다.고 하였다.

 

대원군은 국왕의 고유권인 인사권도 자신이 독자적으로 처결하였다. 인사발령을 할 때는 언제나 그가 미리 후보 명단을 작성하여 자리를 채운 뒤에 올리면 고종은 그것을 따라 낙점만 할 뿐이었다. 이에 명성황후조대비고종에게 그의 나라인지 대원군의 나라인지 반문하였다.

 

 

탄핵과 실각

1873년, 최익현 등의 보수적 유학자들을 앞세운 명성황후고종의 견제로 실각하고, 아들 고종이 친정을 하게 되었다. 이후 흥선대원군이 출입하던 전용문은 폐쇄되었으며, 흥선대원군은 한동안 운현궁에 은둔하였다. 그의 실각 이후 조선쇄국정책을 버리고 1876년 강화도조약을 계기로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였다.

대원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민씨 집안은 권력을 주체하지 못했다. 권력남용과 함께 부정 축재가 심하였고, 일가가 권력을 독식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점점 대원군 섭정 시절을 그리워하게 되었고, 대원군은 세도정치의 반의어로 인식되기 시작했다.[9] :295 대원군과 안동 김씨 김병학의 밀월 관계는 쉽게 잊어버리고, 대원군이 안동 김씨들에게 천대와 굴욕을 당하고 살았으며, 세도정치의 재발을 염려해서 가난하고 몰락한 집안 출신인 명성황후 민씨를 며느리로 간택했다는 이야기만이 대중 속으로 파고들게 되었다.

 

매천 황현은 대원군이 10년간 집정할 때의 위엄으로 '대원군분부'란 다섯 자가 곳곳에 퍼져 뇌정탕화(무서운 천중과 끓는 물과 달구워진 쇠붙이)같아 관리나 일반 색성들은 항상 관청의 법률에 저촉될까봐 노심초사했다. 이에 따라 대원군의 실각을 기뻐하며 축하하였다고 한다.

 

대원군은 큰아들 이재면을 왕으로 삼지 않은 것을 후회했지만, 방법이 없었다.[36] 결국 이재면이재선을 보던 중 나중에 이준용에 주목하게 된다.

 

민씨들이 정권을 잡은 이래 백성들의 주구를 감당할 길이 없어 오히려 대원군의 치정을 좋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명성황후의 온건 개항정책에 반발한 조선 유림들은 다시 대원군 지지로 돌아선다. 쇄국정책을 펼쳤던 점이 조선의 유림들에게 높이 평가되어, 초기에는 명성황후의 고종 친정 정책에 지지를 보냈던 이항로-최익현 계열의 노론 화서학파는 명성황후의 온건 개화 정책을 비판하며 대원군 지지로 돌아서게 되었다.